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도심 구울 (1)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 그곳에는 지체 높은 오닐 공작 가의 차남 스키르 오닐이 있었다.
“하아… 하아….”
-터억! 턱!
잡초를 잡아 뽑는 야무진 손놀림. 세차게 호미를 내리찍는 우람(?)한 팔!
“여~ 공작가 영식이~”
그 뒤엔 나무 그늘 아래 바위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아 먹는 폴라.
이상하고 괴상한 그림이었지만, 이것은 스키르가 창고 털이를 하고 받게 된 벌이었다. 이름하여 잡초 뽑기.
폴라 역시도 그 벌에는 포함이었지만, 양심이 차고 넘치는 오닐 공작가의 영식답게 스키르는 그녀를 쉬게 하고 있었다.
“왜, 왜 부르는가! 하아… 하아….”
“꺄하하! 그냐앙~ 잘 돼가나 해서~”
얄미웠다. 구슬땀을 흘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폴라의 시선이 어딘지 모르게 짜증 났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이 저지른 일이니 죄 없는 폴라는 쉬는 게 맞다. 맞는데…!
“부, 부르지 마라! 아직도 뽑아낼 잡초가 한가득한데!!!”
말투에 짜증을 빼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알았어. 힘내~ 아유 시원해~”
이제 바위 위에 제대로 뻗은 폴라가 기지개를 쭉 켰다.
사실 그녀는 지금 고소해 죽을 맛이었다. 그렇게 뻐기던 스키르가 평민들이나 하는 잡초 뽑기를 하고 있다니!
이렇게 귀한 구경거리가 또 어디 있겠는가!
“헤엑… 헥… 앞으로는… 내가!”
-터억!
“사용인들에게!”
-터억!
“더욱! 잘 대해 줄! 것이다!”
-터억! 턱! 턱!
마법약 교수인 하딘 바라드는 엘프였고, 자연 친화적인 그들은 거짓말을 할 줄 몰랐다. 그런 엘프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인간이었다.
스키르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하딘과의 면담에서 스키르는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자신이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 줄 안다는 것을 최대한 어필했다.
그러자 하딘은 그런 스키르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집에 알리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잡초 뽑기라는 엄청난 벌을 내렸다.
그것도 일주일씩이나!
“허억… 허억….”
차오르는 숨과 함께 떨어지는 구슬땀. 스키르는 지금 자신이 살아온 인생 중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깟… 낙제가… 뭐라고오….”
사람들은 질긴 목숨이나 어떤 짓을 해도 사그라지지 않는 사람을 보고 ‘잡초 같다.’라는 말을 했다.
스키르는 지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사용인들이 뙤약볕에서 일하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지만, 언젠가 본 적 있는 그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그들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잡초 하나 없이 관리되던 말끔한 공작저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사람이 하나하나 정성스레 관리한 흔적들임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밥은 먹었는가?”
바위 위에 누워 살랑거리는 나뭇잎을 보며 아이스크림을 녹여 먹는 폴라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으응? 루키?”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햇살에 눈을 살짝 찡그린 폴라가 몸을 일으켰다.
“그래. 왜 너는 놀고 있지?”
“아~ 키르가 나는 죄가 없다고 쉬래! 어? 이게 뭐야?”
해맑게 웃어 보인 폴라가 루카스의 손에 들린 봉투로 손을 뻗었다.
-탁!
하지만 루카스는 잽싸게 봉투를 빼내어 폴라의 손을 막아냈다.
“노는 자에게 먹을 것은 없다. 가서 일해. 폴라.”
“에!? 나는 사실 죄가 없다니까!”
폴라는 그런 루카스의 행동에 억울하다는 듯 펄쩍 뛰었다.
“흥. 친구의 일탈을 막지 못한 것 또한 죄다. 그 자리에 있었으니 공범이지. 그러니 하딘 교수가 너희 모두에게 벌을 내린 것이고.”
하지만 루카스는 그런 그녀의 반응에도 단호하게 고개만 저을 뿐, 손에 들린 봉투는 절대 내어주지 않았다.
“나는 아니야! 나는 쟤를 말리려고 했다니까!”
“스키르! 와서 샌드위치 먹어라. 일하지 않는 게으른 소 같은 폴라는 단 한 입도 주지 말고 말이지.”
그녀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한 손을 휘휘 저어 보인 루카스가 그에게 외치자, 땅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스키르는 그제야 머리를 들었다.
“허억… 허억… 루카스?”
“고생이 많군.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달게 받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아. 그러니 너는 와서 샌드위치를 먹어라.”
“샌드… 위치?”
스키르는 ‘샌드위치’라는 단어에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고… 고맙군. 그런데 폴라는 왜…?”
“그래! 키르! 얘한테 뭐라고 말 좀 해봐!!! 나도 샌드위치 주라고 해!”
“흥. 일하지 않는 자는 먹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 그러니 단 한 입도 주지 말도록.”
샌드위치 하나로 투닥거리는 꼴이라니. 하지만 루카스는 이런 아이들의 반응을 보는 것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이런 작은 일들이 하나하나 피부로 와 닿을 때마다 루카스는 진짜 인간으로 살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줘어!”
“흠… 먹고 싶다는 말이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는 폴라. 루카스는 그런 폴라를 보며 짐짓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응! 응!”
그러자 폴라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는 말이지?”
“응! 응!”
“알겠어. 단. 조건이 하나 있어.”
“조건? 치… 샌드위치 하나에 조건씩이나?”
“하, 샌드위치 하나라니? 이 샌드위치는 평범한 샌드위치가 절대 아니다. 자, 봉투에 뭐라고 쓰여있지?”
루카스는 봉투에 쓰여있는 문구를 보였다.
“이, 이건! 두 시간은 줄을 서야 먹을 수 있다는… 꽉 끼어버린 샌드위치…?”
“그래, 아주 힘들게 구한 거다.”
거짓말이다. 샌드위치는 사실 점심 메뉴로 나온 것 중 하나이고, 봉투는 담을 곳이 없기에 근처에 놓여있는 것을 대충 가져다 썼다.
“무, 무슨 조건인데?”
“스키르를 도와라. 아니, 돕는 것도 아니지. 네가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니까.”
“그, 그치만….”
“싫음 말고.”
폴라는 짐짓 머뭇거리는가 싶었으나, 루카스가 봉투를 냉큼 치워버리자 얼른 손을 뻗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알겠다구! 그러니까 얼른 줘.”
스키르 역시 뒤에서 ‘자신은 괜찮다.’며 중얼거렸지만, 폴라가 도와주는 상황이 썩 싫지만은 않은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아이들은 루카스가 가져다준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더니 연신 감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으음! 진짜 맛있다! 역시 사람들이 줄까지 서서 먹는 데는 이유가 있다니까?”
입안에 샌드위치를 한가득 욱여넣은 폴라는 감동받은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
“진, 진짜 맛있군! 나는 태어나 이렇게 맛있는 샌드위치는 먹어본 적이 없다!”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는 루카스는 이 상황이 웃겨 죽을 것만 같았다.
‘멍청이들…! 어제도 그제도 먹은 샌드위치다. 이 바보들아!’
오천 년 묵은 드래곤 로드였던 그는 이제 인간들의 장난을 완벽히 습득한 것 같았다.
***
어느덧 새로운 학기도 막바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제대로 살아보겠다 마음먹은 뒤로는 아카데미에서의 생활도, 거지 같은 일들도 어느 정도 인간의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이 꽤 편해졌다.
매일 같은 평화로운 일상이 반복되는 것도 물론 좋았다.
짧고 유한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니 무엇을 하던 드래곤일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어린아이의 몸으로 또래의 친구를 사귀고,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고 같이 커 나가는 과정이 썩 괜찮았다.
“루키! 이번 수업에서 너 진짜 잘하더라!”
“흥. 나도 저 정도는 했어.”
“야, 넌 제발 가만히 좀 있어.”
기초 마법 수업이 끝난 그들이 복도를 걸어가자 밝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아냐, 스키르도 잘하던걸?”
“흠흠, 봤지? 나도 잘했거든?”
이젠 제법 친근하게 말하는 것에 익숙해진 루카스가 부드럽게 그를 칭찬하자, 스키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도 알아. 스키르도 잘하는 거. 근데 쟤가 자꾸 먼저 자기 자랑하니까 꼴 보기 싫잖아!”
항상 폴라의 거침없는 일침에 주눅이 드는 스키르였다.
“오늘 점심은 밖에 나가서 먹는 게 어떤가?”
“야, 우리 나가면 큰일 날 수도 있어!”
스키르의 제안에 폴라가 놀라 펄쩍 뛰었다.
“흥, 나는 오닐가의…….”
루카스가 눈치 없이 냉큼 받아치는 스키르를 얼른 막아섰다.
“그래, 나가서 먹자. 어차피 마지막 수업은 오후 네 시니까 시간도 충분하겠군.”
“루카스, 너까지 왜 그래? 아직도 바깥 분위기 안 좋은 거 몰라?”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루카스가 부드럽게 타이르자 폴라가 입을 삐죽였다.
“호위들도 함께 갈 거니 걱정하지 마라.”
“그때는 뭐 우리끼리만 갔냐?! 아 몰라, 그러든지.”
말릴 줄 알았던 루카스까지 동의하자 폴라 역시도 체념했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럼 책 놔두고 여기서 다시 모이자.”
그들의 뒷모습을 보는 루카스의 입에 미소가 번져갔다.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겠지.’
***
꽤 괜찮은 식당이었다. 오믈렛은 폭신했고 토마토 스튜 역시 훌륭했다.
루카스와 일행은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기 위해 카페로 향하고 있었다.
“저번에 갔던 거기로 다시 갈까?”
“아, 거기 파르페가 아주 훌륭하더군. 나는 좋다. 루카스는 어떤가?”
“나는 뭐 상관 없….”
-크르르…….
루카스는 뒤에서 들려오는 괴상한 소리에 대답을 마치지 못했다.
“마, 마물이야!!! 도망가!!!”
뒤이어 혼비백산해 뛰어오는 여자가 보였고, 그 뒤를 쫓는 것은…….
‘구울? 이건 또 무슨 옘병할 상황이야?!’
초록빛 피부에 무엇이 썩어들어가는 듯 코를 찌르는 악취. 게다가 흘러 내리는 듯한 피부까지. 구울이 확실했다.
심지어 한 마리가 아니었다. 열댓 마리쯤 되어 보이는 구울이 도심 한복판에, 그것도 황성 옆에 나타났다.
“으, 으아아악!! 도망쳐!!!”
순식간에 광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구울은 흉흉한 이빨을 드러내며 사람들을 쫓기 시작했다.
“키르!!! 루키!!!”
처음 보는 구울의 모습에 놀라 몸이 굳어 버린 듯한 스키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도련님!! 가셔야 됩니다!!!”
호위 기사 둘이 스키르와 폴라를 하나씩 들쳐 업고 뛰기 시작했다.
“……나는?”
둘뿐인 호위 기사는 제 도련님과 여자아이인 폴라만 눈에 보였는지 그들만 업고 냅다 달려갔다.
“젠장…… 짜증 나는 상황이네.”
구울의 느린 걸음 덕분에 피해를 본 사람은 아직 보이지 않았으나, 도심 한복판에 언데드인 구울이 나타났다는 것은 필시 무언가 잘못됐다는 신호였다.
구울과 같은 언데드 종류의 몬스터들은 지하 던전에 대부분 서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들이 도심에 나타났다? 이건 누군가 고의로 소환한 것이 분명했다.
“네크로맨서.”
흑마법을 다루는 것 중 가장 사악한 것으로 분류되는 네크로맨서.
죽음을 다루는 자. 그들의 소행이 분명했다.
“흠…… 구울이네요.”
“뭐야?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저야 뭐…… 항상 루카스님을 지켜보고 있는걸요.”
어느새 제 옆에 선 아만이 구울을 바라보며 능글맞게 웃었다.
“누가 쟤네를 여기에 불러왔을까?”
“라크메르일 확률이 높겠네요. 걔네 흑마법사에 네크로맨서에 뭐… 많다던데.”
“쟤네 좀 어떻게 해봐.”
“네. 조금만 더 구경하다가요. 저는 쟤네 움직이는 게 재밌더라구요. 흐느적흐느적하는 게.”
마치 어항을 유영하는 관상어를 보듯 아만의 눈동자가 그들의 움직임을 쫓았다.
-콰콰쾅! 콰쾅!
“아! 한참 보고 있었는데요!”
“수습이나 해.”
결국 보다 못한 루카스가 화염 마법을 날려 그들의 몸뚱이를 태워버리자 아만이 폴짝 뛰었다.
“그리고 이게 무슨 거지 같은 상황인지 알아봐.”
“쳇, 제가 뭐 부하도 아니고…….”
“비밀창고.”
루카스의 명령에 입술을 삐죽이던 아만이 그의 한마디에 차렷 자세를 해 보였다.
“옙. 충성!”
그러더니 장난스럽게 제 주먹을 가슴께에 가져다 대, 기사 흉내를 낸 아만이 눈을 찡긋해 보이더니 냉큼 구울 들의 잔재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창고가 사라졌을 수도 있다는 소리는 절대 하면 안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