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배에 박혀 있던 검이 뽑혀져 나갔다. 섬뜩한 이물질의 감촉에 몸이 떨렸다.
검이란 이토록 차가운 것이구나.
새로운 깨달음에 감탄하다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런 상황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이런 잡생각을 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이미 살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리라.
“그럴…… 수야 없지……. 끄응!”
나는 몸을 일으키며 왼손을 내밀었다.
“이크크!”
페이든은 불에 덴 듯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왼손에 신기한 걸 가지고 계시더군요. 아티팩트인가요? 설마 에고 아티팩트?”
나는 페이든의 질문을 무시한 채 쿠차차에게 신호를 보냈다. 수십 번이나 생사를 같이한 보람이 있었다.
“메가 힐!”
쿠차차는 공격 마법 대신 페이든의 허를 찔러 치료 마법을 시전했다.
따뜻한 빛이 몸을 감쌌다.
치명적인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부러졌던 오른팔의 고통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요. 그래 봐야 고통만 더 길어질 뿐입니다.”
쓴웃음을 지으며 페이든이 말했다. 묘하게 예의 바르고, 묘하게 동정심이 많은 놈이었다.
그래 봐야 암살자, 인간 백정이었지만.
“포기하십시오. 그러면 편해질 겁니다.”
페이든이 자신의 그림자를 향해 검을 내리찍었다.
로열 암스 중 가장 기묘한 무기인 암흑의 로브 월광.
그것의 권능은 그림자.
빛의 이면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어둠의 지배자.
페이든의 검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늘 그랬듯 이번에도 본능이 나를 살렸다.
서걱!
내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검이 옆구리를 베었다.
“발버둥 칠수록 괴로운 것은 당신입니다.”
“그렇게 내가 걱정스러우면 그냥 돌아가든가. 지난번처럼.”
“그럴 수 없습니다. 그때야 존귀하신 분이 계셔서 피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예의가 아니지요. 저도 월급 받아먹는 처진데 이번에도 그냥 돌아갔다가는 감봉입니다.”
페이든이 애처로운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웃기는 조직이군. 로열 암스의 주인이 고작 월급쟁이라니.”
“돈이 깡패지요.”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천성이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페이든은 쓸데없는 말을 많이 지껄였다.
나로선 고마울 따름이었다. 메가 힐의 효력이 아직 남아 있어,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상처가 치유되고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켰다.
카스트로가 가슴에 그어 놓은 X 자 모양의 자상과 페이든이 뚫어 놓은 배의 구멍이 욱신거렸다.
피는 멈췄지만 몸의 충격까지 전부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기력은 되찾을 수 있었다.
한 방.
두 번도 안 된다. 심지어 방어도 안 된다.
오직 한 방.
동귀어진과 같은 한 방.
나는 마력을 끌어 올렸다. 거대한 힘이 몸을 돌아 손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지그재그로 춤추는 시커먼 번개 검이 손바닥에서 튀어나왔다.
“그것이 조금 전의 사내를 폭사시킨 마법입니까? 대체 무슨 마법입니까? 그런 식으로 인간을 폭발시키는 마법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기력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 준 보답으로 번개 검의 이름을 알려 주기로 했다.
“마법이 아니다. 다크 블레이드다.”
“다크 블레이드……. 검이란 말이군요. 검이라…….”
나는 번개 검을 앞으로 내민 채 자세를 잡았다. 심장의 박동에 맞춰 호흡을 조절했다.
두근.
들이마시고.
두근.
내쉬고.
노리는 것은 한 방.
필요한 것은 절대적 타이밍.
다크 블레이드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자꾸 주저앉으려는 다리에 힘을 주어 대퇴근을 크게 부풀렸다.
그리고.
심장박동과 호흡이 완벽하게 일치한 순간.
팟!
나는 땅을 박차고 놈을 향해 날아올랐다. 놈과의 거리가 기하급수적으로 빠르게 좁혀졌다.
바로 그때.
페이든이 로브를 벗어 하늘로 던졌다.
활짝 펴진 채 하늘하늘 내려오던 로브가 갑자기 검은빛을 뿌리며 순식간에 수십 조각으로 찢어졌다.
“죽어랏!”
나는 페이든의 머리를 향해 다크 블레이드를 내리그었다.
필사의 일격이었고, 마지막 일격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불사른 최후의 저항은 허무하게도 허공을 갈랐다.
페이든이 자신의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았던 것이다.
“저는 모르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합니다. 모르는 것은 변수를 만듭니다. 그리고 모든 일의 실패는 그 변수로 인해 생기는 법이죠. 그래서 저는 당신의 그 다크 블레이드가 무섭습니다. 제가 모르는 능력이니까요.”
동서남북 모든 곳에서 페이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냐!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이냐!”
나는 보이는 그림자마다 죄다 다크 블레이드를 쑤셔 넣으며 소리를 질렀다.
펑!
펑!
다크 블레이드가 닿았던 땅, 나무 그리고 바위가 차례대로 폭발했다.
“보여 드리겠습니다, 로열 암스의 진정한 힘을.”
알 수 없는 곳에서 페이든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하하하! 제가 말했지만 이거 좀 쑥스럽군요. 말만 거창했지 사실 별것 없거든요. 월광은 로열 암스 중에서도 전투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무기니까요. 그래도 결코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페이든이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놈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하지만 어느 곳에나 있었다.
“헉…… 헉…….”
나는 모든 행동을 멈췄다. 다크 블레이드를 이런 식으로 휘두르는 것은 불필요한 체력 낭비였다.
이렇게 된 이상 남은 방법은 놈이 공격하는 순간을 노리는 것뿐이었다.
아무리 기기묘묘한 능력을 지닌 월광이라고 해도 공격하는 순간만큼은 반드시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었다.
신중한 마음으로 호흡을 골랐다. 중단 자세를 취해 언제 어느 때라도 반응할 수 있도록 몸을 긴장시켰다.
작은 기척 하나, 작은 소리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일촉즉발.
찰나의 승부.
휘이잉!
바람이 불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천 조각이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그 모양새가 마치 나비 떼 같았다.
수십 개의 그림자가 마치 점박이 무늬처럼 내 주위를 알록달록 수놓았다.
암흑의 로브 월광의 파편들.
내 주위를 맴도는 기분 나쁜 그림자 나비 떼.
오싹!
싸늘한 기운이 혈관을 타고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이런 빌어먹을!”
깨달음이 뇌리를 강타한 순간.
푹!
푹! 푹!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수십 개의 검이 나의 몸을 꿰뚫었다.
“크으으…….”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고통.
눈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절망.
슬그머니 다가와 코끝을 간질이는 죽음의 냄새.
“일단은 댄싱 블레이드Dancing Blade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옥에서 누군가가 어떻게 죽었냐고 물어보거든 그리 대답하십시오. 저승길 선물입니다.”
검들이 몸에서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나의 생명도 피와 함께 밖으로 흘러내렸다.
털썩!
흙바닥에 뺨이 닿았다.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쿠차차가 필사적으로 회복 마법을 걸어 주고 있었지만 상처가 너무 커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고통스럽다.
온몸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이것이 죽음인가? 나는 이렇게 죽고 마는 것인가?
죽음이 나에게 말했다.
“그냥 눈을 감아. 그럼 모든 것이 편해질 거야. 너는 할 만큼 했어. 사실 너도 알고 있잖아. 휴멜에게 복수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꿈인지를. 그냥 이대로 누워 있어. 포기하면 모든 게 편해질 거야. 이제 너도 쉴 때가 되었잖아.”
삶이 나에게 말했다.
“일어나!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너에게 목숨을 맡긴 투사들을 생각해 봐! 그들은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어! 포기하지 마! 일어나서 싸워! 너는 할 수 있어!”
내가 나에게 말했다.
“할……수 있……기는…… 개뿔. 크크크.”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쿠차차가 행한, 무식할 만큼 반복적인 회복 마법 덕분에 수십 군데의 자상은 대부분 아물어 있었다.
“아무래도 다음번엔 그 왼쪽 팔을 잘라 내야 할 것 같군요. 설마 일어설 줄이야. 그 경이로운 체력과 지독한 정신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나는 페이든의 말에 대꾸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서 있는 것 자체로 이미 한계였다.
“어떻게 하려고 그러지? 싸울 수는 있는 건가? 회복 마법을 더 걸어 줄까?”
쿠차차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만약 살아난다면 좀 더 잘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쿠차차는 필사적이었다.
어느새 합체가 되어 있는 월광을 페이든이 다시 하늘로 던졌다.
파파팟!
양쪽 끝을 잡아당긴 것처럼 월광이 수십 조각으로 찢어졌다.
“이번에야말로…… 끝입니다.”
“그거야…… 두고…… 봐야…… 아는 법……이지. 크크크!”
나는 천천히 몸의 긴장을 풀었다. 아예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내 속내를 알 길이 없는 페이든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쿠차차 역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해서 긴장을 풀었다.
숨을 내쉬면서 천천히…… 천천히…….
자아, 깨어나라. 잠들었던 광포한 짐승이여. 잠에서 깨어나 울부짖어라. 모든 속박과 족쇄에서 벗어나 본능이 원하는 대로, 의지가 시키는 대로 날뛰어 보아라.
내가 그 제물이 되어 줄 테니.
꿈틀!
가슴속 심연 깊숙한 곳에서 잠자고 있던 그, 것, 이 살며시 눈을 떴다.
꿈틀!
오랜 잠에서 마침내 깨어난 사나운 짐승이 천천히 기지개를 켰다.
꿈틀!
나는 짐승이 잠자고 있던 곳으로 내려가 짐승을 위로 밀어 올렸다. 순식간에 나의 몸을 장악하는 짐승을 보며 나는 짐승이 잠자던 곳에서 몸을 웅크렸다.
나는 마력의 제어를 완벽하게 풀어 버렸다.
나의 생각처럼 그리고 나의 직감처럼, 마력이 생물과 같은 특성을 지녔다면, 지금이야말로 그동안 참아 왔던 파괴적 본능을 원 없이 폭발시킬 순간이었다.
나는 기대했고, 마력은 그런 나의 기대에 완벽하게 호응했다.
크아아앙!
자유를 얻은 짐승이 천지를 향해 울부짖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