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 배틀Blood Battle
시간은 전광석화처럼 흘러갔다.
나는 두 달 내내 헬 오브 인피니티 안에서 살다시피 했고, 덕분에 하마터면 블러드 배틀의 신청 기간을 놓칠 뻔했다.
“그럼 뒷일을 부탁한다.”
“걱정 마십시오, 형님. 제 돈으로 하는 도박에선 젬병이었지만, 형님 돈으로 하는 도박에선 단 한 번도 져 본 일이 없습니다.”
웰런, 마렉, 리치 그리고 메이어에게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지시한 후 텔레포트를 이용해 제국의 수도로 돌아왔다.
아레나는 여전히 위용이 넘쳤다.
“기다려라. 조만간 내 것이 될 테니.”
아레나를 향해 조용히 선전포고를 한 후 안으로 들어왔다.
거주지로 할당받은 방에 도착하자마자 잠시 후 어떻게 알았는지 미쉘이 쫓아왔다.
“칼리온 님! 그동안 대체 어디 계셨습니까! 수행원도 없이 두 달씩이나 아레나 밖에 나가 계시다니요! 규정대로라면 경기에 나가기는커녕 실격패라고요!”
나는 미쉘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그게 이곳 지배인의 뜻인가?”
미쉘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아니라 규정이 그렇다고요, 규정이…….”
“나를 실격패 처리할 게 아니라면 신경 쓰지 마라. 어차피 블러드 배틀은 서바이벌 방식일 텐데. 모두가 죽고, 단 한 명의 투사만이 생존해야 하는. 조작하고 싶어도 조작할 수가 없는 방식이지.”
“어…… 어…….”
말문이 막힌 입만 뻥긋거리는 미쉘을 밖으로 쫓아냈다.
나를 실격 처리할 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흑풍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다시 말해 돈이 되는 투사니까.
나는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지옥과도 같은 나날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의 기억과 리치의 기억을 이용해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전장과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괴물을 조합했다.
그렇게 만들어 낸 전장에서 그렇게 만들어 낸 괴물과 헬 오브 인피니티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 망할 주인아! 꼭 이렇게 해야 하는 건가!”
헬 오브 인피니티 안으로 얼떨결에 끌려온 쿠차차가 비명을 지르며 불만을 터뜨렸다.
헬 오브 인피니티는 정신을 지배하는 마법으로 현실과 똑같은 고통을 줄 수 있었다. 쿠차차는 정신이 있는 에고 아티팩트였고, 그래서인지 수련의 부작용을 혹독하게 겪어야 했다.
첫 수련에서 호흡이 어긋나는 대가로 나의 몸은 산산이 부서졌다. 물론 나와 한 몸인 쿠차차 역시 그렇게 되었다.
죽음의 고통과 공포를 처음으로 맛본 쿠차차는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 되었다.
덕분에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쿠차차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최악의 전장에서 최악의 괴물과 싸웠던 마지막 수련이 끝나고, 나는 확신했다.
블러드 배틀의 승자는 바로 나라는 것을.
“방심은 금물이지만…….”
며칠 후에 있을 피의 축제가 은근히 기대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지? 그럴 시간 있으면 잠이나 퍼질러 자시지.”
쿠차차가 거친 목소리로 내뱉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수십 번이나 박살 났다 다시 깨어나는 경험을 한 에고 아티팩트는 성격이 더욱더 괴팍해져 있었다. 예의상 붙였던 주인이라는 호칭도 더 이상 붙이지 않았다.
쿠차차는 아티팩트라기보다 투사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로써 나와 쿠차차는 진정한 파트너가 되었다.
내 욕을 쏟아 내며 구시렁거리는 쿠차차를 보자 슬그머니 투지가 끓어올랐다.
역시나 피의 축제가 기대되었다.
“방심은 금물이지만.”
나는 눈을 감았고, 두 달 만에 제대로 된 휴식을 취했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미쉘을 불렀다.
똑똑!
노크와 함께 미쉘이 방으로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칼리온 님.”
목소리가 새침한 게 아직도 어제 일로 화가 난 듯 보였다.
“블러드 배틀에 참가할 테니 신청을 해 줘.”
“알겠습니다.”
미쉘이 사무적인 말투로 대답한 후 방을 나갔다.
블러드 배틀이 열리는 날까지 앞으로 일주일.
그동안 해야 할 일은 육체의 컨디션을 최고로 끌어 올리는 것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력을 일으켰다. 호흡에 맞춰 들숨에는 마력을 일으키고, 날숨에는 마력을 가라앉혔다.
몸 안의 마력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들숨과 날숨.
잡념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무無가 되었다. 종국에는 나 자신조차 잊었다.
완벽한 무아의 세계.
그렇게 서서히 어둠 속으로 침잠해 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 * *
와아아아!
거대한 함성이 경기장의 공기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목적지가 불분명한 적의, 시궁창 같은 현실에 대한 분노 그리고 신기루와 같은 추악한 욕망.
다양한 감정을 음성에 담아 관객들이 광기의 포효를 질렀다.
그 함성을 들으며 나는 대기실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시간들과 나의 승리를 바라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긴장하지 말자. 나는 할 수 있다.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그래. 나는 승리할 수 있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은 지금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어려운 것이었다. 이런 것조차 극복하지 못한다면 복수는 차라리 꿈도 꾸지 말아야 했다.
복수…….
휴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떨림이 멎었다.
똑똑!
“칼리온 님, 나오십시오. 경기가 곧 시작됩니다.”
문 너머에서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아아아!
나는 함성이 울려 퍼지고 있는 아수라들의 전쟁터로 걸음을 옮겼다.
승리를 쟁취하러 갈 시간이었다.
경기장 안에 있는 투사의 수는 100명에 육박했다.
하나같이 대단한 거물들이었다. 자타르 왕국의 투기장에 있을 때부터 들어 봤던 최상위 등급의 투사도 제법 보였다.
이들이 앞으로 나와 싸울 적들이었다. 이들이 모두 죽거나, 혹은 내가 죽어야만 전쟁이 끝나게 된다.
나는 싸워야 할 적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만만히 보이는 투사는 한 명도 없었다.
그래도 왠지…… 질 것 같지가 않았다.
와아아!
“살인광 잭리퍼! 네게 전 재산을 건다!”
“인형술사! 너만 믿는다!”
“무슨 헛소리들이야! 광마狂魔가 최고지!”
자신들이 돈을 건 투사를 관객들은 열정적으로 응원했다.
그때였다.
오합지졸처럼 들쭉날쭉한 응원을 집어삼킨 거대한 하나의 외침.
“흑풍!”
거센 바람이 몰아친 것 같았다. 열광적으로 소리를 지르던 관객들이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밤하늘과 같은 차가운 침묵 속에 다시 한 번 대기를 찢는 외침.
“흑풍!”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외침의 근원지로 몰렸다.
경기장 맨 뒷좌석에 51명의 사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그중 하나인 외팔이 사내가 살짝 손을 흔들었다. 동시에 50명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흑풍!”
쩌렁쩌렁한 울림이 고막을 흔들었다. 간단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결코 간단하지 않은 응원이었다.
잠시 후 제정신을 차린 관객들이 웅성거리며 다시 응원을 시작했다.
경기장은 다시 욕설과 광기 어린 응원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눈에 띄는 짓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애써 무심한 척했지만 나의 파트너는 나를 꿰뚫어 봤다.
“그래도 조금은 기쁘지?”
쿠차차가 능글맞게 웃었다.
“바보 같은 놈들.”
나는 어느새 텅 비어 버린 51개의 뒷좌석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이런 응원을 받고 어떻게 질 수 있을까.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두웅!
두웅!
웅장한 북소리와 함께 경기장 한가운데 거대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번쩍!
하얀 섬광이 모든 것을 덮었다.
경기장에서 전쟁을 기다리고 있던 투사들이 빛에 휩싸여 하나씩 사라졌다.
투사들이 사라질 때마다 관객들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마침내 내 차례가 왔다.
빛이 몸을 감쌌다. 몸이 허공에 떠오르는 감각과 함께 함성 소리가 조금씩 작아졌다.
함성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정적이 찾아온 순간.
밝은 빛이 눈을 찔렀다.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 눈앞에 보이는 것은 더 이상 경기장이 아니었다.
“이곳은…….”
온갖 종류의 꽃들이 부드러운 바람에 산들산들 흔들렸다. 상큼한 풀 냄새와 시큼한 바다 냄새가 바람에 묻어 있었다.
이곳은 섬이었다. 지금은 아름답지만 곧 피로 더럽혀질 저주받은 섬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일단 몸을 움직였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텔레포트 마법진에서 멀어지는 것이었다. 적이 튀어나오는 구멍 앞에 서 있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기에.
100명의 적과 싸워서 살아남는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가능한 조금 싸우는 것이었다. 언제 적이 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지치거나 부상을 당한다는 것은 살아남는 데 치명적이었다.
달리는 도중 문득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해파리 모양의 눈알이 머리 위에 떠 있었다.
적무도에서 보았던, 원거리 송신 마법이 담긴 바로 그 눈알이었다.
이 눈알을 통해 이곳에서 벌어지는 전투가 대륙의 모든 투기장과 돈 많은 부자들의 안방에 중계될 터였다.
“……위험한데.”
블러드 배틀에 참가한 투사들의 실력과 명성을 고려해 봤을 때, 아마도 나는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 말은 곧 내가 가지고 있는 밑천이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된다는 뜻이었다.
그 안에 휴멜이 없으란 법은 없었다.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것은 나중에 생각해도 될 일이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하나, 살아남는 것.
주변의 풍경과 은은히 풍기는 바다 냄새로 보아 결전의 장소는 섬이 분명했다.
블러드 배틀의 방식이 서바이벌인 것을 보아 섬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숲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사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사삭!
사삭!
그들은 굳이 인기척을 숨기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해파리 모양의 눈알 때문에 숨고 싶어도 위치를 숨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재빨리 하늘을 훑었다.
하늘에 떠 있는 눈알의 숫자는 모두 일곱. 그중 하나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
도망을 칠까. 아니면 싸워야 하나.
모두가 적인 상황에서 섣불리 싸우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전투 중간에 제삼자가 어부지리를 노리고 끼어들 가능성도 있었고, 무엇보다 나에 대한 정보가 알려진다는 점이 찝찝했다. 그것은 두 번째 전투부터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게 분명했다.
상대의 전투 방식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전투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만큼 엄청난 차이였다.
“그래도 싸워야겠지.”
슈슉!
나는 다크섀도우를 꺼냈다.
내가 블러드 배틀에서 얻고자 하는 목표는 두 개였다. 하나는 생존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되도록 많은 투사를 죽이는 것이었다.
블러드 배틀은 10년에 한 번 열리는 투기장 최대의 이벤트였다. 그 말은 곧 최고의 도박판이란 뜻이었다.
도박꾼들이 블러드 배틀에서 맞혀야 할 것은 최후의 생존자와 가장 많은 수의 투사를 죽인 최강의 투사였다.
그 둘 모두 내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생존자가 되려면 싸우지 말아야 한다. 반면 최강의 투사가 되려면 싸워야 한다. 계획대로 아레나를 손아귀에 넣으려면 그래야만 했다.
그 이중성. 그 아이러니.
나는 다가오는 눈알을 피해 뛰었다.
생존자와 최강의 투사를 동시에 노리는 방법.
그것은 약한 투사만을 골라 습격하는 것이었다.
“약한 투사들이 없는 게 문제지만. 그래도 걱정 마라. 이 몸이 계시니.”
난생처음으로 쿠차차가 듬직하게 느껴졌다.
우선은 아는 놈부터.
나는 기준을 정했고, 다행히 그 기준에 부합하는 투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만난 첫 번째 적.
그는 초면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에게 선택당했다.
온몸에 털이 덥수룩하게 나 있는, 원숭이처럼 생긴 사내가 해맑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나, 너 알아. 예전에 나 아프게 했던 나쁜 놈. 헤헤헤!”
사내는 반원 모양의 곡도曲刀를 꺼냈다. 그는 곡도로 재주를 부리며 실실 웃었다.
“이번에야말로 팔다리를 부러뜨린 뒤 살가죽을 벗겨 줄게. 헤헤헤!”
사내는 자타르 왕국의 투기장에서 열한 번째 상대로 싸웠던 털북숭이 원숭이였다.
“끼요요요!”
사내가 달려들었다.
과거에 비해 육체의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듯했다. 훨씬 날래고, 훨씬 기기묘묘한 움직임이었다.
부웅!
아래에서 위로 주먹이 솟구쳤다.
나는 뒤로 물러서 공격을 피했다.
빙글!
사내는 주먹질의 반동을 이용해 몸을 회전시키며 다른 손에 들고 있던 곡도를 휘둘렀다.
곡도가 목 아래를 스치고 지나갔다.
“끼요오옷!”
공격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공격과 공격의 간격을 노려봤지만 좀처럼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과거나 지금이나 여전히 막무가내 공격이었지만 수많은 경험을 통해 자신의 약점을 보완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나름 애썼다만…….”
살인의 쾌락을 위해 강해지려는 자와 생존을 위해 강해지려는 자.
애초부터 각오가 달랐다.
주먹을 쥐었다.
이 정도 상대라면 마력을 쓸 필요도 없었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면, 적의 공격이 정교한 톱니바퀴 같다면, 그 톱니바퀴를 부수어 버리리라.
휘익!
주먹을 휘둘렀다.
쨍!
주먹이 곡도를 부러뜨리고 전진했다. 주먹이 멈춘 곳은 사내의 얼굴.
쾅!
폭음과 함께 사내의 얼굴이 움푹 함몰되었다.
“끼…… 끽…… 아, 아파…… 헤헤!”
털북숭이 사내의 몸이 천천히 땅으로 가라앉았다. 몸뚱이가 부들부들 떨리다 이내 잠잠해졌다.
퐁!
작은 소리와 함께 사내의 머리 위에 있던 눈알이 사라졌다.
나는 나의 전투를 지켜보았을 투사들의 위치를 슬쩍 확인한 뒤 잽싸게 전장을 이탈했다.
두 번째 적.
그는 화려한 금발을 지닌 잘생긴 청년이었다. 호리호리하고 날렵해 보이는 몸에 근육이 적당하게 붙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여자깨나 울렸을 법한 곱상한 외모였다.
하지만 나는 그 외모에 속지 않았다. 이놈의 이름을 자타르 왕국의 투기장에서 귀가 따갑게 들은 기억이 있었다.
재능이 넘치는 기사로 명성을 떨치다 첫 출전한 전쟁터에서 사람을 베고, 그 느낌을 잊지 못해 기사 자리마저 박차고 나온 미치광이.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이기 위해 투사가 된 최악의 살인마.
오러 블레이드를 이용해 상대를 수백 조각으로 난도질하는 최상위 등급의 투사.
살인광 잭리퍼.
“낯이 익은데?”
잭리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만난 적 있나?”
같은 투기장에 있었으니 오다가다 마주친 적이 있을 수도 있었다.
대답을 하지 않자 잭리퍼가 미소를 지었다. 눈이 부실 만큼 환한 미소였다.
“하긴 나와 만난 적이 있다면 벌써 잘 다진 고깃덩이가 됐겠지.”
잭리퍼는 끔찍한 소리를 웃으면서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사사삭!
나와 잭리퍼의 싸움을 구경하기 위해 사방에서 눈알들이 모여들었다.
챙!
잭리퍼는 한 뼘도 안 되는 작은 나이프 두 개를 양손에 쥐었다.
두근!
거대한 마나의 파동이 전장을 덮었다.
두근! 두근!
마나가 약동한다.
순수하고 순수한, 부드러우면서도 광포한 푸른 빛깔의 에너지가 작은 나이프에 집약되기 시작했다.
화아악!
나이프가 순백의 빛을 뿌렸다.
짤따란 두 개의 오러 블레이드를 양손에 든 진짜 잭리퍼가 씨익 웃었다.
“어느 정도 관객이 모였으니 이제 네 비명 소리를 감상할 시간이다. 크크크!”
“…….”
고민은 짧고 행동은 빠르게.
스르릉!
나는 검을 뽑았다.
겨우 두 번째에서 밑천 중 하나를 드러낼 생각을 하니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밑천을 숨기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앞으로 싸워야 할 적이 수 명이 될지, 수십 명이 될지 모를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체력을 보존하는 일이었다.
가능하면 쉽게 적을 쓰러뜨린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실천해야 할 절대적인 지상 과제였다.
화아악!
검이 빛을 뿌렸다.
“오러 블레이드?”
살인광 잭리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같은 오러 블레이드라도 시전자의 능력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음을, 나는 카렌의 오러 스피어를 통해 배웠다.
“네놈의 오러 블레이드는 카렌은커녕 베네딕트보다 못하군.”
“카렌? 베네딕트? 그게 누구냐?”
“몰라도 된다. 중요한 것은 네놈의 오러 블레이드는 흉내만 낸 껍데기라는 거지. 네놈의 오러 블레이드는 아무것도 자를 수 없어.”
“헛소리!”
잭리퍼가 몸을 움츠린 채 돌진했다. 그러곤 두 개의 나이프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휘둘렀다.
나는 잔수작을 부리지 않음으로써 내가 한 말을 증명했다.
위아래 일직선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서걱!
“마, 말도 안…….”
잭리퍼는 반 토막이 난 자신의 오러 블레이드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나이프가 서서히 빛을 잃었다.
잭리퍼의 얼굴이 어슷하게 어긋나더니 이내 두 쪽으로 갈라졌다.
나는 투사들의 위치를 확인한 뒤 전장을 이탈했다.
세 번째 적.
“어딜 그렇게 바쁘게 뛰어가? 누나하고 좀 놀다 가렴.”
불길한 예감을 느끼는 순간 바닥을 굴렀다.
쾅!
폭음과 함께 내가 있던 자리에 불구덩이가 생겼다.
얼른 몸을 일으켜 자세를 잡았다.
“젠장.”
세 번째 적을 찾기 위해 너무 주의를 분산시켰다. 덕분에 반대로 선택을 당하고 말았다.
크나큰 불찰이었다.
“귀엽게 생겼네. 마음에 들어. 죽이기 아까울 정도야.”
헐벗은 복장의 여자가 요염한 목소리로 말했다.
밤의 하늘을 닮은 새카만 머리칼이 바람에 찰랑거렸다. 새하얀 얼굴은 작고 오밀조밀했다. 새침해 보이는 눈매에는 장난기가 어려 있었고, 붉은 입술은 반쯤 벌어진 채였다.
낯선 얼굴이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공격을 대비해 자세를 낮췄다. 상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적이었고,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 공격해 올지 예측이 불가능했다.
“그렇게 경계하지 마. 나는 싸울 생각이 없으니까.”
“그럼 이건 뭐지?”
나는 코웃음을 치며 옆을 가리켰다. 내 옆에는 아직도 불타고 있는 구덩이가 있었다.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 호호호!”
여자가 농염한 목소리로 웃었다.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묘하게 신경에 거슬리는 웃음이었다.
“누나와 한편이 되지 않으련?”
여자가 끈적거리는 목소리로 유혹했다.
“한편? 블러드 배틀은 한 사람만이 살아남는 서바이벌일 텐데.”
“바보구나. 그러니까 오히려 힘을 합치는 것에 의미가 있는 거야.”
여자의 말이 옳았다.
모두가 1 대 1을 생각하고 있을 때 2 대 1이 될 수 있다면 승률이 비약적으로 향상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계획에는 허점이 존재했다.
“너를 어떻게 믿지?”
신뢰.
두 사람이 같은 편이라는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했다. 2 대 1이 1 대 2로 뒤집히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었다.
“이 누나를 못 믿는 거야? 호호호! 걱정 안 해도 돼. 나는 절대로 배신 같은 건 안 하니까. 다만 거짓말을 할 뿐이지. 하지만 너무 미워하지 말렴. 여자는 본래 거짓말쟁이잖니. 호호호!”
그때였다.
욱신!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큭!”
나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주저앉았다. 여자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머, 멈춰! 웃음을 멈춰!”
“어머! 내 웃음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니? 실망인데.”
“닥쳐! 웃음을 멈춰라!”
“호호호! 받아들이렴. 그럼 고통이 사라질 거야. 너와 한편이 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게 됐구나. 대신에 네게 최고의 죽음을 선물해 줄게. 영혼마저 불태우는 열화의 불꽃을.”
화르륵!
여자의 손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청염의 불꽃이었다.
“크으윽!”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여자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머릿속을 흔들고 있었다.
“……정신 지배 마법인가?”
한편이 되자고 말한 건 단순히 시간을 끌어 보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호호호호!”
웃음소리가 커졌다.
털썩!
나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머리가 아파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여자의 말처럼 저항을 포기하고 불꽃 속으로 몸을 던지고 싶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정, 신, 차, 려!
강한 충격과 함께 머릿속을 가로지르는 질타의 목소리.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들자 바로 눈앞에 이글거리는 불꽃이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근거리였다.
급히 옆으로 몸을 틀었다.
휘익!
청염의 불꽃이 옆을 스치고 지나가 뒤쪽에 위치한 나무에 적중했다.
화르륵!
커다란 아름드리나무가 순식간에 새하얀 재가 되었다.
“어, 어떻게 피한 거지? 분명히 현혹 마법에 걸렸을 텐데?”
여자가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나는 청염의 불꽃에 그을린 앞머리를 떼어 내며 말했다.
“솔직히 같은 편이 되자는 네 제안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 마음의 빈틈 때문에 현혹 마법에 당한 거겠지. 네 제안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사실은 조금도 없었는데 말이야.”
검을 뽑은 후 마력을 일으켰다.
새하얀 빛이 검에 서리기 시작했다.
“나에겐 이미 한편이 있거든. 쿠차차!”
왼손을 앞으로 뻗으며 파트너의 이름을 외쳤다. 비록 가상의 공간이었지만, 생과 사를 함께했던 에고 아티팩트는 나의 저의를 단번에 눈치챘다.
“라이트!”
왼손에서 빛이 쏘아졌다.
“꺄악!”
여자는 황급히 눈을 가린 채 뒤로 물러섰다. 그 틈을 노려 진각을 밟고 날아올랐다. 그러곤 여자가 있는 곳을 향해 오러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블링크Blink!”
여자가 단거리 순간이동 마법을 시전해 눈앞에서 사라졌다.
“도망쳤나?”
여자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녀의 오른팔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팔 하나가 잘렸으니 아마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다. 치료 마법을 알지 못한다면 과다 출혈로 죽을 것이고, 설사 치료 마법을 알고 있다손 치더라도 피 냄새를 맡은 사냥개들이 가만히 놔둘 확률은 제로였다.
나는 검을 집어넣고 전장을 이탈했다.
문득 스쳐 지나가는 생각.
“저 여자 마법사는 누가 죽인 게 되는 거지?”
사경으로 몰아넣은 것은 나였다. 하지만 끝장내는 것은 아마 다른 투사일 것이다.
최강의 투사가 되려면 가장 많은 숫자의 투사를 죽여야 했다. 허투루 볼 수 있는 자가 한 명도 없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여자 마법사의 존재는 경기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젠장!”
아무리 궁리해도 모호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머리를 아프게 하는 여자였다.
네 번째 적. 그리고 다섯 번째 적.
그들은 죽어 가고 있었다.
한 명은 너클을 끼고 있는 것을 보아 권사로 보였고, 다른 한 명은 부러진 창대를 쥐고 있었다.
“으…… 으…….”
“빌……어먹……을. 이런 곳……에서…… 끝날 줄……이야…….”
나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죽여 줄까?”
“그것도…… 괜찮……겠군. 크크크! 쿨럭!”
권사가 웃음을 터뜨리다 피를 토했다.
푹!
푹!
죽어 가는 두 투사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다.
그러고 보니…….
최강의 투사를 선별하는 방법이 사경으로 몰아넣는 것이든, 투사를 직접 죽여야만 하든,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어졌다.
전자라면 여자 마법사는 나의 것이 된다. 후자라면 심장에 구멍이 뚫린 이 두 놈이 내 것이 된다.
고민거리가 사라졌다.
조금 가뿐해진 마음으로 신형을 날렸다.
여섯 번째 적은 이미 정해졌다.
첫 번째 적과 싸울 때부터 내 뒤를 졸졸 쫓아오는 눈알을 흘끔 돌아본 뒤 달리는 것에 속도를 높였다.
여섯 번째 적.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남자가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낯익은 외모, 낯익은 목소리.
“오랜만입니다, 칼리온 님.”
자타르 왕국 투기장의 안내인 카스트로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 * *
자타르 왕국의 투기장에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이놈은 결코 평범한 안내인이 아니라는 것을.
카스트로는 나의 경기를 지켜본 후 간혹 경기에 대한 감상을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 감상은 경기를 치른 나조차 깜짝 놀랄 만큼 핵심을 찌르는 경우가 많았다.
범상치 않음은 알고 있었지만 블러드 배틀에 참가할 만큼 강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것은 두 가지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었다.
실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블러드 배틀에 참가했던가, 아니면 내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그의 실력이 출중했든가.
아마도…… 후자이리라.
카스트로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기세에 숨이 턱턱 막혔다. 베네딕트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압박감은 휴멜 이후로 처음이었다.
전투 중에도 흐르지 않던 땀이 등줄기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카스트로? 네가 왜 여기에?”
“제가 왜 이곳에 있냐고 물으셨습니까?”
카스트로가 빙긋 웃으며 되물었다.
스스스!
질척한 기운이 바닥을 기어와 발목을 잡았다. 황급히 뒤로 물러나 카스트로의 영역에서 벗어났다.
“이곳에 있는 이유라……. 책임감 때문이라고 할까요?”
카스트로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책임감?”
“자기가 싸지른 똥은 자기가 치워야 하는 법이지요.”
송곳 같은 살기가 미간을 찔렀다.
흠칫!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칼리온 님은 제가 관리하던 투사였습니다. 그 투사가 투기장을 배신하고 투기장에 손해를 입혔으니, 그 죄는 곧 저의 죄이기도 합니다. 칼리온 님과 적무도의 배신자들을 모두 죽임으로써 저의 죄를 씻고자 합니다. 그게 바로 제가 이곳에 있는 이유입니다.”
살기가 점점 짙어졌다. 그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주변의 나뭇가지가 부르르 떨렸다.
나는 다시 뒤로 물러나는 대신 마력을 일으켜 살기에 대항했다. 그러면서 카스트로를 도발했다.
“안내원이나 하던 네놈이 과연 나를 죽일 수 있을까?”
카스트로가 피식 웃었다.
“물론입니다. 왜냐하면 전…… 대륙을 통틀어 단 네 명뿐인 S 등급의 투사니까요.”
“뭐?”
순간 바람이 불었다.
“뭘 멍하니 서 있어! 이 멍청아! 실드!”
쿠차차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투명한 막이 나를 덮었다.
쾅!
거대한 충격이 실드를 때렸다. 실드로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저릿저릿했다.
쩌저적!
결국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실드가 깨어졌다. 실드를 깨뜨린 충격파가 나에게 쏟아졌다.
“피해!”
쿠차차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나는 쿠차차의 조언을 무시했다.
“하압!”
마력을 응축시켜 일거에 폭발시켰다.
양 주먹을 앞으로 뻗어 충격파를 때렸다.
콰광!
힘과 힘의 충돌.
사나운 마나와 광포한 마력의 충돌.
굉음과 함께 돌풍이 일었다. 거센 바람이 폭풍처럼 주변을 휩쓸었다. 아름드리나무가 부러지고, 나무 위에 숨어 있던 투사들이 황급히 몸을 날렸다.
쑥대밭이 된 숲 한가운데 나와 카스트로는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놀랍군요. 고작 C 등급이었던 당신이 나의 일격을 막아 내다니.”
카스트로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놀랍군. 고작 C 등급이었던 나에게 일격이 막히다니.”
나는 이죽거리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속으로는 연방 욕을 해 대고 있었다.
현재까지 살아남아 있는 투사들이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주변에 떠 있는 눈알의 숫자를 봤을 때 생각보다 상황은 암울했다.
일격의 교환이었지만 깨달았다.
카스트로는 강했고, 누가 이기든 어느 한쪽은 만신창이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을.
S 등급의 투사.
전 대륙에 단 네 명뿐이라는, 투사들의 정점에 선 투사.
그동안 싸웠던 그 어떤 적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강함이 느껴졌다.
이런 놈을 부상 없이 이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리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하이에나들은 다친 맹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때였다.
카스트로가 갑자기 살기를 거뒀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제안 하나 하겠습니다.”
“무슨 제안?”
나는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싸우기 전에 잠깐 동안 손을 잡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당신도 마음껏 싸우고 싶으실 테지요? 뒷일 따윈 걱정하지 않고.”
나는 카스트로의 눈을 지그시 쳐다봤다.
한 번 당한 기억 때문인지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함께하는 동안은 절대로 당신을 공격하지 않겠습니다. 마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카스트로가 마나의 약속을 해 버렸다. 그러곤 나를 쳐다봤다.
카스트로의 비웃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자아,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너는 아직도 겁을 먹고 망설이는 것이냐.
“젠장! 함께하는 동안은 절대로 네놈을 공격하지 않겠다. 마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정확히 말하면 마력이었지만, 어쨌든 마나의 약속이 효력을 발휘했는지 이질적인 기운이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의 상황이 딱 그랬다.
나와 카스트로에겐 공동의 적이 있었고, 그래서 한시적으로나마 같은 편이 될 수 있었다.
블러드 배틀에서 생존해야 하는 나에겐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고, 어부지리를 노렸던 하이에나들에겐 예상 밖의 재앙이었다.
얼떨결에 시작된 동맹.
그렇게 사냥이 시작되었다.
“비겁하게 합공을 펼치다니!”
투사는 표범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분노를 담아 외친 후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카스트로는 등을 보이며 도망가는 투사를 쫓지 않았다. 단지 가만히 서서 검을 뒤로 잡아당겼다.
막대한 양의 마나가 검에 서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카스트로는 완벽하게 무방비 상태인 투사의 등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쒜에엑!
검에 서려 있던 기운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푸욱!
“커억!”
푸른 화살이 투사의 등을 꿰뚫었다.
나는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투사의 목을 단칼에 잘랐다.
“투사들과의 싸움이 이렇게 쉬울 줄이야.”
이건 싸움이 아니었다. 학살이었다.
카스트로는 과연 S 등급의 투사다웠다. 그와 내가 힘을 합치자, 나머지들은 추풍낙엽이나 다름없었다. 베네딕트에 버금가는 투사조차 변변찮은 반항도 못 해 본 채 순식간에 척살당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와 카스트로는 10여 명의 투사를 저승으로 보냈다.
“다음은 저놈이 좋겠군요.”
카스트로가 빠르게 멀어지는 눈알을 가리켰다.
카스트로의 뒤를 쫓다 문득 떠올린 생각.
……이러면 카운트가 어떻게 되는 거지.
최강의 투사가 되려면 가능한 많은 투사를 죽여야 했다. 하지만 카스트로와의 동맹으로 인해 카운트가 어그러지고 있었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한 명이 투사를 사지로 몰아넣으면, 다른 한 명이 목을 베는 합동 공격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이런 식이었기에 정확한 카운트를 셈할 수 없었다.
“뭐, 그래도…….”
하나 위안이 되는 건 죽인 투사의 숫자가 최소한 저놈보단 내가 무조건 많으리란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저놈은 곧 내 손에 죽을 것이기에.
파팟!
카스트로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힘차게 땅을 박찼다.
멀리 도망치고 있는 투사의 등이 보였다.
블러드 배틀에 참가한 투사들을 모두 제거하는 데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마지막까지 싸움다운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간혹 우리처럼 편을 만들어 대항해 오는 투사들도 있었지만 그들 역시 큰 위협은 되지 못했다.
커다란 나무의 꼭대기에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섬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와 카스트로의 것을 제외하곤 눈알은 어디에도 없었다.
휘익!
나무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하루 종일 뛰어다녔더니 좀 피곤하군요. 어서 빨리 당신을 죽이고 쉬어야겠습니다.”
검에 묻어 있는 핏방울을 털어 내며 카스트로가 말했다.
“동맹은 파기된 건가?”
카스트로가 평소처럼 예의 바른 미소를 지어 내 질문에 화답했다.
“그럼 이제…….”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최강의 적이 되어 돌아왔다.
적의 적과 싸우기 위해 최강의 적과 한편이 되었다.
그렇게 돌고 돌아 마침내.
동맹이 깨지고 서로가 서로를 향해 검을 든다.
“시작해 볼까?”
마나의 약속이 완료되는 순간 몸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이질적인 기운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족쇄에 묶여 있던 거대한 힘이 용트림을 했다.
휘리릭!
카스트로의 신형이 사라졌다.
나는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아무것도 없었던 빈 공간이었지만, 검이 그 지점을 지나는 순간 그곳에 카스트로가 나타났다.
챙!
불꽃이 튀었다.
검과 검을 맞대고 힘겨루기를 하다 힘껏 앞으로 밀었다. 뒤로 날아가는 카스트로를 향해 왼손을 내밀었다.
“쿠차차!”
“기다렸다고! 파이어 스톰Fire Storm!”
화르르륵!
일직선으로 날아간 불꽃의 소용돌이가 카스트로를 집어삼켰다. 카스트로의 옷과 머리칼이 타들어 갔다.
나는 자세를 바로 했다.
놈이 이대로 끝날 리가 없었다.
예상대로 붉은 불꽃 속에서 거대한 기운이 폭발했다. 불꽃의 폭풍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수천 개의 불씨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그렇게 퍼져 나간 불씨가 섬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변이 불바다로 변했다.
이글거리는 불길과 매캐한 냄새와 시커먼 연기가 바람을 타고 춤을 추었다.
“크윽! 마법이라니……”
카스트로는 온통 그을려 있었다. 온몸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반쯤 타 버린 머리칼은 산발이 되었고, 화상을 입었는지 몸 곳곳에 붉은 반점이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는 격투가이더니, 지금은 무려 오러 블레이드를 휘두르는 검사, 심지어 마법까지 사용할 줄 아는…….”
정확히 말하면 마법은 내가 아니라 쿠차차가 사용한 것이지만 굳이 알려 줄 필요가 없기에 가만히 있었다.
카스트로가 검을 뻗어 내 심장을 가리켰다. 검 끝에서 이어진 가느다란 살기가 심장을 쿡쿡 찔렀다.
“당신은 생각보다 재주가 많군요. 하지만 한눈을 많이 판 사람은 결국 한 곳만 바라본 사람을 이길 수 없는 법입니다.”
“재주가 없다는 말을 어렵게 하긴.”
카스트로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곧 증명해 드리지요.”
스스스!
카스트로의 검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부웅!
푸른 초승달이 대기를 갈랐다.
동시에 쿠차차가 마법을 시전했다. 더 이상 숨어 있을 필요가 없어졌기에, 쿠차차는 말 그대로 물 만난 고기처럼 마음껏 능력을 발휘했다.
“어림없지! 실드!”
쾅!
작정하고 만든 실드가 크게 흔들렸다.
“어떠냐! 나의 실드가…….”
쿠차차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젠장!”
나는 실드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곤 있는 힘껏 뒤로 도약했다.
수십, 아니 수백 개의 초승달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쾅!
콰쾅!
끊임없이 이어지는 폭음에 귀가 멀 지경이었다. 초승달 하나하나가 가공할 위력이었다.
초승달이 폭발하면서 만들어 낸 후폭풍에 불길이 더 세차게 번져 나갔다.
섬 전체가 불지옥으로 변했다. 화끈거리는 열기에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쿵!
불타던 나무가 나와 카스트로 사이로 쓰러졌다. 거대한 불꽃의 장막이 앞을 가로막았다.
장막 너머로 카스트로의 모습이 아련히 비쳤다.
그리고 어느 순간.
스팟!
카스트로의 모습이 사라졌다.
“젠장!”
불길 때문에 카스트로의 흔적을 제대로 찾을 수가 없었다.
오른쪽인가?
왼쪽인가?
아니면 하늘?
“불 속이다!”
쿠차차가 외쳤다.
푸확!
카스트로가 불꽃의 장막을 뚫고 돌진했다. 그의 검이 순백의 빛을 뿌렸다.
오러 블레이드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오러 블레이드뿐이었다.
화아악!
나의 검이 빛을 발했다.
“조금만 더 버텨 줘.”
웰런이 작정하고 구해 온 명검이었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휘익!
쾅!
빛의 검과 빛의 검이 서로를 물어뜯었다.
쾅!
쾅! 쾅!
검이 부딪칠 때마다 격렬한 폭음과 함께 섬광이 번쩍였다.
카스트로가 정교하게 검을 놀렸다. 눈이 시릴 만큼 현란한 움직임이었다. 교묘하게 틈을 파고들어 나의 공격을 무력화시킴과 동시에 날카롭게 목을 찔러 왔다.
나는 순식간에 수세로 몰렸다. 나 역시 호엔레른 백작가의 고급 검술을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몸으로 휘두르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가까스로 막아 내고는 있었지만 온몸에 잔상처가 늘어 갔다. 반격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당신도 알고 있더군요.”
미치도록 몸을 움직이면서도 카스트로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숨이 턱까지 차오른 상태였기 때문이다.
“무엇을! 크윽!”
오러 블레이드가 윗머리를 자르며 지나갔다.
“같은 오러 블레이드라도 시전자의 능력에 따라 수준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말이죠. 후후후!”
나쁜 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왔다. 젠장맞게도! 이런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살인광 잭리퍼에게 했던 말은 잘 들었습니다. 그 말을 그대로 돌려 드리죠.”
고오오오!
대기가 울었다. 바람이 비명을 지른다. 불꽃이 붉디붉은 혀를 날름거렸다.
엄청난 기운이 대기를 찍어 눌렀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의 압박감.
화아악!
카스트로의 검에서 새하얀 빛이 폭사되었다. 순백의 검이 점점 투명한 수정 검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오러 블레이드. 영혼조차 베어 버리는 광휘의 검. 당신의 오러 블레이드는 흉내만 낸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바로 잭리퍼처럼 말이죠.”
카스트로는 수정 검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그는 크게 웃으며 검을 내리그었다.
번쩍!
섬광과 함께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졌다.
“……으윽!”
잠깐 정신을 잃었나 보다.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다행히 나는 살아 있었다. 하지만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검이 깨지면서 생겨난 파편들이 몸 곳곳에 박혀 있었다. 그보다 심한 상처는 오른쪽 어깨부터 배까지 길게 그어진 검상이었다.
쿠차차가 회복 마법을 걸어 줬는지 어느새 새살이 돋아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누워 있던 주변에 피 웅덩이가 생길 만큼 깊은 상처였다.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머리가 핑 돌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아직도 설 수 있다니 대단하군요.”
카스트로는 금방이라도 검을 집어넣을 태세였다. 놈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놈의 확신에 찬물을 끼얹어 주기로 했다.
“네놈 말처럼 한눈을 많이 판 사람은 결국 한 곳만 바라본 사람을 이길 수 없는 법이지.”
카스트로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는 나를 검사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검사가 아니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막기 위해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한 격투가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는 오직 격투가였다.
“실수했군.”
격투가 주제에 검을 드는 선택을 하다니.
크나큰 실수였다.
오러 블레이드를 상대하는 방법…….
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내 손에 죽은 카렌이 그 답을 알려 주었다. 고정관념에 빠진 나의 머리가 그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몸속에 잠들어 있던 마魔의 힘이 끓어올랐다. 뜨거운 용암이 되어 몸속을 질주했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터질 듯이 꿈틀거렸다.
나는 거침없이 밀려 올라오는 힘을 양손에 집중시켰다.
다크섀도우가 칠흑의 빛을 발했다. 어둠보다 어두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
더욱더 마력을 쏟아부었다.
사방이 막혀 있는 주먹에 마력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갈 곳이 없는 마력이 울부짖었다. 폭주할 곳이 없는 답답함을 거칠게 호소했다.
주먹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마력을 쏟아부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투명한 빛을 발하는 수정 검을 옆으로 누인 채 카스트로가 돌진했다. 그는 짧지 않은 거리를 순식간에 도약하여 내 심장을 향해 검을 찔렀다.
나는 눈을 감았다.
금방이라도 심장이 꿰뚫릴 것처럼 간담이 서늘했다. 하지만 본능적인 공포를 억지로 가라앉히며 정신을 집중했다.
카렌이 보여 줬던 그것.
오러 블레이드의 변형.
신의 창, 오러 스피어.
그녀가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러 블레이드가 변형될 수 있는 힘이라면 나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아아아앗!”
단말마의 기합.
갈 곳이 없던 마력이 틈을 비집고 솟아올랐다. 작은 틈으로 마력이 몰려들었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틈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폭발했다.
나는 눈을 떴다.
경악하는 카스트로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빛을 잡아먹는 어둠 속의 어둠.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암흑의 주먹.
“오러 피스트!”
완전한 광휘의 검과 검은 오러가 아른거리는 주먹이 맞부딪쳤다.
쾅!
천지가 진동했다. 땅이 뒤집히고, 불타던 나무가 송두리째 뽑혀 날아갔다.
우두둑!
“크윽!”
나는 부러진 오른팔을 감싸 쥐며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카스트로는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다만 멍하니 자신의 오러 블레이드를 쳐다봤다.
쩌적!
쩌저적!
투명한 수정 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쨍!
쇳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으로 검이 깨어졌다.
“……말도 안 돼.”
손잡이만 남은 검을 보며 카스트로가 중얼거렸다. 넋이 나간 듯 멍한 얼굴이었다.
어쨌든 나에겐 기회였다.
“쿠차차!”
“윈드 스피어Wind Spear!”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왼손에서 곧바로 마법이 터져 나왔다.
거대한 바람의 창이 카스트로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때였다.
카스트로가 슬쩍 손을 올렸다. 멀리 떨어져 있던 죽은 투사의 검이 둥실 떠올라 카스트로의 손으로 빨려들어 갔다.
“말도 안 돼! 너 따위가! 너 따위가! 나의 오러 블레이드를 깨뜨리다니! 너 따위가!”
악귀와 같은 얼굴로 카스트로가 소리쳤다. 그를 중심으로 사나운 기세가 퍼져 나갔다.
휘익!
가볍게 휘두른 검에 윈드 스피어가 폭발했다.
카스트로의 검이 서서히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막아 봐라! 나의 오러 블레이드를!”
이성을 잃은 카스트로가 광휘의 검을 휘두르며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그의 검을 막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나는 그의 검을, 오러 블레이드를, 박살 내 버릴 작정이었다.
바로 나의 최강 그리고 최후의 필살기로.
그 무엇도 벨 수 없는 허상의 검.
하지만 그 어떤 것도 파괴할 수 있는 파멸의 검.
다크 블레이드!
파지지직!
손바닥에서 찌릿 전기가 올랐다. 이윽고 무시무시한 번개 모양의 검이 솟아올랐다. 암흑의 검이 손아귀에서 들쭉날쭉 몸부림을 치며 날뛰었다.
“카스트로!”
나는 다크 블레이드를 잡은 후 카스트로를 향해 휘둘렀다.
흑백의 검이 서로 교차했다.
아무런 충돌음도 들리지 않았다.
백의 검이 아물어 가던 가슴의 상처를 다시 베었다. 흑의 검이 카스트로의 목을 통과했다.
푸슛!
찢어진 가슴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커헉!”
나는 피를 토하며 휘청거렸다. 그러다 결국 한쪽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카스트로가 의아한 눈으로 나와 다크 블레이드를 번갈아 쳐다봤다.
“마법이 실패한 건가?”
“아니, 실패하지 않았다. 크크크!”
내 웃음소리가 거슬린 듯 카스트로가 인상을 썼다.
“마지막까지 마음에 안 드는 놈이군.”
가식적인 예의를 벗어 던진 카스트로는 뒷골목 건달이나 다름없었다.
카스트로가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천천히 다가왔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구름을 움직였고, 구름이 태양을 가렸다. 짙은 그림자가 나와 카스트로의 머리 위에 드리워졌다.
“끝이다. 빌어먹을 놈아.”
카스트로가 검을 치켜들었다.
그 순간.
카스트로의 가슴이 볼록 부풀어 올랐다.
“뭐, 뭐지? 크윽!”
펑!
오러 블레이드가 폭발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카스트로의 몸 전체가 고무공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호리호리했던 몸매가 순식간에 수백 킬로그램의 뚱보로 변모했다.
“큭! 크아아아!”
계속 부풀어 오르던 몸이 마침내 펑 소리와 함께 폭발했다. 흩뿌려진 핏방울이 비가 되어 쏟아졌다.
“크크크!”
나는 혈우를 맞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살아남았다. 생존했다. 가장 많은 투사를 죽여 최강의 투사가 되었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도 될 문제였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렇게, 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
“크하하하!”
미친놈처럼 광소를 터뜨렸다.
그때였다.
“설마 진짜로 최후까지 살아남을 줄은 몰랐습니다. 어쨌든 축하드립니다.”
낯선 목소리가 땅 밑에서 들려왔다.
오싹!
소름과 함께 차가운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변변찮은 거지만 일단 축하 선물입니다.”
구름이 만들어 낸 그림자에서 새하얀 뭔가가 쑥 튀어나왔다.
상상치도 못한, 말 그대로 완벽하게 허점을 노린 일격이었다.
조금이나마 몸을 비튼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푸욱!
검이 배를 꿰뚫었다.
“이런! 심장을 노렸는데. 생각보다 반사 신경이 훌륭하시군요.”
스르륵!
마치 유령처럼, 그림자 안에서 중년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의 지배자.
달의 여신 파트라체의 숨결이 담긴 암흑의 로브, 월광의 주인.
세상에 단 일곱뿐인 로열 암스의 소유자.
섀도우 헌터 페이든.
나이트워커 최고, 최악의 암살자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