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팩트를 얻다
나는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보름이나 침대 생활을 해야 했다. 드레이크의 브레스를 몸으로 받아 낸 탓에 전신 화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팔로 가린 덕분에 얼굴은 무사했지만 대신 머리카락이 홀랑 타 버리고 말았다. 보름 동안 자라난 머리카락이 고슴도치 가시처럼 빳빳했다.
드레이크와의 사투가 끝난 지 20여 일이 지나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필사적으로 마나 치료를 한 덕분에 화상을 입었던 피부가 거의 재생되었다.
가볍게 몸을 움직여 굳어 있던 근육을 풀었다.
슛!
슈슛!
눈을 감고 가상의 적을 떠올린 후 주먹과 발을 휘둘렀다.
“휴우.”
숨을 내쉬며 몸의 점검을 마무리했다.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이었다.
점심을 먹고 마나 수련을 시작하려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 보니 낯익은 얼굴의 하인이 서 있었다. 너클 심부름을 해 주었던 던츠란 이름의 하인이었다.
“무슨 일이지?”
“카스트로 님이 칼리온 님을 찾고 계십니다.”
던츠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카스트로가 왜?”
“안젤리아 님이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안젤리아가? 알았다. 잠시만 기다려 봐.”
나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 밑에 숨겨 놓은 책을 챙겼다. 카렌이 매수한 하인을 통해 몰래 건네준 책이었다.
던츠에게 들키지 않게 검은 천으로 감싼 후 카스트로와 카렌이 기다리고 있다는 응접실로 향했다.
“서두르십시오! 빨리!”
던츠가 발을 동동 구르며 나를 재촉했다. 내가 늦장을 부리자 불똥이 자기에게 튈까 봐 겁을 먹은 듯했다.
그럴수록 더 천천히 걸었다.
던츠가 애를 태우는 모습도 재미있었지만 카렌이 왔다고 해서 쪼르르 달려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응접실에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 응접실은 정말이지 쓸데없이 화려했다.
백작가의 응접실도 화려한 편이었지만 투기장의 응접실은 도가 지나쳤다.
온갖 보석이 박혀 있는 오색찬란한 휘장이 천장과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의자와 드래곤이 조각되어 있는 탁자. 천장에서 은은한 빛을 뿌리는 아티팩트 구슬.
투기장의 응접실은 오직 화려함만을 추구한 곳이었다.
응접실의 문을 열자 꽃향기를 머금은 청량한 공기가 코를 찔렀다.
카스트로와 카렌이 마주 보고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카렌이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예쁘고 애교가 넘치는 웃음소리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언제 들어도 소름이 돋는 웃음소리일 뿐이었다.
“늦었구나, 칼리온.”
카렌이 권위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카스트로를 속이기 위한 연극에 불과했지만 카렌의 눈동자에 어린 웃음을 볼 때마다 속이 뒤집혔다.
“칼리온과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싶군요.”
카렌이 양해를 구하자 카스트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예의 바르게 인사한 후 카스트로가 방을 나갔다.
나는 카스트로가 앉아 있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네놈이 드레이크 슬레이어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멍청한 도마뱀 같으니라고.”
카스트로가 사라지자마자 카렌이 본색을 드러냈다.
“어찌 됐건 네놈 덕분에 제법 짭짤한 수입을 얻었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
카렌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품속에 넣어 놨던 검은 보따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카렌은 보따리를 풀어 책을 확인한 후 다시 묶었다. 그러곤 드레스를 획 걷어 올렸다.
뽀얀 종아리에 책 한 권이 매달려 있었다. 두께가 보통 책의 절반도 안 되는 얇은 책이었다.
“무슨 책이지?”
“특별한 책.”
“특별한 책?”
나는 카렌이 가지고 온 책을 살폈다.
밋밋한 표지에 제목조차 쓰여 있지 않았다. 방금 만든 책처럼 종이가 새하얗고 뻣뻣했다.
“펼쳐 봐. 아마 깜짝 놀랄걸.”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카렌을 노려보며 책을 펼쳤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건……?”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카렌을 쳐다봤다.
“휴멜 님이 뭘 생각하고 계신지 모르겠다니까. 네놈이 아무리 마음에 든다 해도 그렇지. 어떻게 백작가의 마나 수련법까지 주실 수 있담.”
카렌이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카렌이 가지고 온 책은 마나 수련에 관한 책이었다. 그것도 백작가의 혈육만이 익힐 수 있는 호엔레른 백작가 비전의 마나 수련법이었다.
첫 장에 쓰여 있는 머리말이 그 증거였다.
호엔레른의 후손들이여.
나는 비로소 휴멜의 계획이 본심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정말로 황제가 되려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선 백작가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마나 수련법을 노예에 불과한 내게 보여 줄 리 없었으니까.
예상 밖의 선물에 한동안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드레이크 슬레이어가 된 것에 대한 휴멜 님의 선물이니 감사히 받도록 해.”
카렌이 화난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주인의 사랑을 독차지해야만 만족하는 고양이와 같은 표정이었다.
“네놈이 비정상적으로 신체 능력이 뛰어난 것은 인정하지만 육체의 힘이란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 그러니 당분간 마나를 수련하는 데 집중하도록 해. 마나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다.”
이미 나에게 마나가 있는 것을 카렌은 모르고 있었다. 철저하게 숨겼기 때문이 아니라 마나의 근본적인 차이로 인해 인식을 못 하고 있었다.
덕분에 이렇게 백작가의 비전을 얻게 되었다.
백작가의 비전은 나에게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휴멜이 가지고 있는 힘의 근원을 엿볼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흥분으로 몸이 떨려 왔다.
“기한은 두 달. 그 안에 마나를 느껴야 돼.”
“두 달이라……. 휴멜은 얼마 만에 마나를 느꼈지?”
“휴멜 님? 아마 태어날 때부터 느끼셨을걸. 안 믿는 눈치네? 휴멜 님이 마나 수련을 시작한 게 아마 아홉 살쯤이었을 거야. 근데 놀랍게도 그때 이미 마나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고 해. 인색하기로 유명한 호엔레른 백작이 파티 비용으로 1년 치 예산을 쏟아부었을 만큼 백작가의 경사였지.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휴멜 님이 언제 그리고 얼마 만에 마나를 느꼈는지는 아무도 몰라. 다만 분명한 사실은 휴멜 님이 마나의 축복을 받은 천재 중의 천재라는 거지.”
카렌은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 양 기쁜 얼굴로 휴멜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원수가 잘났다는 소리를 듣는데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나는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면 가 보겠다.”
“책은 돌려줄 필요 없어. 최대한 빨리 외운 다음에 불태워 버려.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만약 백작가의 마나 수련법이 다른 곳으로 유출된다면 휴멜 님이 아주 속상해하실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알고 있어.”
나는 책을 품속에 넣은 후 응접실을 나왔다.
* * *
와아!
와아아아!
“파이어 볼!”
불덩이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좌우로 몸을 움직여 불덩이를 피한 후 마법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헤, 헤이스트Haste!”
마법사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나에게 따라잡혔다.
“실드!”
쾅!
주먹이 실드를 때렸다.
꽈직 하는 소리와 함께 너클에 금이 갔다.
나는 한 번 더 실드를 때렸다. 너클과 함께 실드가 부서졌다.
피투성이가 된 마법사의 멱살을 쥐고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자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죽여!”
“머리통을 부숴 버려!”
나는 주먹을 치켜올렸다.
와아!
기대감에 찬 사람들의 함성 소리에 심장이 찌릿찌릿했다. 하지만 광기로 물든 사람들을 위해 인간 백정이 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나는 마법사의 귓가에 속삭였다.
“입은 열지 말고 묻는 말에 답해라.”
삶을 거의 포기하고 있던 마법사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는 탱탱하게 부어오른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목숨값을 지불하면 살려 주겠다. 너의 목숨값은 오늘 경기를 포함한 세 경기의 대전료다. 지든, 이기든 상관없이 세 경기의 대전료를 넘기면 목숨을 살려 주지. 거래를 하고 싶으면 눈을 두 번 깜박여라.”
두 번만 깜박이라고 했는데 마법사는 1초에 열 번도 넘게 미친 듯이 눈을 깜박였다. 그의 절실한 기분이 느껴졌다.
“거래 완료.”
나는 치켜올렸던 주먹을 적의 배에 쑤셔 넣었다.
퍽!
“크윽!”
피거품을 물고 기절하는 마법사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를 바닥에 던지고 경기장을 나오자 관객들이 욕설을 퍼부었다.
“젠장! 투사 놈 주제에 성인군자 흉내나 내다니!”
“이렇게 시시한 경기를 보려고 비싼 돈 내고 들어온 줄 아느냐!”
“돈 물어내라!”
대기실로 돌아오자 카스트로가 언짢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왜?”
“이번에도 죽이지 않았군요.”
“그래서?”
“오늘이 열 번째 경기입니다. 그동안 칼리온 님은 한 번도 상대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손님들이 저렇게 원하시는데 어째서 항상 기절만 시키는 겁니까?”
“죽이고 살리고는 내 마음이잖아. 그런 것까지 참견할 권리는 없을 텐데?”
“…….”
카스트로는 입을 다물었다.
나를 노려보는 눈초리가 제법 사나웠다. 그는 철저할 만큼 완벽한 투기장의 관리인이었고, 그래서 투기장의 이익에 반하는 짓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어쨌든 축하드립니다.”
뜬금없는 축하 인사였다.
카스트로는 언짢은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노련한 상인에 버금갈 만큼 빠른 변화였다.
“오늘부터 칼리온 님은 C 등급 투사가 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나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승급한 지 불과 3주 만에 다시 승급을 하게 된 것이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D 등급이 된 지 3주밖에 안 됐는데?”
“시간으로 보면 그렇지요. 하지만 경기 수로 따지면 D 등급이 되고 벌써 세 번째 경기입니다. 다른 투사들은 빨라야 2개월, 보통 5개월 정도 걸리는 경기 수이지요. 게다가 칼리온 님의 경기는 워낙 압도적으로 끝나기 때문에, 사실 첫 경기가 끝난 후 이미 승급이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C 등급이라…….
첫 경기가 끝난 후 잠시 구경했었던 C 등급 투사들의 경기가 언뜻 떠올랐다.
지금의 나는 투기장의 공기에 완벽하게 적응한 상태였다. 사람들의 광기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강해졌다. 육체와 마음 모두.
그래서 그런지 그토록 처절하게 보였던 C 등급 투사들의 싸움이 이제는 저잣거리의 개싸움처럼 우습게 느껴졌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나는 느슨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방심이야말로 가장 큰 적이었다.
“그건 그렇고, 밖에 좀 나가고 싶은데.”
카스트로가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봤다.
“투사의 외출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웬만한 것은 하인에게 심부름을 시키십시오.”
“내가 쓸 무기를 고르기 위해서다. 아무래도 직접 나가서 사 와야겠어. 하인에게 사 오라고 시켰더니 항상 부실한 것만 사 오거든. 벌써 네 개째야.”
나는 하인이 들으면 억울해할 만한 핑계를 대며 실드와 함께 장렬히 산화한 너클을 카스트로에게 보여 주었다.
사실 하인이 사 온 너클은 괜찮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마나의 사용이 자연스러워질수록 점점 강해지는 악력으로 인해 어떤 너클도 두세 경기를 버티지 못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좋은 너클이 아니라 나의 악력을 버텨 줄 튼튼한 너클이었다. 그 사실을 하인이 알 리 없었다.
“……어쩔 수 없지요. 투사가 무기를 사러 간다는데 말릴 명분이 더 이상 없군요. 대신 규칙대로 수행원을 붙이겠습니다.”
“이왕이면 좋은 병기점을 알고 있는 수행원을 붙여 줘.”
“알겠습니다.”
카스트로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 대답했다.
내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그는 투철한 관리인이었기에 자신의 본분을 절대 잊지 않았다.
“이제 C 등급 투사가 되었으니 아래층으로 방을 옮겨야 합니다. 내일 오전에 방을 옮길 테니 필요한 짐을 미리 챙겨 놓으시기 바랍니다.”
“귀찮은데 그냥 있으면 안 될까?”
“C 등급 투사부터는 개인 연무장이 제공됩니다. 물론 그리 크진 않지만 말입니다.”
군소리 없이 방을 옮기기로 했다.
마나 수련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기 때문에 슬슬 제대로 된 권각술을 익힐 시기였다.
때마침 개인 연무장이 생긴다니 잘된 일이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짐을 쌌다.
짐이라고 해 봐야 별거 없었다.
이제는 나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검은 옷 몇 벌이 전부였다.
짐을 싸기 위해 검은 옷을 들어 올리자 그 안에서 녹이 슨 너클이 툭 떨어졌다.
“아직 있었나?”
녹슨 너클을 보는 순간 문득 잡동사니 더미에서 함께 가져온 나무 상자가 떠올랐다.
“어디다 뒀더라?”
방 안을 샅샅이 뒤진 끝에 침대 구석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나무 상자를 발견했다.
나무 상자에선 여전히 마나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뭐지?”
상자 안에는 동그란 구슬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한 손으로 쥘 수 있을 만큼 작은 크기에 색깔은 검붉었다.
구슬을 들고 자세히 살펴봤다.
구슬은 크기에 비해 무거웠다. 손톱으로 누르면 자국이 날 정도로 말랑말랑했으며, 기묘한 광택이 났다.
“처음 보는 금속인데.”
손톱자국이 날 만큼 말랑거렸지만 금속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금속은 알지도, 보지도 못했다.
“어쨌든 무기로 사용할 만한 금속은 아니군.”
구슬을 제자리에 내려놓고 뚜껑을 닫으려던 찰나 구슬이 희미하게 빛을 발하며 마나를 뿜어냈다.
이와 비슷한 기운을 느껴 본 적이 있었다. 아니, 지금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구슬이 뿜어내는 마나는 나의 마나와 놀랍도록 흡사했다.
나는 두 개의 구슬을 양손에 든 채 다시 한 번 모양을 살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구슬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기운이 짙어졌다.
좀 더 밝은 곳에서 관찰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이트 마법이 걸려 있는 천장의 아티팩트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이변을 알아차린 것은 그때였다.
휘청!
털썩!
무릎에 힘이 빠지면서 도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온몸의 힘이 쫙 빠져나갔다. 힘이 빠져나가는 곳은 바로 손안의 구슬이었다.
“암기……였나?”
믿기 어려울 만큼 몸이 무거웠다. 손과 발이 땅에 달라붙은 느낌이었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죽음과 같은 고요 속에 움직이는 것은 시간뿐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는 죽지 않았다. 다만 물먹은 솜처럼 점점 더 몸이 무거워질 뿐이었다.
구슬을 버리기 위해 손을 펼쳤지만 구슬은 손바닥에 찰싹 달라붙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땅바닥에 널브러진 채 기진맥진 숨만 헐떡였다. 더 이상 빠져나갈 힘이 없을 텐데도 무언가가 계속 빠져나가고 있었다.
“혹시……?”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몸에 힘이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수십 번이나 실패한 후에야 나는 간신히 구슬이 빨아들이고 있는 힘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구슬이 탐욕스럽게 먹고 있는 것은 바로 나의 마나였다.
점점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구슬은 마나와 함께 나의 생기도 빨아들이고 있었다.
구슬이 생기를 전부 빨아들이기 전에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천천히 길게 내쉬었다.
수련을 할 때마다 항상 요동쳤던 마나가 웬일인지 도도한 강물처럼 여유롭게 움직였다.
“상대를…… 잘못 골랐어……. 그렇게…… 먹고 싶다면…… 배가…… 터질 때까지…… 먹여 주마.”
나는 가장 쉽고, 가장 효과가 확실한 방법을 선택했다.
어차피 넘치도록 많은 힘이었다. 구슬의 한계 용량까지 마나를 퍼부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몸을 뒤척여 똑바로 누웠다. 양쪽 손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펼친 후 마나의 흐름을 느끼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마나가 꿈틀거렸다.
두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두근!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온 강맹한 기운이.
두근! 두근!
사납게 날뛰기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마나가 신경을 찢어발기기 전에 손안의 구슬이 마나를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마나는 평야를 가로지르는 대하大河처럼 막힘없이 흘렀다. 몸 안이 찌릿찌릿했다.
환각 마법에 걸린 것처럼 기분이 붕 뜨기 시작했다. 막힘없이 흐르는 마나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황홀했다.
마나의 흐름이 점점 빨라졌다. 흘러가는 마나의 양이 점점 많아졌다.
천 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폭포수처럼 거대한 마나가 질주했다.
그리고 마침내.
번쩍!
배를 가득 채운 구슬이 폭발했다.
양손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방 안을 가득 채울 만큼 강한 빛이었다.
너무 눈이 부셔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았다.
“으으으…….”
나도 모르게 정신을 잃었나 보다. 눈을 뜨자 방 안이 어두컴컴했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머리가 아찔했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천장에 붙어 있는 아티팩트를 살펴보았다. 마나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은은한 빛을 뿌리던 마법 구슬은 평범한 유리구슬이 되어 있었다.
밖이 소란스러웠다.
문을 열어 보니 당황한 하인과 하녀 그리고 투사들이 복도를 메우고 있었다.
“젠장! 카스트로는 뭐하고 있는 거야? 아직도 캄캄하잖아!”
“그런데 구슬의 빛이 왜 갑자기 꺼진 거지?”
“알 게 뭐야? 마법사들이 만든 걸 우리 같은 놈들이 알 리가 없잖아.”
“하긴 그렇군.”
“꺄악! 엉덩이 만지는 게 누구예욧!”
하녀가 비명을 지르자 투사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투사들이 본격적으로 하녀들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새된 비명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문을 닫고 들어와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너클과 텅 빈 나무 상자 따위를 한쪽 구석에 정리했다.
아무리 찾아봐도 나를 죽일 뻔한 검붉은 구슬은 보이지 않았다. 부서진 파편조차 없었다.
“분명히 폭발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나는 다시 한 번 침대 밑을 비롯해 방 안 구석구석을 살폈다. 역시 구슬의 흔적은 없었다.
남은 가능성은 두 개뿐이었다.
나의 마나를 견디지 못하고 기화되었거나, 반대로 나의 몸에 흡수되었거나.
침대에 누워 양손을 하늘로 뻗은 채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기분 탓인지 손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왼손으로 오른손을 주물러 보았다. 반대로 오른손으로 왼손을 주물렀다.
“이건…….”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똑바로 앉았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살가죽 아래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만져졌다. 마치 피부 아래 얇은 철판을 깔아 놓은 듯한 감촉이었다.
잠시 고민하다 단검을 꺼냈다.
단검으로 손등에 작게 십자가를 그었다. 찢어진 피부를 살짝 들어 올리자 핏방울 사이로 검붉은 것이 보였다. 검붉은 것은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얇은 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단검으로 검붉은 것을 쿡쿡 찔렀다. 얇은 막임에도 불구하고 생각 외로 질겼다. 꽤 세게 눌렀는데도 찢어지지 않았다. 마치 진짜 살갗을 후벼 파는 것처럼 아프기만 했다.
“이게 뭐지?”
손가락으로 더듬어 검붉은 막이 어디까지 퍼져 있는지 확인했다. 검붉은 막이 양손 모두 손목 부분까지 만져졌다.
“카렌에게 물어볼까?”
나는 곧바로 생각을 바꿨다.
인과관계를 따져 봤을 때 내 손에 스며든 것은 나무 상자 안의 구슬이 분명했다.
만약에 이것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전대 호엔레른 백작의 아티팩트라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정말로 가치가 높은 아티팩트라면 휴멜과 카렌의 성격상 나의 손목을 잘라서 회수해 갈 가능성이 컸다.
“정체를 알아낼 때까지는 일단 가만히 있는 게 좋겠어.”
나는 단검을 갈무리한 후 까뒤집었던 피부를 제자리에 맞췄다. 그리고 치료를 위해 십자가를 그은 왼손에 마나를 주입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스르륵!
피부 아래 숨어 있던 검붉은 막이 피부를 뚫고 위로 올라왔다. 마치 장갑을 낀 것처럼 왼손이 검붉어졌다. 마나를 주입할수록 색이 짙어졌다. 종국에는 광택까지 났다.
“…….”
손목을 까닥거리고,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약간 뻣뻣했지만 움직이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마나 주입을 차단하자 검붉은 막이 피부 아래로 스며들었다. 단검으로 그었던 십자가 상처가 깨끗하게 나아 있었다. 전과 비교해 몇 배나 빠른 치유력이었다.
다시 마나를 주입했다.
이번에는 양손 모두였다. 오른손과 왼손에 검붉은 장갑이 생겼다.
단검으로 장갑을 툭툭 쳤다.
금속끼리 부딪치는 쇳소리가 났다.
단검 끝으로 찔러 보았다. 긁힌 자국조차 생기지 않았다.
나는 각오를 다진 후 단검으로 손바닥을 내리쳤다.
깡!
역시나 긁힌 자국조차 생기지 않았다.
아예 칼날을 잡고 주먹에 힘을 주자 단검이 나뭇가지처럼 뚝 부러졌다.
“암기가 아니었어…….”
아티팩트였다. 그것도 몸속에 이식되는 전대미문의 아티팩트였다.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지금처럼 칼날을 붙잡을 수 있는 금속 장갑의 역할만 해 주더라도 육탄 전투를 해야 하는 내게는 굉장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진짜로 휴멜과 카렌에게는 비밀로 해야겠군.”
검붉은 장갑의 가치는 단순히 높은 정도가 아니었다.
몸 안에 이식되는 전대미문의 아티팩트.
이 희소성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했다. 보물은 지킬 수 있는 사람에게만 보물이었기에.
나는 마나 수련도 잊은 채 하루 종일, 천장 구슬에 라이트 마법을 걸어 주는 마법사가 방문할 때까지, 검붉은 장갑을 탐구했다.
* * *
“라이트!”
마법사가 시동어를 외쳤다.
천장의 구슬이 깜박깜박하다가 이내 은은한 빛을 발했다. 방 안이 환해지면서 어둠에 길들여진 눈이 시큰거렸다.
“마법사님, 구슬이 왜 갑자기 고장 난 겁니까?”
복도에 서 있던 투사들 중 한 명이 마법사에게 물었다.
마법사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많이 옅어졌지만 아직도 투기장 전체에 마나의 기운이 서려 있어. 아무래도 지나가던 마법사가 안티 매직Anti Magic 마법을 건 것 같아.”
“어째서죠?”
다른 투사가 물었다.
“모른다니까! 심심했나 보지.”
마법사는 투덜거리며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마법사가 사라지자 투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마법사를 욕했다.
“지가 마법사면 다야? 기껏해야 라이트 마법밖에 못 하는 주제에.”
“마흔 살이 다 되도록 라이트 마법밖에 못 한다며? 재능도 없는 주제에 잘난 척하기는.”
나는 문 너머에서 흘러 들어오는 험담을 들으며 마법사의 말을 떠올렸다.
투기장 전체를 감쌀 만큼 거대한 마나와 안티 매직 마법과 비슷한 효과.
나는 범인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나의 마나도 모자라 투기장 아티팩트의 마나까지 먹어 치운 것이다.
나는 그놈에게 ‘다크섀도우Dark Shadow’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마치 그림자처럼 손 안쪽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몸 안에 마나를 일으켰다.
마치 유령처럼 검붉은 장갑, 다크섀도우가 슈욱 나타났다. 마나의 흐름을 끊자 다크섀도우가 봄날에 눈 녹듯 스르륵 사라졌다.
슈욱!
스르륵!
슈욱!
스르륵!
마나의 흐름을 통제하고 조절하며 다크섀도우를 꼈다 뺐다 반복하였더니 마나 통제력이 놀랄 만큼 향상되었다. 게다가 마나를 일으킬 때마다 느꼈던 고질적인 고통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카렌이 말했었다.
지금의 백작이 마법사를 시켜 전대 백작이 숨겨 놓은 아티팩트를 모두 수거하였다고. 그리고 변변찮은 것들만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고.
카렌의 말이 사실이라면 검붉은 구슬이 잡동사니 속에 버려진 이유는 둘 중 하나가 분명했다.
백작이 구슬의 가치를 알지 못했거나,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발견하지 못했거나.
나는 두 번째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검붉은 구슬이 품고 있는 마나의 기운은 일반적인 마나의 기운과 조금 달랐다. 나의 마나와 비슷했다.
따라서 나에게 마나가 있다는 것을 휴멜과 카렌이 눈치채지 못했듯 백작가의 마법사들도 검붉은 구슬을 찾아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찌 되었건 이 아티팩트는 이제부터 내 거다.”
그 어떤 아티팩트, 심지어 여신의 숨결이 담겨 있다고 알려진 로열 암스Royal Arms와도 바꿀 수 없었다.
무기고 잡동사니 더미에 묻혀 있던 검붉은 구슬은 나에게 있어 최고의 무기나 다름없었다.
슈욱!
스르륵!
슈욱!
스르륵!
나는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며칠 후 카스트로가 찾아왔다.
“투사들 사이에서 죽었다고 소문이 났기에 찾아왔습니다만…… 살아 있었군요.”
그는 내 몰골을 보더니 눈을 찌푸렸다. 대체 방 안에만 처박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지?”
수척해진 몸만큼이나 기운이 없는 목소리였다.
다크섀도우를 이용한 수련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몸과 마음이 모두 피로에 절어 있었다.
“무기를 사러 밖으로 나가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수행원을 데리고 왔습니다. 테론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테론이라고 합니다.”
평범하게 생긴 남자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몰골이 이래서야 외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길거리에서 쓰러지지나 않을지 걱정이군요.”
“그냥 지친 것뿐이야.”
“투사는 몸이 곧 재산입니다. 투사의 잘못으로 인해 투기장에 손해를 입힐 경우 모든 책임은 투사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잘못에는 자신의 몸에 대한 관리 소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체력 관리에 실패해 경기에서 어이없게 패배하는 것만큼 손님들을 실망시키는 게 또 없으니까요. 무슨 수련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좀 더 몸을 생각해 주십시오.”
“투기장을 위해서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투기장을 위해서.”
카스트로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
“잠깐 기다려. 옷 좀 갈아입고 오지.”
옷을 갈아입으면서 마지막으로 잠을 잔 날짜를 헤아렸다.
최소한 3일은 넘었을 것이다.
나는 하품을 하며 테론을 따라 투기장 밖으로 나왔다.
생각해 보니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제대로 구경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시골에서 갓 올라온 촌놈처럼 사방팔방 두리번거렸다. 모든 것이 신기했고, 재미있었고, 또한 낯설었다.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과거의 마을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건물의 모양새도 그렇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그렇고, 무엇보다 마을에 감도는 분위기가 그랬다.
그리고…….
사람들의 평화로운 얼굴이, 부드러운 미소가, 여유로운 몸짓이, 그 무엇보다 낯설었다.
평화가 낯설게 느껴진다는 사실에 기분이 씁쓸해졌다.
어렴풋이 남아 있는 기억의 잔재와 현재의 상황을 모두 고려해 봤을 때, 나에게 있어 평화는, 과거에도 지금에도 사치에 불과했다.
들떴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오른쪽입니다.”
갈림길이 나오자마자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테론이 방향을 지시했다.
나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테론은 굉장히 무뚝뚝한 남자였다. 체격도 보통이었고, 인상도 평범했다. 한마디로 말해 눈에 띄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한량처럼 어슬렁어슬렁 내 뒤를 따라왔다. 암살자 훈련을 받은 듯 발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자 작은 간판이 보였다.
세로로 길게 붙어 있는 간판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건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드래곤의 숨결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이곳이 맞느냐는 의미였지만 테론은 나의 시선을 무시하며 하늘만 쳐다봤다.
“나는 병기점을 찾고 있었는데?”
“…….”
역시 대답이 없었다.
테론은 나의 말에 거의 대꾸하지 않았다.
어쨌든 막다른 길이었고, 무기를 팔 만한 곳은 ‘드래곤의 숨결’이란 이름을 가진 대장간 하나뿐이었다.
나는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깡!
깡!
화로에서 시뻘건 불길이 혀를 날름거렸다. 수십 명의 대장장이들이 윗옷을 벗어젖힌 채 커다란 망치를 휘두르고 있었다. 대장간은 무척이나 컸는데 그 이유는 병기점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기점이 있으면 있다고 말해 줄 것이지.
나는 무뚝뚝한 수행원을 한번 노려본 뒤 대장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장간은 숨쉬기가 힘들 만큼 뜨거웠다.
때마침 내 옆에 있던 화로에서 불꽃이 폭발하듯 활활 타올랐다. 후끈거리는 열기가 확 밀려왔다.
대장간은 화로의 열기와 그보다 더욱 뜨거운 대장장이들의 열정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로 왔소?”
망치질을 하고 있던 중년의 대장장이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산적처럼 턱수염이 덥수룩한 대장장이였다.
“무기를 보러 왔습니다.”
“무슨 무기를 찾소?”
“이것과 비슷한 너클입니다만.”
나는 가지고 온 너클을 대장장이에게 보여 주었다.
그는 너클을 대충 훑어보더니 병기점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 보시오.”
대장장이는 귀찮은 파리를 쫓듯 손을 흔들었다.
그의 행동에 기분이 상했다. 그냥 나갈까 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장장이가 가리킨 곳으로 갔다.
각가지 무기가 질서 정연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대단한데.”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과묵한 수행원의 안내는 완벽했다.
드래곤의 숨결이란 대장간의 무기는 호엔레른 백작가의 무기보다 수준이 뛰어났다.
무기가 어느 정도 뛰어났냐 하면, 나를 파리 취급했던 대장장이가 드워프에 버금가는 장인으로 보일 정도였다.
나는 대장장이가 알려 준 곳으로 가 너클을 찾았다.
“아!”
너클을 집어 든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동안 하인이 사 온 너클과는 수준이 달랐다.
기본에 충실한 밋밋한 너클부터 뾰족한 가시가 달린 살상용 너클까지 다양한 형태의 너클이 진열되어 있었다.
종류가 너무 많았고, 게다가 하나하나의 완성도가 높아 도저히 혼자 고를 수가 없었다.
이럴 때는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한 법이다.
나는 망치질을 하고 있는 턱수염 대장장이에게 다시 다가갔다.
“혼자 고르기가 어렵군요.”
“미안하지만 지금은 자리를 떠날 수 없소. 쇠라는 건 때를 놓치면 고철이 되는 법이거든.”
나에게 맞는 너클을 골라 달라고 부탁하자 턱수염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거절했다.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턱수염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는 나의 얼굴을 힐끔 본 후 망치질에 집중했다.
깡!
깡!
화로의 불이 활활 타올랐다. 뜨거운 불꽃과 함께 시뻘건 불빛이 대장장이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턱수염은 망치질을 멈추고 납작해진 쇳덩이를 화로 안 깊숙이 찔러 넣었다.
옆에 있던 다른 대장장이가 풀무질을 시작했다.
지루한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
마침내 턱수염이 커다란 집게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꺼냈다.
대장장이는 고도의 정신 집중을 요하는 직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천 번의 망치질 중 한 번이라도 실수하거나, 담금질할 시기를 조금이라도 놓친다면 좋은 검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깡!
깡!
턱수염은 망치를 들고 모루 위에 내려놓은 쇳덩이를 내리쳤다. 그는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망치 소리가 잦아들었다.
턱수염은 검의 모양을 살핀 뒤 차가운 물속으로 검을 집어넣었다.
치이익!
붉게 달구어진 미완의 검이 찬물 속에서 몸부림쳤다. 허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점점 검이 완성되어 갔다.
눈처럼 새하얀 검날. 번쩍이는 시퍼런 검광. 보기만 해도 베일 듯한 날카로운 예기.
그것은 가히 작품이었다.
“역시…….”
“기운 빠지게 만드는군. 저런 검을 봤는데 어떻게 내가 만든 검을 팔 수 있겠어. 젠장.”
턱수염을 빙 둘러싸고 있던 대장장이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턱수염은 묵묵히 마무리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검이 완성되었다.
“됐다…….”
턱수염이 힘없이 중얼거리자마자 뒤에 서 있던 대장장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손님인 나를 밀어젖히는 대장장이도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 있던 터라 하마터면 바닥에 나뒹굴 뻔했다.
대장장이 한 명이 손가락을 튕겨 칼날을 톡 쳤다.
쨍!
맑은 소리가 대장간 안에 울려 퍼졌다.
대장장이들의 얼굴에 감동의 빛이 서렸다.
턱수염은 피곤한 얼굴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 순간 대장장이들 틈새에서 방황하고 있던 나와 턱수염의 눈이 마주쳤다.
“……아직 있었소?”
“기다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턱수염은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몸을 획 돌렸다.
“이쪽으로 오시오.”
그는 너클이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어떤 것을 원하시오?”
“그야 물론 좋은 것을…….”
턱수염이 피식 웃었다.
“좋은 것이라……. 이건 어떻소?”
그는 날렵하게 생긴 너클을 집어 내게 건넸다.
생김새만큼 가벼운 무게에, 생김새치곤 단단한 강도를 지닌 너클이었다.
손에 너클을 끼고 주먹을 쥐었다. 감촉이 부드럽고, 주먹에 힘이 제대로 들어갔다. 역시 하인이 사 왔던 너클과는 수준이 달랐다.
상당히 마음에 드는 너클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강도라면 한 달이 되기도 전에 부서질 게 분명했다.
“다른 것은 없습니까?”
“마음에 안 드오?”
“아닙니다. 마음에는 듭니다만 금방 부서질 것 같아서…….”
“……지금 나를 모욕하는 것이오?”
턱수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모욕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보여 주는 것이 빠를 것 같아 나는 너클을 낀 손에 힘을 주었다.
빠드득!
손가락 마디를 감싸고 있던 너클의 이음새 부분이 비명을 질렀다.
“보다시피 힘이 센 편이라 웬만한 놈이 아니면 버텨 내질 못합니다. 이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가져온 너클을 다시 보여 줬다.
아까와 다르게 턱수염은 부서진 너클을 자세히 살폈다. 직접 손에 껴 보고, 부서진 곳을 꼼꼼히 살폈다.
“악력을 버티지 못했군.”
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소?”
그는 묵직해 보이는 너클을 들고 왔다.
나는 너클을 손에 끼고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턱수염이 처음 보여 준 것보다 몇 배는 좋은 너클이었다. 움직임도 자연스러울뿐더러 묵직한 느낌도 괜찮았다. 나의 악력에도 제법 버텼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사고 싶었다. 하지만 좀 더 괜찮은 물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욕심이 행동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나는 주먹에 힘을 꽈악 주었다.
빠지직!
“다른 것은 없습니까?”
나는 빙긋 웃으며 턱수염을 쳐다봤다.
자존심이 상한 듯 턱수염의 턱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다른 것이 없으면 그냥 이것으로 하겠…….”
“아니, 잠깐 기다리시오. 하나가 더 있소.”
갑자기 뭔가를 떠올린 듯 턱수염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대장간 안쪽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턱수염이 양손에 쇳덩이 하나씩을 들고 나타났다.
“우리 대장간에서, 아니 자타르 왕국 전체에서 가장 단단한 너클이오.”
그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느껴졌다.
“……그건 너클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보기에는 이렇지만 너클이 맞소. 손에 껴 보면 알 것이오. 하하하!”
턱수염은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나는 그가 가져온, 너클을 가장한 쇳덩이를 살펴보았다.
납작한 타원형의 쇳덩이에 손가락이 들어가야 하는 구멍만 뻥 뚫려 있었다. 이음새가 하나도 없는 쇳덩이 그 자체이니 턱수염의 말마따나 그 어떤 너클보다 튼튼할 것이다.
나는 속는 셈치고 한 짝을 건네받았다.
“흡!”
하마터면 너클을 가장하고 있는 쇳덩이를 발등 위에 떨어뜨릴 뻔했다. 묵직한 정도가 아니라 육중했다.
“보기엔 그래도 천재라 불렸던 대장장이가 만든 거요.”
턱수염의 목소리에는 경외심이 담겨 있었다.
나는 놀랐다.
턱수염은 동료 대장장이들이 감탄할 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일류 대장장이였다. 그런 그가 천재라고 부르는 대장장이의 작품이라니.
아무리 봐도 쇳덩이에 구멍만 뚫어 놓은 형태인데.
기대 반, 의심 반의 기분으로 오른손에 쇳덩이를 끼웠다.
투박한 모양새와는 달리 쇳덩이 안쪽은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주먹을 쥐자 쇳덩이가 손안에 착 달라붙었다.
있는 힘껏 주먹에 힘을 주었다. 쇳덩이는 나의 악력을 버티는 것도 모자라 오히려 악력을 증가시켜 주었다.
나는 턱수염에게 나머지 한 짝을 건네받아 왼손에 끼웠다.
양손이 축 늘어졌다.
투 핸드 소드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떻소? 그 정도면 튼튼하지 않소? 좀 무거운 것이 단점이지만 그것만 빼면 아마 자타르 왕국에서 제일 좋은 너클일 것이오. 하하하!”
턱수염이 유쾌하게 웃었다.
“좀 무거운 정도가 아닙니다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팔을 움직였다. 몇 번 휘둘렀을 뿐인데 팔이 뻐근했다.
“잠깐만 물러서 주십시오. 조금 움직여 봐야겠습니다.”
공간을 확보한 후 나는 눈을 감았다.
지난 열 경기의 싸움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경험을 종합하여 가상의 적을 한 명 만들었다. 적은 웨펀 마스터 웰런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웰런이 검을 들고 공격을 시작했다.
나는 허리를 좌우로 흔들어 웰런의 공격을 피했다. 양팔이 무거워 발놀림이 한 박자씩 어긋났다. 위태위태한 수비였다.
휘익!
웰런이 검을 휘둘러 나의 허리를 노렸다. 첫 번째 경기 때와 똑같은 일격이었다.
나는 검을 향해 주먹을 올려쳤다. 그때와 똑같은 방어였다. 하지만 팔의 움직임이 생각만큼 따라와 주지 않았다.
부웅!
헛손질과 동시에 검의 방향이 휘면서 나의 상체를 베고 지나갔다.
“젠장!”
눈을 뜨자 눈앞에 턱수염이 있었다.
나의 주먹이 그의 코앞에 멈춰 서 있었다. 하마터면 그의 얼굴을 박살 낼 뻔했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턱수염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와 동시에 대장간의 대장장이들이 모두 몰려와 나를 감쌌다.
“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난동을 피우는 것이냐!”
테론이 어느새 내 뒤에 서서 대장장이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별일 아니니까 소란 떨 것 없어. 좀 놀란 것뿐이야.”
턱수염이 손을 흔들며 일어났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오. 좀 더 뒤로 물러났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다가가는 바람에……. 그건 그렇고 당신은 평범한 손님이 아니었군. 아이언 피스트Iron Fist의 무게는 내가 잘 알고 있소. 아이언 피스트는 단순히 힘만 세다고 해서 휘두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오. 조금만 힘 조절을 잘못하면 팔이 쑥 빠지거든.”
“아이언 피스트?”
“그 너클의 이름이오.”
“아이언 피스트……. 철 주먹이라…….”
마음에 들었다.
무기로 쓰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웠지만 적응만 한다면 육체가 더욱더 강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군.”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왕이면 팔뿐만 아니라 다리에도 쇳덩이를 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나는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내 육체는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더 강해졌다. 마치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더 단단해지는 검처럼.
“아이언 피스트를 사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아이언 피스트와 비슷한 무게의 족쇄를 만들어 주십시오. 발에 착용할 것이니 움직임이 최대한 불편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면 좋겠습니다. 3일 후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아이언 피스트의 값을 계산하고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서늘했다.
어느새 서쪽 하늘로 태양이 가라앉고 있었다. 아름다운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나는 아이언 피스트를 살며시 매만졌다.
이것을 사기 위해 그동안 카렌 몰래 모아 놓은 돈을 거의 다 쓰고 말았다. 발에 찰 족쇄까지 구입하면 완전히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
다크섀도우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너클을 구입한 이유는 오직 하나, 다크섀도우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을 만큼 강해지기 전까지는 무조건 숨겨야 했다.
아이언 피스트.
임시로 사용할 무기치고는 좀 과한 감도 있었지만 그만큼 마음에 드는 놈이었다.
“잘 지내보자.”
나는 양 주먹을 가볍게 맞부딪쳤다.
쨍!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