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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30/45)

동행

“주인, 뭐 잊은 것 없나?”

쿠차차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냥해 온 토끼의 가죽을 묵묵히 벗길 따름이었다.

“뭐 잊은 것 없냐니까?”

쿠차차의 목소리에 조금 짜증이 섞였다.

하지만 진정 짜증이 난 사람은 바로 나였다. 쿠차차는 같은 말을 마치 앵무새처럼 수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잊은 게 있을 텐데?”

“참자. 참는 자에게 복이 있느니…….”

나는 폭발하기 직전인 짜증을 힘들게 가라앉히며 토끼 손질을 계속했다.

“이 몸께서 틀린 말 했나? 은혜를 갚으라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이 몸을 존경하고 고마움을 표시하면 된다니까. 간단하잖아? 자아, 따라 해 봐. 볼, 품, 없, 는, 저, 를, 구, 해, 주, 셔, 서, 감, 사, 합, 니, 다, 쿠, 차, 차, 님.”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 끊어졌다.

아아…….

한계다…….

쾅!

왼손을 휘둘러 손등으로 나무둥치를 쳤다. 입을 다물게 할 셈이었건만 쿠차차는 이미 손안으로 숨은 후였다.

손등이 욱신거렸다.

스르륵.

“왜 몸을 학대하고 그래? 크크크!”

피부를 뚫고 다시 나타난 쿠차차가 비웃음을 흘렸다.

쿠차차의 얼굴은 검붉은 광택이 도는 금속으로 이뤄져 있었다. 하얀 손등에 검붉은 오크 머리가 마치 흉터처럼 새겨져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크게 흉물스럽진 않았다. 일부러 가까이 다가와 보지 않는 이상 특이한 문신으로 보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제 슬슬 잊은 게 생각났을 텐데?”

“……그래. 고……맙다. 구해 줘서.”

더럽고 치사해서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쓸개즙을 삼키는 기분으로 내뱉었다.

“크크크! 진즉에 그럴 것이지!”

쿠차차가 통쾌한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는 토끼 손질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삼키며 모아 온 나뭇가지를 원뿔 모양으로 쌓았다.

반지를 나뭇가지에 대고 파이어 볼을 시전하려 했을 때,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반지에 저장되어 있는 파이어 볼은 불길의 조절이 불가능했다. 때문에 모닥불을 피울 때마다 애써 모아 놓은 나뭇가지들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가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불길을 조절할 수 있는 성능 좋은 화염 방사기가 손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쿠차차, 불을 뿜어서 여기에 모닥불 좀 피워 봐.”

“뭐? 지, 지금 뭐라고 했지? 감히 이 몸을 부려 먹을 셈인가? 은인인 이 몸을?”

“아니면 예전처럼 이 고기가 다 익을 때까지 불을 뿜고 있을래?”

나는 꼬치에 꿴 토끼 고기를 쿠차차의 눈앞에 흔들었다.

“쳇!”

한참 동안 눈싸움을 한 끝에 결국 쿠차차가 원뿔 모양으로 쌓인 나뭇가지에 불을 뿜었다.

화르르!

순식간에 모닥불이 타올랐다. 꼬치를 적당한 거리에 비스듬히 꽂고 익기를 기다렸다.

바람이 불자 불꽃이 춤을 추었다. 늑대의 외로운 울음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풀잎이 바스락바스락 속삭였다. 부드러운 밤의 기운이 가만히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밤이었다. 산 채로 매장당할 뻔했던 것이 불과 어제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밤이었다.

나이트워커의 함정은 나를 거의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아니, 실제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절망적인 상황을 일발역전의 묘수처럼 단숨에 뒤집은 것이 바로 쿠차차였다.

그는 브레스를 뿜어 나를 생매장시키려 했던 바위와 흙더미에 구멍을 뚫었을 뿐만 아니라, 뚫린 구멍을 통해 화살과 마법을 쏟아부으려 했던 암살자들로부터 나를 구하기 위해 공간이동 마법인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쿠차차가 텔레포트한 곳은 나이트워커의 함정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호수였다.

제대로 된 좌표 없이 급하게 텔레포트한 탓에 나는 기절한 채로 호수 한가운데 떨어져야 했다. 하마터면 물속에서 익사할 뻔했지만 결과적으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간신히 호수 밖으로 헤엄쳐 나온 나는 나이트워커를 피해 깊고 깊은 숲으로 몸을 숨겼고, 그동안 쿠차차는 자신의 영웅적 행위를 끊임없이 과시하며 나에게 보답을 종용했다.

그 후로 하루가 지났다.

걱정과 다르게 나이트워커는 나를 추적하지 않았다.

암살자들은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함정이 실패하자마자 도망치듯 산을 내려갔다. 철저하게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이 과연 대륙 제일의 암살 집단이라 할 만했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살아났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목숨을 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쿠차차의 등장은 나의 계산에 없는 것이었고, 따라서 운과 같았다. 운에 기대어 살아났다는 사실이 한없이 못마땅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운이 아니라 절대적인 실력이었다.

쿠차차에게 솔직하게 감사의 인사를 못 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왜 내 몸속으로 들어온 거지?”

고기가 거의 익어 갈 즈음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사실은 진즉에 물어봤어야 할 질문이었다. 하지만 나이트워커의 추적을 경계하며 부상을 치료하는 데 전념한 탓에 여태껏 궁금증을 느낄 만한 여유가 없었다.

“이 몸께선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최상급 에고 아티팩트라고 말했을 텐데. 물론 마나의 기운이 담긴 물질이 있어야 한다는 제약이 있지만.”

“그건 나도 알고 있어. 내가 묻고 싶은 건 어째서 내 몸으로 들어왔냐는 거다.”

쿠차차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몸이 아니라 그 시커먼 장갑이다. 그리고 더 정확히 말하면 들어간 게 아니라 납치당한 것이고.”

“납치?”

“그때, 주인이 바위산에서 나를 꺼내 줬을 때, 너무 피곤해서 잠을 자려고 바위 안으로 들어갔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그 망할 놈의 장갑이 이 몸을 빨아들였다.”

“다크섀도우가 너를 빨아들였다고?”

“주인이 마나석을 잡을 때마다 빠져나오려고 해 봤지만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더군. 흡착력이 굉장해. 뿐만 아니라 이상할 정도로 아늑하고 평온하여 잠이 쏟아지더군. 정신을 차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거의 하루 종일 잠만 자야 했어. 그 시커먼 장갑…… 평범한 아티팩트가 아니야. 대체 정체가 뭐지?”

다크섀도우.

호엔레른 백작가의 무기 창고에서 몰래 가져온 정체불명의, 그리고 생체 이식이라는 전무후무한 능력을 보유한 기괴한 아티팩트.

내가 아는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시커먼 장갑의 정체가 뭐냐니까?”

모르는 것을 물어봐야 대답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되물어보기로 했다.

“잠이 쏟아진다더니, 왜 지금은 멀쩡한 거지?”

“글쎄. 주인이 위기에 빠져 이 몸의 도움을 애타게 청원하던…….”

“그런 적 없다.”

“……어쨌든 그때, 갑자기 눈이 떠졌다. 마치 각성한 것처럼. 그 뒤로는 정신이 말똥말똥하군. 태어나서 이렇게 맑은 정신은 처음이다.”

기분이 좋은 듯 쿠차차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내 위로 흙더미가 쏟아져 그대로 생매장당할 뻔했던 그때. 막대한 양의 마력이 왼손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쿠차차가 깨어났다.

마력과 쿠차차.

그러고 보니 지금도 제법 많은 양의 마력이 왼손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위에서 아래로 물이 흐르는 것처럼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마력이 움직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력의 흐름을 끊었다.

“어? 어? 뭐, 뭐지? 가, 갑자기 졸음이…….”

스르륵.

미처 말을 마치지 못하고 쿠차차가 피부 안으로 눈 녹듯 사라졌다.

다시 마력을 주입했다. 희미하게 쿠차차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력의 양을 높이자 그제야 쿠차차가 오롯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그렇군.”

나는 마력과 쿠차차와의 상관관계를 깨달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감히 생명의 은인을 시커먼 장갑 안에 가두려 하다니! 이 은혜도 모르는……. 이, 이런! 또 졸음……이…….”

시끄러운 쿠차차의 입을 봉인하기 위해 나는 망설임 없이 새로운 깨달음을 사용했다.

마력의 공급이 끊기자 쿠차차가 천천히 손등 안으로 스며들었다.

시끄러운 오크 머리가 사라짐으로써 깨달음이 사실로 증명되었다.

쿠차차가 깨어나기 위해선 마력이 필요했다. 그것도 상당히 많은 양의 마력이.

문제는 다크섀도우를 꺼내기 위해서도 같은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다크섀도우를 꺼낼 때마다 쿠차차가 튀어나오는 건가. 곤란한데.”

이래선 수련도, 상처의 치료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가장 정신 집중이 필요할 때에 가장 밉살맞은 놈이 나를 열 받게 할 테니 말이다.

토끼 고기를 뜯으며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부스럭!

인기척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로브를 벗어 모닥불을 덮었다. 그러곤 나뭇가지로 로브 위를 두드려 불을 껐다. 삽시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암살자들의 함정에서 빠져나온 지 이제 겨우 하루 지났을 뿐이건만 너무 방심하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자신을 탓했다.

부스럭!

미처 숨을 새도 없이 이방인이 나타났다.

그는 달빛보다 하얀 흰옷을 입고 있었다. 마치 예식에 입는 옷처럼 화려한 문양이 옷 전체에 수놓아져 있었다.

그가 나무 그늘에서 달빛 아래로 걸어 나오자 달빛이 마치 후광처럼 그의 몸을 감쌌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인神人 같은 모습이었다.

“응? 낯이 익은데. 형씨,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나?”

황족처럼 화려한 복장을 한 사내가 건달처럼 말했다.

나는 경계하는 자세를 풀지 않은 채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의 말처럼 나 역시 그가 낯이 익었다.

“아…….”

순간 머릿속이 번쩍했다.

트와일의 성문 앞에서 경비병에게 시비를 걸었던 거지.

눈앞의 사내는 그 거지가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니…… 트와일에서 나를 도와주었던 돈 많은 거지잖아? 오오! 이런 곳에서 형씨를 다시 만날 줄이야. 옷이 날개라더니.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어 못 알아봤잖아. 하하하!”

사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고작해야 거지에서 떠돌이 용병으로 바뀐 것이지만, 사내는 거지에서 황족으로 바뀐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옷이 날개라는 말은 내 쪽에서 먼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내 이름은 칼렙. 형씨는?”

“칼리온.”

“난 루미라고 해.”

남자들끼리의 대화에 느닷없이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칼렙의 뒤에서 낯익은 여자가 얍, 하는 기합과 함께 깡총 뛰어나왔다. 작은 키에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여자였다.

“또 만났네.”

악덕 상술을 통해 나를 빈털터리로 만들었던 천재 대장장이가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는 사이십니까?”

칼렙이 루미를 향해 정중하게 물었다. 시정잡배와 같은 모습만 보아 온 나에겐 상당히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존댓말이라.

비록 입은 거칠지만 옷차림을 봤을 때 칼렙은 귀족, 아니 최소한 귀족에 준하는 자가 틀림없었다.

그런 칼렙이 대장장이인 루미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루미의 재능이 아무리 천재적이라 할지라도 대장장이는 대장장이일 뿐이었다.

재능은 계급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계급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보다 높은 계급뿐이었다.

다시 말해, 루미 역시 귀족에 준한다는 뜻이었다. 아티팩트를 이용해 담금질을 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

“내 작품을 제대로 평가해 준 높은 안목의 소유자야. 칼렙도 좀 배우면 좋을 텐데.”

“형씨였군. 루미 님이 만든 무기를 극찬했다는 사람이. 형씨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 불쌍하신 분이 착각의 늪에 빠지게 되었어. 지상 최고의 천재라느니, 내가 만든 검은 무적이라느니, 하루 종일 이상한 소리만 하게 되었다고. 어떻게 책임질 거야?”

칼렙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불쌍한 천재 대장장이의 팔꿈치에 옆구리를 얻어맞고 말았다.

“뭐? 착각의 늪?”

나는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아는 얼굴이었지만 경계심을 늦출 만큼의 친분은 없었다.

“나를 쫓아온 건가?”

목소리에 살기를 담아 말했다.

두 사람의 움직임이 즉각 멈췄다.

“딱딱하게 왜 그래? 뭐 죄진 거라도 있어? 혹시 수배범?”

칼렙이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허리춤에 매달린 검이 슬쩍 보였다.

검의 공격 범위에 들어가기 직전 나는 한 번 더 경고하기로 결정했다.

화아악!

살기를 일으키자 사악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뱀 같은 기운이 풀숲을 헤치며 사방으로 기어 나갔다. 잔인하고 흉포한 핏빛 뱀이었다.

완쾌되지 않은 몸으로 무리를 했더니 가슴 부위가 시큰거렸다. 하지만 아픈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칼렙이 슬쩍 루미의 앞을 가로막았다.

“성격이 급한 형씨구만.”

“쫓아온 게 아니라 우연이야, 우연! 길 가다 마주친 거라고! 모든 인연이 그렇듯.”

칼렙의 뒤에 숨은 루미가 얼굴만 빼꼼히 내민 채 말했다.

“우연이라…….”

“그래! 우연이야, 우연!”

루미가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긍정했다. 너무나도 형편없는 연기라 차라리 속아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군. 좋아. 믿겠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루미에게 나는 손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만나서 반가웠다. 그럼 이만 안녕.”

나는 휙 돌아선 후 뚜벅뚜벅 숲 속으로 걸어갔다.

등 뒤로 허둥거리는 루미와 칼렙의 기척이 느껴졌다. 정말로 우연히 만났다면 나를 잡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만약 아니라면.

“자, 잠깐! 형씨!”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칼렙이 당황한 얼굴로 우물쭈물했다.

“나에게 접근한 이유가 뭐지?”

“우연이라니까!”

루미가 소리쳤다.

“그럼 이만.”

다시 몸을 돌리자마자 칼렙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유를 말하지!”

“진짜 우연…… 읍! 읍!”

칼렙이 루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발버둥 치는 루미를 단단히 붙잡은 채 말했다.

“솔직히 말해 루미 님과 난 쫓기고 있어. 그래서 형씨에게 접근한 거야. 형씨, 용병이지? 호위를 부탁하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될까?”

“왜 우연인 척한 거지?”

“루미 님이 보통 짠돌이가 아니라서. 형씨가 봉이니 조금만 구슬리면 공짜로 부려 먹을 수 있다고 하셨거든.”

진심이 느껴졌다. 이것은 절대로 연기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진심이 내 마음에 불을 질렀다.

무시하자.

상대할 가치도 없는 자들이었다.

나는 다시 몸을 돌렸고, 이번에야말로 다시는 돌아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휘익!

고개를 살짝 움직여 날아오는 화살을 피했다. 주변을 둘러보자 어느새 형형한 눈빛을 뿜어내는 복면인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복면인들의 살기로 보아 절대로 나를 그냥 보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설령 루미와 내가 모르는 사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두 번째 계획, 시간 끌기 성공! 이제 당신과 우린 한 배를 탄 몸이야!”

루미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공짜로 나를 부려 먹게 되어 미치도록 기쁜 듯 보였다.

“형씨, 미안하게 됐수다.”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칼렙이 말했다.

“쳐랏!”

“여자만 빼고 다 죽여랏!”

복면인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다크섀도우를 꺼내려다 문득 쿠차차가 떠올랐다.

“젠장!”

나는 선두에 서 있는 복면인을 쓰러뜨린 후 그의 검을 빼앗았다.

챙!

“크악!”

검을 휘두르며 다짐했다.

일단 급한 불을 끄고 난 후 반드시 대가를 받아 내겠다고.

“욥! 힘내라! 얍! 잘한다, 공짜 용병!”

칼렙 뒤에 숨어 방글방글 웃는 낯으로 응원을 하고 있는 루미를 보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결국 루미와 칼렙에게 대가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화가 났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갈 만큼 즐거웠다. 즐거워해야 할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챙!

챙!

“크앗!”

“웬 놈이냐!”

“그러는 너희들은 웬 놈이냐!”

칼렙과 루미를 노리고 온 복면인들과 한창 싸우고 있을 때, 갑자기 또 다른 복면인들이 나타났다.

새로운 복면인들은 가타부타 말없이 공격을 시작했다.

필연적으로 복면인들끼리의 싸움이 벌어졌다.

칼렙과 루미 그리고 나는 그 틈을 이용해 슬그머니 전장을 빠져나왔다.

아무도 우리를 쫓아오지 않았다. 아니, 못한 것이리라.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느라 복면인들은 눈뜬장님처럼 우리가 도망치는 것을 바라만 보아야 했다.

“형씨도 쫓기는 몸?”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칼렙이 인상을 찡그렸다.

“누구한테 쫓기는 거지?”

“나이트워커.”

“이런 거지 같은 경우가…….”

칼렙이 똥 씹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묘한 기쁨이 가슴속에 차올랐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칫! 혹 떼려다 혹 붙였네.”

칼렙의 등에 업혀 있던 루미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끝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숲 속을 뛰었다. 서로 동귀어진했는지 복면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나무로 가려진 작은 공터에 멈춰 몸을 쉬었다.

“자아, 이제 어쩌지?”

칼렙과 내가 필사적으로 달리는 동안 칼렙의 등에 업혀 쿨쿨 잠을 잤던 루미가 팔팔한 목소리로 말했다.

“헤어져야지. 같이 다닐 이유가 없을 텐데.”

쿠차차와는 다른 의미로 복장 터지게 하는 여자였다. 휴멜에게 복수하기도 전에 화병으로 죽을 수는 없었다.

“형씨, 이유가 왜 없어?”

“무슨 이유?”

“형씨 때문에 졸지에 인간 백정 놈들에게 쫓기게 됐잖아.”

“그래서? 책임이라도 지라는 건가?”

“그래! 책임을……. 읍! 읍!”

칼렙이 루미의 입을 얼른 막았다.

“내가 뻔뻔하긴 해도 염치가 없지는 않아.”

그게 그거 아니냐, 하고 묻기 전에 칼렙이 말을 이었다.

“정식으로 형씨를 고용하지. 아까 솜씨를 보니 그냥 부려 먹기에는 미안할 정도더군. 이 정도면 어때?”

휙!

칼렙이 내 쪽으로 작은 배낭을 던졌다. 받고 나서 살펴보니 배낭에서 은은하게 마나의 기운이 풍겨 나왔다.

“돈 많은 용병들의 필수품 마법 배낭이다. 본래 부피의 100배를 집어넣을 수 있는 최상품이지. 형씨, 배낭을 열어 봐.”

배낭을 열자 그 안에 검은 빛깔의 로브가 있었다. 역시 로브에서도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온도 조절 마법이 걸려 있는 로브다. 그 로브 하나만 있으면 한여름, 한겨울 할 것 없이 쾌적한 모험이 가능하지.”

돈으로 준다 하였으면 단번에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칼렙이 대가로 건네준 마법 배낭과 마법 로브는 정말로 구미가 당겼다. 여러모로 유용할 것이 분명했다.

루미의 대장간에는 수십 개도 넘는 아티팩트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칼렙은 고용의 대가라며 아티팩트를 두 개나 건네준다.

대체 이들의 정체가 뭐기에 이렇게 아티팩트가 넘쳐 날까, 불현듯 의문이 생겼다. 생각보다 훨씬 고위 계층의 귀족일 수도 있었다.

칼렙의 새하얀 복장이 새삼 눈이 부셨다.

“마지막으로 서비스 하나. 동행하는 동안 인간 백정 놈들이 습격하면 함께 싸워 주지. 나 정도의 실력자를 동료로 두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지? 물론 루미 님과 내가 습격받을 경우에는 형씨도 싸워 줘야 하겠지만, 인간 백정 놈들의 표적이 된 이상 우리 쪽은 물러갈 확률이 높아.”

두 개의 아티팩트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칼렙의 서비스가 마음에 들었다.

복면인과의 싸움에서 얼핏 본 칼렙의 실력은 결코 내 아래가 아니었다. 피가 난자했던 혈투 속에서도 옷에 피 한 방울 묻지 않을 만큼 그는 강했다.

갑자기 투기가 끓어올랐다.

칼렙과 싸워 보고 싶다는 전투 의지가 순식간에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얼마나 강할까.

적무도의 주인이었던 베네딕트보다 강할까.

싸우고 싶다. 치고받고 싸워서 거꾸러뜨리고 싶다. 칼렙을 쓰러뜨려 나의 강함을 증명하고 싶다.

강자와의 싸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숨 막히는 살기와 살 떨리는 스릴. 그리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

그것을 느끼고 싶었다.

“형씨, 왜 그렇게 뜨거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거지? 난 남자한텐 관심 없는데.”

칼렙이 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로브를 몸에 걸치고, 그 위에 배낭을 멨다.

그것으로 거래가 완료되었다.

우연인지, 악연인지, 우리는 목적지가 같았다. 그 말은 곧 우리가 제법 오랫동안 동행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오옷! 잘한다! 싸워라! 싸워! 죽지만 않으면 내가 다 살려 줄 테니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싸워! 욧!”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루미가 오두방정을 떨며 응원을 시작했다.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경고했지만 가만히 있으면 심심하다는 이유로 묵살되었다.

서걱!

푸슛!

“이크크!”

칼렙이 곡예와 같은 동작으로 핏줄기를 피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칼렙은 적을 베는 것보다 옷에 피를 묻히지 않기 위해 몇 배는 더 노력하고 있었다.

덕분에 고생하는 것은 나였다.

“젠장! 똑바로 싸워! 다 내 쪽으로 몰려오잖아!”

“받은 돈값은 해야지! 괜히 비싼 돈 주고 형씨를 고용했는지 알아!”

“도로 가져가!”

“환불 불가! 이크!”

칼렙이 멋지게 공중회전을 하며 대꾸했다. 그의 바람처럼 그의 옷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이, 이 새끼들이 정말!”

나와 칼렙의 만담에 나이트워커의 습격자들이 분노했다. 그들의 눈동자에 살기가 타올랐다.

좋은 징조였다.

그래, 그렇게.

이성을 잃고 분노하라.

진형을 무너뜨리고 달려들어라.

서걱!

“으아악!”

검이 팔꿈치를 잘랐다. 복면인은 고통과 절망이 섞인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휘익!

서걱!

데구르르!

바닥을 구르는 머리통을 달려드는 놈을 향해 걷어찼다. 동료의 머리통에 가슴을 얻어맞은 놈이 당황한 얼굴로 자세를 추슬렀다.

푹!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의 검이 놈의 심장을 꿰뚫었다. 다음 상대를 찾기 위해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

어느 틈에 적의 살기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

서 있는 사람은 오직 셋뿐이었다.

“그런 조잡한 검술로 용케 잘 싸우는데. 그나저나 어디서 많이 본 검술인데.”

칼렙이 검을 집어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끝내 어느 누구도 그의 옷에 피를 묻히지 못했다.

나는 고심하고 있는 칼렙을 바라봤다.

칼렙은 강했다. 아니, 단순히 강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강함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어머니가 강한 이유는 지켜야 할 자식이 있기 때문이다. 살인자가 강한 이유는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근원적인 거부감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투사가 강한 이유는 피에 대한 갈망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 냈기 때문이다.

이렇듯 강함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칼렙의 강함에도 분명 그러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관찰해도 그것을 찾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루미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에게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루미를 존중해 주고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그녀의 서열이 높았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 주는 것에 불과해 보였다.

파파팟!

무언가가 빠르게 이동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또 오네. 지겨운 놈들. 형씨, 대체 무슨 원수를 졌기에 저 인간 백정 놈들이 이렇게 달려드는 거야?”

칼렙이 숲 속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한겨울 북풍처럼 차가웠다.

“글쎄……. 잘 모르겠군.”

나는 검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나이트워커의 습격은 시도 때도 없이 계속됐다. 그럴수록 칼렙과 루미의 기분은 폭풍을 일으키는 사나운 바람이 되었다. 물론 내 기분은 산들바람이었다.

“속았어, 완전히.”

루미가 피곤에 찌든 얼굴로 중얼거렸다. 몇 날 며칠 제대로 잠도 못 잔 채 쫓겨 다니느라 황금 실타래 같던 머리칼이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그녀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앙칼지게 소리쳤다.

“가방하고 로브, 도로 내놔!”

“어째서?”

나는 실실 웃으며 루미를 약 올렸다.

“애초에 계약은 당신이 우릴 지켜 준다는 것이었잖아? 그런데 지금 상황을 봐. 이건 당신이 우릴 지켜 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당신을 지켜 주는 것과 마찬가지잖아!”

“그건 아니지.”

나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어른처럼 근엄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나를 쫓아오는 나이트워커 때문에 너희들을 뒤쫓던 놈들이 근처에 다가오지도 못하잖아. 결과적으로 나 때문에 무사한 것이나 다름없는 거지. 안 그래?”

“안 그렇거든! 내놔! 내 가방! 내 로브!”

씩씩거리며 달려드는 루미를 피해 작은 공터를 빙글빙글 돌았다.

칼렙은 그런 우리 둘을 심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역시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루미와 같은 심정인 듯 보였다.

“칼렙! 뭐하고 있어? 빨리 이놈을 잡아!”

루미가 숨을 헉헉대며 분한 듯 소리쳤다.

“참으십시오, 루미 님. 설사 잡는다 할지라도 가방과 로브는 빼앗지 못합니다.”

“어째서? 서, 설마 칼렙보다 강해?”

나와 칼렙이 동시에 서로를 마주 봤다.

호기심과 호승심이 부딪쳤다. 마치 뇌전이 내리꽂히는 듯한 강렬함이었다.

먼저 눈을 피한 것은 칼렙이었다.

“루미 님이 하신 것은 용병의 계약입니다. 용병과 한 계약은 어떠한 경우라도 뒤로 물릴 수 없습니다. 그것이 설령 잘못된 계약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억지로 빼앗으면 어떻게 되는데?”

“용병 길드 전체와 전쟁을 벌여야 하겠죠. 물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뭔데? 뭔데?”

루미가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고 빼앗는 방법입니다.”

“…….”

루미가 입을 다물었다.

농담인 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서늘한 공기와 무거운 적막이 공터에 내려앉았다.

“쳇! 재미없어.”

잠시 후 루미는 눈썹을 찡그리며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마법 가방에서 포션 하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캬아! 시원하다! 역시 피곤할 땐 포션이 최고야.”

“…….”

어이가 없었다.

고작 뜀박질에 지친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 포션을 마시다니.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비상식적으로 포션을 남용하는 장면을 수도 없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죽지만 않으면 다 살려 준다는 루미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포션은 신관만이 제조할 수 있는 고가의 물약이었다. 그 효능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는데, 포션에서 풍기는 마나의 냄새로 미루어 보아 루미의 포션은 상당히 비싼 축에 들어가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한 포션이 마법 가방 안에 무한정 들어 있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무한정이었다.

얼마나 많은가 하면, 나이트워커와의 전투에 휘말려 부러진 토끼의 다리를 단지 불쌍하다는 이유로 치료해 줄 정도였다.

고가의 포션을 다리에 쏟아부어. 그것도 두 병이나.

“안 오는데. 이제 포기했나?”

칼렙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만큼 죽였으니 슬슬 사람이 모자랄 때도 됐지. 인원이 보충되면 다시 오겠지.”

“그럼 오늘은 편히 잠잘 수 있는 거지?”

루미가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은 공터가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바위 위에서 들려왔다.

“그렇습니다. 편히 잘 수 있을 것입니다. 영원히.”

내가 앉아 있는 곳은 바로 바위 밑이었다.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낯선 이의 목소리.

차가운 한기가 척추를 타고 흘렀다.

후다닥!

반사적으로 바닥을 굴러 바위에서 급히 멀어졌다.

하지만.

“빠르군요. 하지만 느립니다.”

다음 순간 낯선 이가 모순된 언어로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은 바로 등 뒤였다.

“큭!”

휘익!

몸을 빙글 돌리며 그대로 돌려차기를 했다.

부웅!

발이 허공을 갈랐다.

“역시 빠르군요. 하지면 여전히 느립니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처음 목소리가 들렸던 바로 그 바위 위였다.

바위 위에 한 사내가 누워 있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 후 과도한 몸짓과 함께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페이든입니다.”

페이든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바라봤다.

나이는 서른 중반쯤 됐을까. 사자 갈기처럼 덥수룩한 머리칼과 잘 다듬어진 수염. 눈빛은 부드럽고 선량했다. 툭 불거진 광대뼈와 곧은 콧날이 남자다웠다.

복장은 평범한 용병처럼 단출했다. 기름칠을 잘한 레더아머와 허리의 왼쪽, 오른쪽에 하나씩 매달려 있는 쌍검. 때가 탔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천으로 만든 것이 분명한 로브. 몬스터의 가죽으로 만든 튼튼한 신발.

“용병?”

루미가 사내의 인상을 한 단어로 요약했다.

“아닙니다, 존귀하신 분이여.”

페이든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질 만큼 환한 미소였지만 칼렙과 루미는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젠장! 인간 백정 놈들이 보이지 않아서 좋아했건만 그놈들이 잠깐 쉬는 사이에 이번엔 우리 쪽이 왔군.”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시군요, 존귀하신 분의 검이여. 저는 늘 왔던 놈들 중 하나입니다.”

“인간 백정 놈들 중 하나라고? 그런데 어떻게…….”

칼렙이 내 눈치를 슬쩍 보며 말을 흘렸다.

“어떻게 정체를 알고 있느냐……입니까? 비록 어둠 속에 숨어 있지만 어쨌든 대륙 최고라 불리는 집단입니다. 그 정도도 모른다면 진즉에 괴멸했겠지요.”

루미와 칼렙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흐음. 그렇게 조심하는 걸 보니 저분은 아직 존귀하신 분의 정체를 모르는 모양이군요.”

페이든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도 마침 궁금해 미치려던 찰나였는데 잘됐군. 대체 이들의 정체가 뭐지?”

기회는 이때다, 싶어 얼른 질문을 던졌다.

그때였다.

스르릉.

칼렙이 검을 뽑았다. 광포한 기운이 휘몰아쳐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살갗이 베일 듯한 살기가 목젖을 쿡쿡 찔렀다. 무언의 시위였다.

“보시다시피, 비밀인 듯하군요.”

페이든이 어깨를 으쓱하며 나를 쳐다봤다. 그러곤 크게 기지개를 켜더니.

“그럼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슬슬 일을 해 볼까요.”

바위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졌다.

섬뜩한 예감이 뇌를 관통했다.

팟!

나는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고, 덕분에 심장에 구멍이 뚫리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급히 자세를 잡고 뒤를 돌아봤지만 페이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냐!”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빠르군요. 암살자가 암살 대상의 실력을 잘못 파악하다니. 실격입니다, 실격. 나름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했었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페이든은 멀리 떨어진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언제 저기까지 간 거지?

움직임은커녕 기척조차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슈욱!

지금은 쿠차차의 수다를 두려워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마력을 일으켜 다크섀도우를 꺼냈다.

“네 이놈, 주인! 감히 강제로 이 몸을 잠재웠겠다? 이 몸의 분노가 하늘에 닿고, 땅을 뒤집고 있…….”

“헛소리는 이따가 들어 줄 테니 지금은 제발 닥쳐 줄래?”

살기를 듬뿍 담아 으르렁거리자, 쿠차차가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주변을 살펴보는 꼴이,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듯했다.

진즉에 이렇게 할 걸, 하는 생각에 조금 후회가 되었다.

“호오! 신기한 장갑이군요. 설마 인간의 지능을 지녔다는 에고 아티팩트입니까? 당신은 저를 여러 번 놀라게 하는군요.”

“에고 아티팩트?”

루미가 관심을 보이며 다가오다 칼렙의 제지를 받았다.

“위험합니다, 루미 님.”

“괜찮아. 우리와 싸우기 위해 온 자가 아니니까.”

루미는 망설임 없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 뒤를 칼렙이 뒤따랐다.

“한 번도 실패해 본 적이 없다는 절망과 파멸의 암살자.”

담담한 목소리로 루미가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어색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페이든을 향해 있었다.

“그림자의 지배자. 섀도우 헌터 페이든. 내 말이 맞지?”

시선을 페이든에게 고정한 채 루미가 내 옆에 우뚝 멈춰 섰다.

“이런, 이런.”

페이든이 곤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존귀하신 분께서 미천한 저를 알아봐 주시니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비꼬는 게 아니라 페이든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나무 아래로 뛰어내려 루미를 향해 제대로 예를 차렸다.

“우리를 공격할 건가?”

루미가 한 발 앞으로 나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설마 그녀가 나를 도와줄지는 몰랐기에 제법 놀라고 말았다. 칼렙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아 그녀의 단독 행동이 분명했다.

페이든은 여전히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한숨을 쉬며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항복입니다. 존귀하신 분을 적대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당신은 운이 좋군요. 존귀하신 분의 귀여움을 받을 수 있다니. 솔직히 부럽습니다.”

루미의 귀여움 따위는 눈곱만큼도 필요 없었지만, 전투를 피할 수만 있다면 조금 과묵하게 사는 것도 괜찮을 듯 보였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다음번에는 오늘 같은 행운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럼 이만.”

역시나 과장된 동작으로 작별 인사를 하던 페이든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아! 그리고 이건 선물입니다. 부디 사양치 마시길.”

페이든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를 주워 나무 그늘을 향해 힘껏 집어 던졌다.

휘익!

본래대로라면 나무 기둥에 부딪쳐 튕겨져 나왔어야 할 나뭇가지가 시커먼 나무 그늘 안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나무 그늘 안으로 사라진 나뭇가지가 다시 나타난 곳은 바로 내 그림자였다.

휘익!

뾰족하게 날이 선 나뭇가지가 그림자 안에서 솟구쳤다.

푹!

상식을 파괴한 공격에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그 대가로 옆구리 부분에 나뭇가지가 박히고 말았다.

“컥!”

아찔한 통증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이대로 당할쏘냐!”

한 대 맞았으니 한 대 갚아 줘야 했다. 옆구리에 나뭇가지를 꽂은 채 놈이 있던 곳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유령처럼, 페이든은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젠장!”

나의 고함이 숲 속에 메아리쳤다.

* * *

“힐! 힐! 힐!”

나는 구멍 난 옆구리에 반지를 대고 연방 마법을 시전했다. 피가 콸콸 쏟아지던 구멍이 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했다.

“이거 한 병이면 싹 낫는다니까. 돈 내란 소리 안 할 테니까 줄 때 받아.”

루미가 작은 유리병을 내 눈앞에 흔들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청아한 액체가 유리병 안에서 출렁거렸다. 액체가 흔들릴 때마다 마나의 기운이 물씬 풍겨 나왔다.

“됐다. 힐! 힐! 힐!”

나는 루미의 성의를 무시했다. 하지만 그녀는 집요할 만큼 끈덕지게 포션을 건넸다.

“됐다고 했을 텐데.”

“그 힐, 힐, 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래!”

“그럼 귀를 막고 있든가. 힐! 힐!”

“아아악! 이 자식 베어 버려!”

루미가 광분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녀의 유일한 아군은 그녀를 배신했다.

“루미 님이 구한 목숨 아닙니까? 저는 모릅니다. 알아서 하십시오.”

“카, 칼렙마저 나를……. 으으으……. 좋아! 이렇게 된 이상 강행 돌파다!”

콸콸콸!

마법 가방에서 양손 가득 포션을 꺼낸 루미가 그것을 나에게 들이부었다.

나는 순식간에 포션으로 목욕한 꼴이 되었다. 온몸이 축축하게 젖었다.

“하하하! 어떠냐! 포션의 위력이! 그까짓 상처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나을…… 수…….”

상처는 조금도 낫지 않았다. 아니, 포션 덕분에 핏자국이 씻겨 내려가 핏자국 아래 숨어 있던 흉측한 상처가 오히려 더 도드라져 보였다.

“……말도 안 돼.”

경악한 얼굴로 루미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보란 듯 최후의 한 방을 날렸다.

“힐! 힐! 힐! 힐!”

큰 충격을 받은 얼굴로 루미가 뒷걸음질 쳤다.

“이럴 리가 없어!”

꽥 소리를 지른 루미가 숲 속으로 뛰어갔다.

“존귀하신 분이여! 뛰다가 넘어지면 아픕니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 칼렙이 페이든을 흉내 내며 루미의 뒤를 쫓아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늘 꼭대기에 있던 태양이 서쪽 산 너머로 기울었다. 어스름한 땅거미가 산을 좀먹기 시작했다. 서늘한 바람이 황량하게 불었다. 나뭇잎이 메마른 목소리로 노래했다.

엄지손톱 모양의 달이 하늘을 밝히고 나서야 인정했다. 그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뭔가가 툭 발에 차였다. 루미가 놔두고 간 포션 한 병이 바닥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

쓸데없는 배려였다. 어차피 나에게는 포션이 듣지 않았다. 하지만 비싼 포션이 분명하니 챙겨 놓으면 나중에 요긴하게 쓸 곳이 있을 것이다.

마법 가방 안에 포션을 넣은 후 나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흘 후.

나는 자타르 왕국으로 들어가는 대로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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