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고산 마을.
낯익은 고산 마을을 보는 순간,
천문석은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처음 배송경주를 시작할 때.
철수형은 게이트 거점도시로도 깔려있지 않은 도로가 고산 마을까지는 깔려있다고 어이없어했었다.
그때 당시에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도로가 있으니 운이 좋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천문석은 장철 헌터에게 물었다.
"혹시 고산 마을까지 뚫린 비포장도로. 무림 던전 때문인가요?"
"어, 그건 어떻게 알았냐? 무림 던전 운영권을 넘기니까. 태성 길드, 이태성이가 유령 길드 앞세워서 무림 던전까지 도로를 뚫었어. 처음에는 뭔 병신 짓인가 했는데. 도로가 생기니까 도로를 따라서 줄줄이 거점 마을이 생기고. 신 태백산맥 입구에 고산 마을이 만들어지더라. 하-"
장철이 어이없다는 듯 웃을 때,
천문석도 허탈하게 웃었다.
개고생하며 달렸던 이세계 배송경주의 목적지 고산 마을.
하늘에서는 하늘 고래가 날고,
땅에서는 수많은 몬스터와 마수가 달렸다.
그리고 간신히 도착한 고산 마을에서 천문석은 마스터 급 오크와 생사결을 벌였었다.
그 고산 마을 근처에 무림 던전으로 이어지는 입구가 있었다니···.
한국, 이세계, 무림 던전.
자신이 가본 곳은 세상의 극히 일부일 뿐,
세상은 너무나 넓고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 수두룩했다.
이 순간 천문석은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인들이 살아 숨 쉬는 무림.
하늘을 나는 거대한 산악 같던 하늘 고래.
직접 보기 전까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든 경이로웠든 그 모습!
그와 같은 경이로운 광경을 다시 보게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순간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
-허공을 떠다니는 대륙.
-하늘 너머까지 뻗어있는 탑.
-바다에 잠겨 있는 수중 도시.
-폭풍이 끝없이 몰아치는 바다.
그리고 엄청난 수의 계단으로 이뤄진 거대한 산맥 위를 수십, 수백의 하늘 고래가 유영한다!
천문석은 너무나 생생한 상상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 두근거리는 상상.
천문석은 헌터가 되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건 먼 미래의 일.
무림 던전에서 개고생한 자신은 이제 놀아야 했다.
최소 일주일!
옥탑방 소파에 누워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으리라!
천문석이 다짐한 순간.
아무도 모르게 나타났던 천강흔은 빛을 잃었고,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장갑 SUV는 점점 속도를 올렸다.
장갑 SUV의 목적지는 이세계 거점도시 신서울. 그리고 신서울 게이트 너머에 있는 지구의 광화문이었다.
천문석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생각했다.
이제 집으로 간다!
---
번쩍 눈을 뜨는 순간.
띠이이-
이명이 쏘아지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으윽-
몸을 일으키려던 예비 각성자는 신음을 내뱉으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때 들려오는 목소리.
"5번 예비 각성자. 정신이 드시나요? 이 헌터용 음료수 마셔 보세요."
그리고 입가에 닿는 컵.
컵 안에 담긴 음료수를 마시는 순간,
혀끝에 엄청난 쓴맛이 전해졌다.
예비 각성자가 반사적으로 토해내려 할 때 강한 어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삼키세요!"
꿀꺽-
자신도 모르게 쓴 음료수를 삼키자 눈이 번쩍 뜨였다.
혀가 떨어질 듯한 쓰고 떫은 맛과 대비되는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청량감!
깨질 듯 아팠던 머리가 순식간에 맑아지고 좁아졌던 시야가 단숨에 트였다.
"이건!?"
예비 각성자가 깜짝 놀라 외치자,
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원이 바로 질문 했다.
"각성몽 꾸셨습니까?"
"네? 네!"
연구원이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5번도 각성몽을 꿨다!"
"확인한 모두가 각성했다니!"
"이게 무슨 일이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하필 입구가 사라졌을 때 이런 결과가 나오다니."
사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
5번 예비 각성자는 얼떨떨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봤다.
어쩐지 눈에 익은 석실 안에는 하얀 가운을 걸친 연구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들 앞에는 환자복을 입은 예비 각성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야전 침대에 앉아있었다.
이때 누군가 외쳤다.
"바로 이동해야 합니다. 일어나서 저를 따라오세요."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헌터,
이들을 던전으로 인솔해 들어왔던 위연화였다.
"잠시만! 좀 더 조사해야 합니다."
"이틀만. 아니 하루만이라도!"
연구원들이 다급히 외쳤지만,
위연화는 예비 각성자들에게 신발을 휙휙 던져주며 단호히 말했다.
"무림 던전이 사라졌으니. 더는 연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림 던전이 사라졌다고!?
예비 각성자들이 경악한 시선이 석실 벽으로 향했다.
위연화의 말대로 석실 벽에 있던 이질적인 스크린, 던전 입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
예비 각성자 모두가 멍하게 서 있을 때,
위연화의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바로 이동합니다! 늦은 사람은 버리고 갑니다!"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몸.
예비 각성자들은 바로 일어나 신발을 구겨 신고 위연화를 따라 움직였다.
이들은 안대도 하지 않고 동굴 밖으로 안내됐고.
동굴 밖 넓은 공터에 자리한 장갑 버스에 태워졌다.
위연화는 바로 인원확인을 하고 외쳤다.
"예비 각성자 전원 다 있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구으으응-
진동과 함께 출발하는 장갑 버스.
이때 예비 각성자 중 한 명이 다급히 외쳤다.
"4번, 4번! 예비 각성자가 타지 않았습니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장갑 버스 안 한자리에 모였다.
특별 대우를 받던 4번 예비 각성자가 앉았던 좌석이었다.
누군가 외친 것처럼 그 좌석에는 아무도 없었다.
예비 각성자들의 시선이 인솔자에게 모이자, 인솔자 위연화는 단호하게 말했다.
"4번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예비 각성자들은 의아해했지만, 곧 4번에 대한 생각을 잊었다.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아무도 각성몽을 꾸지 못해 가슴 졸이던 예비 각성자들.
이들 모두는 마지막 날 영약을 먹고 진기도인을 받고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각성몽을 꿨다.
꾸는 순간 각성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현실처럼 생생하던 무인의 꿈!
무인의 생을 꿈꾸는 순간 그 무인이 지녔던 무공이 머리에 새겨졌다.
예비 각성자 모두는 직감했다.
아직 육체는 각성하지 않았지만,
각성몽을 꾼 이상 자신들은 일반 헌터가 아닌 각성 헌터였다.
그것도 범용성이 높은 무공 계열 각성 헌터!
예비 각성자들의 얼굴이 밝게 펴질 때 버스 앞 위연화가 이들에게 말했다.
"각성몽을 꿨다고 끝난 게 아닙니다. 육체가 각성할 때까지 각성몽으로 자각한 무공을 몸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
"던전에서 쌓인 내력은 곧 흩어지겠지만, 그 흔적과 커진 그릇, 경험은 몸과 마음에 남아 성장 포텐이 되어줍니다."
"..."
"앞으로 한 달에서 석 달. 육체가 각성할 때까지 얼마나 노력하냐가 여러분이 '랭커'가 될 수 있냐를 결정합니다."
이 순간 예비 각성자 모두는 눈을 빛냈다.
랭커!
각성 헌터 중에서도 천외천.
사람은 언제나 위를 보기 마련이다.
비각성 헌터가 각성 헌터가 되기를 원하는 것 이상으로 각성 헌터는 랭커가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위연화의 말이 끝난 순간.
환하게 웃던 예비 각성자들은 재빨리 가림막을 치고 각성몽으로 머리에 새겨진 무공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5번 예비 각성자도 재빨리 가림막을 치고, 익숙지 않은 가부좌를 틀고 무당 심법을 되뇌었다.
이 순간 문득 느껴지는 아쉬움에 눈앞의 빈 좌석을 보는 5번 예비 각성자.
'하. 4번. 그 다이아 수저에게 내가 무당 무공을 각성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러나 아쉬움은 길지 않았다.
이번 기수는 전원이 각성했으니 4번도 각성했을 것이다.
머잖아 헌터 업계에서 4번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날 완전히 변한 처지를 보여주마!'
5번 예비 각성자는 눈을 반짝이며 무아지경에 빠져들었고,
다른 예비 각성자들도 하나둘 무아지경에 빠져들어 장갑 버스 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이들을 하나하나 살피는 위연화.
무림 던전에서 쌓은 내공은 밖으로 나오면 연기처럼 흩어지지만, 한 번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몸에 남아있는 영약과 내공. 그리고 선명한 진기 도인의 흔적에 예비 각성자들은 빠르게 무아지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위연화는 이들을 보며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무공에 몰두하는 이들이 부러웠다.
던전 입구가 닫혔으니,
다시는 무림에 들어가지 못한다.
예비 각성자들을 인솔한다는 핑계로 무림 던전에 수시로 들어가 스승님께 무공을 배웠었는데 그것도 이젠 끝이다.
하필이면 짠돌이 스승님이 다음에 만나면 비의 중의 비의, 정말 중요한 걸 가르쳐준다고 했을 때 무림 던전 입구가 사라지다니···.
하아-
위연화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무림에 남은 장일 총관의 얼굴을 떠올렸다.
"부럽다. 장일."
---
천천히 눈이 내리는 숲속의 도로.
이 도로 위로 수레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장일 총관이 모는 서녕시로 향하는 수레였다.
"잠시 이곳에서 멈췄다 가겠습니다."
장일 총관은 수레를 도로 가장자리로 빼내며 말했다.
"뭐야? 한시가 급하다니까! 갑자기 왜 세워?"
수레 짐칸에 삐딱하게 기대앉은 주호가 외쳤다.
예전에 봤던 위엄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다급한 말투와 표정.
순간 나무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오고.
딱, 딱, 딱딱-
주호가 찔끔해서 목을 움츠렸다.
마제사 주지 스님이 목탁채로 수레 바닥을 두들기며 주호를 인자하게 바라본 것.
수레를 타고 오며 저 목탁채에 맞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주호는 사색이 된 얼굴로 마제사 주지의 시선을 피했다.
장일 총관은 웃음을 삼키며 머리를 숙였다.
"화장실이 급해서 잠시만. 이세기 소협. 잠시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이세기가 눈을 번쩍 뜨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장일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 재빨리 숲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쿵, 쿵, 쿵-
심장 소리가 점점 크게 울리고, 육체가 세계에서 유리되는 느낌이 강해지고 있었다.
장일은 직감했다.
이제 곧 던전 입구가 닫힌다!
그 순간 닫힌 입구로 무림 던전에 들어온 모든 사람이 이곳 무림에서 튕겨 나간다.
그 사람 본인뿐만 아니라,
그 주위에 있는 사람까지!
그래서 장일은 급히 수레를 멈추고 숲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혹시나 다른 사람이 말려들지 않도록.
이렇게 숲속을 달리기를 한 참.
수레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됐을 때.
장일은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눈 쌓인 바위 공터에 멈춰섰다.
다급히 품 안에서 철패를 꺼내 드는 장일.
천문석에게 받은 앞면과 뒷면에 '장', '철'이라고 적힌 철권 대협의 철패였다.
장일은 바로 철권 대협의 철패의 위아래 요철을 잡고 비틀어 잡아당겼다.
철컥-
순간 철패가 열리고 이 안에서 뻗어 나오는 마력장!
푸른 마력장이 구 형태로 뻗어 나와 장일의 전신을 감쌌다.
그리고 잠시 후.
쿵-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과 함께 산천초목이 부르르 요동쳤다.
후드드드드득-
순간 숲에서 날아오르는 수많은 새!
새들을 따라 시선을 옮기는 순간,
구름 한 점 없는 한겨울 하늘로 퍼져나가는 파문이 느껴졌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만 장일은 직감했다.
던전 입구가 닫히고 있다!
이 순간 장일의 몸을 둘러싼 구 형태의 마력장에서 푸른 불꽃이 튀어 올랐다.
타다다닥-
그리고 잠시 후 푸른 불꽃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장일은 열렸던 검은 철패를 닫고 수레를 향해 달렸다.
거의 2각, 30분!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장일은 수레가 보이자마자 크게 외쳤다.
"죄송합니다! 적당한 자리가 보이지 않아서 헤매느라···."
그러나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
수레에 도착한 장일은 멍한 눈으로 수레 위를 봤다.
텅 빈 수레.
수레 짐칸에 앉아있던 주호와 발도 스님, 이세기 셋 모두가 사라졌다!
문득 주위를 살폈으나 발자국도 없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텅 빈 짐칸에는 눈이 녹은듯한 흔적만 남아있었다.
장일은 문득 짐칸 바닥에 손을 올렸다.
바닥에는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었다.
‘사라진 지 얼마 안 됐다!’
"주 대협!"
"발도 스님!"
"이세기 소협!"
장일은 다급히 주위 숲을 달리며 외쳤지만.
휘이잉-
거센 바람만 불어올 뿐 누구의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들 어디로 사라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