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117화 (118/1,336)

#117

장갑 버스에서 처음 내린 순간 보인 것은 어둠이었다.

어둠으로 둘러싸인 공동.

그 한 가운데 장갑 버스는 멈춰 서 있었다.

인솔자는 작은 등불을 들고 장갑 버스에서 내려 일행에게 안대를 나눠줬다.

"안대를 착용하고 목적지까지 걷겠습니다."

안대가 씌워진 후,

서로를 잇는 줄을 잡고 다시 이동했다.

서걱, 서걱-

탁, 타닥-

발아래 느껴지는 흙과 돌.

공기 중에서 느껴지는 습하고 탁한 공기.

안대를 쓴 천문석은 직감했다.

‘천연 동굴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안대를 쓰고 한참 동안 어둠 속에서 동굴을 이동했을 때,

어느 순간 바닥의 질감이 바뀌었다.

서걱거리던 흙이 사라지고,

단단한 돌바닥이 느껴진다.

그리고 안대를 했음에도 느낄수 있는 빛!

이때 인솔자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대를 벗어 주세요."

천문석은 어느새 사방에 빛이 밝혀진 석실에 들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무복으로 갈아입은 인솔자와 그것이 보였다.

눈앞의 벽 한가운데,

영상을 틀어놓은 스크린같이 이질적인 부분이 있었다.

이 이질적인 부분으로 연결된 장치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지만,

텔레비전과 인터넷에서 몇 번이나 본 장치다.

던전 계측 장치!

그렇다면 이 장치와 연결된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스크린의 정체는 하나였다.

각성 스팟,

저기가 무림 던전의 입구다!

---

석실에서 일행은 다시 한번 옷을 갈아입었다.

일행 앞에 놓이는 무복(武服)과 가죽신이 가득 들어있는 상자들.

솜이 들어간 회색의 무복을 입자,

털 옷과 털모자, 장갑이 가득 담긴 상자가 다시 앞에 놓였다.

"적당히 맞는 것 찾아서 입으세요."

여름에 맞지 않는 털 옷이지만,

눈앞에 보이는 던전에 바짝 긴장한 일행은 별다른 말 없이 무복 위에 털 옷을 걸치고 털모자를 썼다.

여기에 더해 천문석에게는 기다란 나무 상자가 주어졌다.

"그 검 이 상자 안에 넣고 이동하셔야 합니다."

일행 모두가 의복을 입자,

인솔자는 일행의 복장을 다시 한번 확인하더니 벗은 옷을 모조리 상자 속에 넣었다.

"그럼 입장하겠습니다. 던전 안에 들어가시면 움직이지 마시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세요. 들어가자마자 바로 이동해야 합니다."

한 명씩 던전 입구를 통과하는 사람들.

곧 석실 안에는 천문석과 인솔자만 남았다.

인솔자는 천문석의 검이 담긴 상자를 보며 다시금 주의를 시켰다.

"던전 안에서는 검을 들고 다닐 때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가능한 그 검을 상자에서 꺼내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천문석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무림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

무림 던전에 입장하는 순간.

타다다닥-

천문석은 전신에서 정전기가 올라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파르르 온몸이 떨리고,

머릿속에 던전의 언어가 주입된다.

순간적으로 눈동자가 멍해지고,

기말고사 기간 3일 동안 밤을 새웠을 때처럼 머리가 지끈거린다.

터질듯한 머리에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짚는 순간.

휘이이잉-

귀가 찢어질 듯한 엄청난 바람과 한기가 느껴졌다!

후두둑-

전신을 때리는 눈!

거센 칼바람에 실려 온 눈이 온몸에 쏟아졌다.

눈 폭풍!

던전 안은 한여름인 바깥과 달리,

눈 폭풍이 몰아치는 한겨울의 밤이었다!

이때 2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외침.

"거기 인솔자신가요!?"

미약한 달빛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는 일행 중 누군가가 천문석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이때 천문석의 등 뒤에서 외침이 들렸다.

"여기로 모이세요!"

마지막으로 던전으로 들어온 인솔자였다

인솔자는 한 손에 작은 보따리를 든 채 등불을 흔들며 계속 외쳤다.

곧 사람들이 인솔자에게 모이고,

인솔자는 등불을 앞세워 이동을 시작했다.

"바짝 붙으세요! 30분 정도 이동해야 합니다!"

휘이이잉-

거센 눈보라 속을 미약한 등불에 의지해서 이동하는 7명의 사람.

천문석은 곧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인적 없는 황량한 겨울 산.

인솔자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이 겨울 산을 몇 번이나 왔던 것처럼 익숙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30분가량 지났을 때,

진행 방향 앞쪽에서 불빛이 보였다.

그리고 바람에 실린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히히힝-

인솔자는 바로 멈춰서 등불로 불빛 신호를 보냈다.

허공에 등불로 그리는 도형.

잠시 후 반대편에서도 등불이 도형을 그렸다.

그리고 들려오는 커다란 웃음소리.

"하하하- 이번 기수 왔냐? 이번엔 인솔자가 누구야?"

인솔자는 말없이 앞으로 나아갔고,

곧 커다란 바위 아래 세워진 마차가 나타났다.

마차 주위에는 십여 명의 무사가 무장한 채 말과 함께 흩어져 있었다.

일행이 움찔하는 순간.

"아니, 이게 누구야?! 이번엔 웬일로···."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남자가 인솔자를 보고 반색해서 다가왔다.

"장일. 우선 이거부터 받아라."

인솔자는 메고 있던 보따리를 건네고,

자신을 뒤따르던 사람의 수를 확인했다.

천문석까지 6명 모두가 있었다.

"이번 기수는 6명이다. 인원 확인됐지?"

인솔자는 장일에게 빠르게 말하고 시선을 돌려 일행을 봤다.

"앞으로는 이곳의 관리자인 장일의 지시를 따르시면 됩니다. 여러분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인솔자는 짧은 말을 끝으로 바로 몸을 돌렸다.

"그럼 수고해라. 일주일 후에 보자. 장일."

인솔자는 장일에게 인사하고 눈보라 속으로 걸어갔다.

"뭐? 또 거기 가는 거냐? 너 자꾸 그러면 위에 보고한다!"

"..."

장일이 외쳤으나,

인솔자는 말없이 계속 걸어갔다.

"...야! 일주일, 아니 6일 안에는 장원으로 돌아와야 한다! 늦으면 안 돼!"

장일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외치자,

대답 없이 손만 크게 한번 흔드는 인솔자.

인솔자는 곧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고,

장일은 혀를 차며 마차 문을 열었다.

"무공에 정신이 팔려서는···. 추운데 어서 마차에 타라. 바로 장원으로 이동할 거다."

“장원이요?”

누군가 의아한 듯이 묻자,

장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장원. 따뜻한 잠자리와 음식이 있는 곳이지. 얼른 타라.”

천문석을 마지막으로 모두가 마차에 타자,

장일이 주위에 있던 호위 무사들에게 지시했다.

"바로 출발한다. 길을 확인해라."

"알겠습니다! 총관님!"

두두두-

십여 명의 호위 무사들이 말을 타고 흩어지자,

장일이 마차 안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눈보라가 심해서 한 시간에서 두 시간쯤 걸릴 거다. 도착 할 때까지 마차 안에서 기다리면 된다."

그리고 닫히는 마차 문.

탁-

두꺼운 마차 문이 닫히자 훈훈한 열기가 확 올라왔다.

천문석은 열기의 정체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좌우로 놓인 좌석 한가운데 발갛게 달아오른 숯이 가득 담긴 화로가 있었다.

툭-

천문석은 가볍게 발로 화로를 건드려봤다.

묵직함이 느껴지는 화로는 바닥에 단단히 고정되고 뚜껑까지 반쯤 덮여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숯이 쏟아질 걱정은 없어 보였다.

천문석은 문득 고개를 들어 일행의 얼굴을 살폈다.

발간 숯불이 좌석에 앉아 있는 일행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다섯 명 모두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과는 너무 다른 던전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얼굴들이었다.

화로의 열기에 얼었던 손이 점차 녹을 때,

말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히이잉-

쿠르릉, 쿵, 쿵-

마차는 점점 속도를 올렸고,

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진동도 점점 거세졌다.

한겨울 눈 폭풍 속을 달리는 마차는 천문석의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어쩐지 전생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에,

천문석은 마차 밖으로 기감을 집중했다.

거센 눈보라 너머 깜빡이듯 느껴지는 날카로운 감각.

십여 명의 호위 무사가 흩어져서 길을 열고 있었다.

천문석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부하들을 이끌고 야생 색마를 잡으러 달려가던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야생 색마.

어쩐지 포켓몬 같은 이름이지만,

나름 심각한 피해를 입힌 녀석이었다.

그때도 이렇게 마차를 타고 눈 폭풍 속을 달려갔었다.

전생과 비슷한 상황에 천문석이 회상에 잠겨 들고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바람 소리가 점차 잦아들면서 바닥에서 전해지던 진동이 변했다.

구르르릉-

포장도로로 들어온 듯 확 줄어든 진동.

천문석은 직감했다.

'도시로 들어왔구나!'

그리고 30분쯤 지나 마차가 완전히 멈추고 문이 열렸을 때.

장일이 환하게 웃으며 일행을 반겼다.

"무림에 잘 왔다."

---

장일은 일행을 이끌고 바로 이동했다.

천문석은 일행과 함께 이동하며 주위를 살폈다.

눈보라는 어느새 그쳤고,

환한 보름달이 뜬 덕분에 주위가 잘 보였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커다란 장원이었다.

눈이 쌓인 정원 너머로 담이 있고,

담 위로 높이 솟은 전각들이 보인다.

그리고 사방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기운.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살피면,

무복을 입고 무기를 든 호위 무사들이 경계를 서는 모습이 보였다.

장원에 고용된 호위 무사들이다.

호위 무사의 수만 봐도 어지간한 규모의 장원이 아니라는 감이 왔다.

천문석은 내심 장일이 부러워졌다.

'전생에 이런 장원 하나 가지는 게 꿈이었는데···.'

그래서 스승님께 천문사를 물려받았을 때,

그 사찰로 대박을 쳐서 커다란 장원을 사겠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자신의 염불 실력.

부적 그리는 솜씨.

그리고 화려한 말빨이면 10년이면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천문사가 사실은 마도 18문의 일문임을 알게 되면서 모든 게 헛된 꿈이 돼버렸다.

천문석이 과거의 기억에 씁쓸하게 웃을 때,

장일은 무사들의 공손한 인사를 받으며 장원 깊은 곳으로 계속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두 번 지났을 때,

일행 앞에 십여 명의 무사가 지키는 2층 전각이 나타났다.

"아무도 들이지 말아라."

장일은 전각을 지키는 무사들에게 명령하고,

직접 문의 자물쇠를 열고 일행을 전각 안으로 들였다.

2층까지 가운데가 뚫린 넓은 전각.

영화 속 호텔처럼 가장자리에 복도가 있고 복도 뒤쪽 벽에는 띄엄띄엄 문들이 있었다.

탁-

문을 완전히 잠근 장일이 몸을 돌려 일행을 봤다.

장일의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에 생겨나는 미소.

"던전이 생각한 것과 너무 달라서 궁금한 것도 많고 피곤도 하지?"

긴장이 풀린 일행이 서로를 보다가 장일을 봤다.

"질문이 있습니다!."

"무공 비급은 어떻게···."

...

다급한 외침들이 튀어나올 때,

장일은 손을 들어 외침을 끊었다.

"궁금증은 나중에 풀기로 하고, 우선 할 일부터 하자. 첫날이 가장 중요하거든."

장일은 전각 가운데 놓인 탁자로 걸어가 인솔자에게 받은 보따리를 풀었다.

후두둑-

넓은 탁자 위에 쏟아지는 숫자가 적힌 봉인된 상자 6개.

6개의 봉인된 상자가 나타나자,

일행 모두는 자기가 받은 번호를 떠올렸다.

1번에서 6번까지 6개의 번호를 받은 사람들.

이와 똑같은 숫자가 적힌 봉인된 상자들.

이 순간 모두는 직감했다.

저 상자가 하나씩 주어지고,

각성몽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무공 비급을 받을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