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
천문석이 류세연의 미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걱정할 때.
불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농땡이 부리지 말아라. 외벽 청소도 해야 한다."
천문석이 불손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노려보자,
류세연은 즉시 했던 말을 수정했다.
"농땡이 부리시면 안 됩니다. 삼촌님."
"세연이 너. 요새···. 개기는 빈도가 늘어난 거 같다?"
"오늘 퀘스트 보상 필요 없습니까? 삼촌님?"
“아닙니다! 조!카!님!”
류세연의 협박에 천문석은 다시 잽싸게 움직였다.
곧 방수 페인트칠하기가 끝나고,
오늘의 하이라이트 건물 외벽 청소가 시작됐다.
류세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안전 상자를 열고 하네스를 꺼냈다.
천문석과 류세연은 하네스를 착용하고, 서로의 장비를 앞뒤로 점검했다.
그리고 안전고리에 밧줄을 걸어 던지고 밧줄에 안전 고리를 걸었다.
"시작할까?"
"내가 먼저 탈게. 잠깐 기다려."
천문석은 류세연을 제지하고, 난간에 올라온 곤돌라로 넘어갔다.
기이잉-
버튼을 눌러 위아래로 곤돌라를 움직여 본 후 천문석은 말했다.
"이건 그냥 내가 혼자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뭐야? 전에도 같이 해놓고."
류세연은 피식 웃더니 곤돌라에 청소용 솔과 양동이, 속건성의 시멘트 반죽이 담긴 통을 싣고 호스 더미를 올렸다.
천문석과 류세연은 곤돌라를 타고 외벽 청소를 시작했다.
외벽 곳곳에 탄흔이 있고,
몬스터 핏자국이 남은 곳도 있었다.
"거기! 핏자국 있어!"
류세연이 스프레이건으로 물을 뿌리며 지적하면.
촤아아아-
쓱싹, 쓱싹-
천문석이 비눗물 묻힌 마대 솔로 핏자국을 박박 문질러 지웠다.
류세연은 물을 뿌리면서도 틈틈이 갈라진 벽과 탄흔이 남은 흔적을 속건성 시멘트로 보수했다.
쓰윽, 쓱-
반죽 된 시멘트를 올린 흙손이 지나갈 때마다 감쪽같이 메꿔지는 흔적들.
천문석은 열심히 솔질하면서 생각했다.
류세연과 곤돌라를 타고 외벽 청소를 하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전히 뭔가 비현실적인 상황이다.
고3 학생이 곤돌라를 타고 외벽 청소를 하면서 흙손으로 벽을 보수하고 있다니!
천문석은 흙손을 능숙하게 다루는 류세연에게 물었다.
"넌 오랜만에 휴일인데 친구도 안 만나냐?"
"뭐래? 삼촌 빨리 솔질이나 해. 오늘 우리 할 거 많아. 오후 2시까지는 끝내고 출발해야 해."
"..."
어쩐지 울적했다.
휴일···.
정말 오랜만에 맞이하는 휴일이었는데···.
강제로 이불에서 끌려 나와 노동을 하고 있다니.
이제 백수니 어차피 계속 쉴 거 아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 키즈카페 알바의 기억이 사라지기 전 휴일과 백수로 맞이하는 휴일은 그 밀도가 다른 법이었다.
백수와 직장인의 휴일이 다른 것은,
고난 끝에 맛보는 열매가 맛있기 때문이었다!
이때 천문석의 등을 때리는 매운 손바닥.
찰싹-
"삼촌! 빨리해!"
파박, 파박, 파바박-
천문석의 솔질 하는 속도가 두 배는 빨라졌고,
류세연이 씨익 웃으며 칭찬했다.
"잘한다! 역시 작업에 특화됐어!"
촤아아악-
파박, 파박, 파바박-
빠르게 진행되는 청소.
류세연이 물을 뿌리고,
천문석이 마대 솔질을 한 후,
사람들이 창문 너머에서 나타났다.
"세연이 아니니? 오늘 외벽 청소도 하는 거야?"
세입자들이 물이 뿌려지는 창문 너머에서 류세연에게 아는 척을 했다.
"네! 하는 김에 바깥쪽도 깨끗하게 청소해야죠. 덧창 좀 내려주세요."
류세연은 씩씩하게 대답하고 창과 덧창에 물을 뿌려 거품을 씻어내고, 남은 물기를 스퀴지로 쓱쓱 긁어냈다.
"정말 깔끔하네! 세연이 네가 하는 게 업자 부르는 것 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아."
깨끗해진 창문에 세입자가 고마워할 때,
솔질하는 천문석도 내심 뿌듯했다.
류세연은 이 동네에서 유명인이었다.
지금 하는 청소는 아무것도 아니다.
류세연은 온갖 일들을 능숙히 해냈다.
전등, 수전을 가는 것 같은 자잘한 일뿐만 아니라.
전동 드릴로 능숙하게 구멍을 뚫어 도어락을 설치하고, 도배와 입주, 퇴거 청소도 혼자서 해낸다.
그야말로 우리 동네 만능 일꾼!
그리고 이 모든 게 자신이 가르친 것들이었다.
만능 일꾼 류세연은 자신의 작품인 것이다!
이렇게 뿌듯한 마음으로 외벽 청소를 해서,
곤돌라는 건물 3층, 헌터 도장에 도착했다.
이 헌터 도장의 관장 할아버지가 몬스터와 싸워 이 건물과 자신의 도장 그리고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켰다.
몇 번 본 관장 할아버지는 욱하는 다혈질이지만, 괜찮은 사람이었다.
쓱삭, 쓱삭-
천문석은 도장 창문을 닦으며 내심 웃었다.
도장 창문에 붙어있는 언제봐도 헛웃음이 나는 이름.
[정통 대한 무당파]
대한민국 서울의 건물 3층에 정통 무당파 도장이 있었다.
게다가 이 도장의 관장 할아버지는 조상 대대로 한국에서 살아온 집안 출신이었다.
이 무당파 도장은 헌터라는 직업이 인기를 얻으며 생겨난 일종의 헌터 학원이었다.
게이트가 열린 지 20년.
각종 헌팅 장비가 개발되면서 몬스터 사냥의 위험도가 낮아지고 헌터의 수익도 떨어졌다.
그러나 헌터 일은 여전히 단기간에 목돈을 당길 수 있는 일이었고.
헌터는 청년 취업이 어려운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여전히 인기 직업이었다.
보통 한 직업에 대한 선호도가 올라가면 학원이 수두룩하게 생겨난다.
고시 열풍이 불 때 고시 학원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웹툰, 프로게이머 열풍이 불 때 웹툰, 프로게이머 학원이 생긴 것처럼 말이다.
당연히 헌터 학원도 엄청나게 생겼다.
원래 헌터는 각성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최초의 게이트가 열리고 20년이 흐르는 사이 많은 것이 변했다.
비각성 헌터의 수가 각성 헌터의 수를 앞지른 건 이미 오래전 일.
비각성 헌터를 대상으로 헌팅 기술을 가르치는 학원들은 성업 중이었다.
이런 성업에는 한가지 확인되지 않은 속설도 한몫했다.
이런 학원에서 배우면 각성 확률과 배운 내용으로 각성몽을 꿀 가능성이 커진다는 속설 말이다.
천문석은 문득 고개를 돌려 멀리 언덕 아래, 학원 건물에 붙은 플랫 카드를 봤다.
[원조 화산파 매화 검법! 6개월 속성 강좌 개설!]
[특전사 교관 출신 강사. 몬스터 사격술 강의. 반값 행사!]
[아르 제국 마나 연공법. 각성 확률 대폭 상승! 당신도 미래의 소드마스터!]
...
눈앞의 정통 대한 무당파뿐만이 아니다.
온갖 과장, 허위 광고를 내건 수많은 학원이 성업 중이었다.
쓱싹, 쓱삭-
천문석은 창문에 솔질하며,
헌터 업계 호황의 상징 중 하나, 정통 대한 무당파 안을 봤다.
도장 안, 묵직한 방검 수련복을 입은 수련생들이 검을 들고 유려한 초식을 펼쳐내고 있었다.
정통, 대한, 무당파.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감이 안 오는 엉망인 이름.
그러나 이 정통 대한 무당파는 저 아래 학원과는 달리 양심적인 진짜 도장이었다.
관장 할아버지부터가 검으로 수많은 몬스터를 베어 넘긴 실력 있는 각성자.
각성몽으로 무당파의 무공을 깨닫고 이름마저 개명한 진짜 도사였다.
도장 안 수련생들은 진짜 무당파에서 쓴 검과 비슷하게 생긴 고풍스러운 검을 들고 진지하게 초식을 수련하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검으로 펼치는 초식에 마음을 실어 움직인다.
검은 유려한 선을 그렸으나,
그 선은 이어지지 못하고 뚝뚝 끊어졌다.
선이 끊길 때마다 각성자 사범들이 시범을 보이며, 수련생의 끊어지는 선과 선, 초식과 초식을 이으려 하나.
수련생의 초식은 이어지지 않는다.
“...”
안타까운 일이었다.
천문석은 수련생들이 펼치는 무당검술을 상대하던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저 검술의 이름은 모르지만,
검에 담긴 극의는 지금도 기억한다.
면면부절(綿綿不絶).
점이 선이 되고, 선이 움직여 초식이 된다.
그리고 초식은 끝없이 이어지니 면면부절!
극의에 달한 무당의 검은.
태풍에도 부러지지 않는 유연한 갈대가 되고,
거대한 바위조차 둥글게 깎아내는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된다.
그러나 내력의 뒷받침 없는 초식의 흐름만으로는 면면부절의 극의에 닿지 못한다.
[1, 2, 3, 4, 5, 6, 7, 8, 9]
끊이지 않고 이어진 듯한 숫자.
그러나 1, 2 사이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가 존재한다.
검술의 내력, 심법은 1과 2 사이.
초식과 초식을 이어주는 무한의 수다.
내력은 몸 안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기경팔맥을 흐른다.
그렇다.
내력은 있으나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으나 너무나 선명하게 느낄수 있는 기경팔맥을 흐른다.
그렇기에 내력은 물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상승 무리의 기반이 되고, 이 내력이 초식에 담길 때 무술은 무공이 된다.
심법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는 수련생들의 수련은 검을 들고 체조를 하는것이나 다름없었다.
육체가 유연해지고, 근력과 집중력은 좋아질 것이다.
그러나 내력이 실리지 않은 검으로는 몬스터의 광기와 야성, 투지를 꺾는 게 쉽지 않다.
차라리 간합과 타이밍을 죽어라 익히는 검도나 펜싱,
폭발적인 힘과 스태미너를 키우는 헬스와 인터벌 훈련이 몬스터와의 싸움에는 더 큰 도움이 될 거다.
아니 사실 이 모든 것보다 더 도움이 되는 건 따로 있었다.
그건······.
이때 상념에 잠긴 천문석을 깨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도 무당검술에 흥미 있어? 여기 관장 할아버지 유명하던데. 내가 할아버지한테 말해볼까?"
류세연은 천문석의 어깨너머로 도장 안을 슬쩍 보더니 유리창에 물을 뿌리며 말했다.
쏴아아아-
"뭘 말하려고? 그리고 삼촌! 어디서 은근슬쩍 기어올라!"
"알았어. 삼촌. 관장님한테 건물주 특전으로 회비 좀 싸게 해달라고 해볼까? 어때? 무당검술 배워 볼래? 어차피 면제라 시간도 많잖아?"
천문석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됐어."
"삼촌도 헌터 관심 있잖아? 우리 반에도 이 도장 다니는 애들 있던데? 여기서 배우다가 각성한 사람도 많고, 이 도장 엄청 유명해. 외국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온다던데."
그러고 보니 수련생 중에 외국인도 드문드문 보였다.
그러나 천문석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헌터는 할 건데, 검술은 안 배워."
파바박-
촤아아악-
천문석이 빠르게 솔질을 끝내자 뿌려지는 물.
"검술은 안 배운다고?"
류세연이 스퀴지로 물기를 긁어내며 물을 때 천문석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얼마 전, 고등학교에서 느낀 게 많다. 근접무기 들고 몬스터와 싸우는 건 완전 별로야. 현대인이 할 짓이 아니야."
"···?"
"그런데 창도 아니고 검? 미쳤냐? 검을 들고 몬스터한테 초식을 펼치다간. 아차! 하는 순간에 훅! 가는 거야."
"초식···?"
"그런 게 있어. 하여튼 내가 볼때는. 멀리서 빵야, 빵야! 총으로 쏘는 게 최고야."
전생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전생 천마 천문석이었다.
"그런가···?"
류세연이 고개를 갸웃했을 때.
탕-
창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창문 안에서 하얀 백발을 틀어 올려 검은 관을 쓴 노인이 나타나 버럭 소리 질렀다.
"이런 사마외도 같은 놈! 재금 중공 같은 악의 종자 같으니라고!"
허억-
기겁한 천문석과 류세연이 재빨리 곤돌라를 내릴 때.
기이이잉-
존재의의를 부정당해 분노한 정통 대한 무당파의 관장 할아버지.
통천 도사가 고함을 질렀다.
"뭐? 헌터 되면 총 쓸 거라고?!"
"야! 이 멍청한 놈아! 총알값이 얼마나 비싼 줄 알아!?"
통천 도사는 하늘을 향해 삿대질하며 잇달아 소리쳤다.
"재금 중공! 이 미친놈들이 마탄 라이센스 비용을 더럽게 비싸게 먹여놔서!"
"총알값! 컥- 소리 나올 정도로 비싸!"
"다섯 마리에 하나꼴로 나오는 고블린 마석이 10만 원인데! 제일 싼 마탄 한발이 만원이야!"
"헌터가 몬스터 잡겠다고 총을 갈기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거지 되는 거야!"
"뭐? 빵야? 뺭야?"
"네 통장이 빵야! 뺭야다!"
...
천문석과 류세연은 분노한 통천 도사를 피해 곤돌라를 조정해 재빨리 아래층으로 이동했다.
이사이 통천 도사는 사범들에게 끌려 창에서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관장님이 어제 안 좋은 일이 좀 있으셔서···."
사범 한 명이 창에서 몸을 내밀고 연신 사과했다.
류세연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니에요. 건물도 지켜주셨는데요. 관장 할아버지께 감사드린다고 전해주세요."
사범은 머리를 꾸벅 숙이고 안으로 사라졌다.
마지막에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지만,
류세연의 계획대로 오후 2시가 되기 전에 건물 청소와 보수 작업은 모두 끝났다.
천문석과 류세연은 뒷정리를 끝내고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이제 휴일 퀘스트 보상을 받으러 갈 때였다.
백화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