<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653화>
‘지금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한다!’
하강 준비를 끝낸 천문석은 바로 움직였다.
우선은 배가 숨어 있던 호수 위 바위를 자세히 살폈다.
그러나 거리와 각도 때문에 성벽 위에서는 교차하는 바위아래 배가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신호탄을 쏴서 신호하면 되지만 이제 곧 격전이 벌어진다.
전투를 앞두고 날이 선 군인들의 이목을 끄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이대로 내려간다.’
탁, 탁-
하네스와 로프를 연결한 천문석은 성벽 위 동료들에게 외쳤다.
“바로 내려가자!”
“저기 광장에 축제 때문에 사람들 모이고 있어! 우리도 구경하고 가야지!”
“뭐……?”
진교은은 신나게 외치는 특급 헌터를 번쩍 안아 들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알바! 축제 우리 보고 가자! 축제라서 사람들 엄청 모였어!”
특급 헌터는 지금 상황을 완전히 오판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나 긍정적이고 열심인 특급 헌터에게 세상은 즐겁고, 신기하고, 친절한 사람들로 가득했으니까…….
지금 모인 사람들이 싸운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할 거다.
천문석은 애써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려가서 배에서 보자.”
천문석은 성벽 아래를 가리키며 진교은에게 눈으로 신호했다.
“…….”
천문석의 의도를 깨닫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진교은.
천문석은 바로 진교은을 등에, 특급 헌터와 하늘 고래를 가슴에 고정하고 로프를 잡았다.
그리고 여전히 홀린 듯 전장을 보는 마지막 동료를 봤다.
마침내 적염성을 떠나간다고 환호하던 미호.
“미호. 떠날 거면 지금 내려가야 한다.”
“……!”
미호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눈 속에 담긴 갈등과 고민이 한 눈에 읽혔다.
미호는 자작극을 하면서까지 장원에서 탈출하려 했다.
하지만 이제 곧 격전이 시작될 장원에는 류호, 미호의 엄마가 있었다.
“…….”
미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성벽 위에 서 있었다.
이때 진교은의 외침이 들려왔다.
“호수 북쪽에 배가 나타났어요!”
반사적으로 돌린 시선에 북쪽 멀리서 다가오는 배가 보였다.
커다란 돛대에 걸린 돛은 접혀 있는 상태.
선측으로 솟은 수십 쌍의 노가 움직이고 있다.
갤리선!
이 갤리선의 마스트에는 붉은 달 깃발이 걸려 있었다!
붉은 달, 적월 상단의 지원군이다!
1, 3, 5, 7……!
호수 북쪽에서 나타나는 갤리선의 수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호수에 접안 해 옆을 찌르고 수로와 강을 막을 생각이구나!’
당장 빠져나가지 않으면 물길이 막힌다!
이때 미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돌려줄게.”
미호는 목에건 주머니를 끈을 풀어 특급 헌터의 손에 쥐여 줬다.
“앗! 이건 내가 준 거잖아!?”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까. 돌려줄게.”
미호는 빙그레 웃으며 크게 외치고 몸을 돌려 성벽을 달렸다.
“모두 고마웠어! 잘 가!”
“누나! 이거 가져가! 다시 가져가!”
특급 헌터가 다급히 외쳤지만, 미호는 뒤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성문 방향, 엄마가 있는 곳을 향해서.
“……이상한데!? 독고다이 누나! 뭔가 이상하지 않아!?”
특급 헌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
“…….”
구으으으-?
천문석은 말없이 로프를 잡고 외쳤다.
“내려간다! 꽉 잡아!”
그으으으으윽-
천문석과 일행이 로프를 잡고 호수를 향해 내려가고 미호가 도망쳤던 성주 장원으로 돌아갈 때.
탄이 이끄는 무사들과 일천의 남방 공국 정예병이 마침내 격돌했다.
* * *
화르르륵-
이글거리는 화염 수십 개가 날아오는 순간.
기사들은 오러 가 맺힌 장검을 뽑아 들고 기합을 터트렸다!
핫-
폭풍처럼 일어난 무형의 오러 가 화염 주술의 속도를 확 죽였다!
순간 일천 정예병의 시선이 화염 주술에 꽂혔다.
남방 공국 정예병들의 주적은 거대한 대습지에 펼쳐진 교룡(蛟龍)의 제국!
수많은 교룡의 사제, 주술사들과 싸웠기에 주술에 대한 대응은 뼈에 새기고 있었다.
마법과 주술 모두 현상에 의지를 구현하는 것!
하나로 모인 강렬한 의지는 이미 완성된 마법과 주술조차 약화시킨다!
콰아아아앙-
강철 방패를 동시에 내려찍은 일천의 정예병들은.
수백 수천 번 했던 그대로 의지를 담아 기합을 터트렸다!
하아아아앗-
기합에 담긴 의지에 화염 주술이 흔들리는 순간.
후열에서 대기 중인 경보병과 지원병들이 마법 스크롤을 사용했다.
팡, 파아앙-
얼음 화살이 화염 주술을 꿰뚫어 지워 버릴 때.
앞뒤로 포위된 무인들이 돌연 반전해 돌진했다!
팟-
가볍게 몸을 달려 거리를 지우고.
휘잉-
섬전 같은 검격을 쏟아붓는다!
전신을 가리는 강철 방패를 비스듬히 세워 몸에 붙이는 순간.
내력이 실린 검과 도, 창과 둔기가 방패에 쏟아졌다!
콰앙, 콰아앙, 쾅-
가장 가벼운 검격조차 바위를 내리치는 듯한 충격량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두꺼운 복합 강철 방패와 중갑을 뚫고, 타격을 줄 정도로 내력이 심후한 무인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공격은 단단한 강철 방패에 막혀 불꽃을 쏟아 내며 미끄러졌다.
그러나 돌진한 무인 사이사이에는 복합 강철 방패와 중갑을 뚫고 타격을 줄 무인들이 있었다.
절정의 경지에 달한 무인.
퉁-
가벼운 검격이 닿는 순간.
찌르르-
벼락을 맞은 듯 전신을 달리는 충격파!
왈칵 피를 쏟아 내는 동시에 휘청 다리가 흔들리고 현기증에 하늘이 빙빙 돌았다.
파르르르-
당장이라도 부러질 듯 요동치는 손에서 방패가 뚝- 떨어지는 순간.
휘잉-
섬전 같은 일격이 다시 한 번 날아왔다!
일대일 전투라면, 목이 날아가고 승부가 갈릴 상황.
그러나 중갑 보병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좌우에는 어깨를 붙인 방패병이, 등 뒤에는 벨트를 잡고 등을 받힌 아군이 있었다.
“좁힌다! 뒤로 빼내라!”
좌우의 방패병이 반걸음씩 움직여 방패로 앞을 가리고, 벨트를 잡은 아군이 다급히 중갑 보병을 끌어당겼다.
중갑 보병이 바닥을 구르고, 검격이 강철 방패에 막히는 순간.
쿵-
방패 사이 공간을 지나 절정 무인이 진형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순간 후열의 경보병이 악을 쓰며 강철창을 질렀다.
으아악-
가벼운 검과 강철창이 충돌하는 순간 거대한 쇳덩어리를 때리듯 충격파가 터지고 불꽃이 우수수 떨어졌다.
챠르르르릉-
단숨에 마비되는 손!
당장이라도 강철창을 떨어뜨리고 목이 날아갈 듯한 섬뜩한 느낌에 전율하는 순간.
“빠져라!”
기사의 외침과 함께 경보병의 몸이 뒤로 빠져나가고, 오러를 담은 장검이 튀어나와 절정 무인의 검을 때렸다.
쩌어어엉-
검기와 오러 가 충돌하는 순간 굉음이 터지고 기와 마나가 폭발했다.
순간 장검을 날린 기사는 몸으로 밀고 들어갔다!
쿵, 쿵, 쿵-
기사의 전차 같은 돌진을 가벼운 보법으로 물러서 피해 내는 절정 무인.
처음부터 잡을 생각은 없었다!
절정 무인이 진형에서 빠지는 타이밍.
기사는 우뚝 손을 들어 올렸다.
하앗-
기합을 터트린 중갑 보병이 달려와 강철 방패를 세우고 후열의 아군이 그 등 뒤를 단단히 받혔다.
기사는 절정 무인을 견제하며 외쳤다.
“뒤로 물러서지 마라! 마주 때려야 버틸 수 있다! 하나에 밀어낸다!”
“하나!”
콰앙-
“하나!”
콰아앙-
기사의 구령과 함께 방패진은 파도치듯 전진했다.
쾅, 콰앙, 콰아앙-
내력이 담긴 무기와 강철 방패가 쉴 새 없이 충돌해 굉음이 터지고 사방에서 악을 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패진을 펼진 전장 전체에서 비슷한 양상으로 전투가 진행됐다.
남방 공국의 정예병들은 처음 생색만 내려 했다.
양면에서 적을 포위한,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기에 어렵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전투에 들어간 순간 자신들이 오판했다는 걸 깨달았다.
집단전 경험이 없는 적, 단숨에 밀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 무인들은 만만치 않았다.
수인족의 압도적인 힘과 체력.
강철 방패마저 뚫는 절정 무인.
그리고 존재만으로 모두를 압박하는 마스터급 호인족 전사가 있었다!
처음 남방 공국 기사들의 의도와 다르게 전투는 점점 더 격렬해지고 있었다.
아직 최후의 선을 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검과 방패를 맞댄 모두는 직감했다.
피를 보는 순간 그 누구도 물러서지 않는 치열한 격전이 펼쳐진다.
당종이 의도한 대로!
* * *
그으으으으윽-
로프를 타고 성벽에서 내려갈 때, 처음 특급 헌터는 환호했다.
“으앗! 사람들 엄청엄청 많이 모였어! 재밌는 거 하나 봐!? 혹시 닭싸움!? 말뚝박기!”
구으으으응-!
그러나 광장에서 화염이 날고 기합 소리와 함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특급 헌터의 얼굴에선 빠르게 웃음이 사라졌다.
“어, 뭔가 이상한데?”
구으으으-?
“어어어!? 위험해! 아프단 말야! 조심해!”
구으으, 구으으-!
그리고 마침내 무인과 정예병이 격돌해 방패와 무기가 충돌하고, 투지와 살기가 뒤엉켜 솟구치는 순간.
“…….”
특급 헌터는 말을 잊은 채 눈을 연신 깜빡였다.
방패로 벽을 쌓고 밀어붙이는 정예병.
무기를 들고 방파제를 때리는 파도처럼 몰아치는 무인들.
깡, 깡, 콰아앙-
금속성 폭음이 연이어 터지고.
으악, 으아악-
살기 어린 외침과 괴성이 쏟아졌다.
특급 헌터는 눈을 쓱쓱 비비며 말했다.
“꿈이지? 진짜 아니지?”
그러나 몇 번이나 눈을 비벼도 광장에 펼쳐진 전투는 사라지지 않았다.
특급 헌터는 눈을 비비는 걸 멈추고 외쳤다.
“왜 싸우는 거야!?”
“모두 그만해!”
“친구들끼리는 싸우면 안 돼!”
작은 팔을 휘두르며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광장의 전투가 멈추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특급 헌터는 쉬지 않고 외쳤다.
“그만하라니까!”
“축제잖아!”
“고기 먹고!”
“구슬치고!”
“딱지치기해!”
“엄청엄청 재밌어!”
“친구끼리 싸우면 안 돼!”
,,,,
이때 조용히 특급 헌터의 눈을 가리는 손.
진교은이 특급 헌터의 눈을 가리고 부드럽게 귓가에 속삭였다.
“이거 모두 꿈이야. 눈 꼭 감고 있다가 나중에 뜨면 전부 사라진단다. 잠깐만 이러고 있자…….”
으아, 으아아-
특급 헌터는 어깨를 들썩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
천문석은 말없이 이 모습을 바라보며 로프를 내려 와 호수 위 바위에 도착했다.
쿵-
이 순간 교차하는 바위 사이에 숨겨진 배와 갑판 위 숨죽이고 있는 동료들이 보였다.
천문석과 특급 헌터, 진교은을 보는 순간 동료 모두의 얼굴이 환하게 밝혀지고 반가운 외침이 쏟아졌다.
“무사히 왔구나! 얼른 건너와!”
“특급 헌터! 괜찮니!?”
“진교은! 너 무사해!?”
천문석은 바로 로프를 풀고 미끄러운 바위를 밝고 달려 선박 갑판에 내려섰다.
와아아아아-
이 순간 최설, 허준, 이원, 한호석 교수가 달려들어 진교은과 특급 헌터를 안았다.
“특급 헌터! 괜찮아!?”
“…….”
“교은아! 괜찮아!?”
“난 괜찮아. 특급 헌터가 날 지켜 줬어.”
“특급 헌터 왜 말이 없어? 괜찮은 거 맞아?”
“…….”
언제나 씩씩하던 특급 헌터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천문석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동대문 게이트 사건 때 랩터를 유인해 친구들을 구하고.
제주도 때는 마수와 몬스터 사이를 달려 사람들을 구한 특급 헌터.
그 위험한 순간에도 특급 헌터는 용감하게 외치고 열심히 달리고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마수와 몬스터가 아닌 사람끼리 싸우는 모습을 처음 보는 지금.
특급 헌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멍하니 광장을 바라보며 속삭일 뿐이었다.
“싸우면 안 되는데…….”
“친구들끼리 싸우면 안 되는데…….”
천문석은 한참 특급 헌터를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성벽을 봤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성문으로 달려가는 미호가 보였다.
인질극까지 해서 탈출한 곳으로 돌아가는 미호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았다.
강호의 은원은 무거운 법.
남의 싸움에 끼어들어 원한을 쌓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류호와 태웅은 특급 헌터와 진교은을 보살펴 줬다.
적염성의 신임 성주로.
그 과정에서 상상할 수 없는 어이없는 오해 와 황당한 일들이 있었겠지만, 두 사람이 특급 헌터와 진교은을 도왔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 모든 게 남의 싸움이 아니게 됐다.
은혜를 받았으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른다고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