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타라스의 계획.
공명음과 함께 느껴졌던 불안함은 바로 이것이었다.
눈앞에 나타난 뻔뻔한 저 행태!
시커먼 머리를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채, 양옆에 꼭 자신 같은 시꺼먼 천사 둘을 대동한 저 짜증 나는 행태를 보라!
‘게다가 뭐? 안녀엉? 오랜만이지?’
루카스는 눈앞에 나타난 시꺼먼 존재에 속이 뒤틀렸다.
[안 반가운가 봐?]
“안 반가운가 봐? 어이가 없군. 너는 그럼 네놈이 반가울 거라 생각하고 나타난 거라는 건가? 신이란 놈 지능이 오크 수준이니 종족들도 그 모양이겠지.”
[하하. 말이 심하네. 나 조금 상처받았어.]
마신 타라스는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루카스의 말에도 허허롭게 웃어 보였다.
“신이나 되는 작자가 바쁘지도 않은가 보군.”
[진짜 서운하네. 그래도 3년이나 넘게 지났는데 말이야.]
“어이가 없군. 무슨 용건인지는 몰라도 듣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으니 당장 꺼져줬으면 좋겠군.”
루카스의 박대에도 타라스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한번 들어는 봐. 아까부터 보아하니 마족들한테 궁금한 게 많은 것 같던데. 알고 있지? 나 마신인 거. 그 궁금한 거 내가 해결해 줄 수도 있어.]
타라스의 말에 루카스는 순간 고민했다.
‘물어볼까?’
하지만 묻는 말에 타라스가 사실대로 말해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저런 시커먼 놈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고.’
생각을 마친 루카스가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다.”
[그래? 마왕에 관한 이야긴데.]
“필요 없다.”
[흐음~ 마왕이 생각보다 네 가까이에 있는데. 알아?]
하지만 타라스는 끈질기게 쫓아오며 말을 이어갔다.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왜? 궁금한 거 내가 얘기해 줄게. 그러니까 우리 불쌍한 애들 좀 그만 괴롭혀.]
그 말에 루카스가 걸음을 멈추고 타라스를 바라봤다.
“불쌍한 애들을 그만 괴롭혀라? 그게 무슨 되도 않는 소리지?”
[맞잖아? 사실 너 아니었으면 우리 애들이 마계로 쫓겨날 일도 없었어. 네가 치사한 짓 해서 우리 애들 전부 내가 피신시킨 거잖아. 내 말 틀려?]
루카스의 머리에서 투둑 하며 인내심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무슨 거지 같은 소리지? 내가 치사한 짓을 했다니. 그리고 불쌍? 마족 놈들 때문에 우리 종족 역시 전에 없던 수치를 겪었다. 너도 알 텐데? 그런데도 그런 개 같은 소릴 하는 건가?”
분노에 찬 루카스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결과만 놓고 보자고. 그래서? 드래곤들이 입은 피해가 뭐지? 그래. 우리 애들이 인간한테 속아서 해츨링 알 몇 개 잘못될 뻔한 거? 알아.]
“……지금 아는데 그런 소릴 하는가?”
[그래서 잘못됐냐고 묻잖아. 그리고 그 일 이후로 분명 우리 애들은 수십 수백 번 잘못을 빌었어. 그런데 용서해 주지 않았잖아?]
루카스는 지금 당장이라도 타라스의 얼굴을 뭉개버리고 싶었다.
천여 년 전, 마족들은 드래곤들의 신뢰를 이용해 해츨링의 알을 훔쳐 갔었다.
드래곤들은 알이 태어나면 한곳에 모아두고 주기적으로 마력을 주입해 그들을 키워냈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은 드래곤뿐이었지만, 그들은 몇 천 년 동안 신임을 얻은 마족들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줬었다.
주기적으로 주입하는 마력의 양이 모자랄 때를 대비해, 즉 누군가 동면에 들거나 유희를 떠나게 되면 혹여 마력이 모자랄까 싶어, 마왕에게 이야기해 둔 것이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으며, 일어날 가능성 역시 아주 희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그런 사실을 알린 것은 그저 신뢰의 표시였다.
우리의 후손을 맡길 만큼 너희를 신뢰한다는 그런 표시 말이다.
그런데 마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츨링 알이 모여있는 둥지에 들어와 알들을 훔쳐 갔었다.
“개 같은 소릴 잘도 해대는구나.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있다. 타라스 네 놈을 보아하니 그 말이 틀린 게 없다는 것을 알겠구나.”
루카스의 차가운 눈빛이 타라스를 훑어내렸다.
[영악한 인간들이 속인 일이야. 너도 그걸 알고 후회했지 않았나?]
“아니. 속아 넘어간 것도 속여 넘긴 것도 모두 같은 죄다. 마족들은 우리의 신뢰를 저버렸고, 영악한 인간 놈들의 꼬임에 넘어갔어. 그건 누구도 합리화할 수 없다. 그리고 너도 잘 알 텐데? 인간 놈들이 뭐라고 꾀어냈는지 말이야.”
[…….]
사실 루카스가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드래곤에 버금가는 마력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지. 아, 물론 알은 무사할 거라는 말도 했다던가. 그래서? 그 때문에 우리 종족의 알을 훔쳐간 것이 합리화할 수 있는 이유라는 건가? 해치지 않을 거라 했다는 말을 믿어서?”
그렇게 마족들은 드래곤에 버금가는 힘을 얻기 위해 드래곤의 신뢰를 저버렸다.
그것도 흑마법을 연구한다는 같잖은 인간 놈들의 되도 않는 소리에 넘어가서는, 대담하게 그들의 알을 훔쳐갔다.
[그래. 그리고 이미 천 년이나 지난 일이잖아? 네 소원대로 우리 애들은 이미 마계로 사라졌고. 그런데도 지금 그러는 이유가 뭐야?]
타라스의 말에 루카스가 이를 부득 갈았다.
“닥쳐라. 그렇다면 내가 묻지. 천 년이나 지난 일인데 너는 이제 와서 그러는 이유가 뭐지?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길래 지금 그러냐는 거다.”
[그게 무슨…….]
“말 그대로다. 내가 마계에 내려간 것도 아니고 그냥 마족 혼혈 하나를 만난 것뿐인데, 여기까지 직접 찾아온 이유가 뭐냐는 말이다. 응? 도대체 그 시커먼 속에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길래, 이리도 동동거리며 날 찾아온 거냐는 말이다.”
루카스가 마신의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서자, 천사 하나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왜 말을 못 하지? 3년 전 날 찾아와 네 편에 서달라 중얼거릴 땐 언제고 지금은 왜 아무 말도 못 하느냐.”
루카스가 다시 한 발짝 다가서자, 루카스의 앞을 막아섰던 천사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괜찮으니 비키거라.]
그의 말에 천사가 비켜섰다.
“그래, 어디 한번 말해봐라.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종종거리며 날 찾아왔는지 말이야.”
루카스의 한쪽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래. 뭐. 원한다니 말해줄게.]
그에 타라스 역시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응수했다.
[예상하고 있겠지만 우리 애들은 지상으로 올라올 준비를 하고 있어. 뭐 마왕은 이미 반쯤 올라왔다고 봐도 되고.]
그의 말대로 예상했던 부분인지라 루카스는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애들이 이곳 지상을 차지할 거야. 물론 드래곤들을 몰아내고 말이지.]
“하하하. 어이가 없군. 같잖은 마족 놈들이 드래곤을 몰아낸다? 오크만도 못한 지능을 가진 종족들이 가지기에 적절한 생각이구나.”
그런 타라스의 말에 루카스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다.
“마족 놈들이 모두 지상으로 올라온다 해도 드래곤 다섯, 아니, 셋한테도 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지. 안 그래도 우리 애들은 그걸 노리는 중이야. 오만한 드래곤이 방심한 틈을 타서 승리를 가져올 거거든.]
하지만 타라스 역시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생글생글 웃으며 오만한 드래곤 운운하는 그의 모습 어디에서도 허풍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루카스는 지금 불안했다.
‘지금 저 자식이 드래곤들 모두를 당해낼 수 있다고 말하는 건가?’
[그렇게 계속 생각해. 우리 역시 바라는 바니까.]
게다가 타라스는 마족과 자신을 ‘우리’라고 칭하고 있었다.
그 말인즉 타라스 역시 그들의 계획에 동참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되면 정말 승산이 없을 수도 있다.’
루카스의 눈동자가 잠시 불안에 흔들렸다.
[그러니 네가 우리 편에 서면 돼. 그렇게만 해준다면 나의 권한으로 드래곤에게 새로운 세계를 부여하도록 하지.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이주시켜 줄 수도 있어.]
“그게 무슨 소리지? 너의 권한이라니. 주신도 아닌 네깟 게 무슨 권한이 있어서…….”
그제야 루카스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루카스가 말을 마치지 못하고 타라스를 바라봤다.
[네 생각이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그러자 씩 웃어 보인 타라스의 몸이 천천히 떠올랐다.
[그보다 아모레가 좋은 걸 줬네. 진짜 귀한 건데 그거. 그러니 네 몸이 지금 버티잖아?]
“도대체 무슨 꿍꿍이냐. 타라스. 주신의 권능에 도전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하하. 설마. 아, 그리고 원하는 답은 어느 정도 준 것 같은데. 애들 그만 괴롭힐 거지? 부탁.]
타라스가 제 손을 앞으로 한번 모아 보이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젠장 할!”
조금 전 타라스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정말 큰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타라스는 분명 제 권한으로 새로운 세계를 부여한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그건 주신의 권능이었다.
‘주신에게 도전하겠다는 건가? 마신 따위가?’
게다가 마족들이 마계를 탈출하는 일을 타라스가 적극 돕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마왕 놈이 설치는 거겠지.’
이것은 하셀을 비롯한 다른 드래곤들도 생각했던 것이었지만, 마신의 입에서 그 사실이 확인하고 나니 상황이 달라졌다.
‘마신이 돕는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타라스의 말대로 마족들은 지상에 올라와 드래곤들과 맞설 것이다.
그것도 마신의 가호를 등에 업고서 말이다.
게다가 마족들이 여태 보였던 행보를 보았을 때, 그들은 마물들과 몬스터들 역시 조종할 것이다.
혹여 드래곤들이 그것을 미리 막지 못한다면?
‘종말이다.’
자신들에 땅엔 종말이 찾아오고 말 것이다.
지상에 있는 모든 종족들이 끔찍하게 학살당할 것이며, 마신의 가호를 받은 마족들은 날개를 단 듯 날뛸 것이다.
온 세상은 화염에 휩싸일 것이며, 그것을 막지 못한다면 이 땅 위엔 마족을 제외한 다른 종족은 찾아보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종족들 역시 노예가 되거나 처참하게 생을 마감할 테지.’
균형을 잃어버린 세상은 그렇게 되고 만다.
하지만 루카스의 머릿속에 다른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차라리 마신의 편에 서서 드래곤에게 다른 세상을 부여할 수 있다면?’
‘주신에게 도전하는 타라스의 계획이 정말 성공한다면?’
‘그렇게 되어서 자신이 정말로 영면과 영멸을 얻는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루카스의 머릿속을 헤집는 수많은 생각들.
“아니, 말도 안 된다.”
하지만 루카스는 이내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생각들을 털어냈다.
“바로잡을 수 있다. 같잖은 마족 놈들에게 이 세상을 모두 내어줄 수는 없지.”
-파앗!
주먹을 한번 꽉 쥐어 보인 루카스가 텔레포트했다.
***
루카스가 돌아온 곳은 아만의 집무실이었다.
“아만.”
마침 그곳에 있던 아만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루카스를 반겼다.
“금방 오셨네요.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마족의 혼혈을 만나고 오는 길이다.”
루카스의 말에 아만이 인상을 팍 찌푸려 보였다.
“그 같잖은 것들은 왜요?”
“그리고 타라스도 만났지.”
“……타라스요? 마신? 마신 타라스요?”
놀란 아만이 되묻자,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이 조금 심각해졌다.”
“무슨 일이신데요? 아니, 그보다 왜 타라스를… 아니지. 타라스는 어디서 만나신 건데요?”
루카스가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아만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로드?”
“하셀을 만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