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오닐 공작가 (2)
스턴이 집을 떠난 지 벌써 이틀이 흘렀다. 처음엔 그저 화가 난 형이 잠시 집을 나간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스턴이 집을 떠난 지 하루 만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게…… 정말인가?”
자신의 응접실에 앉은 시러스 오닐 공작은, 조금 전 들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손에 든 티스푼을 바닥에 툭 떨어트리고 말았다.
“……예, 공작님.”
“그것이 정말 우리 스턴이 맞느냐 그 말일세.”
“그렇다고 합니다.”
“……고맙네. 나가보게.”
제 아들인 스턴은 열세 살에 마법 아카데미에 입학해, 열여덟이 되던 해에 우수한 성적으로 최상급 반을 졸업했다.
아쉽게 수석을 놓쳤던 스턴은 그것이 분했는지, 한 달 내내 밥도 잘 먹지 않고 잠도 잘 못 잤을 만큼 승부욕이 대단한 아이였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4서클 마법사까지 되었으니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아들은, 왕궁 마법사가 되어 국가에 이바지하겠다는 충성심까지 내비쳤었다.
마탑주인 알베르토를 따라다니며 마법 연구에 매진한 것은 물론이고, 황제의 총애까지 받았으니 그의 앞날은 물론 오닐가의 앞날 역시도 탄탄대로였다.
“스턴…….”
아들의 이름을 읊조리는 공작의 눈동자가 텅 비어있었다.
공허했다. 자신의 아들이 가문의 이름을 버렸댄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로드리고 백작가에게 보냈던 선물을 비롯한 서신의 내용들까지도 모조리 황제에게 고해바쳤다.
공작이 지금 느끼는 감정은 분노나 절망 같은 것이 아니었다.
후회와 회한.
자신이 자식을 잘 가르치지 못했다는 후회와, 십년 전에 로드리고 백작가의 편에 서주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
공작은 응접실 한편에 놓인 제 오랜 친구가 보낸 선물을 바라봤다.
시비에 로드리고. 그와 함께했던 오랜 시간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검술 아카데미에서 만나 함께 수석과 차석을 나란히 하며 졸업을 하던 그날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
검술 아카데미의 졸업식 날.
“아쉽군. 마지막엔 자네를 꼭 이겨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하하, 그런 소리 말게. 나는 자네 때문에 매일매일 불안에 떨었으니 말이야.”
“엄살도 참. 이제 막 자네를 따라잡기 시작했는데 불안은 무슨 불안.”
나란히 선 두 청년의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 동고동락하며 일, 이등을 다퉜었다.
그들의 경쟁은 다른 학생들에게도 모범이 되어 모든 졸업생들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
시비에 로드리고와 시러스 오닐. 그들은 둘도 없는 친구였으며 장차 제국을 이끌어 나갈 중앙귀족이 될 것이었다.
어떤 이는 그들을 질투했으며, 어떤 이는 그들을 동경했다.
이들은 그런 시선조차도 즐거웠다. 그만큼 돈독한 둘의 우정은, 세상 어떤 것이 온다 해도 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
“정말 축하하네.”
“허허, 고맙네. 자네도 얼른 자식이 생겨야 할 텐데 말일세.”
자신의 친구인 시러스의 득남 소식에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온 시비에는 진심으로 그를 축하했다.
가장 친한 친구의 아들은 마치 하늘에서 막 내려온 천사 같았다.
친구를 닮은 눈부신 은백색 머리에, 그의 부인을 닮은 금색 눈동자는 찬란하기까지 했다.
“정말…… 예쁜 아기일세. 진심으로, 진심으로 축하하네, 친구.”
제 조카를 보는 시비에의 눈동자가 감동으로 일렁였다.
“내 친구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네.”
“그게 무엇인가? 내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네.”
“우리 아들의 대부가 되어주게.”
“그, 그게 정말인가?”
“허허, 그래 이 친구야. 속고만 살았는가?”
대부라니. 이 작고 아름다운 생명체의 대부라니!
그날 시비에는 다짐했다. 이 아이가 혹여 잘못된 길을 가거나, 제 부모에게 문제가 생기거든 어떻게 해서든 이 아이를 책임지겠다고.
“물론이지. 물론! 백 번, 아니 천 번도 하겠네!”
“고맙네. 고마워.”
둘은 와락 끌어안았다. 목숨보다 소중한 제 아들의 뒤를 맡길 수 있는 친구를 둔 공작과, 제 아들의 뒤를 믿고 맡겨주는 친구를 둔 백작은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
그렇게 6년 남짓한 시간이 지나 공작이 둘째 아들을 얻었을 때에도, 시비에는 둘째 아들의 대부 자리 역시 자신에게 올 것이라 생각했다.
“정말 축하하네.”
둘째 아들 역시도 친구를 닮은 은백색 머리에 그와 비슷한 회색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아기였다.
첫째 아들인 스턴은 이제 말을 곧 잘했으며, 자신을 보고 혀짧은 소리로 대부님, 대부님 하는 것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고맙네. 그보다 자네도 얼른 후손을 보아야 할 텐데…….”
“허허, 걱정하지 말게. 언젠가 우리에게도 이렇게 어여쁜 아이가 올 테니 말일세!”
“그래, 꼭 그렇게 될 걸세.”
백작의 어깨를 꼭 붙잡은 그가 건넨 위로의 말이 따뜻했다.
“이 아이의 대부는… 정해졌는가?”
“아, 그것이… 이번에는 신전에 위탁하기로 했네.”
“하하…… 그렇군. 나도 요즘 신전에 위탁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네. 축언을 내려준다고 하더구먼. 괘념치 말게.”
“미안하네. 이번 신전에 넣은 지참금이 워낙 크니 말일세…….”
“아이 그럼. 그럴 수 있지. 나도 잘 알고 있네.”
정말 괜찮았다. 첫째 아이의 대부 역할을 맡고 있으니, 둘째 역시도 제게 맡겨 줄 거라 생각한 것이 조금 욕심이었는지도 몰랐다.
요즘 중앙귀족들 사이에서는 신전에 지참금을 넣고 위탁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그 지참금 크기에 따라 위탁을 부탁할 수 있는 사제의 등급이 나뉘기에, 그것이 부를 나타내는 척도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분명 제 친구도 그 중앙귀족들의 유행에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공작 작위를 물려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가 이렇게라도 해야 그들 사이에 확실히 자리매김하는 느낌이 들 테니 말이다.
정말 괜찮았다.
***
“그게…… 무슨 말인가?”
“말 그대로네. 그래드 황자가 제로스 황자님을 몰아내려 하고 있네.”
“말도 안 되네.”
시러스 공작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은 시비에가 입술을 질끈 물었다.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이미 그래드 황자님 편에 선 자들이 꽤 많은 모양일세.”
“반역이네. 모두 반역자나 다름없다 그 말일세!”
공작의 집무실에 앉은 두 사람의 표정이 심각했다.
제1황자인 제로스 황자를 몰아내려 제2황자가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제로스 황자는 황후에게서 난 적통이다. 하지만 그래드 황자는 후궁이 낳은 서자였다.
하지만 황후에게서 또 다른 자식을 보지 못한 데다, 그래드를 특별히 총애하던 황제가 그래드에게 황자 작위를 내렸다.
그런데 황제가 서거하자마자 그래드가 세력을 모아 반란을 꾀하고 있었다.
아직 황제의 장례가 모두 채 끝나지도 않은 상태였다.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쾅!
시러스의 말에 시비에가 주먹으로 응접실 테이블을 거칠게 내려쳤다.
“그게 무슨 말인가! 어떻게 할 생각이냐니!”
“말 그대로네. 어떻게 할 생각이냐… 그 말일세.”
제 친구의 거친 반응에도 시러스는 담담히 되물었다.
“당연히 제로스 황자님을 지지해야 맞는 것 아닌가?”
“……맞지.”
“그런데 어째서 그런 것을 묻는가?”
“자네 뜻에 따르려고 했네. 자네는 현명한 사람이니 말일세.”
“그렇다면 내 뜻에 따라주게. 나는 제로스 황자님의 편에 서서 싸울 테니 말일세.”
“알겠네.”
자리에서 일어난 백작이 시러스를 지그시 쳐다봤다.
“그럼 가보겠네.”
“……조심히 들어가게.”
백작이 떠난 자리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공작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나오셔도 됩니다.”
“클클클… 눈물겨운 우정이군.”
그러자 아무도 없었던 응접실 한편에서 인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자,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어떻게 해주길 바라나? 자네가 원하는 것은 한 가지 아닌가?”
로브를 쓴 사내의 입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
“자네의 바람대로 저자를 살려는 주지. 내가 특별히 그래드 황자님께 부탁한다면 가능한 일이야…….”
“제 아들들은 언제쯤 풀어주실 겁니까?”
“클클클… 거사가 마무리되고 나면 풀어주도록 하지.”
“제 아들들이 괜찮은지 확인해야겠습니다.”
“오오, 그래그래. 확인해야지.”
말을 마친 사내가 주머니에서 수정구를 하나 꺼내 들어 무어라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수정구에 무언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스턴! 스키르!”
“클클클… 여기서 불러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어.”
“크윽…….”
수정구에 비친 아이들의 모습에 공작은 원통한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입술에 피가 배어 나와 입가에 맺혔다.
“자, 보다시피 아이들은 무사하네. 거사를 잘만 도와준다면 꺼내주는 것은 물론이고 이 끔찍한 기억까지도 지워주지.”
온통 하얀색인 방에 갇힌 아이들은 동공이 풀린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직 어렸다. 큰아들은 이제야 여덟 살이 되었고, 둘째는 이제 두 살을 막 넘겨 걸음마를 하는 아이였다.
저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끔찍한 일을 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어떻게 믿습니까?”
“크하하하! 아주 좋은 지적일세… 자, 이러면 어떤가?”
말을 마친 사내가 허공에 마법진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서약을 하지. 피의 서약을 말일세…….”
“좋습니다.”
허리춤에 찬 단검을 빼낸 사내가 공작의 손을 잡아 상처를 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손에도 작은 생채기를 낸 사내가 주문을 읊자, 손에 있는 핏방울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핏방울들이 모여 마법진에 스며들자, 마법진은 빛을 내며 허공에서 사라졌다.
“되었네. 그럼 거사를 잘 부탁하지.”
“…….”
그래. 이거면 되었다. 이것이 최선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세뇌하던 공작이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
1황자인 제로스가 암살당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범인은 황자를 지키던 기사 중 한 명이었다. 황실에 충성을 맹세한 그 기사는 제 부인과 딸이 볼모로 잡혔다.
그래드는 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진정한 충성을 바라지도 않았고,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입들을 믿지도 않았다.
그저 힘으로 모든 것을 찍어눌렀으며, 인간이 가진 가장 약한 부분을 약점 잡아 그들을 움직였다.
그래드가 황제에 즉위한 다음, 혹여라도 그가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던 모든 사람들의 걱정은 헛된 것이었다.
협박으로 이뤄진 협조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파국이 올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아는 그래드는 자신이 한 약속을 칼같이 지켰으며, 그에 더해 개국 공신들이나 받을법한 처우를 해주었다.
그렇기에 협박을 받았던 이들은 누군가는 권력에 취해, 누군가는 금전적인 보상에 의해 자신과 타협하기 시작했다.
공작 역시도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루지 못했을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래드는, 제 머리 위에 황관이 얹어지자마자 시러스를 찾았다.
극진한 대접을 하며 공작의 입지를 단단하게 다져주는 것은 물론이고, 중앙 귀족들 사이에서 누구에게도 무시받지 않을만한 영지를 내렸으며, 금은보화까지 아끼지 않고 내주었다.
또한 제 친구였던 시비에 백작 역시도 변방으로 추방하되 앞으로 절대 건들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스스로 해주었다.
그렇게 한낱 인간인 시러스 역시도 점차 권력에 물들어 제 친구를 잊어가고 있었다.
근근이 들려오는 시비에의 소식에도, 공작은 그저 먼 곳으로 이사를 떠난 친구의 소식을 접한 정도의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도 기다리던 아이를 얻었다는 소식에 정신이 번뜩 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황제가 다져준 기반은 제 친구에게 편지 한 통 쓸 수 없는 족쇄였다.
제 오랜 친구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거나, 변명을 할 수 있는 시간도 이미 때를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늦은 후회는 서서히 제 몸을 적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