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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 (29/45)

함정

“끝났군.”

나는 눈앞에 펼쳐져 있는 수십 개의 무덤을 바라봤다. 무덤은 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구름이 달을 가렸는지 하늘이 온통 새카맸다.

휘이잉!

“우우우!”

바람과 함께 늑대의 가냘픈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 때문에 죽은 이들이었다. 좋은 기억, 나쁜 기억을 떠나 시간과 장소를 함께 공유했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눈물 한 방울만큼의 슬픔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마음을 준 적이 없으니 잃은 것도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슬픔 대신 내 가슴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불보다 뜨겁고, 황야보다 거친 분노였다.

만약 놈들의 목적이 나를 분노케 하는 것이었다면, 놈들은 축배를 들어도 좋을 것이다.

“네놈들의 의지는 잘 알았다.”

선물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였다.

“갈 때까지 가 보자는 말이군. 마음에 들어. 크크크!”

나는 나이트워커의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고, 놈들은 나와 관련된 모든 것을 학살할 것이다.

이것은 전쟁이었다. 둘 중 하나가 파괴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멈추지 않을, 항복이 존재하지 않는 전쟁이었다.

“복…….”

무덤을 향해 복수를 해 주겠다는 맹세를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복수는, 어쩌면 나의 목숨인지도 몰랐기에.

한 번 더 무덤을 쳐다본 후 몸을 돌렸다.

휘이잉!

바람이 불었다. 바람 소리가 마치 한 맺힌 사람의 흐느낌처럼 애절했다.

주워 온 나뭇가지를 원뿔 모양으로 대충 쌓아 올린 후 오른손을 내밀었다.

“파이어 볼!”

화르륵!

오른손에 낀 반지에서 불덩이가 쏘아져 나왔다. 불덩이가 나뭇가지 더미를 강타했다.

펑!

순식간에 잿더미가 된 나뭇가지들이 사방팔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젠장.”

나는 산불이 일어나지 않도록 숯이 된 나뭇가지를 모아 다시 불을 피웠다.

천재 대장장이 루미가 새롭게 만들어 준 마법 반지에는 1레벨 마법 세 개가 저장되어 있었다.

불꽃 마법인 파이어 볼과 마찰력을 영으로 만들어 주는 마법인 슬라이드 그리고 치료 마법인 힐이 바로 그것이었다.

파이어 볼과 슬라이드는 전투를 위한 마법이었고, 힐은 최후의 순간, 한 줌의 힘이 필요할 때 사용하기 위한 일종의 생존 마법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한 번씩밖에 사용할 수 없는 마법이었지만 루미 덕분에 나는 세 개의 마법을 무한정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고기를 구워 먹기 위해 파이어 볼을 사용하는 사치도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파이어 볼의 결과물로 만든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다. 돌팔매질로 사냥한 멧돼지의 뼈와 살을 발라 모닥불 위에 굽기 시작했다. 멧돼지 고기가 노릇노릇 익으며 맛있는 향기를 퍼뜨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마법을 담아 오는 건데.”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인지라 반지에 담겨 있는 마법을 생각하자 내심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고기를 뜯어 먹었다.

어디선가 부엉이가 구슬픈 목소리로 울었다. 모닥불 주변을 날아다니던 나방이 유혹을 참지 못하고 결국 불 속으로 몸을 던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가 파도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

나는 먹던 고기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솔직히 말해 방심하고 있었다.

아직은 아닐 거라고. 나에게 준비가 필요하듯 그들 역시 준비가 필요할 것이라고.

그렇게 방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와 다르게 그들은 이미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나는 앞뒤 생각 없이 선전포고를 했지만, 그들은 철저하게 준비를 끝낸 후 나에게 선물을 보낸 것이다.

그 차이는 결코 작지 않았다.

두두두두!

지축이 울렸다. 나무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고기 굽는 냄새를 맡고 몰려든 산짐승들이 화들짝 놀라 사방으로 도망쳤다.

푸드득!

잠자고 있던 산새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낯익은 감각.

낯익은 살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코앞까지 다가온 위험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두두두두!

현혹 마법에 걸린 것이 분명한 몬스터 부대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첫 번째 희생자는 주인을 잘못 만난 말이었다.

몬스터 세계에서 먹이사슬 최상위에 위치해 있는 폭식자 오우거가 달려오던 힘을 이용해 말의 몸통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퍼억!

“이히잉!”

허리가 반으로 꺾인 말이 울부짖으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땅으로 떨어진 말을 짓밟으며 몬스터들이 달려들었다.

천천히 마력을 끌어 올렸다.

슈욱!

피부 아래 숨어 있던 검붉은 장갑이 양손 위로 솟아올랐다. 자신을 오랜만에 소환해 준 주인을 원망하듯 다크섀도우가 칠흑 같은 빛을 발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검을 하나 사 오는 건데.”

주먹으로 싸우면 필시 온몸이 피로 젖을 게 분명했다. 그 끈적이는 느낌과 비릿한 혈향이 생각났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기억.

“자아, 얼마나 준비했는지 구경해 볼까. 슬라이드!”

나는 무한대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을 시전해 땅의 마찰력을 영으로 만들었다.

미끌!

선두에 서 있던 몬스터들이 벌러덩 뒤로 넘어졌다. 그 바람에 뒤따라오던 몬스터들 역시 우당탕 바닥을 나뒹굴었다.

“일단은 네놈부터다! 하앗!”

나는 말의 원수인 오우거의 머리통을 발로 걷어찼다. 아름드리나무조차 부러뜨릴 만한 일격이었지만 오우거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크아앙!

거친 포효과 함께 오우거가 팔을 풍차처럼 휘저었다. 마구잡이였지만 오우거 특유의 힘과 속도가 뒷받침되었기에 굉장히 위력적이었다.

나는 몬스터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분노에 눈이 먼 오우거가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는 몬스터들을 곤죽으로 만들며 황소처럼 뒤쫓아 왔다. 겁에 질린 몬스터들이 오우거를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제법 정연했던 몬스터들의 진형이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크아아앙!

피에 취한 오우거가 다시 포효했다. 살기를 실은 사자후가 밤공기를 찢었다.

순간 현혹 마법의 명령과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서 방황하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그 정지된 시간 속에서 오우거 홀로 포효하고 있었다.

길게 이어진 포효가 마침내 멈췄다. 산에 부딪쳐 반향되어 온 메아리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크르릉!

-취익! 취익!

현혹 마법에서 깨어난 몬스터들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누군가의 명령이 아닌 본능으로 움직이던 본연의 성정, 즉 야생의 피가 들끓기 시작했다.

퍼억!

제정신을 차린 오크가 들고 있던 몽둥이로 코볼트를 내리쳤다. 졸지에 봉변을 당한 코볼트의 머리가 수박처럼 깨어졌다.

포식자와 희생양이 한 무리를 이루다 현혹 마법이 깨어졌으니 그 혼란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먹고 먹히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현혹 마법이 제대로 작동하였을 때는 나만이 유일한 적이었다. 하지만 현혹 마법이 깨어진 지금은 서로가 서로의 적이나 다름없었다.

마법에 홀려 먹이사슬을 무시한 채 자신의 포식자와 나란히 달려온 힘없는 몬스터들이 순식간에 죽어 나갔다.

“하압!”

퍽!

다리를 들어 오크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오크의 머리가 뭉개진 빵처럼 찌그러졌다.

휘익!

트롤이 칼날보다 날카로운 손톱으로 내 목덜미를 노렸다. 고개를 숙이며 빠르게 뒷걸음질 쳐 트롤의 공격을 피했다. 재차 공격할 것을 대비해 자세를 잡았지만 트롤은 나를 무시한 채 내가 죽인 오크를 뜯어 먹기 바빴다.

-크헝!

-취익! 취익!

-캬아악!

물어뜯고, 할퀴고. 찢고, 뽑아내고.

난전도 이런 난전이 없었다.

적아의 경계가 무너지고,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이 목숨을 노리는 적이었다.

부웅!

섬뜩한 느낌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오우거의 팔이 내가 있던 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퍽!

오우거의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쏠린 틈을 이용해 그의 무릎을 걷어찼다.

-크앙!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오우거가 쓰러졌다.

단순 전투력만 보면 웬만한 기사에 버금가는 오우거였지만, 적무도에서 단련된 나에게는 그저 뇌까지 근육으로 되어 있는 멍청한 몬스터일 뿐이었다.

꽈아악!

주먹에 힘을 준 후.

쾅!

오우거의 머리를 내려쳤다.

가격당한 머리가 땅속에 움푹 박혔다. 오우거는 머리를 끄집어내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나는 오우거의 머리가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게 꽉 누른 채 연속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쾅!

쾅!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오우거의 머리가 점점 더 땅속으로 깊숙이 박혔다.

쾅!

파삭!

최후의 일격과 함께 오우거의 머리가 박살 났다. 머리가 박혀 있던 구덩이에서 붉은 핏물이, 마치 분수처럼 하늘로 솟아올랐다. 동시에 버둥거리던 오우거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리고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주먹에 묻어 있는 피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에 있던 몬스터들이 후다닥 멀어졌다.

오우거의 죽음은 살육의 축제에 정신이 나가 있던 몬스터들에게도 충격을 준 듯했다.

-크르르…….

-취익…….

미친 듯이 파괴를 일삼던 몬스터들이 내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살육을 멈추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진짜 살육은 지금부터였다.

나는 서서히 마력을 끌어 올렸다.

몬스터는 본래 살기에 둔감하다. 살기가 끊이지 않는 먹이사슬의 영향력 아래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살기를 뿜어 몬스터를 도망가게 하는 것은 전장에서 오래 굴러먹은 기사조차 여간해선 하기 힘든 일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몬스터가 흥분에 휩싸인 채라면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화아악!

힘을 개방했다. 움츠리고 있던 살기가 일시에 폭발했다. 지독한 살기가 폭풍처럼 전장을 휩쓸었다.

적무도에서도 그랬다. 언젠가부터 내가 진심으로 살기를 뿌리면 아무리 광기에 젖어 있던 몬스터라 할지라도 겁에 질렸다.

이유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랬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본능에 새겨져 있는 천적처럼. 다 자란 양이 새끼 사자가 무서워 도망을 치듯.

-쿠에엑!

-키익! 키익!

겁에 질린 몬스터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적무도에서 갖게 된 몬스터에 대한 혐오와 나이트워커에 대한 분노를 담아 거침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퍽!

퍽!

-쿠엑!

-케에에엑!

도망치는 몬스터를 학살하고 있으려니 왠지 내가 악당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쓸데없이 살육에 미쳐 날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불타오르던 감정이 일순간에 차갑게 식어 버렸다.

추격을 멈추고 다크섀도우를 집어넣으려는 그때.

슈슛!

슈슈슛!

화살 모양의 빛줄기 수백 개가 소나기처럼 하늘에서 쏟아졌다.

나무 뒤로 몸을 날리며 미처 피하지 못한 빛화살을 주먹으로 때렸다.

쾅!

손목이 저릿저릿했다.

곧이어 빛화살들이 땅과 나무를 강타했다.

쾅!

콰과광!

빛화살이 떨어진 장소가 순식간에 폐허로 돌변했다. 수십 개의 분화구로 땅은 곰보가 되었고, 줄기를 물어뜯긴 나무가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큭!”

빛화살로부터 내 몸을 지켜 주었던 나무 역시 나를 향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옆으로 몸을 굴러 나무를 피한 뒤 급히 주변을 살폈다. 누군가의 기척이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도망치게 놔둘 것 같으냐.”

식었던 분노가 다시 타올랐다.

나는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 * *

마법사로 추정되는 놈은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놈은 마치 술래잡기를 하는 것처럼 나무와 나무 사이를 교묘하게 도망쳐 다녔다.

하지만 끈질긴 추격 끝에 결국 놈의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단검을 꺼내 놈의 등으로 집어 던졌다.

쐐에엑!

빛과 같은 속도로 단검이 날아갔다.

휙!

그 순간 놈이 방향을 틀었다. 단검은 놈이 있던 자리를 통과해 그 앞에 있던 나무에 푹 박혔다.

“칫!”

나무에 박힌 단검을 뽑은 후 다시 추격을 시작했다.

단검을 뽑기 위해 잠깐 시간을 지체했을 뿐인데 놈의 기척이 까마득하게 멀리 느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홀연히 기척이 사라졌다.

기척이 사라진 곳에 도착한 후 주변을 꼼꼼히 살폈다. 하지만 놈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법인가.”

인비저빌리티Invisibility라는 모습을 사라지게 만드는 마법일 수도 있기에 좀 더 세심히 정신을 집중하여 놈의 기척을 찾았다.

부스럭!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찾았다!”

몸을 날리려는 순간.

“꺄아악!”

기척이 느껴진 곳에서 새된 비명이 울렸다. 비명 소리로 짐작했을 때 나이 어린 소녀가 분명했다.

“……마법사는 아닌 것 같군.”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소녀에게 간다는 것은 나이트워커 놈을 놓치게 된다는 뜻이었다.

“꺄아아아!”

다급한 비명이 다시 한 번 고막을 때렸다.

나는 마법사가 사라진 장소를 한차례 훑어본 뒤 비명이 들리는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팟!

앞을 가로막고 있는 풀숲을 뚫고 나오자 눈앞에 참상이 펼쳐져 있었다.

-취익! 취익!

세 마리의 오크가 작은 소녀를 마치 장난감처럼 걷어차고 있었다. 소녀는 피투성이가 된 채 비명만 질러 댔다.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는지 걷어차여 굴러다닐 때마다 덜렁거렸다.

나를 피해 도망치다 우연히 먹음직스러운 소녀를 발견하고 포악한 본성을 되찾은 오크가 분명했다.

“이런, 썅!”

욕을 내뱉으며 오크에게 달려들었다.

-취익?

놈들이 눈치챘을 때는 이미 놈들 사이로 파고든 후였다. 나를 알아본 오크들의 눈동자에 공포가 떠올랐다.

엉덩이를 뒤로 빼는 것이 다시 도망치기 위해 자세를 잡는 듯 보였다.

“그렇게 놔둘 듯싶으냐!”

나는 소녀가 당했던 고통을 세 마리 오크에게 그대로 돌려주었다. 조금 이자를 붙여서.

퍽!

으드득!

양팔과 양다리가 부러진 오크 세 마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땅바닥에 엎어져 낑낑거렸다.

최후의 일격은 날리지 않았다. 이대로 고통 받다 다른 몬스터, 혹은 산짐승의 밥이나 되라는 의미에서였다.

“으으…….”

나는 고통에 떨고 있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소녀의 상태는 처참했다. 팔다리는 부러져 있었고, 얼굴 역시 엉망이었다. 고통이 심한 듯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신음만 흘렸다.

“힐.”

오른손의 반지에서 따뜻하고 포근한 빛이 흘러나와 소녀의 몸을 감쌌다. 하지만 1레벨 마법이라서 그런지 치료 효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부러진 뼈가 붙는 것은 고사하고 찢어진 상처조차 잘 아물지 않았다.

“으음……. 아, 아파…….”

몇 번이나 시전한 끝에 소녀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조금 아플 거다. 이것을 물고 있어라.”

부우욱!

나는 피가 묻어 있지 않는 부분의 옷을 찢어 소녀의 입에 물려 주었다. 고통이 심해 혹시나 혀를 깨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기묘한 각도로 휘어진 팔을 잡고.

우둑!

단숨에 뼈를 맞췄다.

“으윽!”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하지만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하는 것보다는, 아프더라도 이렇게 하는 편이 훨씬 나았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다리의 뼈도 바로잡았다. 그러곤 뼈를 바로잡은 부위에 힐을 집중적으로 시전했다. 아물게 하는 효과는 별로 없었지만 조금이나마 고통을 줄여 주기 위해서였다.

끅끅거리며 울던 소녀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입에 물고 있던 옷 쪼가리를 치워 주자 소녀가 괴로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여, 여기는?”

“클라리스 왕국과 자타르 왕국 사이에 위치한 산맥이다. 그나저나 너 같은 아이가 어째서 이 깊은 산속에 있는 거지?”

질문을 던지며 옷 쪼가리로 소녀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시야를 방해하고 있던 핏물이 사라지자 소녀가 힘겹게 눈을 떴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나의 얼굴을 확인하던 소녀의 눈동자가 일순 크게 흔들렸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혹시 나와 만난 적 없어?”

소녀의 얼굴이 무척 낯익었다. 만남의 장소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머릿속을 간질였다.

“미, 미안……해요.”

소녀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를 했다.

탓하려는 게 아니라고 말해 줬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건 소녀는 사과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산속까지는 어떻게 온 거지? 설마 혼자 온 것은 아니겠지? 누구와 같이 왔다면 알려 줬으면 싶은데. 어떤 망할 놈들 때문에 이곳은 지금 몬스터가 돌아다니는 험지가 됐어. 만약 누구와 같이 왔다면 그들 역시 위험할지도…….”

“미안……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

소녀의 울음소리가 내 말을 잘랐다. 소녀는 흐느끼는 목소리로 연방 사과했다.

“충격이 심해서 그런가.”

결국 나는 대화를 포기했다.

견디기 힘들 만큼 과도한 고통을 받으면 그 고통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뇌가 스스로 작동을 멈춘다는 얘기를 예전에 들은 적이 있다.

“설마 미친 건 아니겠지?”

어찌 보면 나 때문에 이렇게 된 소녀였다. 물론 정확히 따지면 나를 죽이기 위해 나이트워커 놈들이 준비한 몬스터 때문이지만 어쨌든 그랬다.

해야 할 일과 책임감 사이에서 망설이다 결국 소녀를 품에 안고 일어섰다.

“하는 수 없지. 일단 내려가자.”

뼈를 맞춰 불구가 되는 것은 막았지만 빠른 시간 내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평생 후유증에 시달리게 될 지도 몰랐다.

실력이 좋은 의사를 만나려면 아마도 트와일까지 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몸이 아픈 소녀를 안고 트와일까지 달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선 산 아래 위치한 촌락에 소녀를 맡긴 뒤 트와일에서 의사를 데려오기로 결정했다.

“금방 낫게 해 줄 테니 조금만 참아라.”

아직도 사과를 하고 있는 소녀에게 최대한 다정스럽게 말해 준 뒤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걷자 부러진 뼈가 흔들린 듯 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곤 멀쩡한 손으로 내 가슴팍을 꼬옥 잡았다.

이번에는 내가 사과할 차례였다.

“미안하…….”

푹!

소녀의 손이 닿은 가슴이 따끔거렸다. 소녀의 손에는 내가 낀 것과 비슷한 모양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반지에서 마나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평범한 소녀가 가지고 있기에는 너무나 고가의 아티팩트 반지였다.

왜 이제야 눈치챘을까.

“미안……해요……. 미안…….”

소녀의 사과와 함께 반지가 다시 반짝 빛을 뿌렸다. 반지에서 발사된 새하얀 빛화살이 가슴을 꿰뚫었다.

푹!

가슴에 박힌 빛화살이 등을 뚫고 지나갔다.

다행스럽게도 빛화살은 가늘었다. 나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최소의 마나로 만든 아티팩트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심장에 구멍이 뚫리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푸슛!

빛화살이 만든 상처는 동전만 했다. 상처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소녀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아아…….

기억이 났다.

알빈의 최종 목적지였던 파뉴트. 그곳의 여관에서 자신과 알빈을 맞이한, 싹싹하고 수완 좋았던 아이.

나에게 암수를 펼친 소녀는 그 여관의 딸이 분명했다.

“쿠, 쿨럭! 어째서?”

내장이 다쳤는지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가족이 죽어요……. 미안해요……. 저도,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큭!”

쓴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네 가족은 이미 죽었단다, 라고 알려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너 역시 죽게 될 것이라는 것도.

사삭!

사사삭!

꼬랑지에 불붙은 개처럼 죽자 살자 도망치던 놈들이 피 냄새를 맡고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힐.”

가슴에 손을 대고 마법을 시전했다. 몇 번을 시전하고 나서야 간신히 피가 멈췄다.

나는 소녀를 가만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미안……해요. 미안…….”

가족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어쨌든 나를 죽이고자 했으니, 너를 위해 내가 목숨을 걸어야 할 필요는 없겠지.

“……적어도 고통 없이 죽길.”

내 말을 들었는지 소녀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나는 놈들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유일한 곳으로 몸을 날렸다. 일부러 비워 놓은 구멍이 분명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피는 멈췄지만 상처의 깊이가 상당했다. 전투를 최대한 미루면서 조금씩이나마 힐로 회복시키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함정임을 알면서도 그곳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 입맛이 썼다.

함정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날카로운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놈들은 살인의 달인이었다. 분명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게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나를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이리라.

소녀의 비명 소리가 길게 메아리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죽여 줄 걸 그랬다. 그러지 못한 것이 조금 후회되었다.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지웠다.

쓸데없는 생각은 싸움이 끝난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

정신을 집중하고 감각을 끌어 올렸다. 그러곤 캄캄한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 * *

슈슛!

슈슈슛!

내가 방향을 틀 때마다 마치 장벽을 만들듯 화살과 암기가 쏟아졌다. 사격의 목적은 나를 맞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가려고 하는 방향을 차단하려는 것이 사격의 목적이었다.

“큭!”

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도망치려던 계획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실패만 벌써 수십 번째였다.

함정이란 본래 은밀한 곳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놈들은 착실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성실하게 나를 한쪽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함정은 그쪽이 아니라 이쪽 방향에 있다, 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며.

“젠장! 힐!”

반지에서 미약한 마나가 흘러나와 가슴의 상처를 쓰다듬었다. 고통이 일순 사라졌다가 금세 부활했다.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도주가 오히려 최악의 족쇄가 되어 버렸다.

도망을 치며 힐을 사용해 상처를 치유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힐을 사용해도 격렬한 뜀박질 때문에 상처는 조금도 아물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는 피로 등이 축축했다. 옷이 착 달라붙어 몸을 움직이기가 굉장히 불편했다.

“헉…… 헉…….”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입에서 단내가 풀풀 풍겼다. 소녀의 암습에 구멍이 뚫릴 뻔한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절망이 조금씩…… 조금씩…… 내 안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치고받고 싸우다 위기에 몰렸으면 투지라도 불태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싸움은커녕 적의 모습도 보지 못한 채 함정을 향해 돌진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고통과 분노와 짜증과 절망이 한데 뒤섞여 시커먼 응어리를 만들었다.

“빌어먹을!”

이 망할 놈의 토끼몰이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무언가 계기가 필요했다. 그것도 가슴속 응어리가 모두 풀어질 만큼 강력하고 화끈한 것이.

필사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놈들은 울창한 나무숲을 지나 산 깊숙한 곳에 위치한 계곡 쪽으로 나를 밀어 넣고 있었다.

계곡이라.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수백 명이 넘는 나이트워커의 암살자일까. 아니면 고레벨 마법을 자유자재로 시전할 수 있는 마법사일까. 아니, 어쩌면 오러 블레이드의 경지를 뛰어넘었다고 알려진 검의 절대자 중 한 명일 수도 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결코 쉽게 물리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이들의 준비는 철저하리만큼 치밀했다.

슈슈슛!

“큭!”

어떻게든 방향을 바꿔 보려 했지만 마치 그 마음을 읽은 것처럼 귀신같이 화살이 날아왔다.

“좋아.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우뚝!

나는 갑자기 뜀박질을 멈췄다. 일정한 거리에서 나를 뒤쫓던 인기척들이 달려오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크게 요동쳤다.

“힐. 힐. 힐.”

가슴의 상처를 향해 연속적으로 힐을 사용했다. 동시에 호엔레른 백작가의 마나 수련법을 응용하여 만든 나만의 수련법을 행했다. 양손의 다크섀도우가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전장 한가운데서 수련을 하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다크섀도우를 이용한 나만의 수련법은 상처를 치유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할 만큼의 충분한 가치를 지녔다.

수련을 몇 번 행하지 않았음에도 가슴의 통증이 한결 가라앉았다.

부스럭!

부스럭!

일부러 그러는 것이 분명한, 부산하게 움직이는 인기척 소리에 결국 수련을 멈췄다.

도망치다 말고 갑자기 멈춰 서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켜보던 놈들이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상처가 난 곳을 살짝 만져 보았다. 동전만 한 크기의 구멍에 새살이 돋아나 있었다. 물론 몸을 움직이면 다시 찢어질 만큼 얇디얇은 피막이었다.

육체의 회복력에 새삼 감탄했다. 그리고 안타까웠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그런대로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을 텐데.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인기척이 점점 커졌다. 몇몇은 아예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천천히 그리고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폐가 터질 것처럼 팽창하자 호흡을 뚝 멈춘 후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노리고 있는 것은 한순간.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하기 위해 놈들이 화살을 쏘려는 그 찰나의 순간.

‘하나…… 둘…… 셋!’

마음속으로 숫자를 센 뒤 숨을 내쉬며 다리의 근육을 부풀렸다.

팟!

땅을 박차고 계곡을 향해 뛰었다.

“헉!”

놀란 숨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전장을 선택할 권리는 이미 빼앗겼다. 그렇다면 적어도 전장에 도착하는 타이밍은 내 것이 되어야 했다.

나는 바람보다 빠르게 발을 놀렸다.

부랴부랴 내 뒤를 쫓아오는 놈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놈들은 내가 딴 곳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최대한 크게 포위망을 넓혔다.

포위망이 넓어졌다는 것은 곧 인구밀도가 낮아졌다는 것을 뜻했다. 각개격파식으로 정면 돌파를 하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하지만 이내 계획을 포기했다. 인기척의 숫자로 보아 인구밀도가 낮아졌다 한들 거기서 거기일 가능성이 높았다.

싸우다 지친 상태로 계곡에 도착하느니 차라리 놈들이 타이밍을 빼앗은 지금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는 편이 훨씬 더 좋을 듯싶었다.

타타탓!

달리는 속도를 최대한 끌어 올렸다.

멀리 계곡이 보이기 시작했다.

“헉…… 헉…….”

가슴이 욱신거렸다. 상처를 만지자 역시나 찢어진 새살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힐을 이용해 통증을 완화시키며 계곡을 살폈다.

V 자 형태로 되어 있는 계곡은 산의 단면을 깎아서 만든 듯했다. 단면의 경사가 가파르고 거칠어 기어 올라가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휘이잉!

날카로운 칼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귓불이 얼얼할 만큼 매서운 바람이었다.

땀이 식으면서 몸이 으스스 떨렸다.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순간 머리가 아찔했다.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은 후 계곡의 함정을 찾기 시작했다.

함정은…… 없었다.

수백 명이 넘는 암살자도, 대마법사도, 검의 절대자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깎아 내린 듯한 절벽과 계곡을 타고 흐르는 거친 강물뿐이었다.

“…….”

느낌이 좋지 않았다. 놈들의 타이밍을 빼앗았다고 생각했건만, 어쩌면 처음부터 타이밍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사삭!

뒤늦게 도착한 나이트워커의 추격대가 계곡의 입구를 에워쌌다.

이제 계곡에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계곡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항복하면 살려 주겠다.”

검은 옷에 검은 복면을 쓴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복면을 휙 벗어젖힌 후 미소를 지었다.

“항복해서 마굴의 위치만 알려 주면 된다. 물론 우리가 마굴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곳에서 원하는 것을 찾을 때까지는 감금하겠지만, 그 후부터는 자유다. 우리를 적대했던 것도 용서해 주지. 아니, 원한다면 평생 먹고살 수 있을 만큼의 돈도 줄 수 있다.”

사내의 표정과 목소리는 진지했다. 그의 말은 결코 거짓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더 속을 수가 없었다.

진심을 호소하는 암살자라니.

개가 웃을 일이었다.

“지금 여기서 목숨을 끊어 봐라. 그럼 네놈의 말을 믿어 주지.”

나는 비웃음을 담아 말했다.

사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미소가 사라지자 완벽한 무표정이 되었다. 그제야 암살자다운 표정이 되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럼 어디 한번 발악해 보거라. 크크크!”

사내는 다시 복면을 쓰고 무리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을 신호로 공격이 시작되었다.

“팔다리는 필요 없다! 머리만 멀쩡하면 된다!”

“포위해라! 사방에서 공격해!”

시커먼 복면인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

챙!

챙! 챙!

다크섀도우와 검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파파팟!

새하얀 불꽃이 튀었다.

덥석!

목을 노리는 검을 잡은 후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당황한 얼굴로 끌려온 복면인의 얼굴에 주먹을 먹였다. 복면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자아, 와라! 이 인간 백정 놈들아!”

마력을 끌어모아 있는 힘껏 포효했다.

장소, 인원수 등 전투와 관련된 모든 부분에서 지고 있었지만 기세에서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다.

일종의 오기였고, 자존심이었다.

휙!

“죽어랏!”

반월을 그리며 날아온 검이 옷자락을 스쳤다.

암살자들의 검에는 자비가 없었다. 주저 없이 목을 노리는 것을 보아, 팔다리뿐만 아니라 나의 목숨도 그다지 필요 없는 듯 보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놈들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큭!”

내가 가지고 있는 최후의 보루는 바로 나의 생명이었다. 그것은 나이트워커 놈들이 아무리 거칠게 몰아붙여도, 결국에 가선 나를 살려서 끌고 갈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한 믿음을 토대로 나는 최악의 경우, 목숨을 담보로 모험을 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다.

놈들이 필요한 것은 오직 머리였으며, 마법을 이용해 뇌의 기억을 스캔할 계획이 분명했다.

공격은 점점 거세졌다. 빠져나갈 구멍은 어디에도 없었다.

“헉! 헉!”

숨쉬기가 힘들었다. 손발이 어지럽고 무거웠다. 악착같이 달려들던 놈들이 나의 무위를 확인하곤 유연하게 전술을 바꿨다.

차륜전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지쳐 갔고, 적의 숫자는 줄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포기하지?”

항복을 권유했던 사내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개소리! 하압!”

쿵!

강하게 땅을 구르며 주먹을 뻗었다.

마나가 담긴 검을 휘둘러 푸른 초승달 모양의 검기劍氣를 발사할 수 있다면, 마력이 담긴 다크섀도우를 휘둘러 권기拳氣를 발사할 수도 있으리라.

휘이익!

거대한 주먹 모양의 마력이 다크섀도우에서 뿜어져 나갔다. 마력 특유의 검붉은, 하지만 마치 유령처럼 반투명한 거인의 주먹이었다.

“헉!”

나에게 이죽거린 사내가 경악을 하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놈이 있던 자리에 거인의 주먹이 떨어졌다.

콰광!

굉음이 계곡에 울려 퍼졌다. 주먹 모양으로 움푹 파인 구덩이에서 흙과 부서진 바위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죽여라! 빨리 죽여 버려!”

한순간이나마 겁에 질린 것이 창피한 듯 사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시간을 끌며 차륜전을 펼치던 암살자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휘익!

서걱!

검이 옆구리를 베었다. 날아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몸의 반응속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몸의 상처가 빠른 속도로 늘어 갔다.

“젠장!”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불가능했다. 좁은 계곡 안으로 몸을 피한 후 일렬로 달려오는 적들을 순서대로 상대하는 편이 훨씬 나을 듯싶었다.

나는 계곡 안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놈들은 내 뒤를 쫓아오지 않았다.

순간.

불길한 느낌과 함께 차가운 기운이 등뼈를 타고 올라왔다.

멈칫.

발을 멈췄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드드드드!

계곡이 몸을 떨었다.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흔들렸다. 계곡의 절벽에 둥지를 틀었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수천 마리의 새가 계곡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시끄럽게 울었다.

새들의 날개가 달빛을 막았다. 가뜩이나 어두컴컴했던 계곡이 빛 한 점 없는 암흑으로 돌변했다.

그리고 잠시 후.

계곡이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쿠르르릉!

콰과광!

나이트워커 놈들이 계곡에 심어 놓았던 마법이 일제히 폭발했다. 수만 년에 걸쳐 만들어진 계곡이 비스듬히 어긋났다.

가로로 찢어진 계곡이 서서히 앞으로 고꾸라졌다. 집채보다 커다란 바위들이 경사면을 타고 굴러 내려왔다.

태산이…… 내 머리 위로 무너져 내렸다.

“준비한 게 고작 이것이었더냐! 이딴 걸로 나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으냐! 하앗!”

나는 떨어지는 바위를 계단처럼 밟으며 하늘로 솟구쳤다. 한계에 도달한 몸으로 펼치기에는 무리인, 곡예에 가까운 묘기였다.

욱신.

가슴이 통증을 호소했다. 핏물이 울컥 목울대까지 차올랐다. 숨이 거칠어지면서 일순 호흡의 타이밍을 놓쳤다.

필연적인 실수였다.

퍼억!

“컥!”

바위가 몸을 강타했다.

정신이 아찔했다. 다시 제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땅으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하늘로 올라가던 것의 몇 배나 빠른 속도였다.

위험했다. 이대로는 바위에 깔려 납작한 쥐포가 될 터였다.

최후의 힘을 짜내 몸을 비틀었다. 덕분에 간신히 바위에 깔리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쾅! 콰광!

거대한 바위가 소나기처럼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몸을 굴려 바위 밑으로 몸을 숨겼다.

쿠르르릉!

본격적으로 계곡이 무너져 내렸다.

“네놈을 위해 준비한 무덤이다! 하하하하!”

암살자의 광소가 흙더미와 함께 쏟아졌다.

쿠르르릉!

계곡이 무너지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

바위와 흙더미가 멈추지 않고 쏟아졌다. 바위가 땅에 박히면 뒤따라온 흙더미가 바위와 바위 틈새를 메웠다. 그렇게 첩첩이 바위와 흙더미가 쌓였다.

나는 바위 틈새에 자리를 잡은 덕분에 간신히 깔려 죽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살았다는 것은 아니다.

무너진 계곡에서는 여전히 바위와 흙더미가 떨어지고 있었다.

쿵!

쿵!

바위가 떨어질 때마다 진동이 울렸고, 그럴 때마다 흙이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해 밀려들었다.

공간이 좁아지면서 상대적으로 공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조금씩 숨이 막혔다.

탈출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힘도 자연의 무게에는 아무 소용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나를 생매장시키고 있는 무덤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것뿐이었다.

쿵!

부스스!

바위에 붙어 있던 흙덩이가 진동에 떨어져 나와 얼굴 위로 떨어졌다.

콜록! 콜록!

흙이 콧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아까운 공기를 낭비하고 말았다.

“으으으…….”

무거운 압력이 마치 수압처럼 몸을 짓눌렀다.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복수도 못 하고…….

나에게 목숨을 맡긴 부하들을 외딴 섬에 가둬 놓은 채…….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인가.

문득 리치가 떠올랐다.

슬레이브 스템프로 묶여 있는 암흑의 흑마술사.

나와 생명을 공유하고 있는 그가 지금의 나를 보았다면 과연 무어라 말을 할까. 아니,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흙더미에 깔려 죽기 전에 자신의 손으로 나를 죽이려 할 것이 틀림없었다.

-만약 죽는다면,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죽여 버릴 테다.

리치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자아, 그럼 마지막 발악을 해 볼까.”

주먹을 바위에 댄 채 힘을 끌어모았다.

마력이 다크섀도우에 서리기 시작했다. 검붉은 기운이 주먹에서 일렁거렸다.

“마력은 넘쳐 나니 괜찮을 테고. 문제는…… 체력인가.”

전생의 기억을 깨닫고 고통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마력을 쓴다는 것은 제법 몸에 부하가 걸리는 일이었다. 한계에 다다른 체력으로 그 부하를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잠시 망설이는 사이 바위 틈새를 파고든 흙이 허리까지 차올랐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 따위는 없었다.

“달리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니.”

주먹에 힘을 준 후.

쾅!

바위를 향해 휘둘렀다.

내가 흙더미에 깔려 죽지 않도록 주춧돌 역할을 해 주던 바위가 일격에 부서졌다.

바위를 누르고 있던 흙더미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려앉았다.

나는 그 찰나의 틈새로 파고든 후 하늘을 향해 연속적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쾅!

쾅!

떨어지던 흙더미가 다시 위로 솟구쳤다. 그렇게 하늘을 향해 땅을 파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흙더미의 낙하 속도가 빠르다면 나는 순식간에 압사당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주먹질이 빠르다면 그리고 체력이 버텨 준다면, 언젠가 하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승부의 관건은 속도와 체력이었다.

쾅!

쾅!

떨어지는 흙더미를 밀어 올리며, 간간이 앞을 가로막는 바위를 깨뜨리며 하늘을 향해 전진했다.

“큭!”

일순 정신이 흐릿해지더니 주먹에 모여 있던 마력이 흩어졌다. 얼른 반대편 주먹을 뻗어 덮쳐 오는 흙더미를 후려쳤다.

쾅!

하마터면 흙더미에 잡아먹힐 뻔했다.

“젠장!”

얼마나 이 짓을 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얼마나 뚫고 올라왔는지, 앞으로 얼마나 남아 있는지 셈할 수 없었다.

체력은 이미 바닥이었고, 희망은 죽어 버린 지 오래였다. 다만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두를 뿐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발악도 서서히 끝나 가고 있었다.

쾅!

쾅!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주먹질 한 번에 수십 번씩 욕이 쏟아졌다.

그리고 끝내…….

주먹에 서려 있던 검붉은 기운이 사그라졌다.

“제에엔자아앙!”

휘익!

퍼억!

떨어진 흙더미가 내 몸을 집어삼켰다.

바로 그때.

흙더미에 파묻힌 채 힘겹게 기어 올라온 곳에서 어두운 무저갱으로 떨어지고 있던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두근!

두근! 두근!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듯한 고통.

마력이 멋대로 요동쳤다. 멀쩡한 몸이었을 때도 함부로 사용하지 못했을 압도적인 크기의 마력이 몸을 갈기갈기 찢을 기세로 미친 듯이 질주했다.

마력이 향하는 곳은 왼손의 주먹.

왼손이 멋대로 꿈틀거렸다. 검붉은 것을 넘어 새카만 기운이 주먹에 서렸다. 새카만 기운에 닿은 흙이 파파팟 튀어 올랐다.

“커헉!”

마력의 난동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피를 토했다. 마치 천재 대장장이의 검, 아이언 블레이드처럼 왼손의 다크섀도우가 마력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으득!

으드득!

마력의 힘에 짓눌린 뼈가 삐그덕거렸다.

“크으윽!”

고통을 참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순간.

폭발할 것처럼 요동치던 마력이 일순간에 왼손 주먹에 집결했다.

“잘 잤다! 하하하하!”

화아악!

낯익은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왼손 주먹에서 검은 빛줄기가 발사되었다. 빛줄기는 흙더미를 단숨에 꿰뚫었다.

콰과광!

충격음이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쾅!

엄청난 폭음과 함께 천장에 구멍이 뚫렸다.

구멍 너머로 캄캄한 하늘과 둥그런 보름달이 보였다. 새하얀 달빛이 눈을 찔렀다.

구멍 안으로 공기가 밀어닥쳤다.

쓰으으읍!

신선한 공기를 가슴이 터지도록 들이마셨다. 탐욕스럽게 공기를 먹어 치웠지만 거친 숨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보았느냐! 이 몸의 위력을! 하하하하!”

역시나 낯익은 목소리였다.

달빛에 의지해 목소리가 들려오는 왼손을 살폈다. 다크섀도우의 손등에, 마치 양각으로 조각한 듯, 무언가 작은 형체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오크의 얼굴이었다.

“생명의 은인을 그딴 눈으로 쳐다보다니! 어서 감사해하지 못할까!”

오크 얼굴이 거만한 얼굴로 호통쳤다.

어이가 없어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다크섀도우의 손등에 솟아난 달걀 크기의 오크 머리는 바로 쿠차차였다.

“하!”

헛웃음과 함께 스르륵 눈이 감겼다.

“기껏 구해 줬더니 태도가 불량하군! 건방져! 이 몸께서 말을 하고 있는데 감히 잠을 자려 하다니! 이봐, 주인! 듣고 있는 거야? 이봐! 이봐!”

쿠차차의 목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주인! 빨리 눈을 뜨지 못…….”

목소리가 뚝 끊김과 동시에 의식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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