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왕 중 왕
아카데미로 돌아온 루카스는 아만의 집무실 쇼파에 털썩 몸을 기댔다.
‘긴 여정이었다.’
그저 혼자 가볍게 나들이나 할 생각으로 나섰던 길이었는데 너무 긴 여행을 한 느낌이었다.
“후우…….”
온몸에 힘이 죽 빠져나가는 기분.
“로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만이 나타나자, 루카스는 왠지 모르게 헛웃음이 나와 피식 웃고 말았다.
“어? 왜 웃으시지?”
“좋군.”
“예? 설마… 제가요?”
“그래. 널 보니 좋아서 웃음이 나왔다.”
아만은 그저 평소처럼 까불었던 것인데, 루카스에게서 의외의 대답이 나오자 굳어지고 말았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긴 여정이었어. 힘들었다.”
“아니, 저를 부르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리고 날짜로는… 일주일도 아직 안 지났는데요?”
“그랬나.”
아만의 말을 듣고 날짜를 셈해보니, 정말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학기는 마칠 것 같다고 하지 않았나?”
루카스는 아카데미에 들어서며 바깥의 분위기를 슬쩍 살폈는데, 학기 중인 듯 활발한 분위기였다.
“아, 그렇지 못하게 됐습니다. 학부모들의 반발이 거세서 말입니다. 축제만 취소하고 학기는 끝까지 하기로 결정이 났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나는… 무단으로 결석을 한 건가?”
“그건 아닙니다. 뭐 제가 심부름을 좀 멀리 보냈다고 했습니다.”
아만의 대답에 루카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심부름을 멀리 보내?”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아니, 루카스는 겨우 초급반에 다니는 상태였다.
그건 차치하고라도 루카스는 아직 성인도 아니었다.
그런 그를 혼자 멀리 심부름을 보냈다니?
“아, 저도 압니다! 그런데 지들이 뭐 어쩔 겁니까? 내가 보냈다면 보낸 거지.”
버럭 소리치는 아만의 말에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만이 보냈다면 보낸 거지. 지들이 뭐 어쩌겠는가?
“네 말이 맞다.”
“그럼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말해주세요. 로드 표정이 영… 익숙지가 않네요.”
루카스는 잠시 고민했다. 모든 일을 아만에게 말해주어야 좋을지.
“이번에도 말 안 해주시겠다 뭐 그런 건 아니시지요?”
“……그래. 해주마.”
결심이 선 듯 루카스가 입을 뗐다.
루카스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아만은 모든 이야기를 경청하며 시시각각 다채로운 표정을 보였다.
특히 루카스가 습격을 받아 노예선에서 눈을 떴다는 대목에서 아만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태세였다.
“아니! 로드는 그럼 저를 부르셨어야지! 내 이 자식들을 당장이라도……!”
“이미 다 죽었으니, 당장 쫓아가도 소용없다.”
“그렇다면 베네타를 통째로 엎어버리면……!”
“고맙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그만 이야기할까?”
루카스의 만류에도 길길이 날뛰던 아만은,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었는지 얼른 자리에 앉았다.
“아닙니다.”
“그래.”
그 뒤로 다시 시작된 이야기에 아만이 귀를 기울였다.
이민족을 물건처럼 수집했던 남작 부인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역시 아만은 분노했다.
“이런 으마으마한 썅X! 게다가 겨울 여우족 눈을 아직도 캐다 파는 작자들이 있다니……! 로드 이건 정말이지 화를 참을 수가 없습니다.”
“아만. 눈을 캐다니…….”
루카스는 아만의 단어 선택에 흠칫 놀랐다.
“아, 로드는 잘 모르시겠지만, 예전에 한참 겨울 여우족 눈동자가 유행처럼 번졌을 때, 그 업자들이 쓰던 말입니다. 보석을 캐는 것처럼 겨울 여우족 눈을 ‘캔다’라고 표현하더군요.”
“아.”
아만의 설명을 들은 루카스가 작게 탄식했다.
“로드는 그때 고룡 중 고룡이셨으니…… 속세에 관심이 없으셨겠지만요.”
루카스가 아만을 한번 째려봤다.
“베네타에 살고 있는 드래곤이 있는가? 하셀이 나간 뒤로 말이야.”
“아, 맞네요. 아버지 레어가 베네타였었죠. 지금은 누가 없는 걸로 압니다.”
옛날엔 실버드래곤인 하셀이 베네타에 레어를 두고 있었지만, 그 역시 다른 곳으로 이주한 지 오래였다.
그렇기에 베네타는 지금 주인 없는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늘 내가 한 이야기를 잘 간추려 하셀에게 전해라. 가여운 이들을 언제까지고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저 역시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드래곤의 수장인 그에게 말을 전한다면, 그 역시 이번 일을 두고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드래곤은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모든 종족의 왕이다. 각 종족이 자신이 가진 위치에서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힘을 가진 용의 의무이다.”
루카스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하는 아만.
“기억하는군.”
기특하다는 듯 웃는 루카스.
“그럼요. 로드께서 항상 말씀하셨던 것 아닙니까?”
“그래. 그러니 질서를 바로잡아야지 않겠는가?”
“맞습니다.”
***
하셀 역시 아만의 이야기를 들으며 분노했다.
아무리 자신이 떠나온 땅이라 한들, 그곳은 제집이었던 땅이었다.
“감히 겨울 여우족을 또 건드려?”
“게다가 픽시며 엘프들까지, 애들이 너무 고생이 많습니다. 토토족은 또 어떻고요.”
-쿵!
“이것들을……!”
하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의자가 뒤로 쿵 떨어졌다.
“어떻게 하시게요?”
하셀의 분노에 아만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너는 뭐 내가 가서 브레스라도 쏘길 바라는 눈치다?”
“아니~ 뭐 브레스 쏘신다고 하면 제가 말리지는 못하지만요~ 진짜 쏘시게요?”
아만의 몸이 기대에 벅찬 듯 앞으로 쏠렸다.
“안 쏜 지 너무 오래돼서 조준이 잘 될는지 모르겠네. 그러니 너한테 먼저 쏴봐야겠구나.”
하셀이 손을 까딱이자, 아만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아닙니다! 그럼 아버지가 알아서 잘하실 거라 믿고, 저는 갑니다!”
쏜살같이 도망치는 아만.
“자, 그럼…….”
하셀 역시 즉각 움직였다.
***
하셀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베네타에 있는 겨울 여우족이었다.
“누, 누구냐!”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하셀의 모습에 놀라 공격태세를 취했다.
[족장을 데려와라.]
하지만 동굴에 울려 퍼진 하셀의 용언과 그의 기운에 모두 무릎을 털썩 꿇었다.
“왕이시여…….”
그 모습에 하셀은,
“가여운 것들…….”
그들을 내려다보는 하셀의 눈에 측은함이 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뛰쳐나온 겨울 여우족장 역시, 하셀을 마주하자마자 바닥에 머리를 대고 부복했다.
“왕이시여.”
“너희가 겪은 고통을 들었다.”
“크흑… 어찌하여… 이제야…….”
바닥에 엎드린 족장이 흐느꼈다.
“너희 모두를 지켜줄 수는 없다. 그들이 누구인지 찾아내 하나하나 벌할 수도 없다. 하지만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해 주마.”
“매일같이 빌었습니다…. 하지만 저희에겐 신도 기적도 없었습니다. 어찌하여 이제야 오셨습니까…. 너무나도 많은 일족이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족장의 눈물 맺힌 설움이 절절하게 울려 퍼졌다.
하셀 역시 알고 있었다. 옛날부터 행해져 온 인간들의 나쁜 짓거리를 말이다.
하지만 드래곤은 균형이 유지되는 데 도움을 줄 뿐, 직접 나서서 인간들을 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드래곤을 등에 업고 반대로 인간을 핍박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드래곤은 균형이 깨지지 않게 멀리서 지켜보며 그것을 유지하는 수준을 지켜왔다.
“그래. 하지만 이것은 최소한의 안전장치일 뿐. 너희는 스스로를 지켜낼 힘을 길러야 할 것이다.”
“…….”
“겨울 여우족이 아닌 것들이 이곳 동굴에 들어올 수 없게 마법을 걸어주마.”
그 말을 끝으로 하셀이 돌아섰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되겠지.’
하셀 역시 안타까웠다. 마음 같아서는 아만의 말대로 브레스라도 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제 저들은 드래곤이 자신들을 잊지 않았다는 작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힘을 얻고 살아갈 것이다.
***
그 뒤로도 하셀은 이민족들의 마을을 찾아가 직접 마법을 걸어주었다.
‘자, 이제 인간 차례인가.’
최소한 그들이 살아가는 터전은 지킬 수 있게 도왔으니, 이젠 그 원흉을 눌러둘 차례였다.
-파앗!
“누구냐!!!”
갑작스레 나타난 인영에 소스라치게 놀라 자빠진 사람은 다름 아닌 한 나라의 국왕이었다.
“폐하를 지켜라!!!”
그 소리를 듣고 달려온 기사들이 검을 빼 들고 가차 없이 달려들던 때였다.
[꿇어라.]
하지만 그들 역시 마주한 하셀의 기운에 속절없이 무릎을 털썩 굽히고 말았다.
“드, 드래곤…….”
라스칸 국왕이 덜덜 떨며 말했다.
“그래, 드래곤.”
그를 내려다보는 하셀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너희 요즘 많이 건방져졌더라.”
하셀은 집무실을 한 바퀴 빙 둘러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주 건방져졌어. 왕 그만할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셀은 한 나라의 왕을 두고 여느 집 하인 이야기하듯 했다.
“왕 계속 하고 싶으면 지금부터 똑바로 들어.”
“예, 예! 물론입니다.”
집무실 탁자 위에 비스듬하게 몸을 기댄 하셀이 국왕을 내려다보며 이야기했다.
“앞으로 이민족 노예를 거래하는 모습이 보이면 모두 참형해라. 너희 인간이 노예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
“저, 저희 왕국은 노예제도가 금지입니다만…….”
“지금… 내 말에… 말대꾸?”
-쿠릉!
하셀의 낮은 목소리와 함께 왕궁이 통째로 흔들렸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에 국왕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손을 싹싹 비벼댔다.
“알고 있잖아? 이민족들 사고파는 귀족이 한둘이 아니라는 건. 그리고 요즘 겨울 여우족 눈동자가 또 유행인가 보던데.”
“그, 그것이…….”
“그런 것들 역시 가만두지 마라. 물론 나 역시 알고 있다. 모든 것을 막을 수는 없다는 걸. 하지만 내가 하는 말은 너더러 막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럼 제가 어떻게…….”
“알고도 묵인하는 일은 없길 바란다. 그걸 내가 알게 되는 순간.”
국왕이 침을 꿀꺽 삼켰다.
“네놈 역시 눈을 뽑아 내가 소중히 전시하도록 하지. 뭐, 장식품으로서 가치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알겠습니다.”
“야. 뒤에 있는 인간 나부랭이들.”
하셀이 다른 인간들을 보며 말하자, 그들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머리를 더 수그릴 뿐이었다.
“너희는 나가서 소문을 널리 퍼트려라. 드래곤이 직접 행차해 왕을 무릎 꿇리고 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말이야.”
하셀이 씨익 웃었다.
“다음에 날 마주하는 때엔 이렇게 신사적인 방법이 아닐 테니, 잘들 명심하고.”
“예. 알겠습니다.”
“그래. 말이 좀 통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하셀이 쪼그려 앉아 국왕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건방들 떨지 말고 인간답게 살아라. 내 눈엔 너희 역시 같잖은 하등생물임을 잊지 마라. 너흰 그저 숫자가 많아 대륙을 차지한 것뿐이니 말이다.”
“…….”
그 말을 끝으로 하셀이 사라지자, 자리에 있던 모두가 탄식을 내뱉었다.
“크윽… 긴급회의를 소집해라. 이종족 특별법을 만들어 시행할 것이다.”
왕의 말에 기사 하나가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도,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드래곤이라니…….”
***
그 뒤로도 하셀은 크고 작은 나라와 제국을 돌며 모든 수장들을 만나 협박과 겁박을 반복했다.
하루가 지나자 전 세계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그 소문이 이종족들 귀에 들어가는 것 역시 순식간이었다.
‘에휴. 이로써 종족전쟁은 막았나.’
하셀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종족전쟁. 그것을 막기 위해서.
종족전쟁이 벌어진다면 인간은 물론이고 모든 이종족의 출혈이 엄청날 것이다.
국가간의 전쟁만 벌어져도 사상자가 엄청난데, 그것이 모든 이종족과 인간의 전쟁이라면 정말이지 끔찍할 것이었다.
‘천 년쯤 됐나…….’
천 년 전에 일어났던 종족전쟁.
그 전쟁 역시 처참했었다.
그때를 기억하는 하셀은 다시 한번 그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이번 일에 개입했다.
만약 하셀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종족전쟁은 진짜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이종족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으니.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