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발리마의 심장 (3)
‘뭐? 어딘가에 있을 거야?’
어이가 없었다. 쪽지 마지막에 써 있는 말이 고작 ‘어딘가에 있을 거야.’라니?
쪽지를 확 구겨 바닥에 던져버린 루카스가 제 손에 들린 하트 모양 보석함을 바라봤다.
‘이건 그냥 보석함인가?’
보석함을 살피려 뚜껑을 열자, 요상스러운 오르골이 다시금 울려 퍼졌다.
“에라이.”
루카스는 짜증스레 뚜껑을 닫아 아공간 주머니에 휙 던져 넣어버렸다.
‘단서를 다시 찾아야겠군.’
다시 단검을 살피는 루카스.
단검은 세월의 힘이 무색하리만큼 잘 벼려져 있었으며, 손잡이에 박힌 큼지막한 다이아몬드 역시 빛을 잃지 않고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검신에는 ‘알리타를 위하여.’라고 적혀있었다.
‘알리타의 단검이라… 알리타… 알리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이었다.
“알리… 타? 알리타?! 알리타!”
그제야 생각이 났는지 손가락을 딱 튕긴 루카스가 순식간에 텔레포트해 사라졌다.
“하, 왜 보자마자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성녀의 이름이었다.
루카스가 살았던 때에도 전설처럼 내려오던 그 이름은 태초부터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성녀라기보다는 주신의 천사였지만.’
태초에 주신이 이곳을 창조했을 때 내려보낸 천사 알리타. 한마디로 주신이 관리자로 내려보낸 천사였다.
하지만 이제 막 태어난 인간들이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때문에 인간들을 비롯한 다른 종족들은 모두 그를 신이나 그 비슷한 것으로 떠받들고 추앙했었다.
알리타의 관리 덕에 종족들은 모두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고 한다.
수천 년, 아니 수만 년일지도 모르는 그 시간 동안 알리타는 지상에 남아 그들을 돌봤다.
그런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수많은 아티팩트들이 있었다. 지금 루카스의 손에 들린 알리타의 단검 역시 그것들 중 하나였다.
‘여기군.’
루카스가 찾아온 곳은 알리타의 성역으로 알려졌던 곳이었다.
지금은 그 뜻이 희석되고 희미해져 그저 잊힌 신전쯤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루카스는 알고 있었다.
이곳이 알리타의 성역 중 한 곳이라는 것을.
“옛날에 여기서 좋은 거 많이 찾아갔었지.”
사실 알리타와 관련된 아티팩트를 찾았던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루카스는 이전에 찾았던 방법 그대로 한번 찾아보기로 했다.
‘알리타의 아티팩트들의 시작은 바로 여기부터니.’
낡고 허름해져 지금은 몇몇 기둥과 제단으로 보이는 것들의 잔재들만 남아있는 이곳은 사실 알리타의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알리타가 죽은 것은 아니지만, 알리타가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고 다시 천계로 돌아간 자리가 이곳인 것이다.
때문에 인간들은 그녀가 천계로 돌아갔지만, 언젠가 다시 내려올 것이라고 믿었고, 이와 같은 성역을 만들어 그녀와 관련된 물건들을 모두 이곳에 보관했다.
‘남은 물건은 없겠지만, 단서는 충분히 있을 것이다.’
이전에 알리타의 물건이 힌트로 나왔을 때 역시 그러했다. 성역을 돌다 보면 문제를 풀만한 단서들이 나왔다.
“흠… 다이아라…….”
단검 손잡이에 박혀있는 큼지막한 다이아몬드.
그런데 흔히 볼 수 있는 다른 장식과는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구멍을 내서 다이아를 박아 뒀다라…….”
실로 엄청난 정성이었다.
보석 하나를 박는 것에도 많은 품이 필요하건만, 이것은 검 손잡이 한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그곳에 다이아몬드를 딱 맞게 박아두었다.
게다가 세공도 어렵기로 소문난 다이아몬드를 말이다.
그러다 보니 투명한 다이아몬드 너머로 바깥의 형체가 희미하게 비치는 모양새였다.
“빛과 관련이 있겠어.”
단검을 든 루카스가 성역 곳곳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있는 곳이 있다면 다이아몬드에 햇빛을 반사시켜 그곳을 비춰보기도 하고, 검이 들어갈 만한 곳을 찔러보기도 했으며, 제단에 새겨진 글자 하나하나를 모두 다이아몬드에 가져다 대기도 했다.
“흐음…….”
문제를 풀어내는 것은 즐거운 편에 속했으나, 가끔 이렇게 답답할 때면 온통 때려 부숴버리고 싶을 때가 있었다.
‘옛날에 그런 적이 있었지.’
하지만 그 방법은 무식한 것은 둘째 치고 아무것도 건지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이런 문제들은 함정과는 달리 탐색 마법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니 직접 풀어낼 수밖에.’
루카스가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봤다.
“오?”
단상 뒤편에 있는 반쯤 부서진 기둥. 그곳에 새겨진 작은 문자들,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기둥에 새겨진 것들은 문자가 아닌 그림이었다.
기둥이 부서져 위에 있는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래에 새겨진 그림들은 아직까지 형태가 꽤 뚜렷했다.
‘이건… 책인가?’
그림을 살피던 루카스가 단순한 규칙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날개는 알리타를 뜻하는 것이군. 그리고 이건 누가 줬는지를 표시한 것인가?’
마치 선물 목록처럼 알리타에게 누가 어떤 선물을 했는지를 나타내는 듯 보였다.
“흐음…….”
하지만 수만년 전에 만들어졌을지도 모르는 이 그림들을 정확히 해석하기는 어려웠다.
루카스가 그림들을 더욱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자 눈에 보이지 않았던 또 다른 규칙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는 것과 아닌 것인가?’
예전에 자신이 발견했던 아티팩트들을 표시하는 듯한 작은 화살표가 그림 옆에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살피지 않는다면 화살표인지도 모를 만큼 모호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 유물들의 위치를 알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검인가.”
가장 아래쪽에 새겨진 단검 그림은 얼핏 보아도 자신이 든 검과 같은 것으로 보였다.
“화살표가…… 이건 없군.”
하지만 아쉽게도 단검엔 화살표 그림이 없었다.
힌트를 찾지 못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루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때였다.
“틈?”
기둥뿌리 쪽에 난 아주 작은 틈. 그것은 기둥과 바닥이 맞닿는 다른 부분과는 어딘지 모르게 미묘하게 다른 구석이 있었다.
‘뭐. 손해 보는 것도 없으니.’
루카스가 단검을 빼 들어 그곳에 살짝 찔러넣었다.
-쑤욱.
그러자 단검은 빨려들 듯 쑤욱 하며 틈을 파고들었다.
“호오?”
하지만 기둥과 그 주변엔 어떠한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달칵.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아주 작은 소리.
‘뭔가 열리는 소린데.’
하지만 주변을 둘러봐도 어디 하나 열릴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틈에서 단검을 빼낸 루카스가 다시 한번 그 사이로 단검을 밀어넣었다.
-쑤욱.
아까와 같이 단검은 쑤욱 빨려 들어갔지만, 아무리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여도 이번엔 무언가 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쳇.”
자리에서 일어난 루카스가 다시 주변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어딘가 열릴만한 틈이 있으면 모두 열어보고, 두드렸다.
한참을 그렇게 성역을 뒤지는 때.
-스릉.
제단 상판이 움직였다.
“찾았다.”
무거운 상판은 아래 레일이라도 달린 것인지 부드럽게 밀려났다.
상판 아래로, 제단을 받친 기둥보다는 훨씬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에 놓인 낡은 양피지 한 장.
‘흠…… 오래되어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대충 무슨 말인지는 알겠군.’
양피지엔 그림도 글자도 아닌 애매한 문자들이 어지러이 나열되어 있었지만, 루카스는 대충 뭔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검의 출처와 기원을 나타내는 것 같은데… 바뀐 지명을 찾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닌데…….’
그렇게 돌아서려는데 양피지가 놓였던 곳에 또다시 작은 틈이 보였다.
‘음?’
설마 싶었지만, 루카스는 다시 단검을 빼 들어 그곳에 찔러 넣었다.
-쑤욱.
‘호오.’
-달칵.
이번엔 잠금쇠 풀리는 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들려왔다.
몸을 숙여 제단 아래를 살피자, 그곳에 작은 틈이 벌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손으로 그곳을 살짝 밀어보니,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혹시 모르니.’
루카스는 혹시 모르는 사태에 대비해 손에 보호 마법을 두른 채 공간에 손을 집어넣었다.
‘뭔가 있군.’
손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 루카스는 그것을 잡아 꺼내 들었다.
‘목걸이로군.’
이번엔 가운데 새빨간 루비가 박힌 목걸이었다.
목걸이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천천히 느낀 루카스의 입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괜찮은 물건이군. 고대 마법이 걸려있는 것 같은데…….’
루카스가 목걸이에 마나를 주입했다.
-우웅…….
그러자 목걸이가 진동하기 시작하더니.
-파앗!
루카스가 사라졌다.
***
‘이동 마법이었나.’
순식간에 다른 공간으로 이동했지만, 루카스는 놀라지 않았다.
목걸이가 그를 데려온 곳은 작은 동공이었다.
동공은 벽을 빙 둘러 크고 작은 기둥들이 주욱 나열되어 있었다.
총 열두 개의 기둥엔 루카스가 가진 단검과 목걸이를 비롯해 아티팩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아는 모양들이 많군.’
알리타의 유물들 중 루카스가 모았던 것들 역시 다수 있었다.
루카스는 들고 있던 단검과 목걸이를 각자의 위치에 올려뒀다.
-우웅! 쿠르릉!
그러자 기둥은 아티팩트와 함께 즉각 바닥으로 사라졌다.
“……?”
그다음 무언가 있길 기다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루카스는 허탈한 듯 천장을 올려다봤다.
“알리타…….”
천장엔 알리타로 보이는 여인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젠장.”
아티팩트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정말 이렇게 사라질 줄이야.
‘저것들을 모아 돌아오면 뭔가 또 있겠지.’
루카스가 모르는 아티팩트는 단 두 개.
나머지는 아만을 비롯한 다른 드래곤들에게 퍼져있으니, 그들을 찾아가 모아오면 될 것이다.
‘...저건 지도로군.’
기둥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져 있는 표식. 자세히 들여다보니 보물지도 같은 모양이었다.
‘지체할 필요 없지.’
루카스가 동공에 표식을 새기고는 그대로 텔레포트해 사라졌다.
***
두 개의 지도 중 한 곳은 루카스가 분명 아는 곳이었다.
‘동굴과 거북이 모양 바위. 그건 여기뿐이지.’
전생의 자신의 레어였던 곳 근처였다.
‘분명 바위가 힌트겠지.’
루카스가 바위 옆으로 거침없이 다가갔다.
안 그래도 몇 바퀴나 뺑뺑이를 돈 탓에 루카스는 짜증이 쌓여있었다.
-콰콰콰쾅!
그 분풀이를 바위에게 해버린 루카스는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리기도 싫다는 듯, 커다란 바람을 일으켜 흙먼지를 모두 날려버렸다.
“그렇지.”
산산조각이 나버린 바위 사이로 반짝이는 것 하나.
남아있는 돌조각들을 손으로 쓸어낸 루카스가 조심스레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거였군.”
잘 세공된 붉은 보석엔 옅지만 분명 신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음에도 역시 부숴도 괜찮겠어.”
보석을 잘 닦아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둔 루카스가 씨익 웃었다.동공 벽에 있던 알 수 없는 모양들은 바로 이것을 위한 것이었던 듯했다.
“이거 잘하면 발리마의 심장보다 더 괜찮은 걸 얻을 수도 있겠는데.”
문제를 풀어낸 루카스의 기대가 한껏 올라가기 시작했다.
“가볼까.”
-파앗!
루카스가 다음 장소로 텔레포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