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무슨 소리 안 들려요?
“……끄응.”
“백작님, 정신이 드십니까?”
“허억! 이, 이게 무슨… 제가 정신을 잃은 겁니까?”
“하하, 예. 제가 슬립 마법을 쓰는 바람에…… 죄송하게 됐습니다.”
쓰러져있는 백작과 기사들이 깨어나자 아만은 그것 역시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아, 그렇습니까…… 이거 그렇다 해도 참 송구스럽습니다.”
“아닙니다. 생각보다 꽤 숫자가 많아서…… 그보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아만의 말에 몸 이곳저곳을 살핀 백작과 기사들이 멋쩍게 웃었다.
“예…… 다친 곳이 있을 리가 있습니까. 허허…… 이것 참.”
자신의 영지에서 일어난 일을 처리하기 위해 나서준 아만을 따라와 잠만 퍼질러 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 웨어울프는 모두 처리했습니다만…….”
“…….”
“가죽이나 부산물을 건지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참…… 더욱 죄송스럽군요. 연구에 필요한 재료라고 하셨는데 말입니다.”
“아! 하하, 맞죠. 하지만 괜찮습니다. 다른 곳에서 또 구하면 되니까요.”
연구에 필요한 재료라는 핑계를 잠시 잊었던 아만이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웨어울프는 모두 처리가 된 겁니까?”
“예, 이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거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아닙니다. 저를 믿고 루카스군 을 아카데미에 보내주셨으니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아만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도통 해결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갑자기 나타난 아만 덕에 모든 일이 수월하게 풀렸다.
하지만 이 일에 감사의 말을 아무리 전한다 한들 작은 성의라도 표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드릴게… 드릴 게 없는데…….’
한때는 잘나갔던 수도 귀족의 몰락은, 귀인에게 작은 감사 표시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
“아만 교수님!”
“교수님. 웨어울프는 모두 무찌르신 겁니까?”
아만과 일행들이 백작저 입구에 들어서자, 멀리서부터 아이들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마치 드래곤이라도 토벌하고 오는 원정대의 귀환만큼이나 반겨주는 아이들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하, 그래.”
“교수님! 웨어울프는 진짜 엄청나게 커요?”
“그럼, 엄청나게 크지.”
“교수님. 그럼 무섭진 않으셨습니까?”
“그럼! 하나도 안 무서웠단다.”
“우와…… 교수님 진짜 멋있다.”
어느새 아이들은 아만의 옆에 딱 달라붙어 질문 세례를 쏟아내고 있었다.
“루키! 교수님이랑 백작님이 돌아오셨어!”
폴라가 멀리 있는 루카스에게 소리쳤다.
“이제 웨어울프 없대!”
신나게 뛰어오는 폴라를 바라보던 루카스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래. 나도 들었어.”
“진짜 다행이다! 그치?”
손뼉을 짝짝 치는 폴라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다행이다…….’
웨어울프를 잡아 가죽이나 심장을 꺼내 영지에 도움을 주려던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갔으나, 어찌 되었건 백작의 시름 하나는 덜어준 것이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교수님.”
아이들의 외침을 들은 블레인 역시 한달음에 달려와 아만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예. 방에 돌아가 얼른 먼지만 털어내고 가겠습니다.”
“예. 천천히 준비하고 오시지요.”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소리에 루카스의 마음 한편이 또다시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없는 살림에 또 감사를 전하려니 얼마나 무리를 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에휴…… 내가 집안 살림을 걱정할 날이 올 줄이야.’
“루카스? 교수님을 손님방까지 안내해 드리렴.”
“……예.”
작게 한숨을 내쉰 루카스가 아만을 따라갔다.
***
“하…….”
뒤에서 아만을 쫓는 루카스의 입에선 한숨이 끊이질 않았다.
굳이 자신에게 아만을 손님방으로 안내할 것을 부탁한 블레인 때문에,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쉬어서 땅이 꺼지겠습니까?”
“하아…… 너는 모른다.”
“뭘 말입니까?”
방에 들어선 아만은 마법으로 몸에 먼지를 가볍게 털어낸 다음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가난한 삶이 무엇인지 아느냐…….”
“풉!”
“웃지 마라…… 심각하다.”
“들을 때마다 웃긴 걸 어떡합니까? 어쩌다 그렇게 되셨습니까.”
“……천사들이 내게 억하심정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루카스는 입을 삐죽이며 바닥에 깔린 애꿎은 카펫을 발로 툭툭 차고 있었다.
“아, 그보다 아까 제가 화가 나서 제대로 묻지 못한 것이 있는데요.”
“뭔데?”
“그…… 자결을 하고 신이 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아차 싶었다. 자신의 정체를 안다고 해서 이번 생을 마치고 신이 되는 것까지 아는 것은 아니었다.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그게…… 자결을 하면 신이 되는 것이 아니고……그러니까…….”
“드래곤이 신의 견습 과정이라는 게 진짭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죽고 나서 천계로 올라가면 내가 뭐 천사들한테 부탁이라도…….”
아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가 바보인 줄 아십니까? 저 이래 봬도 꽤 살았는데요?”
“……너 그래 봤자 한 오백 년 산 거 아니냐?”
“하! 내일모레면 칠백 년쯤 되거든요!?”
“…….”
“아니, 제가 뭐 바보도 아니고 그런 이상한 변명을 믿을 것 같습니까?”
아만을 과소평가했다. 아무리 애가 모자라 보여도 명색이 드래곤인데.
“와…… 신이라니. 그럼 몇만 년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사는 거 아닙니까?”
“…….”
“와…… 나도 신 하고 싶다. 우리가 쏘는 브레스는 아무것도 아닐 거 아닙니까!?”
해맑고 또 해맑은 드래곤은 벌써부터 기대감에 볼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와…… 계속 거짓말하는 것 봐. 로드 진짜 나쁜 거 아십니까?”
“내가 뭐가 나빠?”
“제가 어디 가서 말할까 봐 지금 그러시는 거 아닙니까? 저 그렇게 입 가벼운 용 아니거든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아만을 보자, 발끝에서부터 한숨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제 입으로 ‘입 가벼운 용’이라는 소릴 꺼내는 아만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저 용으로 말할 것 같으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 아비의 아티팩트를 훔쳐다가 시간을 뒤튼 다음, 그 죄를 다른 용에게 씌웠다.
그것이 발각되어 자신에게 불려 왔고, 아티팩트를 어디서 어떻게 얻었는지 말하라며 채근하자, 로드인 자신에게 그게 누구인지 숨도 쉬지 않고 전부 말했었다.
그게 어디에 어떻게 있었으며, 그것이 누구 것인지. 하다못해 그 아티팩트의 쓸모를 말해준 것이 제 아비이고, 그 아티팩트를 제 아비가 어디에서 얻었으며, 그것을 어디 가서도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까지!
그랬던 용의 입에서 입이 가볍지 않다는 말이 저리도 술술 흘러나오니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
“뭐, 뭐요! 저 입 안 가볍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쳇, 어쨌건 말 안 할 테니 걱정 마시죠? 제가 로드의 삶이 끝날 때까지 도움을 꼭 드려야 하는 이유가 또 한 가지 추가되었으니 말입니다.”
“무슨 이유?”
“아니, 어쨌건 백 년 안에 돌아가실 건데 백 년 뒤에는 신이라는 소리 아닙니까? 그럼 성유물이라도 하나 제게 던져주시지 않을까…….”
“미친…….”
“하하하! 그런 작고 소박한 이 드래곤의 바람이 있다~ 뭐 그런 거죠!”
“닥치고 옷이나 얼른 갈아입어라.”
루카스는 바지를 갈아입다 말고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이야기하는 아만의 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앗, 죄송!”
***
식사 자리에 가보니 역시나 만찬이 차려져 있었다.
“우와! 어제보다 더 맛있는 게 많아요!”
신이 난 폴라가 자리에 앉자마자 얼른 테이블 위의 음식들을 훑었다.
‘없는 살림에…….’
인간의 밥상을 보고 이렇게도 근심이 가득했던 적은 없었다. 그것도 돈 때문에.
아만까지 모두 자리에 앉자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었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 저희 영지에 도움을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아닙니다. 도울 수 있어 기쁩니다.”
블레인의 감사 인사에 아만 역시 겸손으로 화답했다.
“교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셨더라면 정말 힘든 토벌이 되었을 겁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하하, 언제든 도울 수 있다면 돕겠습니다.”
백작 역시도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하자, 아만은 멋쩍은 듯 웃음을 보였다.
“멋진 만찬을 차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폴라와 스키르 역시도 백작 부부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화기애애한 식사 분위기가 이어졌다.
만찬을 보아도 속이 불편한 루카스를 제외한 나머지는 여러 가지 음식을 맛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하아…….”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작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 그보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아만이 무언가 생각났는지 얼른 입을 열었다.
“예.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시비에 백작은 결국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웨어울프 한 마리를 토벌하더라도 용병들이 부르는 금액은 꽤 컸다.
그런데 한 무리의 웨어울프 떼를 혼자 모두 토벌했는데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제가 아까 웨어울프를 토벌하다가 느낀 것인데…… 주변에 광산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 광산이요? 있긴 합니다만 그렇게 좋은 광산은 아닙니다.”
시타타에 있는 광산은 그야말로 작고 볼품없는 광산이었다. 영지민의 삶에 도움은 되고 있었지만 살림이 나아지지는 않는 그런 광산.
“예. 그것 외에도 광산이 있는 것 같더군요. 마나석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마나… 석이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예. 마나석 말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백작을 비롯한 모두가 눈이 커다래졌다.
마나석은 그 크기가 어찌 되었건 비싼 값을 자랑했다. 물론 품질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었지만 광산이라 함은 개중에 품질이 높은 마나석들 역시 존재할 것이었다.
하지만 시타타는 척박하다는 이유 하나로 누구도 탐을 내는 자가 없었다. 그렇기에 로드리고 백작가가 이 머나먼 땅 시타타까지 쫓겨나듯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곳에 마나석 광산이 있었다면 누구나 탐을 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 마나석이 있다는 이야기는…… 누구도…….”
“아뇨, 있습니다. 분명히요.”
루카스 역시도 마나석 광산이 있었다면 분명 알아차렸을 것이다.
‘무슨 마나석 광산이 있다고…….’
작은 마나석도 아니고 광산씩이나 있다면 알아차리고 싶지 않아도 알았을 것이다.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아만에게 되묻는 백작의 표정이 상기되기 시작했다.
아만의 말이 사실이라면 더 이상 백작가 뿐만 아니라 시타타에 가난은 없을 것이다.
“예. 내일 저와 함께 가서 찾아보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루카스가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자 아만이 살짝 윙크했다.
‘미친놈이?’
***
“마나석 광산이라니?”
식사를 마치고 아만의 방으로 들어선 루카스가 물었다.
“있습니다. 마나석 광산.”
“그게 있었으면 내가 알았겠지.”
“하! 자꾸 잊으시나 본데 로드는 지금 인간이시고, 저는 드래곤입니다.”
“그게 뭐가…….”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따지려던 루카스는 말을 끝마치지 못한 채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마나석의 기운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방대한 마나의 존재가 갑자기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시겠습니까?”
아만의 한쪽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이, 이게 무슨…….”
“제가 숨겨 놨지 말입니다. 인간 놈들이 이 땅을 너무 탐내면 귀찮아지지 않습니까.”
“……하!”
“저도 전부는 못 드리고! 적당히 끄트머리 한 귀퉁이 정도는…… 뭐.”
“이 자식…….”
루카스는 감격에 겨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같잖은 해츨링이었던 사고뭉치가 이렇게 커서 제게 보답을 하는 게 너무나도 기특했다.
백작가가 가난해질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었는데 이렇게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부를 쌓아줄 수 있다니, 이제 저도 마음 편히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이럴 때 로드께서도 창고 한 귀퉁이 정도는…….”
“고, 고맙다! 그럼 잘 자도록.”
혹시라도 다른 말이 나올까 얼른 돌아선 루카스는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안 돼. 아직은 절대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