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하셀.
하셀의 레어 앞에 선 루카스와 아만은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사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아만은 몇 차례나 같은 질문을 했었다.
“후우! 그럼 들어갑니다.”
아만이 손을 뻗자, 레어 앞을 가로막은 장막이 걷혔다.
“아버지!”
레어에 들어선 아만이 큰 소리로 하셀을 부르자, 먼 곳에서부터 하셀이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자식은 왜 또 밖에서부터 들어오고 난리야?”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하셀은 그제야 아만의 뒤에 선 루카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렇네. 인간 꼬마?”
“크흠. 네. 뭐.”
“인간 꼬마는 왜? 내 간식이라도 하라고?”
루카스의 존재를 알아차린 하셀이 이죽거리자, 아만은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듯 루카스를 바라봤다.
“하셀.”
루카스가 하셀의 이름을 부르자, 하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 하셀?”
“오랜만이구나.”
“허어~? 오랜만?”
하셀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허리춤에 팔을 얹고서 입을 떡 벌렸다.
“오랜만이란다. 어이가 없다. 야, 인간. 너 내가 누군지는 알고 온 거지? 야, 아들. 얘 내가 누군지 알고 온 거 맞지?”
어찌나 어이가 없는지 하셀은 아만의 팔을 흔들며 대답을 재촉했다.
한낱 인간이,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놈이 제 이름을 부르며 오랜만이라고 하는데 어이가 없을 수밖에.
“흠흠. 예. 누군지 알고 온 겁니다.”
“그럼 얘 죽여도 되냐? 나 살다살다 이렇게 어이가 없어 본 적은 또 처음이네.”
아만의 대답에 하셀은 루카스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죽이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뭐, 생각했던 것보다 얼마 돌지 않고 만나긴 했다만…….”
그런 하셀을 보며 루카스가 작게 미소 지었다.
“하! 어이가 없다. 정말 어이가 없어. 야 인간 꼬마. 너 책도 안 봤냐? 나 드래곤이야. 응? 나 드래곤. 드래곤은 무서운 거라고 엄마가 안 가르쳐 줬어?”
이제 하셀은 당장에라도 뒷목을 잡고 쓰러질 지경이었다.
“하셀. 나다.”
“나다? 나다가 누군데 이 자식아.”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셀이 꽤나 잘 참고 있다는 것.
아마도 제 아들이 직접 자신의 레어로 루카스를 데리고 왔기 때문일 것이다.
“라노스다. 하셀.”
“라~ 노~ 스으?!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어디 로드 이름까지!!!”
하셀이 버럭 소리치자, 레어가 쩌렁쩌렁 울렸다.
“하하. 그래, 아직 로드라 불러주니 고맙군.”
그럼에도 루카스가 여유롭게 웃자, 하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아마록. 얘 뭐라는 거냐?”
“진짭니다.”
하셀의 질문에 아만이 대답했다.
“아니, 얘가?”
하셀은 그럼에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루카스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얘가? 라노스 님이라고?”
그러고는 루카스의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며 샅샅이 뜯어보기 시작했다.
-딱!
하셀이 손을 한번 튕기자, 루카스에게 걸려있던 폴리모프 마법이 해제됐다.
“얘 그 시타타에 있는 그 집 아들 아니야?”
“맞다. 그보다 언제까지 그럴 거지? 대충 하고 앉지.”
결국 참다못한 루카스가 하셀을 쏘아보며 말했다.
“허……?”
“벌써 다섯 바퀴 째다. 하셀. 어지럽군.”
“허……!”
“볼만한 표정이군. 그 표정은 마치 아만이 네 아티팩트를 들고 한바탕 난리를 친 다음, 내게 모든 것을 일러바친 것을 알았을 때. 그때 딱 그런 표정이었지.”
“허!!! 진짭니까?!”
하셀이 제자리에 우뚝 서서 소리쳤다.
“그래, 하셀. 삶이 돌고 돌아 볼 줄 알았건만.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보고 말았군. 벌써부터 지겨워.”
그에 루카스가 환하게 웃자, 하셀의 눈이 울망울망해지기 시작했다.
“로드?!”
“그래.”
하셀이 달려와 루카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빈자리가 얼마나 컸는지 아십니까! 왜 제게 이 자리를 주고 가신 겁니까.”
“윽…! 숨막힌다.”
말과는 달리 루카스는 하셀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꼭 끌어안은 하셀을 부드럽게 토닥일 뿐.
“힝! 저도 껴주십쇼. 저도 말도 못 하고 얼마나 답답했는지 아십니까!”
하지만 감동적인 재회는 아만의 콧소리와 함께 깨지고 말았다.
“징그러워 자식아!”
“다들 떨어져라.”
***
티테이블에 앉은 세사람은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하하, 그 자식이 그랬다고?”
“예! 진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하하하. 내 레어에 제 지분이 있다니. 누가 골드 드래곤 아니랄까 봐. 욕심이 가득 찼구나.”
루카스의 말에 하셀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제 말이요. 게다가 이번에 그 자식 딸인 앨리가 큰 사고를 또 쳤지 않았습니까? 진짜 제가 마음 같아서는 콱!”
하셀이 제 주먹을 불끈 쥐며 불만을 토로하자, 루카스의 입가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래, 나는 그리웠었구나. 이게 그리웠어.’
루카스는 같은 하늘 아래 살며 만나지 못하는 옛 동무가 그리웠다.
하지만 짧은 인생이기에 자신의 옛 동료들에게 같은 슬픔을 또 안겨주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기에 참았던 것이었는데…….
‘좋구나.’
다짐했던 것과는 달리 사실 너무 좋았다.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어제 만난 것처럼 친근한 이 관계가 너무나도 좋았다.
자신을 숨길 필요도, 구태여 자신이 더 강한 척할 필요도 없는 이것이 너무 좋았다.
“아, 그런데 진짜 웃기지 않습니까? 이번엔 좀 노력한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가소롭습니다. 부활교라뇨? 게다가 그 구슬 이야기 들으셨죠?”
“……그래.”
현실을 잠시 잊게 만들었던 행복감이 와장창 깨졌다.
“로드께서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하셀이 제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마신이 돕고 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마신’이라는 말에 하셀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타라스를 만났다. 방금 막 만나고 온 길이지.”
“…….”
“제 입으로 말하더군. 마족들이 지상에 올라올 준비를 하고 있다고. 그 말이 뭐겠나?”
“자신이 돕겠다는 말이군요.”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내 생각이 틀리길 바라지만… 타라스는 주신의 권능에 도전할 생각인 것 같더군.”
하셀과 아만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내게 거래를 제안하더군.”
“거래라뇨?”
하셀의 물음에 루카스는 잠시 말을 삼켜냈다.
‘모든 걸 말해줘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루카스가 생각을 끝내고 입을 열었다.
“자신의 권능으로 드래곤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부여하겠다고 하더군.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이주시켜 줄 수 있다고도 했고.”
루카스는 거래 내용의 일부를 먼저 숨겼다.
“원하는 건 뭐랍니까?”
하지만 하셀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건 말해줄 수 없다.”
“…….”
루카스의 대답에 하셀이 몸을 뒤로 기댔다.
“하지만 타라스의 말이 사실이 되려면 그가 주신의 권능에 도전한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그렇네요. 로드의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셀이 다시 몸을 앞으로 세웠다.
“로드께서는 모든 것을 말씀해 주시지도 않는데, 저희가 어떻게 도울 수 있겠습니까?”
“…….”
“로드께서 하신 말씀들을 짚어봤을 때. 소소한 인생을 끝내고 이곳까지 찾아오신 이유는 하나 아닙니까? 저희의 도움이 필요해서요.”
하셀의 말에 루카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틀렸다. 하셀. 나는 도움을 구하고자 온 것이 아니다. 너희를 돕고자 온 것이지. 그리고 내 잘못을 바로잡으러 온 것이고.”
“…….”
“타라스의 말 중에 틀린 것은 없었다. 그래. 나는 치사한 방법을 써서 그들을 몰아냈다. 우리의 손을 더럽히는 것이 아닌 몬스터들의 통제를 풀고 다른 종족들을 괴롭혔지. 그리고 그 책임을 마족들에게 돌렸다.”
“그게 뭐가 치사합니까? 마족 놈들이 한 짓은 더 하지 않았습니까? 감히 우리 알을 훔쳐 간 놈들입니다!”
격앙된 하셀의 목소리에 루카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도 맞다. 하지만 타라스의 말대로 그들은 매일같이 우리를 찾아와 죄를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어. 그 세월이 50년이다.”
“…….”
“그동안 그들은 모든 종족에게 핍박받고 돌을 맞았으며, 수많은 자들이 없는 죄를 뒤집어쓴 채 죽어갔다. 그럼에도 그들은 매일 같은 마음으로 우리를 찾아와 빌고 또 빌었어. 그들은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다. 그건 확실해.”
루카스의 말이 사실이었다. 하셀과 아만 역시 그것을 알기에 대답 대신 작게 침음했다.
마왕과 그의 부하들은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들을 찾아와 용서를 빌었다. 그것도 진심으로.
자신의 동족들이 매일같이 죽어 나갔다.
그럼에도 그들은 단 한 번도 드래곤을 향해 원망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가혹하다 욕하지 않았으며, 제 동족들을 그만 살려달라 빌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항상 같은 마음으로 용서를 빌었다.
“그들은…… 마계로 쫓겨나면서도 우리에게 손가락질 한번 하지 않았어. 절반이 넘게 줄어든 제 동족들을 데리고 이 땅을 버리고 가면서도 말이야.”
“인과응보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일로 받은 벌이란 말입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하셀. 하지만 나는 가끔 생각하곤 했어. 그들이 마계로 내쫓기는 그 순간에라도 내가 용서했더라면? 내가 그들에게 마지막까지 가혹하게 굴지 않았더라면?”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듯 하셀의 입꼬리가 분노로 씰룩였다.
“그랬더라면 지금 너희들이 겪고 있는 이 골치 아픈 문제들이 없었을까…하고 말이다. 그러니 하셀. 이것은 모두 내 업보다.”
“말도 안 됩니다!”
결국 하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들은 감히… 감히 우리 알들을 훔쳐 갔습니다. 그중에! 바로 우리 아마록도 있었단 말입니다!!! 그것도 이제 막 태어난 우리 아마록이요! 앨리도 마찬가지구요! 우린 동족을 그것도 자식을 잃을 뻔했습니다!”
하셀의 분노에 루카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때 애들이 잘못됐더라면 지금 우리 곁에 아마록도 앨리도 없었을 겁니다.”
그런 루카스의 모습에 하셀의 분노가 잠시 내려갔다.
“그래. 하셀. 네 말이 모두 맞다. 그러니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이건 내 업이라고 말이다.”
“…그래서요? 그래서 지금 로드께서 뭘 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 약한 인간의 몸으로 뭘 말입니까. 7서클도 채 되지 않은 그 몸으로 말입니다.”
“…….”
하셀의 말이 모두 맞았다. 그렇기에 루카스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로드의 업이라고 말씀하시는 게 무슨 도움이 됩니까? 차라리 마왕이 어디 있는지, 그게 아니라면 타라스가 왜 인간인 로드를 굳이 찾아가서 거래를 제안했는지 그런 것들을 말씀해 주십시오.”
“하셀.”
“그게 아니라면 저도 됐습니다. 로드께서 하셨던 말씀들을 기억하세요. 강자에겐 잘못이 있어도 없다는 그 말씀을요. 그러니 우리에겐, 더더욱 잘못이 없습니다.”
차갑게 말을 뱉은 하셀이 몸을 돌려 걸어갔다.
“후우…….”
그 모습에 루카스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괜찮으십니까?”
“하하. 그래. 마치 자식에게 옳은 소리를 들은 부모의 마음이 이런 것인가 싶구나.”
루카스가 쓰게 웃자, 아만이 고개를 저으며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아닙니다. 아버지 말이 다 틀렸습니다.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애교 많은 막둥이가 최고라는 부모의 말도 이해가 가는구나.”
루카스가 웃자, 아만 역시 활짝 웃었다.
‘하… 하셀 저 자식 화 풀리려면 한참 걸릴 텐데…. 다른 방법을 또 찾아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