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34화
34. 지각 변동(1)
“가주를 뵙습니다.”
“가주를 뵙습니다.”
천진오와 천지훈이 가주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천태산은 웃음이 올라오는 것을 애써 억눌렀다. 저 녀석들과 상반된 태도를 보이던 녀석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의자를 드륵 가져와 끌고는, 허락도 없이 자리에 풀썩 앉아 소리치던 막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재밌군.’
지극히 정상인 것은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가주 천태산의 마음을 잡아끈 건 막내의 행동이었다.
“건방진 녀석…….”
적막이 감도는 천가의 행사장 안.
작은 중얼거림에 가문이 술렁였다.
건방진 녀석이라니…… 행사 준비 중에 실수가 있었나? 아니면 천진오와 천지훈이 무엇인가 실수한 것인가.
모두의 마음속에 긴장이 일었다.
여전히 일말의 소음조차 허용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 행사장을 감도는 기운은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그 순간 천진오와 천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예를 표했다.
“가주를 뵙습니다.”
“가주를 뵙습니다.”
한껏 더 진중 하려 노력하는 태도였다.
그 모습을 바라본 가주는 작게 인상을 쓰며 말했다.
“염려 말라. 너희 둘에게 말한 것이 아니니…….”
천진오와 천지훈은 그 순간, 멈칫했다.
둘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면……!
역시나 남는 인물은 딱 한 명이었다.
천가의 막내 천도윤!
천진오와 천지훈의 얼굴이 꿈틀댔다.
‘가주님은 여전히 녀석을 신경 쓰고 있다!’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들은 거슬리는 감정이 얼굴로 드러나는 것을 애써 숨겼다.
그때 가주 천태산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 오라.”
서서히 일어난 둘은 천천히 계단 앞으로 몸을 이동했다.
둘은 계단 앞에 멈춰 위를 바라봤다.
자신을 내려 보는 태산(泰山)이 있었다.
“가문을 위해 무엇을 했고,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말해 보라.”
묵직한 음성이었다.
가주 천태산의 물음에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천진오였다.
“저는 가문을 위해…….”
-무엇을 했냐고요? 버려졌습니다! 가문이 대체 저에게 뭘 해 줬다고 그런 걸 묻는 겁니까?
천태산은 피식 웃었다.
천진오의 얼굴 위로 천도윤의 얼굴이 겹쳐 보인 탓이었다.
‘그 녀석이라면 분명히 저리 대답했겠지.’
웃는 가주의 모습에 당황한 천진오는 잠시 머뭇거렸다.
“커흠, 계속하거라.”
목을 가다듬은 천태산은 발언을 진행 시켰다.
“아, 네. 그럼……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가문을 위해…….”
계속해서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 가주. 그 얼굴을 확인한 천지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그동안 공들였던 것이 결과로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이미 차기 가주는 따 놓은 당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원로를 설득하기 위해 들인 시간과 돈이 얼마였던가.
온갖 뇌물과 아부, 계약을 통해 얻어 낸 원로들의 지지율은 무려 70퍼센트에 육박하고 있었다.
결정하는 것은 가주였지만, 아무리 가주라도 원로들의 의견을 깡그리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게 조금 더 신경 썼어야지.’
비릿하게 웃은 천지훈은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천진오의 연설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천진오의 발언이 끝나고, 천지훈의 차례가 돌아왔다.
천지훈은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첫마디를 뗐다.
“천가가 걷는 길은 패도(霸道)입니다.”
그럴싸한 언어로 서두를 열었다.
그리고 이어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하여, 저는 그 길을 더욱 증진하려 합니다.”
그러나 잘 짜진 다음 연설에서도 가주는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에 천지훈은 당황했다.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의 연설?
백번 양보해 마음에 안 들 수 있다.
그래도 저 표정은…….
아무리 봐도 아버지는 차기 가주 결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보기 힘든 얼굴을 하고 계셨다.
‘대체 왜…….’
천진오와 천지훈은 혼란스러웠다.
* * *
둘의 생각대로, 천태산은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역시…… 성에 차지 않아!’
녀석들은 아직 약했다.
젊어서 이해는 되는 부분이었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성에 차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패도(霸道)를 입에 담다니.’
패도를 걷겠다는 녀석이 자신의 표정을 살피며 눈치를 보는 모습이 실로 가당찮았다.
천태산의 눈에 천도윤이 아른거렸다.
그 녀석은 분명 달랐다.
천태산은 얼마 전 있었던 녀석과의 식사 자리를 떠올렸다.
바람만 불어도 죽을 것 같던 나약한 육신을 가진 녀석은, 자신의 기운 앞에서 한 치의 물러섬도 보이지 않았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역시 분노의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그것도 당사자이자, 천가의 주인인 본인 앞에서 천가에 대한 분노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말이다.
그 당시를 생각하니, 천태산은 다시 웃음이 나왔다.
언제 어디서나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태도.
그것이 천태산이 생각하는 진정한 천가의 자세였다.
‘분통하다.’
지금 결정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분통했다.
막내가 더 자란 뒤, 경쟁을 붙여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결정해야만 했다.
약속한 것이 있으니…….
게다가 막내는 지금 생사가 불투명한 상태였다.
‘그렇게 가지 말라 일렀거늘…….’
잠시 끔찍한 악몽을 떠올린 천태산은 애써 머릿속을 비워 냈다.
어차피 답은 정해 놓은 상태였다.
천태산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차기 가주를 발표하겠다.”
여기저기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는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주머니 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누군가는 이후 있을 임명식 준비를 위해 뒤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약간의 어수선함이 지나고, 천태산은 다시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차기 가주는…….”
그때였다.
구구구구-!
감각이 예민한 몇몇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 안에는 천진오, 천지훈 그리고 천태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눈치가 빠른 장로 하나가 자신의 호위를 시켜 진상을 알아보려 할 때였다.
“모두 대기하라!”
가주의 묵직한 음성이 공간을 채웠다.
장로의 명령을 받아 조용히 움직이려던 호위는 멈칫했다.
가주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혀 있었다.
흠칫 놀란 호위는 곧장 자리로 복귀했다.
원로의 명령이 가주의 명령을 앞설 순 없었으므로.
“…….”
가주 천태산은 그 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소리가 났던 곳을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쥐 죽은 듯 조용하던 공간에 작은 소음이 울려 퍼졌다.
휘우우웅-!
퍼버벙!!
마른하늘에 폭죽 하나가 쏘아 올려졌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폭죽이 아니라 오직 노란색으로만 이루어진 특이한 폭죽이었다.
자리에 참석한 모든 관계자는 경악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감히 신성한 천가의 후계 임명식 때 저리 폭죽을 터트린단 말인가!
아직 후계는 발표하기도 전이었다.
“어떤 놈이 감히!”
나대기 좋아하는 원로 하나가 소리쳤다.
평소라면 질타받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폭죽이 터진 곳은 분명 가문 내였다.
게다가 위치로 보아 출입 금지 구역에서 터트린 것이 분명했다.
어떤 미친놈이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출입 금지 구역에 들어가 폭죽을 터트린 것이다.
이는 파문을 당해도 이상할 게 없는 중죄였다.
“제가 당장 가서 저놈을 잡아 오겠습니다.”
나대기 좋아하는 원로가 시뻘게진 얼굴로 말했다.
이에 원로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대기하라.”
하지만 가주의 허락은 떨어지지 않았다.
모두가 의아했다.
수습하려는 호위를 멈춰 세우고, 직접 가겠다는 원로 역시 멈춰 세웠다.
당최 이해하기 힘든 결정이었다.
그러나 원로는 다시 한번 어필했다. 점점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시기였다. 어떻게든 심폐소생을 하기 위해서는 가주에게 점수를 따야만 했다.
“가주님,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닙니다. 당장 저놈을 잡아 와, 다리몽둥이를…….”
“네놈이?”
가주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로는 식은땀이 죽 흘렀다.
나대지 말라는 건가?
표정을 보니 아니었다.
그렇다면…….
“설마, 지금…… 저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
가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로의 표정이 다시 한번 뻘게졌다.
분통한 얼굴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원로들 사이에서 입지가 좁아졌다고는 하나 원로였다.
잘나가는 길드 하나쯤은 혈혈단신으로 쳐들어가 깨부술 정도는 되는 원로란 말이다!!
이런 치욕은 살면서 오랜만이었다.
“제가 정말 남몰래 뒤에서 사고나 치는 방계 녀석 하나 제압 못 하실 거라, 생각하십니까?”
평소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대듦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뒤에서 원로들이 눈빛으로 지지해 주고 있었다.
가주의 발언이 원로들을 무시한다고 느낀 것이다.
역시나 가장 큰 지지의 눈빛을 보내는 것은 천태산의 친동생 천태수였다.
“보내 주십시오. 제가 녀석의 손과 발을 잘라…….”
“끌끌, 해 보려무나.”
원로의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모두의 시선이 노인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부족한, 왜소한 사내에게 꽂혀 있었다.
원로들, 그중에서도 극소수의 얼굴에 경악이 물들었다.
나머지는 그저 멀뚱멀뚱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심지어 천진오와 천지훈마저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해 보려무나.”
다시 한번 놀리는 듯한 노인의 말이 들려왔다.
원로는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
“네놈 짓이냐?”
“그렇다만.”
“감히 천가의 중대사…….”
원로는 말을 채 잇지도 못한 채, 목이 댕강 잘려 나갔다.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아 고통 없이 보내 주마.”
낄낄 웃는 노인을 보고, 존재하는 모든 천가의 일원들이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매서운 속도로 노인을 향해 나아갔다.
“그만!!”
빠르게 노인에게 접근하던 천가의 발걸음이 일제히 멈춰 섰다. 그들을 멈춘 것은 다름 아닌 천태산이었다.
그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예를 표하라!”
모두의 얼굴에 의문이 깃들었다.
원로를 죽인 이에게 예를 표하라니, 대체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아무리 가주라도 이럴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가주의 말에 사람들은 또 한 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흑운(黑雲)이다.”
“뭐?”
“흐, 흑운?”
“그 가문의 창이자 방패라는?”
전설이라 치부했던 존재가 눈앞에 나타났다.
본적도 느낀 적도 없는 존재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며 눈앞에 서 있다.
그런 그가 원로의 육신을 걷어찬다.
마치 쓰레기를 치우듯이.
좀처럼 믿기 힘든 장면에 가문의 일원들은 넋이 나가 있었다.
“예를 표하라. 흑운이시다.”
좀처럼 나서지 않던 천태산의 동생 천태수가 소리쳤다. 그 역시 당최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흑운의 존재만큼은 확실히 보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흑운을 뵙습니다.”
“흑운을 뵙습니다.”
모두의 무릎이 일제히 땅에 닿았다.
차기 가주 임명식에 나타난 전설적인 존재.
상황은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 녀석은 가문의 물건을 많이도 빼돌렸더구나.”
원로의 머리를 집어던진 흑운은 매와 같은 눈빛으로 주위를 훑었다.
움찔하는 몇몇의 인물들이 눈에 띄었다.
낄낄 웃던 그는 마지막으로 가주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고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빙긋 웃는 천태산.
그가 소리쳤다.
“차기 가주를 발표하겠다!”
갑작스러운 가주의 외침.
모두가 정신을 애써 가다듬고는 천태산의 입을 주목했다.
“오늘 차기 가주뿐만 아니라, 차기 흑운도 뽑을 것이다.”
이어지는 천태산의 갑작스러운 발표.
흑운이 무엇인가.
정말 전설로만 존재하던 인물이었다.
그 뒤를 잇는 사람을 뽑는다니…….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천진오와 천지훈을 바라봤다.
한 명은 가주가 남은 한 명은 전설의 제자가 되는 것이었다.
관중들은 조금씩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천태산의 입이 움직였다.
“차기 가주는…….”
여기저기서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꿀꺽.
제발.
제발!!
“천진오다.”
“와아아아!!”
“예스!”
천진오를 지지하던 소수의 원로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은 대다수는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반면, 대다수의 원로 및 천지훈은 썩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축하한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려요.”
천진오의 측근들은 천진오에게 다가가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러나 축하는 오래가지 못했다.
“조용!”
축하를 채 나누기도 전, 가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다시 가주를 주목했다.
아직 발표가 남아 있었다.
“차기 흑운을 발표하겠다.”
모두의 시선이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는 천지훈에게로 향했다.
흑운. 그 전설의 자리에 걸맞은 사람은 지금 한 명뿐이지 않은가.
사실상 확정에 가까운 발표였다.
“차기 흑운은…….”
모두가 천지훈을 향해 박수와 환호를 준비하고 있었다. 모두가 정답을 아는 시상.
그러나 떨리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사람들은 다시 한번 긴장의 끈을 잡은 채 가주를 주목했다.
두근.
묘한 흥분감에 가슴을 부여잡는 이도 있었다.
드디어 가주의 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주의 입에서는…….
전혀 엉뚱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저놈이다.”
그곳에는 먼지 덮인 옷을 입은 채 황당한 표정으로 가주를 바라보는 천도윤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