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기사 칼리온 2-핏빛 안개의 섬 (10/45)

흑기사 칼리온 2

● 차 례

핏빛 안개의 섬

투사들의 요새

요새 공방전

마렉

징조

붕괴

서바이벌

리치

복수

핏빛 안개의 섬

쏴아아!

쏴아아!

조각배는 파도를 넘어 섬으로 향했다.

어느덧 수평선 아래에서 아침 해가 떠올랐다. 빛이 빠른 속도로 어둠을 걷어 냈다.

잠시 후 배가 해안에 닿았다.

바위투성이 산과 폐허가 된 건물과 그 사이를 메우고 있는 울창한 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스트로의 말이 떠올랐다.

“적무도는 100년 전만 해도 해적들의 섬이었습니다. 위대한 해적왕이라 불렸던 휴 루스의 왕국이었죠.”

카스트로는 조금 들떠 있었다.

내가 적무도로 끌려가는 것이 그리도 좋으냐 싶어 마음이 괜히 언짢아졌다.

“해적 놈 주제에 무슨 왕씩이나.”

“설마 휴 루스를 모르시는 겁니까?”

카스트로의 말투가 나의 무식함을 비웃는 것처럼 들려 더욱더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놈이 누군데?”

“휴 루스는…….”

아르센 제국에 가난한 농노의 아들로 태어난 사내가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남들 두 배에 달하는 체격과 그 이상의 힘을 타고난 거한이었다.

힘 하나만으로도 평생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었을 사내는 좋은 팔자를 타고났는지 괜찮은 스승까지 얻을 수 있었다.

사내의 스승은 은거할 곳을 찾던 늙은 용병—훗날 제국의 제1기사단인 로열 나이츠Royal Knights의 기사단장으로 밝혀졌다—이었는데, 사내의 힘에 감탄한 나머지 그를 제자로 삼았던 것이다.

비록 자신의 선택은 아니었지만 사내는 실망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이 배우는 검술이 삼류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쇳덩이를 서걱서걱 자르는 삼류 검술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사내는 스승이 죽고 난 후 제국을 떠돌며 수련을 계속했다. 많은 사람들과 싸웠으며 대부분 이길 수 있었다.

제국에 차츰 이름이 알려지고 검술도 그만큼 성취를 보이자 사내는 삶의 목표를 정했다.

그것은 한평생 앞만 보고 돌진해도 이룩하기 어려운 목표였다.

하지만 적어도 그 정도 목표는 있어야 한다고, 남자라면 그래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사내는 바다로 나갔고 뜻한 바를 이루었다.

그 어떤 함대조차 제압하지 못했던 바다의 해적들을 순식간에 일통한 해적 중의 해적.

떠돌이 해적들을 모아 바다 한가운데 나라를 세운 엉뚱한 해적.

제국의 황제로부터 왕의 칭호를 부여받은 유일한 해적.

역사상 유일의 해상 왕국 세이렌의 왕이자, 육지의 황제가 인정한 바다의 제왕.

해적왕 휴 루스.

“뭐, 지금이야 피로 얼룩진 섬에 불과하지만 말이죠.”

영웅담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냉소적으로 끝맺음 되었다.

“무슨 뜻이지? 피로 얼룩진 섬이라니?”

“휴 루스는 해적답게 험악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격은 해적답지 않게 순진했습니다. 자신의 왕국인 세이렌이 약탈로 완성되었다는 것도 죽을 때까지 몰랐죠.”

이후에 이어진 카스트로의 말을 요약하면.

세이렌 왕국이 세워진 섬은 원래 무인도였다. 온통 바위투성이인 땅과 벌거숭이산 하나로 만들어진 투박한 섬이었다.

휴 루스는 부하들에게 섬을 개간해 그럴듯한 왕국으로 만들어 놓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곤 총책임자인 자신은 훌쩍 여행을 떠나 버렸다.

섬에 상륙한 해적들은 무척 난감했다.

섬에는 건물을 지을 땅 그리고 건물을 지을 목재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해적들은 고민했지만, 해적답게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들은 난공불락 같던 그 문제를 자신들 특유의 방식으로 해결했다.

바로 약탈이었다.

해적들은 큰 배, 작은 배 할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약탈을 시작했다.

약탈한 배는 모두 분해하여 건물을 짓는 데 사용하였고,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노예가 되어 바위를 날라야 했다.

많은 배가 부서지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섬은 점점 왕국의 모양새를 갖춰 나갔다.

그렇게 해상 왕국 세이렌의 역사는 약탈과 피로 시작하게 되었다.

“시작이 좋지 않으니 끝이 좋았을 리 없습니다. 휴 루스는 믿었던 부하의 배신으로 죽었고, 해적왕의 죽음과 함께 역사상 최초의 해상 왕국은 불과 10년 만에 붕괴되었습니다. 구심점을 잃은 해적들은 배를 타고 온 육지의 기사들에게, 창피하게도 바다에서 몰살당했지요. 그리고 다시 무인도가 된 세이렌은 지금…… 대륙의 투사들이 서로를 죽이기 위해 투쟁하는 지옥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섬의 역사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그 섬에 붉은색의 안개가 끼기 시작했습니다. 피처럼 붉은 빛깔의 안개가. 그래서 저희들은 그 섬을 핏빛 안개의 섬, 적무도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카스트로와 나의 마지막 대화였다.

핏빛 안개의 섬, 적무도.

아침 햇살과 함께 섬 전체에 물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안개는 불그스름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카스트로가 말한 바로 그 안개였다.

배 위에 앉아 해안 주변을 살폈다.

햇빛을 받은 모래밭이 반짝반짝 빛났다. 모래밭 너머로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빽빽이 서 있는 나무와 붉은 안개 때문에 구석구석을 자세히 살펴볼 수가 없었다.

사람은커녕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유령이라도 나타날 것처럼 을씨년스러웠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이 섬 안에 무언가가 있음을.

피부를 찌르는 살기가 이를 증명했다.

단검을 챙긴 후 배에서 내렸다.

기온이 높고, 나뭇잎이 대체적으로 넓은 편이었다. 비가 많이 내리는지 땅에 물기가 많았다. 열대지방에 속한 섬이 분명했다.

살을 에는 듯한 살기가 나의 걸음에 맞춰 함께 이동했다.

해안가를 따라 오른쪽으로 걸었다. 살기가 계속 따라왔다. 한나절을 걷고 나서야 문득 깨달았다.

무언가가 나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적무도란 이름의 이 기분 나쁜 섬 전체가 살기 그 자체임을.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내뱉었다.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해 봐도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진정될 수가 없었다.

누군가 칼끝으로 목젖을 톡톡 찌르고 있는데 편히 잠을 잘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장난임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살기 때문에 한나절 내내 날카롭게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지독한 피로감을 느꼈다.

“위험한데.”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마음이 급속도로 마모되고 있었다. 살기의 정체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편히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보다 더욱 신경이 쓰였다.

은신의 고수는 아무도 없는 외딴 곳에 숨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이 바글거리는 도시에 몸을 숨긴다. 나뭇잎은 숲에, 물방울은 바다에.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섬은 살기를 숨기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진짜 살기를 떠올리자 더욱더 신경이 곤두섰다.

그것이 비록 가능성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생명과 직결되는 가능성이었기에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미쳐 버리기 딱 좋은 곳이군.”

머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발을 움직였다.

일단 섬을 한 바퀴 둘러볼 생각이었다. 섬의 크기와 지형 그리고 생태 환경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길을 막고 있는 거대한 바위를 기어올라, 폐허가 된 마을을 가로질러, 빽빽한 나무숲 사이를 지나, 강물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시냇가를 건너, 최대한 섬의 외곽을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해안가를 따라 이틀을 걸은 후 처음 계획을 수정했다.

섬의 외곽을 돌며 가늠한 섬의 크기는 작은 왕국에 버금갔다. 한 바퀴 둘러보기 위해 얼마만큼의 시간이 소요될지 계산이 되지 않았다.

이 섬이 과거에 왕국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다시 말해 적무도는 이름만 섬일 뿐, 왕국이 세워질 만큼 커다란 땅덩어리였던 것이다.

걸음을 멈췄다.

핏빛 안개로 물들어 있는 섬의 안쪽, 숲을 바라봤다. 핏빛 안개는 아침마다 피어올라 한낮이 되어서야 사그라졌다. 살기는 핏빛 안개가 있을 때 한층 더 짙어졌다.

핏빛 안개가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싱그러운 풀냄새와 함께 날카로운 살기가 폐부를 찔렀다.

밤이 찾아왔다.

어두운 땅거미가 숲을 덮었다. 밤하늘에 노란 달이 떴다. 나뭇가지가 바닷바람에 흔들렸다. 시커먼 그림자가 기괴하게 춤을 쳤다.

끼잇끼잇!

쿠아앙!

푸드덕! 푸드덕!

이름 모를 생물이 울부짖고, 정체 모를 날것이 날아올랐다.

나는 나무 위로 올라가 튼튼한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숲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울창한 숲 사이로 드문드문 세이렌 왕국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멀리 우뚝 솟아 있는 바위산이 보였다.

숲이 있다는 것은 물이 있다는 뜻이고, 나무가 있다는 것은 열매가 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풀숲을 뛰어다니는 작은 동물들의 모습도 언뜻언뜻 보였다.

채집과 사냥이 가능한 섬이었다. 굶어 죽을 걱정은 없으리라.

쿠오오오!

먼 곳에서 포효가 들려왔다. 울음소리에 담긴 살기가 숲의 살기를 압도했다. 숨기려는 의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광포한 살기였다.

푸드드득!

겁에 질린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포효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후 눈에 힘을 주었다.

황금빛 털을 가진 거대한 원숭이와 송곳니가 턱밑까지 내려온 네발짐승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쾅!

쿠궁!

원숭이의 주먹이 아름드리나무를 부러뜨리고 네발짐승의 송곳니가 바위를 깨뜨렸다.

양쪽 모두 피투성이가 된 끝에 양팔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원숭이가 승리를 거뒀다.

쿠오오오!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원숭이가 포효를 질렀다. 그러곤 네발짐승의 몸을 찢어 내장을 뜯어 먹었다.

순간.

원숭이가 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거리의 한계를 뛰어넘어 눈과 눈이 마주쳤다.

원숭이의 샛노란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나는 살기를 일으킨 후 원숭이를 쏘아보았다.

살기가 전달될 만한 거리가 아니었건만 내 살기를 느낀 것처럼 원숭이가 몸을 움츠렸다. 원숭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곤 먹이를 버려둔 채 숲 속으로 사라졌다.

살기를 가라앉히고 나뭇가지 위에 몸을 눕히니 지옥 같은 침묵 속에 지독한 살기만이 넘실거렸다.

아침햇살과 함께 눈을 떴다. 나뭇가지 위에서 밤새 칼잠을 잔 탓에 온몸이 쑤셨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귀가 웅웅 울렸다.

주변을 한번 둘러봐 안전을 확인한 뒤 나무 위에서 내려왔다.

단검으로 잔가지들을 헤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날카로운 살기가 여전히 목을 옥죄고 있었다. 긴장이 마음 한쪽에 늘 도사렸다.

먹을 수 있을 만한 열매를 몇 개 구해 한 입씩 먹어 보았다. 맛과 몸 상태를 살피며 독이 든 것으로 의심되는 열매는 버리고, 괜찮은 열매로 배를 채웠다.

그렇게 조심했음에도 불과하고 기어이 독이 든 열매를 먹었는지 하루 종일 설사를 했다.

살기로 인해 민감해진 신경에 탈수증상까지 겹치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짜증이 솟구쳤다.

거의 분노에 가까운 짜증이었다. 모든 것이 신경에 거슬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졌다.

적무도에 들어온 지 8일째.

마침내 나는 미치고 말았다.

* * *

원래 계획은 우뚝 솟아 있는 바위산을 오르는 것이었다. 바위산 정상에서 섬의 전경을 확인해 보는 것이었다. 섬의 전경을 눈으로 확인한 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궁리해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폭!

뭔가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머리 위가 축축했다. 손으로 만지자 진흙을 만진 것처럼 물컹했다. 똥 냄새가 진동했다.

……그렇게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던 머리 두 개 달린 새가 내 머리 위로 새똥을 싸지르는 순간 모든 계획이 무너졌다.

뚝!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기름으로 흠뻑 젖은 오두막에 작은 불티가 튄 것처럼, 주체 못 한 짜증이 들불처럼 솟아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붕괴시켰다.

머릿속이 새하얗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했다. 오랜만에 제 세상을 만난 마나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다. 활화산처럼 폭발한 마나가 모든 신경을 뜨겁게 달궜다.

위험하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어서 빨리 마음을 진정시키고 마나를 억눌러야 한다.

하지만…….

평정심 따위는 개에게나 갖다 주라지!

“으아아아!”

참고 참았던 짜증이 외마디 비명이 되어 터져 나왔다.

달렸다.

숲 속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앞을 가로막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무엇이든 일단 주먹부터 내뻗었다.

쾅!

슈슛!

콰광!

연못을 뛰어넘고, 벌판을 내달렸다. 나무를 부러뜨리고, 바위를 박살 냈다.

그 무엇도 나를 막지 못했다. 그 무엇도 아이언 피스트보다 단단하지 못했다.

해와 달이 번갈아 떠올랐다. 빛과 어둠이 수시로 교차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들끓던 마나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시야가 갑자기 탁 트였다.

“헉, 헉…….”

나는 절벽 끝에 서서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를 바라봤다.

휘이잉!

거친 바람에 옷자락이 펄럭거렸다.

섬의 끝이었다.

몇 날 며칠을 질주하여 섬을 가로지른 것이다. 쌓이고 쌓였던 모든 감정이 바람과 함께 허공으로 사라졌다.

가슴이 뻥 뚫린 듯 시원했다. 지끈거리던 머리가 개운했다.

나는 절벽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헉……. 헉…….”

갑자기 지독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안 되는데.

이렇게 자면 안 되는데.

이곳은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인데.

그 어떤 이유로도 수마를 쫓아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주변을 경계하며 선잠을 자기엔 모든 신경이 망가져 있었다.

될 대로 되라지.

적무도에 도착하고 처음으로 나는 깊이 잠을 잘 수 있었다.

* * *

쏴아아!

철썩!

쏴아아!

철썩!

거친 파도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밝은 빛이 눈꺼풀을 두드렸다.

“……으으으.”

온몸이 삐거덕거렸다.

옆으로 돌아눕기 위해 몸을 뒤척이는 순간 칼에 찔린 듯 격한 고통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고통과 함께 잠이 들기 전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비몽사몽을 헤매던 정신이 순식간에 번쩍 깨어났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눈을 뜨자 푸른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태양이 눈동자를 찔렀다.

나는 고통을 참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크윽!”

이곳이 어디인지,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웠다.

반사적으로 바다를 등지고 앉아 숲을 노려보았다.

다행히 나를 위협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작은 짐승 몇 마리가 나무 뒤에 숨어 고개만 슬쩍 내민 채 나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지치고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말았다.

황금 털 원숭이 같은 괴물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곳에서 무방비에 가깝게 휴식을 취하다니.

욱신거리는 팔다리. 바닷바람을 맞아 뻣뻣하게 굳은 근육.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지독한 피로감.

숙면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피로는 조금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오히려 더욱 가중된 듯했다. 앉아만 있어도 숨이 거칠어질 만큼 힘들었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몸을 살펴보니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검붉게 말라 버린 피딱지로 몰골이 흉측했다.

나에게서 나온 것치고는 너무나도 많은 양의 피였다. 언뜻언뜻 숲의 동물들을 찢어발기고 있는 나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힘들고 괴로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벽 위에 계속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도 배가 고팠다.

비틀비틀 걸어서 다시 숲 속으로 들어갔다.

숲 속으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

이변을 느꼈다.

숲은 여전히 살기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살기의 느낌이 전과 달랐다.

전의 살기가 특정한 대상이 아닌 세상 전체에 대한 막연한 분노였다면, 지금의 살기는 단 하나의 대상에 초점을 맞춘 구체적인 분노였다.

그 대상은 바로 나였다.

숲의 살기가 노골적으로 나를 노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니, 기분 탓으로 돌리기에는 조짐이 심상치 않았다.

작은 네발짐승들이 나무 기둥 뒤에 숨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새들이 지저귐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봤다. 손톱보다 작은 벌레들이 붕붕 소리를 내며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때였다.

땅이 미약하게 진동했다.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는데 진동의 세기가 조금씩 강해져 마침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지경이 되었다.

나는 나무 기둥을 붙잡고 중심을 유지했다.

“뭐지?”

땅에 귀를 대었다. 거대하고 무거운 뭔가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쿵!

엄청난 소리와 함께 땅이 진동하며 들썩거렸다.

우지끈!

콰당!

멀리서 나무 한 그루가 내가 있는 방향으로 쓰러졌다.

쿵!

다시 땅이 진동했다.

동시에 나를 감시하듯 쳐다보고 있던 동물과 새와 벌레가 화들짝 놀란 듯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우지끈!

콰당! 콰당!

나무들이 내가 있는 방향을 향해 연쇄적으로 쓰러졌다. 거대한 뭔가가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본능이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것이 도착하기 전에 어서 빨리 도망치라고.

쿵! 쿵!

꽈당! 꽈당!

진동의 간격이 짧아졌다. 나무들이 갈대처럼 픽픽 쓰러졌다.

그, 것, 이 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숲 속으로 몸을 날렸다.

몸을 날리기 직전 나무숲 사이로 불쑥 솟아 있는 시커먼 물체를 보았다. 아름드리나무를 능가하는 거대한 크기에 질릴 지경이었다.

괴물의 정체를 미처 확인해 보지 못한 채 땅의 진동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달렸다.

나는 연못가에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한여름처럼 기온이 높은 탓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물을 마시다 아예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차가운 물이 달궈진 몸에 달라붙었다.

달라붙은 것은 물뿐만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물고기들이 바지 자락을 물고 늘어졌다. 대충 몸을 씻고 연못 밖으로 나올 때까지도 물고기들은 여전히 바지 자락을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의도치 않은 낚시였다.

나는 물고기들이 나에게 했던 것처럼 그들을 뜯어 먹었다. 워낙에 배가 고프고 기력이 쇠한 까닭인지 날것이었음에도 물고기는 생각보다 맛이 있었다.

적당히 배를 채운 후 연못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러곤 단단한 나뭇가지 위에 몸을 뉘었다. 나뭇가지가 제법 두꺼워 그런대로 편안한 느낌이었다.

기력을 회복할 겸 잠시 눈을 붙였다.

부스럭!

기척이 들림과 동시에 가만히 눈을 떴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옆에 있는 나뭇가지가 코끝을 쳤다. 코를 비틀어 재채기가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부스럭!

풀숲이 양 갈래로 벌어지면서 그 안에서 땅딸막한 초록색 괴물이 걸어 나왔다.

괴물은 두 발로 걸었고, 검붉은 색깔의 짐승 가죽으로 사타구니만 간신히 가리고 있었다. 성인 남자의 가슴팍 정도 되는 키에, 온몸이 단단한 근육질이었다. 손에는 기다란 창을 들었다. 얼굴은 돼지머리와 비슷했는데, 하늘로 솟아 있는 들창코에선 숨을 쉴 때마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몬스터도감에 적혀 있던 괴물의 이름은 바로 오크였다.

휘익!

휘익!

오크 셋이 창대로 숲을 헤치며 연못가로 향했다. 하지만 곧장 가는 것이 아니라 중간 중간 걸음을 멈추고 땅을 살폈다.

취익! 코프트툴!

게? 카다루! 취익!

오크 셋은 서로 대화를 나누며 꼼꼼히 땅을 살폈다. 그들은 연못가에 도착한 후 더 조심스럽게 땅을 살폈다.

특히 한 곳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바로 내가 물고기를 뜯어 먹으며 휴식을 취했던 자리였다.

그들은 내가 먹다 버린 물고기 뼈다귀를 들고 냄새를 맡거나, 입에 넣어 맛을 봤다.

취익! 차트롤푸!

셋 중 한 놈이 내가 누워 있는 나무 쪽을 가리켰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저놈들이 찾고 있는 것은 바로 나였다.

어째서 나를 찾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나는 나무 아래로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뛰어내렸다.

나무 기둥에 숨어 슬쩍 동태를 살피니 내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오크 셋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있는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오크를 향해 던지지는 않았다. 무턱대고 싸움을 시작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나를 추적하는 이유와 추적하고 있는 인원수 정도는 확인해야 했다.

특히 나를 쫓는 이유가 궁금했다.

숲의 적의를 한 몸에 받게 된 이유와 관련이 있으리란 예감이 뇌리를 지배했다.

발자국이 남지 않게 조심하며 오크들의 뒤로 돌아갔다.

그들은 내가 잠을 잤던 나무 밑에서 한참을 서성인 후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추적을 포기했다.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긴 채 그들의 뒤를 쫓았다. 체취가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바람의 방향을 조심하며 오크들을 미행했다.

중간 중간 다른 오크들이 합류해 어느새 오크의 숫자가 열다섯을 넘겼다.

취익! 오쿰바!

오쿰바! 오쿰바! 취익!

오크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돼지 멱따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그러다 갑자기 시비가 붙어 엉망진창 주먹다짐을 했다. 그러더니 승자와 패자가 나뉘기도 전에 화해를 하곤 어깨동무를 한 채 보금자리로 들어갔다.

몬스터도감에 적혀 있던 대로 굉장히 다혈질적인 몬스터였다.

오크들의 군락은 절벽 위에 위치해 있었다. 절벽 아래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나무 위로 올라가 오크들의 군락을 훑어봤다.

오크들이 절벽 위를 보금자리로 택한 이유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보금자리를 만드는 데 힘을 쏟는 대신 멸망한 왕국의 잔재를 보금자리로 활용하고 있었다.

멸망한 왕국의 잔재답게 제대로 된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목조 건물은 대부분 기둥만 남아 있었고, 석조 건물은 이끼와 넝쿨로 뒤덮인 채였다.

반쯤 부서진 탑이 시선을 끌었다. 탑의 크기와 둘레를 바탕으로 부서지기 전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거목의 높이를 훌쩍 뛰어넘을 만큼 높은 탑이었을 것이다. 이 정도 높이의 탑이라면 아마 등대로 쓰였으리라.

그리고 지금은 오크들의 감시탑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군락에는 대략 100여 마리의 오크가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일부는 외곽에서 경계를 서고, 일부는 사냥감을 들고 저녁을 준비하고, 일부는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뛰어다녔다.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듯 보였지만 그 안에서 묘한 질서가 느껴졌다.

인간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지성을 가진 몬스터이니 나름대로의 질서와 규칙이 있을 것이다.

오크들의 군락에서 흰 연기가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연기와 함께 고기 굽는 냄새가 밀려왔다.

입에 침이 고이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물고기 몇 마리로 허기를 달랜 위장이 밥을 달라며 난동을 부렸다.

그러고 보니 적무도에 도착한 이후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 본 기억이 없었다. 설사를 하게 만드는 열매와 날고기 따위가 전부였다.

꼬르륵!

다시 위장이 소리를 질렀다.

“알았다, 알았어. 조만간 제대로 된 고기를 넣어 줄 테니 조금만 더 참아라.”

나는 나뭇가지에 달려 있는 열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열매를 잡아당기자 나뭇가지가 활처럼 휘었다. 무성한 나뭇잎이 좌우로 벌어졌다.

번쩍!

틈이 벌어진 나뭇잎 사이에서 샛노란 빛이 이글거렸다.

흠칫!

온몸에 소름이 돋고, 근육이 빳빳하게 긴장했다.

샛노란 빛이 데구루루 옆으로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새하얀 빛이 반짝였다.

새하얀 빛의 정체가 짐승의 송곳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

스팟!

황금빛 털을 가진 거대한 원숭이가 나뭇잎을 뚫고 튀어나왔다.

“흡!”

황급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턱을 스치며 지나갔다.

얼굴에 구멍이 나는 것은 간신히 모면했지만 그 덕분에 원숭이 아래로 깔리고 말았다.

크르르르!

원숭이의 얼굴에 승자의 미소가 떠올랐다.

원숭이에게 잡혀 있는 팔이 뜯겨져 나갈 것처럼 아팠다. 뿌리치려고 해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괴력을 지닌 원숭이였다.

원숭이가 입을 쩍 벌렸다. 역한 입 냄새와 함께 허연 침이 얼굴 위로 뚝뚝 떨어졌다.

목덜미를 물어뜯기기 직전.

나는 앞뒤로 크게 몸을 흔들었다.

나와 원숭이를 위태롭게 지탱하고 있던 나뭇가지가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뚝 부러졌다.

퍽!

나는 허공에 떠 있는 상태로 원숭이의 배를 걷어찼다. 원숭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내게서 떨어졌다.

나와 원숭이 모두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벌떡!

급하게 몸을 일으켰지만 먼저 몸을 추스른 쪽은 원숭이였다.

다다다닷!

부웅!

원숭이는 네발로 달려와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러곤 내 가슴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나는 팔을 X 자로 교차시켜 가슴을 방어했다.

퍽!

둔탁한 충격이 팔을 지나 가슴팍을 때렸다.

“크윽!”

뒤로 몸을 날려 충격을 흡수했음에도 불구하고 팔이 찌릿찌릿했다.

나는 돌팔매질의 돌멩이처럼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착지할 지점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나도 모르게 욕이 터져 나왔다.

“젠장!”

내가 날아가고 있는 방향에는 엉성하게 만들어진 목책이 서 있었다. 오크들이 외부의 침입자를 막기 위해 세워 놓은 방어벽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나를 잡으려 하는 오크들의 본거지로 날아가고 있었다.

콰당탕!

엉성하게 만든 목책이 산산이 부서졌다.

원숭이가 또다시 공격을 시도하기 전에 고통을 참으며 얼른 자세를 바로잡았다.

“……젠장.”

나의 힘을 능가하는 원숭이의 괴력보다 원숭이가 나의 이목을 속이고 바로 옆까지 다가와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열매를 먹기 위해 손을 뻗지 않았다면 반격 한번 해 볼 틈 없이 송곳니에 머리통이 깨졌을 것이다.

어째서 몰랐을까.

어째서 방심하고 있었을까.

어째서…….

크아앙!

원숭이가 화난 얼굴로 소리를 지른 후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쳤다. 그러곤 분에 못 이긴 듯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샛노란 눈동자가 희번덕거리며 흉포한 살기를 뿜었다.

“아…….”

원숭이의 살기를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어이없을 만큼 쉽게 원숭이의 접근을 허용한 이유를.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다. 아무리 강한 자극일지라도 같은 자극이 일정 시간 이상 계속 주어지면 종국에는 자극을 자극으로 느끼지 못하게 된다.

나의 상태가 이와 같았다.

붕괴되어 버린 마음이 아직 회복하지 못한 탓에 살기를 위험신호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원숭이가 살기를 내뿜고 있다는 것을 지식으로 ‘알고’ 있을 뿐, 위험신호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위험한데.”

정말로 위험했다.

살기를 살기로 느끼지 못한다면, 그래서 직감이 아닌 머리로 생각하고 반응해야 한다면, 싸움에 있어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것과 다름없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취익! 취익!

취익! 팍카푸쿠!

초록 빛깔의 땅딸막한 몬스터들이 자신들의 본거지에 침입한 나를 천천히 둘러쌌다. 그들이 내뿜는 살기에 호흡이 곤란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살기가 살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육체의 반응속도를 극한까지 올려 주던 위험 감지 능력이 작동을 멈췄다.

황금 털 원숭이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분통을 터뜨리며 포효했다. 자신의 사냥감을 오크에게 빼앗긴 것이 분한 듯 보였다.

오크 몇 마리가 창을 휘두르며 다가가자 원숭이가 잽싸게 나무 위로 올라가 으르렁거렸다.

취익! 취익! 오쿠마하팜!

네크리토쿠추파!

쿵! 쿵! 쿵!

나를 둘러싼 오크들이 박자에 맞춰 창대로 바닥을 찍었다.

단순히 침입자에 대한 분노치고는 오크들의 살기와 적의가 의아할 정도로 강렬했다.

그때였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거대한 덩치의 오크가 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모든 오크들이 행동을 멈췄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했다.

휘이잉!

바람이 불었다. 사냥감을 놓친 황금 털 원숭이가 나무 위에서 샛노란 눈을 껌벅였다. 달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풀벌레가 찌르르 울었다.

숲의 숨소리만이 적막을 깨뜨렸다.

그리고…….

크어어어엉!

오크들의 왕이 포효했다.

푸드덕!

새들이 날아올랐다.

파사삿!

동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황금 털 원숭이가 화들짝 놀라 숲 속으로 도망쳤다.

망가졌던 풍차가 다시 회전하듯, 잠들어 있던 생존 본능이 압도적인 살기에 다시 깨어났다.

손끝이 덜덜덜 떨렸다. 온몸의 털이 쭈삣 곤두섰다.

두려움과 공포가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이내 모든 감정을 초월하는 거대한 투지가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올랐다.

주먹에 꽉 힘을 주었다. 아이언 피스트의 단단함이 손아귀에서 느껴졌다.

취익! 취익!

우두머리 오크 뒤쪽에서 몇 마리의 오크가 넓은 판자를 들고 나타났다. 판자 위에는 세 마리의 오크 시체가 뉘어 있었다.

두 마리는 머리가 박살 나 있었고, 나머지 한 마리는 가슴 부위가 깊이 함몰되어 있었다. 모두 망치로 맞은 듯 처참한 상처였다.

서걱!

서걱! 서걱!

우두머리 오크가 거대한 크기의 도끼를 들어 시체의 목을 하나씩 잘랐다.

데구루루!

그러곤 시체의 머리를 내 쪽으로 툭 굴렸다. 죽은 지 며칠이나 지났는지 머리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취익! 레프리샬!

우두머리 오크가 도끼를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를 질렀다.

레프리샬! 레프리샬!

취익! 취익! 레프리샬!

레프리샬!

나를 둘러싸고 있던 수십 마리의 오크들이 손에 들고 있는 무기를 치켜들며 ‘레프리샬’을 외쳤다.

오크들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 오크들의 의지가 뇌리에 새겨졌다.

저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우두머리 오크가 시체에게 행했던 만행을 고스란히 나에게 재현하는 것.

취익! 레프리샬!

그것은 복수였다.

* * *

오크는 인간보다 지능이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다. 인간으로 치면 대략 일곱 살쯤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크가 모든 면에서 인간보다 뒤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인간을 능가하는 것들도 많았다.

일단 힘과 체력적인 면에서 오크는 인간을 능가했다.

드워프에 버금갈 만큼 땅딸막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오크는 웬만큼 단련한 인간보다 힘이 셌다. 또한 따로 훈련하지 않아도 나날이 두꺼워지는 근육 덕분에 단순한 힘 싸움으로 오크를 이기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또한 오크는 뛰어난 전사였다.

그들은 두려움을 몰랐다. 체계적으로 무술을 배운 것은 아니지만 타고난 힘과 두려움을 모르는 성정은 그들을 항상 최전선에 서서 적을 향해 돌격하는 광전사로 만들었다.

그리고 오크가 인간보다 뛰어난 또 한 가지가 있었다.

오크는 타고난 사냥꾼이었다.

하지만 전사일 때와는 달리 놀라운 사냥 솜씨 덕분에 타고난 사냥꾼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두려움이 없는 대신 그 어떤 종족보다 탐욕스러웠다. 특히 식탐이 강하기로 유명했다.

그들의 사냥법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사냥감을 선정한 후 무작정 뒤를 쫓는 게 사냥법의 전부였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체력을 바탕으로 사냥감이 지칠 때까지 뒤를 쫓는다. 사냥감이 너무 빨라 시야에서 놓치면 들창코를 이용해 냄새를 쫓는다.

어찌 됐건 쫓는 것이다. 잡을 때까지.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은 그 집요함, 그 탐욕.

오크들이 어째서 타고난 사냥꾼으로 불리는지 나는 절실하게 깨달았다.

부서진 목책을 통해 숲 속으로 달아난 순간부터 오크들의 추적이 시작되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일부러 도망갈 길을 만들어 놓은 것도 같다.

토끼몰이를 통해 좀 더 괴롭힌 후 죽이려는 속셈인 듯했다.

휴멜의 병사들에게 쫓겼던 것은 애들의 어설픈 장난에 불과했다.

물론 포위망의 완성도는 휴멜의 병사들 쪽이 훨씬 높았다. 하지만 마치 전쟁을 벌이는 것처럼 단순하면서도 저돌적인 추격은 나를 훨씬 더 힘들게 만들었다.

사실 오크들은 포위망을 짜지도 않았다. 개개인이 나를 쫓아, 혹은 냄새를 쫓아 일직선으로 달려들 뿐이었다.

인간보다 월등한 체력 때문에 쉽게 떨쳐 버릴 수도 없었다. 인간보다 월등한 전투 능력 때문에 쉽게 죽여 버릴 수도 없었다.

단숨에 죽여 버릴 수가 없으니 드잡이질을 하는 동안 금방 다른 오크들이 나를 에워쌌다. 때문에 오크의 숫자를 줄이지도 못한 채 체력만 소모하고 후퇴하는 짓을 수십 번이나 반복해야 했다.

휘익!

챙!

나는 허벅지를 노리며 날아온 창을 발목의 족쇄를 이용해 걷어찼다.

창이 하늘로 솟구쳤다.

창과 함께 만세를 부르고 있는 오크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아이언 피스트로 가슴팍을 때렸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오크의 가슴이 움푹 함몰됐다.

그래, 이 상처다.

목이 잘린 오크 시체에 남아 있던 상처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오크들이 어째서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잡아 죽이려 하는지를.

미쳐 버린 내가 숲을 뛰어다니며 무슨 짓을 벌였는가를.

그리고…… 숲의 살기가 나에게 집중된 이유를.

나의 광기에 유린당한 숲이 나에게 복수를 하고자 했다.

나를 쫓아다니는 것은 오크뿐만이 아니었다.

황금 털 원숭이 역시 높은 나무 위에서 나를 따라다니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살쾡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몬스터, 코볼트 역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나를 쫓아다녔다. 심지어 아름드리나무보다 큰, 작은 동산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한, 그래서 볼 때마다 나를 도망치게 만드는 괴물 거북이조차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녔다.

숲의 저주를 한 몸에 받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무사할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오크들 덕분이었다.

오크들은 나를 추적하며 황금 털 원숭이를 위협하고, 코볼트의 머리통을 부수었다. 물론 괴물 거북이가 나타났을 때는 오크들 역시 혼비백산하며 도망쳤지만 오크들은 숲의 지배자처럼 당당하게 활보했다.

취익! 게롬보…… 켁!

오크가 동료를 부르기 전에 손날로 목을 후려쳤다. 목을 감싸 쥐고 주저앉은 오크의 머리를 강하게 걷어찼다.

게롬보파쿰!

오크는 반쯤 함몰된 머리통을 손으로 누른 채 끝내 원하는 말을 외쳤다.

지독한 생명력이었다.

취익!

취익! 취익!

사방에서 오크들이 몰려왔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숨이 막혔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공기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뇌가 현기증을 일으켰다. 하늘이 빙글빙글 돌았다.

휘익!

빠각!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이 창대를 부러뜨린 후 오크의 입에 박혔다.

입에 피거품을 문 채 오크가 달려들었다. 부러진 창대를 몽둥이 삼아 나를 공격했다.

“이 지긋지긋한 놈들아!”

달려드는 오크의 팔을 잡은 후 그 힘을 이용해 멀리 집어 던졌다.

각개격파를 통해 거의 스무 마리에 가까운 오크를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었지만 그럴수록 오크들은 더욱더 전의를 불태웠다.

나는 돌멩이를 집어 내 쪽으로 뛰어오고 있는 오크의 다리를 향해 집어 던졌다.

쉐에엑!

퍽!

정강이뼈가 기이한 각도로 휘면서 오크가 엎어졌다. 뒤따르던 오크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동료의 등을 밟고 나에게 돌진했다.

등을 밟힌 오크가 괴성을 지르며 자신의 등을 밟고 지나간 동료에게 고함을 질렀다.

휘익!

오크가 휘두른 검이 앞머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잘린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어졌다.

“하앗!”

나는 목을 노리며 날아오는 검을 피한 후 오크의 손목을 후려쳤다.

오크의 팔이 180도 반대 반향으로 획 꺾이면서 들고 있던 검이 어깨를 찔렀다.

케케케!

등을 밟혔던 오크가 자기 손으로 자기를 찌른 동료를 크게 비웃었다.

사사삭!

사삭!

어깨를 감싸 쥐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오크를 끝장내기 직전 주변의 풀숲에서 기척들이 느껴졌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다른 오크들이 도착하기 전에 자리를 떠났다.

추적을 피해 도망 다닌 지 5일째.

5일 동안 한숨도 자지 못했다. 5일 동안 나는 구릉을 넘고, 개울을 지나, 처음 목표로 했던 바위산까지 오게 되었다. 물론 바위산을 오르지는 않았다. 민둥산을 기어올라 빌어먹을 오크들에게 나의 위치를 알려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바위산 아래에 위치한 커다란 바위 틈새에 몸을 쏙 집어넣은 후 잠시 휴식을 취했다.

마음이 금세 풀어졌다. 바위에 기대 눈을 감으니 순식간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헉!”

깜빡 잠이 들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났다.

아직 잠을 잘 때가 아니었다.

문득 이 섬에 있는 동안 영원히 잠을 못 잘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죽든, 적무도의 생명체들이 죽든, 둘 중 하나가 죽어야 잠을 잘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는 정말로 잠을 자 버릴 것만 같았다.

나를 향하고 있는 살기가 점점 짙어지는 것을 보아 빌어먹을 오크들이 또 쫓아온 듯했다.

오크의 추적을 피해 도망 다니는 동안 나를 따라다니는 살기의 숫자가 더욱 늘어났다. 그리고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아무리 미쳐 있었다고 하지만 대체 얼마만큼이나 횡포를 부렸기에 이렇게 섬 전체의 분노를 살 수 있는지 쓴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5일이나 도망 다니며 궁리해 봤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하는 법이다.

내가 딱 그 꼴이었다.

햇살이 눈을 찔렀다. 뻑뻑한 눈에 햇살이 닿으니 눈이 시려 제대로 눈을 뜨고 있기가 어려웠다.

부스럭!

맞은편에 있는 풀숲이 흔들렸다.

이마에 뿔이 달린 늑대가 풀숲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너도냐?”

처음 보는 놈이었다. 하지만 왠지 앞으로 자주 볼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몸을 일으켜 바위 틈새에서 빠져나왔다.

크르릉!

화들짝 놀란 늑대가 뒷걸음질 쳤다.

덤벼들 용기도 없는 놈조차 나를 죽이기 위해, 혹은 죽는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쫓아다닌다. 이 섬의 생명체들은 몬스터고 짐승이고 할 것 없이 집요함만큼은 끝내줬다.

나는 햇볕을 피하기 위해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갔다.

걷다가 땅에 귀를 대고, 또 걷다가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5일째 계속되는 긴장에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뇌가 민첩하게 움직이지 않았고, 돌부리에 걸린 것처럼 계속 작동을 정지했다.

명령을 내려야 될 사령관이 이 모양이니 부하인 몸이 제대로 움직일 리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육체의 반응속도가 떨어졌다. 그만큼 위험한 상황에 많이 노출되었다.

평상시의 머리라면 금방 눈치챘을 것이다. 저돌적인 오크들이 달려들지 않고 나무 기둥 뒤에 숨어 소리를 지를 때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던 나는 오크들이 나타난 곳을 피해 본능적으로 도망만 쳤다.

뭔가 이상하다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나는 일곱 살 아이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오크들의 유인작전에 완벽하게 걸려들었다.

휘이잉!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과 흰 구름뿐이었다.

콰르르르!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취익! 마카다파루!

5일 내내 오크들과 어울리다 보니 이제는 오크의 말이 해석될 정도였다. 애초에 지능이 떨어지는 종족답게 단어의 수가 많지도 않았다.

마카다파루!

독 안에 든 쥐새끼야. 대략 이런 의미일 것이다.

레프리샬! 취익!

복수를.

취익! 오타추푸하!

이 몸이 죽여 주마.

누타타초파!

아니야. 내가 죽일 거야.

오크 둘이 쌈박질을 시작했다. 몇 마리는 싸움을 부추기고, 몇 마리는 응원을 했다. 그리고 대다수의 오크들은 싸움이 끝날 때까지 쪼그리고 앉아 그동안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을 멍하니 중얼거리고 있었다.

두프투코하…….

……배고프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이런 놈들의 유인 작전에 걸려들다니.

나 자신이 한심할 지경이었다.

막다른 절벽 위에 몰려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묘하게 지루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싸움이 끝나고 승리한 오크가 쌍코피를 흘리며 기쁨의 제스처를 취했다.

승리한 오크는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휘익!

휘익! 휘익!

창을 빙글빙글 돌려 묘기를 부린다.

하나…… 둘…… 셋!

타이밍을 계산한 다음 창의 끝을 잡아챘다.

취익!

창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오크가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나의 힘이 더 셌다.

나는 오크를 잡아당겼다.

질질질!

오크가 무게중심을 뒤로한 채 필사적으로 버텼다.

잡아당기던 손에 갑자기 힘을 풀었다.

그러자.

쿠당탕탕!

제 힘을 못 이긴 오크가 뒤로 발라당 넘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동료 오크들이 와아,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벌떡!

넘어졌던 오크가 취익, 취익, 숨을 몰아쉬며 일어섰다. 초록색 얼굴이 붉게 보일 만큼 상기된 상태였다.

추라라포쿠!

넌 오늘 내 손에 죽었다, 를 외치며 넘어졌던 오크가 황소처럼 달려들었다.

슬쩍 옆으로 몸을 피한 뒤 다리를 걸었다.

턱!

부웅!

다리에 걸린 오크가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내 뒤는 절벽이었다.

나의 눈과 오크의 당황한 눈이 허공에서 잠깐 부딪친 후 오크가 절벽 아래로 훅 사라졌다.

웃고 떠들던 오크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특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 오크와 치고받고 싸웠던 오크가 불같이 화를 냈다.

레프리샬!

레프리샬! 취익!

30마리에 가까운 오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피할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오크를 향해 달려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두두두두!

마치 군마가 달리는 것처럼 땅이 울렸다. 그렇게 뛰어온 오크들이 나를 잡기 위해 점프했다.

몇 마리는 쳐 냈지만 기어이 한 마리가 허리를 붙잡았다.

케케케!

나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오크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 이 멍청한 놈들아!”

나는 기어이 소리를 질렀다.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뛰어들어 나의 허리를 잡았으니 결과는 뻔했다. 나는 나의 허리를 끌어안은 오크와 함께 절벽 위에서 튕겨져 나왔다.

쉐에에엑!

절벽이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거친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콰르르르!

폭포 소리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그 소리가 정점에 다다른 순간!

풍덩!

차가운 액체가 나를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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