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반란의 씨앗 (1)
[십여 년 전 사건에 연루되었던 가주들이 뜻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말리지 못한다면 제국에 큰 피바람이 불어올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땅을 되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저희 아스트리드 가문은 그들의 뜻에 힘을 보태지 않을 것이며, 로드리고 백작가 역시 그러리라 믿습니다. 시비에 백작님께서 자신의 뜻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쪽지의 내용을 본 루카스는 깊이 파고들지 않아도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십여 년 전 사건이라 함은 분명 1황자를 시해하고 2황자가 즉위했던 그때의 사건을 얘기하는 것이다.
또한 그 사건에 연루되었던 가주들이라 함은, 분명 2황자가 아닌 1황자의 편에 섰다가 멸문을 피해 다른 대륙으로 도망치듯 쫓겨난 다른 가문들일 것이다.
방금 그 소녀는 아스트리드 가문을 대표해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그 말인즉 시타타에 분명 제 아버지인 시비에를 설득하고자 누군가 진즉 나섰다는 뜻일 테고.
‘젠장 할.’
이제야 조금 먹고살 만해진 집안이다. 그들의 마음에 평온이 들어선 지 아직 일 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부터 날파리들이 날아들어 제 가문을 좀먹으려 하고 있었다.
화가 치밀었다.
인간들의 소문은 제피로스의 바람보다 빠르다. 다시 한번 그 속담의 위력을 체감했다.
황제가 반푼이가 되고 시타타에 단내가 풍기자마자 그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의 땅을 되찾는다? 허울 좋은 말로 포장한 반역이다.
‘내게 소식이 찾아든 이상, 가만히 두고볼 수는 없다.’
루카스가 몸을 돌려 한적한 골목에 접어들었다.
-파앗!
텔레포트를 시전한 루카스가 도착한 곳은 아만의 집무실이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방 한편에 아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드?”
“미안하군. 자네가 눈코 뜰 새없이 바쁘다는 것을 알고 있네만, 급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네.”
“괜찮습니다. 모든 일은 잘 수습되고 있습니다. 그보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만의 물음에 품에서 쪽지를 꺼내려던 루카스가 멈칫했다.
‘이 짐까지 지울 수는 없다.’
생각을 마친 루카스가 품으로 향하던 손을 자연스레 거두고 아만을 바라봤다.
“해결해야 될 문제가 좀 생겨서 말이야. 나의 부재를 자네가 좀 메워주면 좋겠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해결할 수는 없는 문제입니까?”
“아니, 아니다. 자네가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인간사에 뭐가 있겠는가. 그보다 훨씬 쉬운 문제라 나 혼자 움직일까 해.”
루카스의 말에 아만의 눈이 길게 찢어졌다. 그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허허. 못 믿겠는가?”
“예. 못 믿겠습니다. 그리고 로드 팔에 그건 또 뭡니까? 그건 언제쯤 말해주실 거였습니까? 제가 로드의 인생에 방해가 됩니까?”
아만의 눈빛이 매서웠다. 하지만 눈꼬리는 무척이나 서러운 듯 축 쳐져있었다.
“이건…… 피치 못할 사정이 좀 있었다. 그리고 방해라니? 네가 없었다면 진즉 끝났을지도 모르는 인생이다. 끝나진 않았더라도 굉장히 고달팠겠지.”
“그런데 왜 자꾸 숨기고 말씀을 안 해주십니까?”
“숨기는 건 아니다. 그저…….”
숨기는 게 아니라고 말은 뱉었지만 달리 다른 말이 생각나질 않았다.
‘숨기는 게 맞으니까.’
이제 아만의 입이 삐죽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말씀을 안 해주시냐는 말입니다.”
“부탁하지. 내 부재를 메워주게. 그리고 내가 도움을 요청하면 그때 와줄 수 있겠는가? 혹시 위험한 순간이 생기면 자네를 찾겠네.”
“로드께서 위험한 순간을 제가 어떻게 알고 찾아갑니까? 위험하실 때 수정구로 저 부르시게요?”
반박할 말이 생각나질 않았다.
‘반박할 수가 없으니까.’
루카스가 입을 달싹일 뿐 말을 잇지 못하자, 아만이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뭔데 말씀을 안 해주시냐고요!!! 뭔데요!!!”
한계에 달했는지 아만은 이제 팔짝팔짝 뛰기 시작했다.
“그, 그만!”
루카스의 외침에 아만은 콧바람을 씩씩대며 그를 째려봤다.
“계약을 하지.”
“……정말이십니까?”
루카스의 말에 아만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래.”
계약. 그것이 뜻하는 바는 엄청났다.
정령과 계약을 하는 것처럼 드래곤과도 계약이 가능했다.
가끔 드래곤이 지상에서 마음에 드는 종족을 만나면 그를 상대로 계약을 진행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주종관계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힘을 나눠주는 대가는 완전한 종속.
마음에 드는 종족을 만나 계약을 진행하는 것 역시, 애완동물이나 다름없는 그것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전생에 드래곤 로드였던 루카스의 입에서 계약이라는 말이 나오자 놀라울 수밖에.
“그, 그래도 괜찮으신 겁니까?”
“그래. 내가 원해서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위험한 순간이 오면 너는 언제든 알 수 있을 것이고, 나는 너의 마나를 가져다 쓸 수 있으니 상부상조 아니겠는가.”
사실 안 괜찮았다. 그 역시 드래곤이었기에 계약이 가진 의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인간을 비롯한 다른 종족에게는 크나큰 축복이자 행운이겠지만, 드래곤에게는 그저 귀여운 애완동물 하나가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말이시죠……?”
아만 역시 그 뜻을 잘 알기에 재차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 그만 묻고 계약을 진행하지.”
“제가 감히… 로드와 계약을 해도…….”
“된다.”
한시가 급한데 자꾸만 머뭇거리는 아만 때문에 답답했지만, 최대한 평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루카스의 확답에 아만은 뭐가 그리 좋은지 주둥이를 꼼질거리며 볼이 발그레져 있었다.
‘저 미친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당장에라도 마빡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시간이 더욱 지체될 터였다.
짜증을 꾸욱 누른 루카스가 억지웃음을 짓자, 아만은 헤헤거리며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곳에 선 자 루카스 로드리고. 그대는 나 아마록 테리디어와 계약함에 따라 나의 힘을 나누어 받으며 그대의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내게 복종할 것을…….]
“아마록? 그거 안 해도 되는 거 안다. 표식이나 남겨라.”
계약 전 읊는 저깟 말들은 사실 필요 없는 절차였다. 그저 계약자에게 읊으며 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한 쓸모없는 절차였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저 해맑은 드래곤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저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예……. 제가 언제 또 로드를 상대로 계약을 해보겠나 싶어서…….]
굳이 위엄을 보이겠답시고 용언까지 써가며 읊어대는 꼴을 보자니 한편으로는 귀엽기도 했다.
-사아아
아만의 손에서 뻗어 나온 빛이 루카스를 한 번 감싸자, 오른쪽 손등에 희미한 표식이 새겨졌다.
“일부러 이런 거지?”
“뭐, 뭐가요?”
“표식 위치 말이다.”
“그, 그럴 리가요. 저는 손등에밖에 못 하는데요?”
진심으로 죽이고 싶었다. 표식의 위치 역시 계약을 진행하는 드래곤이 위치를 정해 남길 수 있는데, 아만은 의도적으로 잘 보이는 위치인 손등에 남긴 것이다.
“계약자. 첫 번째 임무다. 폴리모프로 문양을 숨겨라. 그리고 내가 죽을 때까지 유지해라.”
“예!?”
한번 새겨진 문양은 계약을 파기하지 않는 이상 옮기거나 지울 수 없다.
“계약의 파기는 피계약자의 죽음뿐이니 어쩔 수 없이 네가 고생하는 수밖에.”
루카스가 싱긋 웃자, 아만의 표정은 곧 울 것처럼 죽상이 되었다.
“아니면 콱 죽어버리지 뭐.”
“아닙니다…….”
아만이 폴리모프를 시전하자 문양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럼 잘 부탁하네. 아마록 테리디어.”
“예…….”
“가야겠군. 아, 하나 더.”
“뭡니까?”
“폴리모프 시켜라. 내가 해도 되지만 유지하려면 신경 쓰이니까.”
“……예.”
아만의 마력이 다시 한번 루카스를 감싸자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을 제외한 모습이 모두 바뀌었다.
“내 부재를 잘 메워주게.”
“예. 핑계는 제가 잘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위험한 순간이 생기면 제가 언제든 가겠습니다.”
“그래. 자네 덕에 든든하군.”
루카스가 아만의 어깨를 두드렸다.
***
-파앗!
루카스는 아만과의 계약 덕분에 마나를 신경 쓰지 않고 마법을 마음껏 쓸 수 있었다.
‘좋은데?’
때문에 투명화 마법을 유지한 채 단박에 시타타로 텔레포트한 루카스가 주변을 살폈다.
시타타는 얼마 전 자신이 떠났을 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물론 모습은 굉장히 바뀌어 있었다. 백작저 역시 보수가 꽤 진행되었는지, 군데군데 깔끔해진 벽과 정원의 모습은 굉장히 놀라웠다.
‘역시 돈이 좋기는 좋아.’
광산이 개발됨에 따라 아만이 연결해 준 골드나인 상단은 소문대로 엄청난 속도와 수완을 보이고 있는 듯 보였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루카스가 발걸음을 옮겨 백작저 내부로 향했다.
‘역시나.’
백작저 안으로 들어서자 낯선 사람들 몇이 눈에 들어왔다.
거친 피부와 대륙과 다른 의복 양식.
‘베네타쪽 인간들인가.’
베네타 대륙. 최북단에 위치한 그곳은 시타타는 비옥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척박한 땅이었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로드라타 시국 역시 척박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웠으나, 베네타보다는 사정이 나은 수준이었다.
얼어있는 땅은 사계절 내내 녹지 않았으며, 그나마 사계절 중 가장 따뜻하다는 여름이 되어서야 바다가 겨우 녹아 배가 움직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쫓겨난 자들이 간 곳이 베네타인가.’
마음 한켠에 잠시 연민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 춥고 척박한 곳까지 쫓겨난 이들의 심정이 이해는 되었다.
2황자의 반역에 맞섰다가 쫓겨난 그들은 매일이 지옥이었을 것이다.
가는 길조차도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곳인데, 겨우 살아 도착한 곳 역시 매일 목숨을 걸어야 했으니 매일매일이 참담했을 것이다.
겨우 자리를 잡아 익숙해졌더라도 매일 약탈과 싸움을 일삼는 도적떼와 맞서야 했을 것이고, 그조차도 막아냈다기보다 그저 하루를 버텼다는 것이었겠지.
응접실에 들어서자 한편에 놓인 보따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제 아버지인 시비에에게 바치겠다고 들고 온 것들이겠지.
그때 응접실 문이 열리고 시비에와 함께 낯선 사내들이 들어섰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백작님.”
“허허. 아닙니다. 어려운 걸음 해주셔서 제가 감사드리지요.”
시비에가 자리를 권하자 앉은 사내들은 거친 손으로 찻잔을 집어 들었다.
“향이 좋습니다. 얼마 만에 맡아보는 홍차향인지…….”
“그간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머무르셔도 좋습니다.”
“아니요. 아닙니다. 저희는 그저 지나는 길에 백작님 안부나 묻고자 들른 것이지 신세를 지겠다 들른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저희 트래버 남작… 아, 이젠 그냥 트래버 님이라고 말씀드려야 하나…….”
사내가 멋쩍은 듯 말을 고치자 백작은 괜찮다는 듯 손을 저어 보였다.
“아닙니다. 이곳은 저희뿐이니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백작의 말에 사내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감사합니다. 트래버 남작님께서 백작님의 안부를 몹시도 궁금해하셨습니다. 베네타가 사람의 왕래가 적은 지역이라 한들 종종 포탈을 건너 넘어오는 상단이 있어, 저희도 대륙의 소식을 종종 접하곤 하니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저 역시도 떠나게 된 사람들의 소식이 늘 궁금했습니다. 제가 먼저 찾았어야 했는데… 저 역시 상황이 여의치 못해 송구하게 됐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희 중 누구도 백작님 탓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이 공교롭게 된 것이지요.”
사내의 말에 백작이 쓰게 웃었다.
“귀하고 힘든 발걸음 하셨으니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아시다시피 여기 시타타는 지형이 험하고 척박한 땅인지라 이 근처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땅이 많습니다.”
백작이 뜻하는 바는 정확했다. 언제든 베네타를 떠나 이곳으로 와도 된다는 뜻이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백작님께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모르는 땅인 것을요.”
확실한 백작의 의사 전달에도 사내는 어딘지 모르게 말을 빙빙 돌리며 머뭇거렸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오늘은 이만 쉬시지요.”
사내의 목적이 무엇인지 눈치챈 백작이 서둘러 자리를 마무리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오늘 신세를 좀 지겠습니다.”
“신세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언제든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돕겠습니다.”
다시 한번 거듭된 백작의 당부에 사내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