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발리마의 심장 (2)
커다란 바위 덩어리가 자신을 덮쳐오는 그때.
루카스는 잠시 시간이 느려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 이런 게 주마등인가?’
인간들이 죽기 직전 겪는다는 그것을 겪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루카스는 바위 덩어리가 자신을 완전히 덮치기 전에 생각했다.
‘살아야 된다.’
그리고 유일하게 살아 나갈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아니, 차라리 죽을까.’
찰나의 시간이 어색하게 늘어졌다.
그리고 결심한 루카스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외쳤다.
“사랑의 힘으로 뾰롱뾰롱!!!”
-우웅!
그와 동시에 펼쳐진 장막이 루카스 주변을 단단하게 감쌌다.
-콰콰쾅! 콰쾅!
그와 동시에 쏟아지는 돌더미들이 장막에 막혀 튕겨나가기 시작했다.
-콰쾅! 콰콰쾅!
동굴이 무너지며 내는 굉음이 루카스의 귀를 때렸다.
“하아… 그냥 죽을 걸 그랬나…….”
그와 함께 밀려오는 수치심에 루카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쓰고 싶지 않았으며, 절대 외칠 일 없다고 생각했던 그것을 방금 외치고 말았다.
“으윽! 차라리 그냥 죽는 게 나았을 거다!”
결국 수치심을 이기지 못한 루카스가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위를 올려보자, 옅은 빛을 내는 장막 위로 쌓인 돌더미들이 눈에 들어왔다.
‘짜증 나지만 효과는 확실하군. 수준 높은 마나 차단 마법에도 아무런 제약 없이 발동되다니…….’
루카스가 긴 한숨을 주욱 뽑아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 사람은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는 루카스.
‘동굴이 무너졌으니 차단 마법도 해제되었으려나.’
그가 텔레포트 마법을 시전했다.
-파앗!
다행스럽게도 그의 생각이 맞았는지 텔레포트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
다시 무너진 동굴 위에 선 그가 주변을 둘러봤다.
단서로 보이는 단검은 얻었지만, 또 다른 단서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자기야~]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목소리.
“으악! 씨X!”
게다가 고개를 돌린 타이밍에 마주쳐 버린 눈.
그에 루카스는 뒤로 크게 물러나며 욕지거릴 내뱉었다.
[어머, 우리 자기 또 놀랐나 봐~ 홍! 홍! 홍!]
언제 보아도 기함을 토하게 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씨X! 너 내가 나타나지 말랬지.”
어찌나 놀랐는지 루카스는 숨까지 헐떡이고 있었다.
“이런 젠장 할! 내가 그 긴 용생에도 너처럼 치가 떨리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어머, 자기. 나 상처받을 뻔했잖아! 하지만 괜찮아~ 자기가 나를 부르는 사랑의 주문을 외쳤으니까.]
제 윤기 나는 금발 머리를 베베 꼬는 아모레를 보자, 루카스는 토할 것 같은 기분과 함께 수치사할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다…….’
루카스가 뒤늦은 후회에 눈물을 머금는 동안에도 아모레는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 근데 진짜~ 위험했나 봐. 그치?]
“가라.”
아모레의 질문에도 루카스는 더는 대꾸할 기력도 없는지 손을 휙 내저으며 걸어갔다.
[근데 자기야. 뭐 찾으러 온 거야?]
그럼에도 아모레는 개의치 않고 루카스를 졸졸 따라왔다.
“가라고 했다.”
[도와줄까? 우리 자기 힘들어 보이는데. 어머, 얼굴 좀 봐. 수척해졌어!]
호들갑을 떨며 루카스에게 다가오는 아모레.
“…….”
루카스는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하….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자기야. 왜 말이 없어? 아모레가 도와줄까?]
“……됐다.”
[자기는 가끔 잊는 것 같더라? 나 신이야.]
아모레가 자신의 우람한 근육을 내보이며 활짝 웃어 보였다.
“도대체 신이랑 근육이랑 무슨 상관인가?”
[어머, 자기도? 체력이 곧 신력이다. 몰라?]
“…….”
[봐봐. 여기 이두 딱! 어? 활배 딱! 어?]
이리저리 몸을 틀며 포즈를 취해 보이는 아모레.
[어때? 내 말이 맞는 것 같지? 자, 이제 말해봐. 자기가 찾는 게 뭔지.]
아모레가 찡긋 윙크해 보이자, 루카스는 그로기상태에 빠졌다.
“그래.”
[그래! 그래서 찾는 게 뭔데?]
“발리마의 심장.”
결국 자포자기한 루카스가 말해주자, 아모레의 표정이 밝아졌다.
[호오~ 그건 갑자기 왜? 보아하니 계약도 했는데…… 아, 뭔가 들었구나?]
“어딨는지나 말해라.”
[이렇게 되니까 또 맨입으로 말하긴 싫네~? 우리 자기가 누구한테 무슨 말을 들었을까나~?]
결국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루카스가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파앗!
‘그 자식을 견디는 것 보다는 내가 찾는 게 낫다.’
몸서리를 쳐 보인 루카스가 품속에서 알리타의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게 단서였구나?]
뒤에서 다시 들려온 소름 끼치는 목소리에 루카스는 단검을 재빨리 휘두르며 소리쳤다.
“죽어버려!”
하지만 단검은 아모레에게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하고 스르륵 빠져나갔다.
[에잉! 자기 장난도 참! 아, 그래서? 누가 와서 무슨 말을 한 건데 그래?]
“…….”
[말을 해봐용~]
루카스의 귓가에 입을 바짝 붙인 아모레가 속삭였다.
“……떨어져라.”
[타라스? 타라스구나? 걔가 와서 뭐래?]
끈질기게 달라붙는 아모레를 보던 루카스가 생각했다.
‘그래, 이 괴상한 것도 신은 신이지. 그렇다면 이자가 해결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뭔데에~]
‘한번 말해봐?’
[자기야아~]
루카스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자, 답답해진 아모레가 제 까칠한 턱을 루카스의 볼에 비비기 시작했다.
[으흥~ 우리 자기는 어쩜 이렇게 피부도 보드라울까?]
“제발 그만!!!”
[어맛! 깜짝이야.]
결국 루카스는 입을 열기로 결정했다.
“그래. 타라스가 찾아왔다. 내 생각이 맞다면 타라스는 주신의 권능에 도전하려 하고 있다. 가서 막든지 해라.”
루카스는 한 방에 엄청난 사실을 후루룩 뱉어냈지만, 그걸 들은 아모레는 되려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흐음~ 그게 끝?]
“마족들이랑 함께 이곳을 차지하려 하고 있다.”
[뭐야. 별거 없네? 난 또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지? 주신의 권능에 도전하려 하는 것이 별게 아닌 일인가?”
이 엄청난 사실에도 별게 아니라니?
그에 놀란 루카스가 다시 한번 사실을 상기시켰다.
[아, 자긴 모르겠구나?]
“……?”
[지금 주신의 자리는 공석이야. 뭐 엄밀히 말하면 주신께서 파업을 하셨달까?]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린가.”
아모레의 말에 도리어 루카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나도 모르지. 일하기 싫다고 떠나셨는데 어디로 가셨는지는 아무도 몰라. 그러니까 타라스가 날뛰는 거지.]
주신이 파업을 했다니? 이건 정말이지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주신이라는 자리는 본인이 내려놓고 싶다고 해서 내려놓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물론 온 세상을 창조한 주신이니 본인이 쉬고 싶으면 쉴 수도 있겠지만, 자리를 아예 비워버리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아모레나 타라스 같은 상급 신이 아닌 하급 신들 역시 자리를 비울 수가 없는데, 주신이 자리를 비웠다니?
[하긴~ 자기가 그 사실을 알면 안 되지. 하여튼 그래서 지금 신계가 아주 시끄럽거든.]
“……주신이 자리를 비운 지 얼마나 된 거지?”
[음… 어디 보자…….]
루카스의 질문에 아모레는 셈을 하는 듯 한참을 생각했다.
[한 백 년? 그쯤 됐겠는데?]
아모레가 셈을 할 때부터 불안하긴 했다만, 일이십 년도 아닌 자그마치 백 년이라니?
“허. 백 년?”
어이가 없었다.
[그렇지. 그러니까 자기가 신계로 바로 못 왔던 거야. 주신의 부재일 때 죽은 드래곤은 자기밖에 없으니까.]
그제야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천사들도 드래곤의 환생을 겪어본 애들이 아니니까~ 망각의 물 농도 조절에 실패한 거지! 그래서 자기 기억이 고대~로 있는 거고.]
“…….”
아모레의 말을 들으니 그제야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내가 아주 가여운 피해자가 되었군.”
그동안 품었던 의구심이 너무 쉽게 해결되고 나니, 오히려 머리가 멍해졌다.
[홍! 홍! 홍! 그렇네~]
“그렇다면 하나 묻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모든 궁금증을 해결해야 했다.
[뭔데~?]
아모레가 몸을 앞으로 세우며 물어왔다.
“어차피 주신의 자리가 공석이고 내가 신계로 올라가지 못한다면 지금 여기서 죽는다 해도 똑같은 환생을 반복해야 된다는 소리인가?”
[그렇지!]
상황이 너무나도 거지 같았다.
아주 어린 시절에 이빨이 다 자라나면 혀를 콱 깨물어 죽으려고 했었는데, 그 시도가 성공했다 하더라도 또 같은 삶이 반복되어야 했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주신께서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돌고~ 또 도는 삶을 살겠지? 그럴 것 같으면 내가 말해줄게! 차라리 드래곤으로 다시 살아! 이번엔 망각의 물 농도 조절도 내가 가서 할게!]
허탈했다. 이번 생을 온 힘을 다해 끝마친다 하더라도 또 같은 환생을 반복해야 된다니?
“하나만 더 묻지.”
[응응. 뭔데?]
“그렇다면 내가 중요한 열쇠라는 이야기는 도대체 뭐지? 어차피 주신의 자리는 공석이고 나는 환생을 지겹도록 반복해야 되는데?”
아모레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말해주고 가라.”
아모레가 대답을 회피하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루카스가 얼른 그를 붙잡았다.
[급한 일이 생각났네. 어머, 시간 좀 봐.]
“시계는 없다. 그러니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대답하고 가.”
[그건 진짜 말 못 해줘. 자기야. 내 입장도 생각해 줘야지?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줘야 해.]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인 아모레가 루카스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나는 자기 편이라는 거. 나는 자기가 행복하길 바란다는 거!]
“그게 무슨 개같은…….”
그와 동시에 아모레의 신형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자기… 그럼 우리 또 만나용!]
“대답하고 가라고!”
다급하게 손을 뻗어봤지만, 아모레는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젠장!”
그동안 궁금했던 점들은 대부분 해결됐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이 해결되지 않았다.
도대체 자신이 무엇이길래 아모레와 타라스가 발을 동동거리며 자신을 이렇게 쫓아다니는 것인지.
또한 주신의 자리가 공석이라면 이 세상은 앞으로 괜찮은 것인지 말이다.
“아. 이런!”
게다가 하나 더 있었다.
“발리마의 심장이 어딨는지 알려주고 간다더니!”
자신이 찾는 아티팩트의 위치를 알려주겠다며 알랑거리던 아모레는 정작 그것도 알려주지 않고 가버렸다.
“아모레!!!”
화가 난 루카스가 하늘을 향해 크게 외쳤다.
그때 하늘 위에서 무언가 반짝하는가 싶더니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다.
‘저게 또 뭐야?’
루카스의 시선이 내려오는 것을 빠르게 좇았다.
그것은 지상에 가까워질수록 그 속도를 늦춰 천천히 루카스의 앞으로 다가왔다.
-투욱.
“이게 또 뭔…….”
루카스의 발 앞에 정확히 떨어진 물건은 손바닥만 한 핑크색 하트 모양 보석함이었다.
“하…….”
누가 보냈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보석함을 천천히 열자, 요상스러운 오르골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후우…….”
보석함 안에는 작은 쪽지가 들어있었다.
[자기야. 화내지 마. 화는 피부에 안 좋대. 우리 자기 피부 상하면 어떡해? 아, 그리고 자기가 찾는 발리마의 심장은…….]
그다음을 읽던 루카스의 표정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