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530화>
사진을 본 장철은 돌이 된 듯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천문석은 말없이 일어나 조용히 놀이터를 빠져나왔다.
오랜 시간 딸을 찾았던 아빠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놀이터 앞 슈퍼를 지나갈 때 싸늘한 바람결에 생경한 소리가 들려왔다.
“…….”
천문석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뒤돌아보지 않고 언덕을 올라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텅 빈 옥상, 놀이터가 내려다보이는 난간 앞에 섰다.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
천문석은 장철이 사라진 놀이터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세기말 대한민국에 떨어지고.
장철, 장민, 장세린과 우연히 만나.
곰 인형 곰곰이를 받아 장철에게 전했다.
과거를 변화시켰으나 여전히 세린이는 없었다.
밤하늘에 뿌려진 별들은 밝게 빛나고 있으나, 그 안에 담긴 천의는 너무나 아득하여 헤아릴 수 없었다.
문득 오래전 스승님께 들었던 이야기 생각났다.
‘하늘에는 선악이 없으니, 그 인과는 단지 인연, 업을 따라 흘러간다.’
하지만 그 누가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늘은 무정하나, 사람은 유정하고.
하늘의 인과는 헤아릴 수 없으나, 그 인과를 넘어 다시 만나기를 소망하는 것이 사람.
슬퍼하는 장철과 장민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두 사람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잊으라고 말할 수 없었다.
유정을 끊고 무심에 닿아 하늘의 뜻을 헤아린다 하여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자신 또한 장철, 장민과 같았다.
홀로 높게 솟아 하늘에 닿은 거목이 아니라, 굽은 줄기로 바람을 막아주고, 성긴 나뭇잎 사이로 햇살을 흘려 풀과 나무를 길러내 숲을 이루는 못생긴 나무가 되고 싶었다.
돌멩이는 무공보다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서 일류, 절정, 초절정 무의 경지를 넘는 것에 얽매이지 않았고.
무의 극을 넘어 천의무봉의 경지에 닿는 것 또한 소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하고 하늘의 인과는 인지로는 헤아릴 수 없으니.
너무나 바랬던 소망은 이루지 못하고, 엉뚱하게도 그렇게 버리려 노력하던 무로 극을 넘어섰다.
천문석은 문득 고개를 들어오래전 그날처럼 하늘을 바라봤다.
산속 사당의 돌멩이처럼.
마도 18문의 지존, 천마처럼.
김철수 사무실의 부사장, 천문석처럼
돌멩이, 천마, 천문석.
불리는 이름은 변해 왔으나, 조금도 변하지 않은 마음으로 결정했다.
오늘이 그날이다.
천문사의 주인이 대를 이어 쌓아 올린 업으로 단 한 번 하늘에 묻는 날.
천문(天問)!
이것은 천의를 고쳐 쓰는 법이며.
원인 없이 결과를 만드는 역천이었다!
그러나 자신이야말로 역천의 무공으로 극을 넘어선 존재!
이제 와서 주저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천문석, 천문사의 유일한 후계자는 대대로 이어진 업을 실어 하늘을 향해 고했다.
“장세린! 장철의 딸을 내놔라!”
휘이이이잉-
순간 마음마저 차갑게 식는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천문석은 미동도 없이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봤다.
휘이이이잉-
바람만 계속 불어올 뿐 천기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스승님…… 설마!?”
차마 뒷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천문사의 비전이라면서요!? 설마, 이것도 구라였던 겁니까!?’
전생의 스승님의 말대로 이어받은 업을 실어.
천문, 하늘에 고했으나 하늘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휘이이이잉-
싸늘한 바람만 계속 불어올 뿐이다!
당했구나!
“이런 사기꾼 중 같으니라고. 아니 어떻게 된 게 전부 다 구라야…….”
천문석은 깊은 한숨을 쉬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언제 넣어 뒀는지 모를 동전 한 개가 주머니 안에서 잡히는 순간.
천문석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하늘 높이 튕겨 올렸다.
핑그르르르-
빠르게 회전하는 동전이 하늘의 별들을 향해 치솟을 때.
천문석은 하늘을 향해 기원했다.
장세린 그 아이가 행복하기를.
장철과 아내, 장민과 특급 헌터.
세린이네 가족이 환하게 웃을 수 있기를.
기원을 마친 천문석은 바로 몸을 돌려 옥탑방으로 들어갔다.
하늘로 치솟은 흑전은 떨어지지 않고 아주 오랫동안 회전하며.
핑그르르르-
그 안에 담은 펜던트의 힘과 쌓인 업을 풀어냈다.
인과를 잇는 가장 강력한 힘, 마음!
하나로 모인 마음, 기원이 흑전에 담긴 힘을 일깨웠다.
회전하는 흑전의 주위로 아지랑이가 지듯 대기가 일렁이고, 복잡하게 뒤엉킨 실이 올올히 풀려 나가듯 인과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무심한 하늘에 마음이 생겨나고, 별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상을 내려다봤다.
하늘의 인과가 변화하는 이 순간.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던 존재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킥, 킼키킥-?
구으으으응-?
띧디디딛딛-?
니케, 사슴벌레, 황금 풍뎅이.
셋은 난간에 나란히 앉아 변화하는 인과를 구경했다.
그러나 인과가 완전히 이어지지 전 흑전은 힘을 잃고 떨어졌다!
휘이이-
흑전이 떨어지는 순간.
벌떡 일어나 외치는 니케!
킥, 키킼킼키키킼-!
구으으응-
딛디딛디-
사슴벌레와 황금 풍뎅이가 재빨리 날아가 떨어지는 흑전을 잡는 동시에.
휘이이이잉-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니케가 흑전을 낚아채 도약했다.
팟-
단숨에 거실로 들어온 니케는 텐트 위에 내려앉았다.
슬그머니 텐트 안을 바라보니 두 사람에게 깔려 잠든 대두목이 보였다!
니케의 시선이 대두목과 구멍 뚫린 텐트를 오갔다.
손에 퐁퐁검을 꼭 쥔 채로 인상을 쓰고 잠든 대두목!
작은 구멍이 뽕뽕뽕 세 개나 뚫린 텐트, 대두목의 집!
순간 니케는 불안해졌다.
제주도에 내려가기 전 복수하기 위해서,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대두목의 집에 구멍을 세 개나 뚫은 게 자신이었다!
자신이 한 일이 걸리는 순간 무자비한 응징이 돌아온다!
그전에 미리미리 착한 일을 해둬야 했다!
니케는 텅 비어 버린 흑전을 대두목의 이마에 올려놓고 환해진 얼굴로 도약했다.
팟-
니케가 사라진 순간.
장민과 류세연에게 깔린 특급 헌터는 최악의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으으으- 고등어. 고등어는 안 돼! 누나!”
* * *
“일어나! 빨리 일어나! 엄청 큰일 났어!”
우렁찬 외침이 귓가에 쏟아지고.
휙, 휘휘휘휘휙-
이불 너머 몸을 흔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눈을 뜨지 않아도 누군지 감이 왔다.
슬쩍 이불을 내리고 눈을 뜨자, 생각 그대로의 얼굴이 보였다.
순간 이마에 착- 달라붙는 검은 동전!
“특급 헌터. 이거 뭐냐?”
“알바 동전 맞지? 내가 주웠어!”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 특급 헌터는 침대 옆에 서서 자랑스레 외치고 있었다.
“아, 동전 주웠구나? 엄청 큰일이었구나. 그럼 더 자자. 안녕.”
천문석이 이불을 뒤집어쓰려는 순간.
특급 헌터는 다급히 이불을 잡고 외쳤다.
“알바 멈춰! 지금 엄청 큰일 났다니까!”
“……혹시 엉덩이가 너무 아프다는 거면 나 화낸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내 엉덩이는 특급 이란 말야! 이번엔 진짜, 진짜! 완전 큰일이란 말야!”
특급 헌터는 고개를 휙휙 저으며 공포마저 느껴지는 얼굴로 외쳤다.
순간 천문석은 감을 잡았다.
‘뭔가 일어났구나!’
“……뭔데? 혹시 마수? 몬스터 나왔냐!?”
천문석이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묻는 순간.
꿀꺽-
특급 헌터는 바싹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키며 외쳤다.
“장민! 장민이 오늘 아침 식사 준비할 거 같아!”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외치는 특급 헌터.
“…….”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천문석은 확인했다.
“장강 유통 대표님?”
“맞아!”
“장철 헌터 동생?”
“맞아!”
“너희 엄마?”
“맞다니까! 왜 자꾸 물어! 지금 엄청 급하단 말야! 빨리 일어나!”
“장민 대표님이 요리하겠다고 했다고? 지금 이 새벽에?”
깜깜한 창밖을 가리키는 순간.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특급 헌터.
“내가 직접 봤어!”
“……지금 거실에서?”
“아니, 꿈속에서! 나 방금 엄청 무시무시한 꿈 꿨어! 장민이랑 누나가 나한테 고등어 먹였어! 으으윽-.”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특급 헌터.
“…….”
뭐지, 이건 신종 괴롭힘인가?
천문석은 물끄러미 특급 헌터를 보다가 픽- 쓰러져 이불을 머리 위로 끌어올리며 말했다.
“더 자라 꼬맹아…….”
특급 헌터는 올라가는 이불을 잡고 외쳤다.
“그게 끝이 아니야! 진짜 진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단 말야!”
“사건……?”
건성으로 묻는 순간 돌아오는 너무나 진지한 대답.
“꿈꾸고 일어나자마자 확인했단 말야!”
“뭘 확인해……?”
“통조림! 알바가 사 온 고등어 통조림! 내가 꼭꼭 숨겨 둔 고등어 통조림이 실종됐어! 그것도 세 개 전부다!”
천문석의 머릿속에서 특급 헌터의 이야기가 재구성됐다.
1. 장민 대표가 요리하는 꿈을 꿨다.
2. 고등어 통조림 3개가 실종됐다.
3. 장민 대표가 실종된 고등어 통조림으로 요리해서 자신에게 먹일지도 모른다!
“…….”
천문석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지난 며칠 자신은 치열한 격전을 치렀다.
세기말 대한민국에서는 게이트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마수와 몬스터와 싸웠다.
공방 도시로 돌아와서는 수백의 헌터와 초거대기업의 추적을 따돌리고 만만치 않은 강적과 승부를 벌였다!
이렇게 모든 의뢰를 완수하고 당분간 잠수 타겠다고 생각한 첫날.
정말 오랜만에 내 집, 내방, 내 침대에서 잠들고 일어난 새벽.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고등어 통조림 3개 실종 사건!
게다가 장민 대표가 고등어 요리를 할지도 모른다니!
“우리 집에서 이런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다니!”
천문석이 경악한 외침을 터트리는 순간.
특급 헌터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알바! 아직 늦지 않았어! 우리 얼른 실종된 고등어 통조림 찾아야 해! 이대로 있다가는 장민이 우리한테 고등어 먹일 거야!”
“우리가 실종된 고등어 통조림을 찾을 수 있을까?”
천문석이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 순간.
마찬가지로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특급 헌터.
“최악의 경우!”
“최악의 경우?”
“장민 일어나기 전에 도망쳐서 국밥 먹고 오자! 나 돈 엄청 많아!”
짤랑-
터질듯한 동전 지갑을 흔드는 특급 헌터.
“우와! 특급 헌터 너 엄청 부자구나!?”
“카카카- 나 깡통 많이 팔았거든! 드래곤 형이 엄청난 깡통 부자야! 오늘도 깡통 보내 준다고 연락 왔어!”
“뭐! 깡통을 준다고!? 우와! 너 인맥 대단하구나!”
“카카캌- 내가 좀 그래! 앗! 나 관장 할아버지한테 퐁퐁검 휘두르는 법도 배우고 있어! 얍, 얍얍!”
“우와 진짜!? 이러다가 특특특급 헌터 되는 거 아냐!?”
“당연하지! 난 매일매일 강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앙꼬 대장 꼭 이겨야 하거든!”
“우와, 우와! 엄청나 대단해…….”
천문석은 연신 칭찬을 하며 특급 헌터를 은근슬쩍 이불 속으로 끌어당겼다.
특급 헌터가 포근한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천문석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우리 잠깐 눈 좀 붙였다 일어나서 수사 시작할까?”
“그럴까? 하압-.”
악몽에 놀라 깨어난 특급 헌터는 크게 하품을 하더니 졸린 눈을 감았다.
천문석과 특급 헌터는 곧 포근한 이불 속에 나란히 잠들었다.
그리고 류세연의 외침이 들려오는 순간 번쩍 눈을 떴다.
“삼촌! 특급 헌터! 아침이야! 얼른 일어나!”
어느새 환해진 침실.
창문 밖으로 밝은 하늘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