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529화 (530/1,336)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529화>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천문석은 소리없이 방문을 열고 나와 거실을 살폈다.

벽에 걸린 시계는 11:50분.

시계 아래, 구멍 세 개가 뚫린 티피 안에는 나란히 엎드려 잠든 특급 헌터와 류세연이 보였다.

조용히 주방으로 걸어갈 때.

특급 헌터의 잠꼬대 소리가 들려왔다.

“으으윽- 엉덩이…….”

천문석은 웃음을 삼키며 조용히 주전자를 가스레인지에 올리고 머그컵에 커피 믹스를 두 잔 탔다.

벌써 가을이 시작됐는지 쌀쌀한 밤이었다.

천문석은 담요를 하나 챙겨 쇼핑백과 함께 들고, 다른 손에는 뜨거운 커피가 담긴 머그컵 두 잔을 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현관문을 나와 옥상으로 나왔다.

달빛에 환히 밝혀진 옥상 한쪽, 평상 위에는 이미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틀어 올린 머리카락에 나무젓가락을 비녀처럼 꽂아 고정하고, 세연이의 트레이닝 복을 입은 채 느긋하게 앉아 있는 사람.

장민 대표.

서늘한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올이 흩날릴 때.

휘이이이-

장민 대표는 문득 고개를 돌려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바씨. 왔군요?”

“오래 기다리신 건가요? 제가 늦은 건가요?”

“아뇨. 달도 좋고 바람도 좋아서 먼저 와서 앉아 있었어요. 오늘따라 풍경이 너무 좋네요.”

장민은 옥상 난간 너머 환한 달빛 아래 펼쳐진 도시를 가리키며 웃었다.

천문석은 장민에게 담요와 커피를 건넸다.

“여기 담요 받으세요. 그리고 여기 커피 믹스입니다.”

“고마워요. 알바씨.”

장민은 담요를 어깨에 걸치고 후, 후- 뜨거운 커피를 몇 번 불고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천문석과 장민 두 사람은 평상에 앉아 말없이 도시를 바라봤다.

“…….”

“…….”

꼭 할 말이 있다고 12시 자정 이곳에서 만나자고 먼저 말한 게 천문석 자신이었다.

그러나 막상 장민 대표가 앞에 있자, 뭐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1999년 12월 30일부터 2000년 1월 1일까지. 3일 72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아서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천문석은 문득 시선을 돌려 옆에 놓아둔 쇼핑백을 봤다.

그리고 담요를 어깨에 걸치고 후, 후- 불며 커피를 마시는 장민 대표의 얼굴을 봤다.

세기말 대한민국에서 본 10대 중반의 고등학생 소녀는, 어느새 한 아이의 엄마 한 회사의 대표가 됐다.

그러나 장민 대표의 얼굴에는 며칠 전 본, 고등학생 소녀의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어린 조카를 지키기 위해서 주저하지 않고 석궁을 쏘고, 부엌칼을 찔러 오던 강단 있던 어린 장민.

어린 장민의 얼굴을 장민 대표의 얼굴에서 발견하는 순간 수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특급 헌터의 사촌 누나, 장세린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장철 헌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나 묻는 순간 돌아올 대답을 짐작하기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천문석을 어느새 장민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장민은 야경을 가리키며 빙그레 웃었다.

“장철은 오늘 낮에 내려간 던전에서 급하게 올라오고 있어요. 긴급 운송 서비스를 불렀다니까 30분쯤? 그쯤이면 이곳 근처에 도착할 것 같네요.”

“아까 특급 헌터가 했던 장난 때문에 올라오시는 건가요?”

장민은 민망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 집 아이가 또 사고를 쳤네요. 그런데 사실 오늘 친 사고는 좀 고마워요.”

“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반문하는 순간.

장민은 짧은 한숨을 쉬며 하늘을 가리켰다.

“장철은 잃어버린 별을 찾아 던전을 헤매고 있거든요. 이번에 내려간 던전도 그런 던전 중 하나고요. 하-.”

“…….”

천문석은 장민의 이야기를 바로 알아들었다.

잃어버린 별을 찾아 수많은 던전을 헤매는 장철.

장철이 찾아 헤매는 던전은 2000년 광화문 게이트 사태를 재현하는 던전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별은 특급 헌터의 사촌 누나이자 장민의 조카.

장세린, 장철의 딸이다.

“…….”

이 순간 천문석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그저 담백하게 사실을 전하면 된다.

조카를 잃은 장민과 딸을 잃은 장철의 아픔과 슬픔은 온전히 두 사람의 것이니까.

“잠시만.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천문석은 옆에 놓아둔 쇼핑백을 들어 장민 대표에게 건넸다.

“이게 뭔가요?”

“보시면 바로 알 수 있을 겁니다.”

“혹시 깜짝 선물인가요?”

장민은 눈을 반짝이며 쇼핑백을 열었다.

“곰 인형이네요? 특급 헌터 선물이 제게 잘못 온 거 아니에요?”

장난스레 말하며 곰 인형을 꺼낸 장민.

그러나 곰 인형을 제대로 본 순간 장민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이 탄 자국, 이 꿰맨 흔적. 어떻게…… 어떻게…….”

장민은 떨리는 손으로 곰 인형을 들어 팔과 다리와 꼬리를 살폈다.

언제나 여유로웠던 몸이 덜덜 떨리고, 손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강하게 곰 인형을 움켜쥔 순간.

언제나 빙그레 미소 짓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고 후드득- 물방울이 쏟아져 내렸다.

장민은 곰 인형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고 다급히 입을 열었다.

“이 곰 인형…….”

그러나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장민.

장민은 천문석을 바라보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게, 이게 왜? 곰 인형이, 이 곰 인형 이름이…….”

뒷말을 듣지 않아도 장민이 무얼 묻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천문석은 장민이 차마 묻지 못한 질문에 답했다.

“네. 그 곰 인형. ‘곰곰이’입니다. 세린이, 장세린이 제게 선물로 줬습니다.”

* * *

1999년 12월 30일부터, 2000년 01월 01일까지.

세기말 대한민국에서의 짧은 3일.

그 짧은 시간 동안 만난 장철 가족과 있었던 긴 이야기가 전해졌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장민은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공방 도시 지하. 그곳에 장철이 그렇게 찾던 일이 일어났군요.”

장민은 깊은 한숨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빠는 이번에도 늦었군요…….”

서글픈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감정.

천문석은 위로도 질문도 하지 않고 그냥 장민 옆에 앉아 있었다.

“…….”

“…….”

두 사람은 말없이 평상에 앉아 언덕 아래 펼쳐진 도시를 바라봤다.

어느 순간 장민이 입을 열었다.

“세린이를 도와줘서 감사해요.”

문득 고개를 돌려 장민을 보자, 장민은 곰 인형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던전은 현실을 비추는 왜곡된 거울 허상이라고 해요.”

“…….”

“그게 모두 거짓말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진짜 과거로 간 거여서 장철과 우리 가족이 알바 씨를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장민은 문득 고개를 들어 천문석에게 물었다.

“……알바씨가 만난 세계의 세린이는 씩씩하게 즐겁게 지내고 있겠죠?”

“…….”

자신이 떨어진 2000년은 단순한 허상이거나 평행 세계가 아니었다.

2000년에 한 일로 의인 광장에 일어난 변화가 그 증거였다.

그러나 다른 세계에서라도 조카가 즐겁게 지내고 있을 거라고 말하는 장민에게 해 줄 대답은 하나였다.

“네. 세린이는 즐겁고 씩씩하게, 특급 헌터의 좋은 누나가 됐을 겁니다.”

장민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곰 인형 곰곰이를 쓰다듬었다.

“정말 감사해요.”

부르르르-

이때 천문석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장철.

전화를 받자 곧 들려오는 목소리.

=나 장철이다. 10분이면 도착할 거 같은데. 집 위치가 어디지? 지금 운전하시는 분이 부산 분이라…….

천문석은 힐끗 장민을 보고 대답했다.

“……네 그 사거리가 맞습니다. 아니, 올라오지 말고 사거리 쪽에 계시면, 제가 나가겠습니다.”

천문석이 전화를 끊자, 장민은 곰 인형이 담긴 쇼핑백을 건네며 말했다.

“부탁드려요. 오빠에게도 말해 주세요.”

쇼핑백을 받은 천문석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 장민을 홀로 두고 옥상을 나갔다.

쿵-

문이 닫히고 천문석이 사라지자, 혼자 남은 장민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맑은 밤하늘을 보는 순간 바로 앞에서 보듯 선명한 얼굴이 떠오른다.

20년의 시간이 지났다는 게 거짓말 같았다.

당장이라도 저 문이 열리고, 세린이가 달려와 예전처럼 유치원에 가면 안 되는 이유 10가지를 조곤조곤 외칠 것만 같았다.

장민은 새삼 던전을 찾아다닌 장철의 마음을 이해했다.

이런 종류의 아픔은 잊히지도 치유되지도 않는다.

평생을 가슴속에 묻은 채 참고 살아갈 뿐이다.

그럼에도 장민은 건물 입구를 나와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천문석을 바라보며 기원했다.

‘곰곰이를 받은 장철이 이제는 웃을 수 있기를.’

* * *

“네. 휘경 슈퍼 맞습니다. 그 앞 놀이터에 계시면 됩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아, 보입니다.”

천문석이 전화를 끊고 손을 흔들었다.

한밤의 놀이터 입구에 서 있는 남자의 험상궂은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급하게 올라왔는지 강화 전투복에 무장 벨트를 차고, 재킷을 걸친 남자.

장철 헌터였다.

천문석이 다가가자 장철 헌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우리 집 꼬맹이 엉덩이는 무사하냐? 흐흐흐-.”

한껏 가라앉은 마음에 훅 치고 들어오는 장철 헌터.

천문석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

장철은 천문석의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표정 보니까 이번엔 장민이 제대로 벌을 줬나 본데? 그 녀석 이번엔 혼나야 해. 얼마나 장난을 쳤는지. 비서실 직원들 얼굴이 노랗게 떴더라. 하하-”

“하하. 네 그렇긴 하더라고요. 그보다 저 드릴 말씀이…….”

“어, 그래. 집으로 걸으면서 이야기하자. 특급 헌터 엉덩이에 불이 났는데. 당연히 사진으로 남겨놔야지! 크크크-.”

철없는 삼촌처럼 휴대폰을 흔들며 음흉하게 웃는 장철 헌터.

분위기가 점점 더 진지함과는 멀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진행되다가는 말을 꺼낼 수 없는 분위기가 될 상황.

천문석은 쇼핑백을 내밀며 외쳤다.

“장철 헌터님. 우선 이것부터 보시죠!”

“뭐야? 너 의뢰 갔다더니. 내 선물 사 왔냐? 뭘 이런 걸 다 사 와.”

대수롭지 않은 듯 쇼핑백을 받아 여는 순간 장철은 발걸음을 멈췄다.

“…….”

곰 인형을 꺼내는 순간.

장철은 무섭게 굳은 얼굴로 외쳤다.

“이거! 이 인형! 어디서 구했냐? 던전이지?! 그 던전 어디냐?! 아니, 그보다 그 던전 클리어됐냐?!”

뚫어질 듯 천문석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는 장철.

천문석은 놀이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야기가 깁니다. 저기 앉아서 이야기해 드릴게요.”

장철은 깊은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성큼성큼 놀이터를 향해 걸었다.

10여 미터 남짓한 짧은 거리.

그러나 이 짧은 거리를 걷는 장철의 심장은 터질 듯 두근거리고 있었다.

끝없이 찾아다닌 던전!

최초의 게이트가 열렸을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는 던전을 마침내 찾았다!

그뿐이 아니라, 너무나 눈에 익은 곰 인형이 손에 들어왔다!

곰 인형을 잡은 장철은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모두 이야기해라!”

놀이터에 도착한 장철은 천문석에게 다급히 외쳤다.

“부산 던전 7층, 공방 도시 지하 유적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천문석은 장철에게 세기말 대한민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 * *

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 장철은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수없이 후회했다.

2000년 1월 1일 그날 회사에 가지만 않았으면. 아니, 일정을 미루지 않고 가족들만 먼저 제주도로 보냈으면…….

그러나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과거를 후회하는 아빠는 2000년 게이트 사태를 재현하는 던전을 찾아다녔다.

던전은 현실을 비추는 왜곡된 거울, 허상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게 헛된 일이라고 해도 반드시 찾아야 했다.

장철은 손에 쥔 작은 곰 인형을 바라봤다.

울지 않도록, 무서워하지 않게 그 작은 손과 몸을 꼭 안아 줘야 했는데…….

“…….”

장철은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곰 인형을 바라보다 문득 입을 열었다.

“……이 인형 이름도 들었냐?”

“‘곰곰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아-

깊은 한숨 소리 뒤로 다시 한번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 속에 담긴 수많은 질문.

장철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짧게 물었다.

“……잘 지내냐?”

천문석은 장철의 망설임에 숨겨진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장세린. 내 딸은 …… 잘 지내냐?’

“…….”

과거를 바꿔 의인 광장은 시고르자브르 광장이 됐다.

하지만 장철의 딸 장세린의 운명은 변화하지 않았다.

아니, 장민과 장철과 자신이 만난 일 자체가 없던 일이 돼버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변한 게 없다 하더라도 자신이 한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천문석은 확신을 담아 대답할 수 있었다.

“세린이는 아빠, 엄마. 장민이랑 안전한 제주도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급 헌터에게 좋은 누나가 되어 줄 겁니다.”

“…….”

장철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누구도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장철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단지 세린이가 웃는 모습을 보고 그 작은 몸을 꼭 안아 주고 싶었을 뿐이다.

직접 하지 못했어도 괜찮다.

세린이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곰 인형이 돌아오고, 세린이가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장철은 한참 동안 곰 인형을 바라보다가 혼잣말하듯이 말했다.

“세린이는 네가 아주 마음에 들었나 보다.”

“…….”

“자신의 보물이 담겨 있는 곰곰이를 이렇게 너에게 줬으니 말야.”

서글프게 웃은 장철은 곰곰이를 뒤집어 털 속에 숨겨진 지퍼를 열었다.

그리고 딸이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은 보물들을 살폈다.

천으로 만든 공기돌.

한 장이 모자란 치킨 쿠폰.

장민이 찾아준 네 잎 클로버.

가족 모두 놀러 간 놀이공원 티켓.

……

그리고 사진 한 장이 나왔다.

젊은 자신과 아내.

교복을 입은 어린 장민.

곰곰이를 안고 환하게 웃는 아이, 장세린.

세린이의 보물, 가족사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