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단단히 짜인 장서실의 책장에 꽂혀있는 수십 권의 무학서.
천문석은 책 표면을 손끝으로 훑던 중 문득 한 권의 무학서를 뽑았다.
[운기토납법]
별다른 이름 없이 내용을 제목 삼아 표지에 적은 흔한 무학서.
책의 내용도 무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기초적인 운기토납법이었다.
특이한 점은 책의 내용이 한글로 적혔다는 것.
이 책은 체계적인 내공을 쌓기 이전에 기초적인 기감을 느끼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천문석은 손에 잡히는 데로 몇 권 더 책을 빼냈다.
삼재검, 육합권, 반일보, 대수장, 일수도.
다른 책들도 대동소이했다.
자체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다른 무공의 기초가 되어줄 만한 권장각법과 검법, 보법들이다.
이곳 장서실에는 특별한 비급은 없고,
일반적인 무학서들만 한글로 번역된 채 꽂혀있었다.
아까 예비 각성자들을 봤을 때도 특별한 것은 느껴지지 않았고.
지금 이곳에 있는 무학서들을 봐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각성이 끊겼다.
아무래도 수련각으로 오면서 생각했던 대로 지맥의 흐름이 약해진 게 이유가 맞는 것 같았다.
그리고 왜 그렇게 됐는지 이유도 짐작이 갔다.
천문석의 시선이 검대에 매달린 검으로 향했다.
천검 이세기의 검혼과 하늘 고래의 힘이 담긴 롱소드.
천문석은 이 롱소드에 담긴 검혼을 깨우며 막대한 양의 영맥과 지기를 끌어다 사용했다.
그 후폭풍으로 지맥의 흐름이 약해지고 지기의 압력이 낮아졌다.
그 결과 예비 각성자들은 각성몽을 꾸지 못하고 있었다.
건물 5층에서 수도꼭지를 돌렸는데 수압이 약해져서 물이 나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사실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하천의 수위가 낮아져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차오르듯,
잠시 약해진 지맥의 흐름은 금세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문제는 이번 기수에게 남은 시간이 3일 밤밖에 없다는 것!
그 사이에 지맥의 흐름이 돌아오고,
예비 각성자들이 각성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결자해지.
문제를 일으킨 자신이 이걸 해결해야 했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떠오르는 수많은 해결 방법들.
가장 쉬운 방법은 무림 던전, 이곳의 영맥을 이용해서 강제로 무공에 입문하도록 진기도인을 해주는 것!
그러나 무림 던전에서 나가는 순간,
던전의 영맥으로 쌓은 기는 허상처럼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지구에는 영맥이 없기에 이렇게 익힌 무공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이건 안된다.
두 번째 방법은 검강 롱소드에 담긴 천검의 검혼을 이용해서 지맥의 흐름을 자극하는 것.
그러나 이건 타인 명의로 사채를 빌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번 기수의 예비 각성자들은 큰 이득을 보겠지만,
뒤이어 이곳에 올 사람들의 각성 확률은 뚝 떨어질 것이다.
"..."
천문석은 어떤 방법으로 해결할지 고심하다가,
문득 탁자 위에 놓인 무학서들을 봤다.
운기토납법.
삼재검, 육합권.
반일보, 대수장, 일수도.
...
손때 묻은 무학서 옆에는 예비 각성자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종이 뭉치와 붓과 벼루, 먹물이 놓여 있다.
예비 각성자들은 이 허술한 무학서를 치열하게 탐독하며 각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순간 천문석은 한가지 생각이 들었다.
무림 던전의 정확한 각성 메커니즘은 모른다.
그러나 무공을 익혀서 각성몽을 촉진하는 걸 볼 때.
이 안에서 보고 익힌 무공이 영향을 주는 건 분명했다.
문득 한 가지 아이디어가 생각난다.
지맥의 흐름, 수압이 약해졌다면.
그 수압을 강하게 만들어줄 펌프를 달면 어떨까?
이 경우 수준 높은 무공은 필요 없다.
아이들의 장난감 페트병 물총처럼.
약해진 수압을 강하게 쏘아 낼 간단한 방책들이면 족하다.
다른 무인들은 생각하여도 실행하기 힘든 방법이다.
그러나 영맥이 없는 지구에서 어떻게든 한 방울의 진기를 만들어내려 고심했던 천문석에겐 방법이 있었다.
천문석은 즉각 붓을 들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수많은 초식과 내공심법들!
복잡하고 어렵고 시간이 걸리는 방법들은 모두 쳐낸다.
천문석은 일필휘지로 종이에 생각해낸 방책들을 적어 내려갔다.
대단한 내용은 아니었다.
운기토납법에 기감(氣感)을 느끼는 소림 심법을 더하고.
삼재검, 육합권.
반일보, 대수장, 일수도.
너무나 흔한 무공에 천지의 기운과 감응하는 화산과 점창, 공동파의 독문 초식을 잘라서 끼워 넣는다.
구파일방의 진산 절예가 담긴 독문 초식들.
천문석은 그 흔적조차 알기 힘들 정도로 독문 초식을 잘게 잘라내고 그 형을 변화시켜 흔한 무학서에 담았다.
천문석은 순식간에 작업이 끝난 종이를 반듯하게 잘라 무학서의 철을 풀고 사이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무학서를 단단히 다시 철한 후 일기일원공의 내력을 흘려보냈다.
탁, 탁, 탁-
가볍게 무학서를 흔드는 순간.
먹물이 바짝 마르고 새롭게 끼워진 종이의 색이 바래져 원래의 책과 구분할 수 없게 변했다.
수정된 6권의 무학서를 잘 보이게 탁자 위에 늘어놓는 천문석.
운기토납법.
삼재검, 육합권.
반일보, 대수장, 일수도.
천문석은 무학서를 보며 무협 영화 속 은거 고수처럼 읊조렸다.
“인연을 따라 이어지리라!”
이 무학서를 익히고 각성몽을 꾸게 될 사람들의 얼굴이 그려지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터지는 웃음.
하-
천문석은 왜 전대의 고수들이 자신의 무공을 숨겨두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어쩐지 두근거리는 가슴.
그리고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묘한 기대감!
이 무학서에 숨긴 구파일방의 초식과 도인법은 진심을 다해 탐독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몸과 마음에 스며든다.
이 초식과 도인법이 기연이고 선연이라면.
진심으로 무학서를 익히는 것은 시련이자 마장이다.
기연과 시련.
선연과 마장.
이게 바로 선연과 마장을 준비하는 하늘의 마음인 건가?
천문석이 내심 흐뭇하게 웃을 때,
어느새 장서실로 들어온 예비 각성자가 물었다.
"그 책 보고 계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전 다 봤습니다."
천문석이 탁자에서 물러서자,
초조한 얼굴의 예비 각성자가 탁자 위의 책들을 살폈다.
천문석은 '운기토납법'을 슬쩍 밀어주며 말했다.
"이거 한번 읽어보세요. 큰 도움이 되실 것 같네요."
"네? 이 책이 도움이 된다고요?"
의아한 얼굴로 천문석을 보는 예비 각성자.
그러나 예비 각성자는 곧 천문석이 특별 대우를 받고 있다는 걸 기억했다.
"이게 진짜로 도움이 될까요?!"
어쩐지 절박하게 들리는 예비 각성자의 물음.
천문석은 주위를 슬쩍 살피고 은밀한 표정으로 말했다.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그 책과 여기 탁자 위의 무학서를 집중적으로 익히세요!"
"...!"
비밀을 알려주는 듯한 천문석의 모습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예비 각성자.
"설마, 이거?"
"쉿!"
천문석은 장서실 입구를 손으로 가리키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비밀입니다.'
순간 예비 각성자는 눈을 번쩍 떴다.
이 눈에 생겨난 뜨거운 열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예비 각성자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고,
천문석이 내용을 끼워 넣은 무학서에 집중했다.
타다다닥-
이때 들려오는 다급한 발걸음 소리!
천문석과 예비 각성자의 대화를 들은 다른 사람들의 발소리였다.
이들은 다급히 달려와 탁자 위에 놓인 무학서를 한 권씩 낚아챘다.
6명의 예비 각성자들.
이번 기수의 인원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천문석이 내용을 끼워 넣은 무학서를 살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처럼 절박한 표정으로 무학서를 살피는 예비 각성자들.
그러나 이들이 살피는 무학서는 예비 각성자들에게는 튼튼한 동아줄이었다.
장서실에서 나온 천문석은 자신의 방이 있는 전각으로 향했다.
이제 이들이 각성할 수 있을지는 자신에게 달렸다.
자신이 친 사고를 수습한 천문석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빡센 밤을 보내고 뒤이어 하루 종일 장가장을 찾아 달렸다.
천문석은 오늘 하루 늘어지게 빈둥거리고,
밤이 되면 묵직한 은자를 들고 놀러 나갈 계획을 세웠다.
이제 곧 무림 던전도 안녕이다!
---
천문석은 계획대로 오전이 다 가도록 따뜻한 화로를 앞에 두고 방 안에서 빈둥거렸다.
그러나 장가장 전체가 점점 술렁이기 시작했다.
장원 곳곳에 모여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호위 무사들과 귓속말을 나누는 하인들.
이들의 목소리가 장주실에서 빈둥거리는 천문석에게까지 닿았다.
"...비무···."
"응룡채···."
...
"누가 비무라도 하나 보네. 으아아-"
천문석은 귀에 들려오는 단어들을 흘려들으며,
크게 하품을 하고 포근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차피 3번의 밤만 보내면 집에 간다.
설령 소림사 방장과 무당파 장문인이 비무를 해도 자신과는 상관없었다.
지금은 밤에 재밌게 놀기 위해서 체력을 비축할 때!
순간 천문석의 눈이 별처럼 빛났다.
묵직한 은자 주머니!
이 은자를 물처럼 뿌리리라!
남궁세가 망나니 소가주처럼!
카캬카-
천문석이 웃음을 터트릴 때.
장일 총관이 점심을 함께하러 장주실에 찾아왔다.
그리고 점심 중 장일 총관은 장가장이 술렁이는 이유를 말해줬다.
"지금 이곳 서녕시 전체가 난리입니다. 강호 초출의 청년이 철검장의 단혈철검 주호에게 비무첩을 전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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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에게 비무를 청해요?"
천문석의 질문에 장일은 좀 더 자세히 상황을 설명했다.
"한 청년이 응룡채주 마일도를 통해서 단혈철검 주호에게 비무첩을 전달했습니다. 강호에 처음 나선 젊은이가 지역의 패주로 이름 높은 고수를 찾아 비무를 벌이는 거죠. 이름을 날려보겠다는 젊은 혈기에 간혹 일어나는 일입니다."
장일은 별일 아니란 투로 이야기 했지만,
천문석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단혈철검 주호!'
철검장의 단혈철검 주호는 이 각성 던전의 보스, 던전 클리어 조건이다.
그 보스에게 던전 밖에서 온 헌터가 아니라 던전 안의 무인이 도전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되는 거지?'
천문석은 의문을 장일에게 바로 물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되죠? 이렇게 다른 무인과의 비무에서 져도 던전이 클리어되는 겁니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장일.
"네. 이런 경우에도 클리어가 됩니다. 전에 다른 던전에서도 이렇게 클리어가 된 경우가 있었다고 하네요."
태평하게 대답하는 장일을 향해 되묻는 천문석.
"그럼 지금 큰일 난 게 아닌가요?"
장일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하-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단혈철검 주호는 사실 사자련의 고수입니다. 그 청년이 응룡채주를 통해 호기롭게 비무첩을 전달했어도. 쉽게 비무가 이뤄지지는 않을 겁니다. 사자련 같은 거대 방파의 고수는 쉽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정사마중 사파를 대표하는 사자련!
단혈철검 주호가 사자련의 고수였다고?
순간 천문석은 어쩐지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간질간질한 뇌리.
오랜 시간 잊고 있던 무언가가 기억날듯한 감각!
너무나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쉬러 나왔더니 소독 모래를 가득 실은 트럭이 도착하던 그때 그 느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