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이크drake
똑똑!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여기는…….”
일순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헷갈렸다. 축축한 흙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똑똑!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방을 밝히고 있는 빛은 반딧불의 은은한 빛이 아니라 아티팩트의 차가운 빛이었다.
문을 열자 카스트로가 서 있었다.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그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지?”
“경기 날짜가 잡혀서 알려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보통은 첫 경기까지 한 달 정도 걸리는데 안젤리아 님께서는 아름다운 외모와 다르게 성미가 급하시더군요.”
“안젤리아 님? 아! 안젤리아 님 말이군.”
안젤리아는 카렌의 가명이었다.
내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자 카스트로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나는 짐짓 모르는 척했다.
“경기가 언제지?”
“경기 날짜는 내일입니다. 상대는 같은 F 등급인 웰런이란 투사입니다.”
“웰런이라…….”
“그리고 대전료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접수원의 말이 떠올랐다.
투사들에게 막대한 대전료를 지불한다고 했었지.
돈을 쓸 일은 없었지만 가지고 있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내심 기대하며 카스트로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엄청난 착각에 불과했다.
“원칙대로라면 대전료는 경기가 끝나는 즉시 투사에게 지불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대전료는 승패에 상관없이, 살아 있다는 전제하에, 양쪽 투사 모두에게 지불됩니다. 물론 투사의 등급과 승패에 따라 대전료는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칼리온 님 같은 경우는 경기에서 승리하더라도 대전료를 받으실 수 없습니다.”
“나 같은 경우?”
“칼리온 님은 안젤리아 님의 노예시더군요.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칼리온 님이 노예라는 것은 저만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카스트로가 다시 묘한 웃음을 흘렸다.
“간혹 귀족 분들이 자신의 전투 노예를 투사로 만들기 위해 데려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칼리온 님처럼 말이죠. 그럴 경우 전투 노예가 받게 되는 대전료는 노예의 주인인 귀족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니까요.”
카스트로는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 내게 주었다.
“하지만 안젤리아 님은 인정이 많으신 분이더군요. 대전료를 다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용돈 정도는 칼리온 님에게 지급하라고 특별히 부탁하셨습니다. 이것이 안젤리아 님이 남기신 편지입니다.”
편지를 펼치자 단 한 줄이 쓰여 있었다.
열심히 일해서 나를 부자로 만들어 줘.
찌익!
나는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카스트로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주인의 편지를 찢어 버리는 노예는 아마 처음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얼마를 받게 되지?”
“이곳에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각종 비용을 뺀 나머지 금액의 10퍼센트를 받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90퍼센트를 카, 아니 안젤리아가 꿀꺽한다는 말이군.”
카스트로의 눈이 더 커졌다.
주인의 이름을 마치 뉘 집 강아지 이름처럼 막 부르는 노예도 아마 처음 보았을 것이다.
“그, 그렇습니다.”
“어쨌든 알았다. 다른 할 말은?”
“이상입니다. 경기에 관한 내용은 내일 경기 전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카스트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갔다.
나는 문을 쾅 닫고 침대로 돌아왔다. 공기가 흔들리면서 천장에서 흙먼지가 떨어졌다.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카렌의 편지가 눈앞에 아른거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마나 수련이나 하자.”
침대 위에서 한참을 뭉그적거리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후 호흡을 조절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신 다음 천천히 내뱉었다.
꿈틀.
마나가 미약하게 움직였다.
휴멜과 카렌의 얼굴을 떠올렸다. 증오의 감정과 함께 마나가 요동쳤다. 동시에 뜨거운 불길이 혈관을 타고 내달렸다.
“크윽!”
모든 세포가 분열되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마나를 회전시켰다. 아랫배에서 솟아오른 마나가 심장을 거쳐 온몸을 휘돌았다.
나는 서서히 마나의 양을 늘리며 회전속도를 높였다. 그럴수록 고통이 가중되었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호흡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내쉬고.
마시고.
내쉬고.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머리가 지끈거렸고, 코피가 터졌다. 고막이 상했는지 귀가 윙윙거렸다.
평소대로라면 이쯤에서 수련을 멈췄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조금 더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마나의 양을 조금 더 늘렸다.
티끌만 한 마나였다. 빵 부스러기보다 작은 마나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욕심은 기대를 배반한다.
가득 차 있던 그릇에 떨어진 한 방울의 물방울.
그릇에 있던 물이 흘러넘쳤다.
두근!
심장이 크게 격동했다. 원을 그리며 움직이던 마나가 지그재그로 튀어 올랐다. 배, 가슴, 어깨, 허벅지 할 것 없이 마나가 부딪친 곳이 볼록하게 부풀어 올랐다.
“쿨럭!”
시커멓게 죽은피가 가슴팍을 적셨다.
마나를 제어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하지만 미쳐 버린 마나를 달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절망이 뇌리를 가득 채웠다.
그때였다.
이성을 잃은 마나가 오른손으로 달려들었다.
화악!
오른손이 미약하게 빛났다. 동시에 흘러넘쳤던 마나가 증발했다.
그릇은 안정을 찾았고,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온몸에 흩어져 있는 마나를 그러모아 원래 자리에 꾹꾹 눌러 담았다.
“헉…… 헉…….”
역시나 위험한 힘이었다. 순간의 방심, 조그만 욕심 때문에 어이없게도 개죽음을 당할 뻔했다.
다시는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기사회생의 기회를 마련해 준 오른손을 살폈다.
조심스레 붕대를 풀었다.
“음…….”
오른손을 다친 것은 어제였다. 그것도 새끼손가락이 절반이나 잘려 나갈 만큼 중상이었다.
나의 회복력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마법을 초월할 만큼 빠른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치료 마법을 받은 것처럼 상처가 아물어 가고 있었다.
새로운 발견이었고, 놀라운 발견이었다.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다음 날.
창문이 없어 해가 떴는지 졌는지 시간을 알 수가 없었다. 하인이 밥을 가져다주는 것을 보고 아침이구나, 점심이구나, 하고 추측할 뿐이었다.
하인이 제때에 밥을 가지고 왔다면, 슬슬 나를 경기장으로 안내해 줄 사람이 올 때였다.
똑똑!
예상대로 얼마 안 있어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 카스트로가 서 있었다.
“경기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나는 카스트로를 따라 경기장으로 향했다.
흥분한 관중들이 발을 구르는지 쿵쿵 소리와 함께 투기장 전체가 진동했다.
“칼리온 님의 경기는 네 번째입니다. 지금 두 번째 경기를 하고 있으니 올라가서 미리 몸을 푸시는 게 좋을 겁니다.”
내가 노예임을 알았으면서도 카스트로는 꼬박꼬박 존댓말을 했다.
가축과 다름없는 노예의 위상을 봤을 때, 반말을 하는 나도 그렇지만, 카스트로의 행동도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어쩌면 단순히 투기장의 규칙을 지키고 있는 것에 불과한지도 모르지만.
“하인에게 들었습니다만, 어제부터 한 번도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수련은 하지 않아도 됩니까? 아무리 F 등급이라지만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투사입니다. 만만하게 보다간 봉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수련은 방 안에서 했는데.”
“방 안에서요?”
카스트로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가 믿건, 믿지 않건 나는 정말로 하루 종일 잠도 자지 않고 수련만 했다.
바로 마나 수련이었다.
나는 수련의 성과인 오른손을 펼쳤다.
상처가 거의 아물어 있었다. 절반이나 잘려 덜렁거리던 새끼손가락도 제대로 붙어 있었다.
나의 마나는 역시 보통의 마나와 달랐다.
명상을 통해 마나의 흐름을 조종하던 중 폭주한 마나가 우연히 오른손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자 놀랍게도 포션으로도, 신성 마법으로도 치료할 수 없었던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새로운 발견에 흥분한 나는 시험 삼아 마나를 오른손에 집중시켜 보았다.
그러자 상처 아무는 속도가 빨라졌다. 쏟아붓는 마나의 양이 많아질수록 아무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종국에 가선 새살이 돋아나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마나는 살아 있는 생물처럼 상처에 달라붙어 육체의 치유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이와 비슷한 효과를 발휘하는 마법을 나는 알고 있었다.
바로 ‘힐’이었다.
마법을 시전하지도 않았는데 마치 힐 마법을 쓴 것처럼 마나가 스스로 상처를 치유했다.
“신성력에는 저주받고, 마나에게는 축복을 받은 몸이로군.”
나는 상처의 흔적만 남아 있는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카스트로가 뒤를 돌아봤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카스트로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럼 경기의 규칙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규칙은 간단합니다. 경기에 참가한 두 명의 투사 중 한 명이 패배를 인정하면 경기가 끝나게 됩니다. 혹은 한쪽이 패배를 인정할 수 없는 상태가 됐을 경우에도 경기가 끝나게 됩니다.”
“패배를 인정할 수 없는 상태?”
“기절했거나, 또는 죽었을 때입니다.”
“패배를 인정한 상대를 계속 공격하면 어떻게 되지? 실격패가 되는 건가?”
“아닙니다. 패배를 인정한 상대를 계속 공격하여 죽인다 할지라도 승패에는 영향이 없습니다. 다만 투사는 투기장의 재산이기 때문에 피해 보상 차원에서 대전료의 절반이 몰수됩니다.”
“겨우 그것뿐? 상대를 죽이든 살리든 사실상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그때였다.
쿵쿵!
다시 천장이 진동했다.
“이런! 두 번째 경기가 끝났나 봅니다. 비슷한 실력의 투사들이라 시간이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예상이 틀렸군요. 세 번째 경기는 금방 끝날 확률이 높습니다. 서둘러야겠습니다.”
카스트로는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왼쪽으로 크게 구부러진 모퉁이를 돌았다. 비슷한 모퉁이를 벌써 몇 번이나 돌았다.
도착했나 싶을 때마다 또 다른 모퉁이가 나타났다.
카스트로는 나를 끝없는 모퉁이의 미로 속으로 안내했다.
나는 목적지에 거의 이르렀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다시 모퉁이를 돌았다. 목적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더욱 강해졌다.
또다시 모퉁이를 돌았다.
카스트로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덩달아 나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모퉁이를 돌고, 돌고, 돌고, 돌고, 돌았다.
기운이 점점 강해졌다.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강한 기운이었다.
오른쪽으로 크게 휘어진 모퉁이 앞에서 나는 걸음을 멈췄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이 모퉁이가 마지막이었다.
“뭐하고 있습니까? 세 번째 경기가 끝나기 직전입니다. 빨리 오십시오!”
카스트로가 다급한 얼굴로 재촉했다.
모퉁이를 돌았다.
그 순간.
와아아아아!
거대한 함성의 파도가 나의 몸을 후려쳤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털이 쭈삣쭈삣 솟았다.
타원형 경기장에 계단식 관람석이 방사형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관람석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다.
“죽여!”
“목을 베라!”
“패자에게 죽음을!”
사람들의 광기로 공기가 요동쳤다.
검을 든 투사가 무릎을 꿇고 있는 상대의 목을 잘랐다. 잘린 목에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와아아아!
다시 한 번 함성이 일었다.
함성 소리가 마치 절규와 같았다.
“투기장의 성지聖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카스트로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그의 눈동자가 희열에 떨리고 있었다.
세 번째 경기의 승자가 환호를 받으며 퇴장했다. 진행 요원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와 시체를 치웠다.
광기에 젖어 있던 관람객들이 흥분을 가라앉히며 경기의 여운을 즐기고 있었다.
두웅!
커다란 북소리가 울려 퍼지자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경기장 안으로 화려한 옷차림의 미청년이 들어왔다. 듀란이었다.
듀란이 나오자 여기저기서 꺄악꺄악 소란이 일었다.
평민인 여자들은 적극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꽃송이를 던졌고, 귀족 영애들은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점잖게 눈웃음을 쳤다.
듀란은 남자가 봐도 혹할 만큼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자신에게 환호하는 여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질투에 찬 남자들이 듀란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두웅!
북소리가 울렸다.
관객들의 환호와 야유가 일제히 멈췄다.
“오늘의 네 번째 경기입니다.”
듀란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소리를 크게 지르는 것도 아닌데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마법으로 목소리를 증폭시키는 듯했다.
“이번 경기에 나올 투사는 놀랍게도 열 종류의 무기에 통달한 웨펀 마스터Weapon Master 웰런입니다. E 등급 투사로의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F 등급 최강의 투사 중 한 명입니다.”
듀란의 소개와 함께 반대쪽 입구에서 노란 머리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와아!
무술을 배워 본 적이 있는 귀족들은 피식 웃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평민들은 웨펀 마스터에게 환호성을 질렀다.
“웨펀 마스터 웰런과 싸울 투사는, 이런! 놀랍게도 오늘이 첫 출전이로군요! 과연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을까요? 미지의 실력을 가진 투사 칼리온입니다.”
카스트로가 살짝 등을 떠밀었다.
“나가십시오. 승리를 기원하겠습니다.”
진심이 조금도 깃들지 않은 기원을 받으며 경기장 안으로 걸어 나갔다.
웰런이 등장했을 때완 다르게 환성이 일지 않았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는 대신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관찰했다.
이곳은 도박장이었다.
도박을 하려면 패를 잘 읽어야 하는 법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나라는 패가 얼마만큼의 실력을 지니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나는 웰런과 마주 보고 섰다.
웰런은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하지만 키에 비해 어깨가 좁아 홀쭉해 보였으며 원숭이처럼 팔이 길었다. 열 종류의 무기를 다룬다는 듀란의 설명처럼 그는 온몸에 무기를 매달고 있었다.
양쪽 허리춤에 각각 롱 소드와 도를 차고 있었다. 등에는 X 자 형태로 묶인 철퇴와 배틀 엑스가 있었고, 어깨에는 암기로 보이는 작은 수리검이 달려 있었다. 그 밖에도 단검, 채찍 같은 무기가 허벅지와 발목에 매여 있었다.
“첫 출전이라고? 오랜만에 처녀의 피를 맛보겠군. 제법 따끔할 것이다. 크크크!”
웰런은 들고 있는 창으로 나를 가리키며 히죽 웃었다.
와아아아!
웰런의 도발에 잠잠했던 열기가 확 끓어올랐다.
열 종류의 무기를 찬 채 당당하게 서 있는 웰런의 모습은 무술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가히 무신武神과 같을 것이다.
“웰런! 웰런!”
“웨펀 마스터에게 전 재산을 건다!”
“지면 죽여 버릴 테다!”
사람들이 웰런의 이름을 연호했다.
나는 몸이 위축됨을 느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나를 노려보며 나의 죽음을 염원하고 있었다. 그들의 광기 어린 저주에 몸이 으스스 떨렸다.
위축된 근육을 풀어 주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두 발로 디디고 서 있는 경기장의 단단한 땅을 느꼈다.
흙의 색깔은 검붉었다. 수백, 수천 명의 피를 머금은 땅이었다. 탐욕스러운 땅이 또다시 누군가의 피를 원하고 있었다.
나에게 야유를 퍼붓는 사람들을 일부러 둘러보았다.
도박에 인생을 건 어리석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인간에 불과했다. 내가 위축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귀족 전용 관람석에서 낯익은 가면을 발견했다. 하얀 드레스에 나비 모양의 가면을 쓰고 있는 귀족 영애였다.
휴멜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음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무엇이 두려운 것이냐.
상대는 겨우 F 등급에 불과한 투사이지 않느냐.
그런 자를 상대로 머뭇거릴 시간 따위 내게는 없었다.
빨리 치고 올라가지 않으면 휴멜은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곳까지 올라가 버릴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복수는커녕 죽을 때까지 휴멜의 발바닥이나 핥고 있어야 할 것이다.
마음속에서 투지가 끓어올랐다.
나의 변화를 알아차렸는지 듀란이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두웅!
북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다.
“아름다운 아가씨, 아가씨는 어떤 무기를 사용하지? 설마 맨손으로 웨펀 마스터인 나를 상대하려는 건 아니겠지?”
웰런이 음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품 안에서 너클을 꺼내 오른손에 끼었다. 오른손의 상처 부위가 시큰거렸다.
“설마 그게 아가씨의 무기는 아니겠지? 진짜 맨손으로 나를 상대하려는 것이냐?”
“너에겐 이것도 과분하지.”
나는 웰런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는 쉽게 흥분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더니 롱 소드만 남기고 다른 무기를 모두 바닥에 놓았다.
“애송이 아가씨에게 모든 무기를 쓸 필요는 없지. 검으로만 싸워 주겠다.”
웰런은 큰 인심을 쓰는 것처럼 거만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속셈을 눈치챘다.
“상대보다 유리한 무기를 고르기 위해 온갖 무기를 주렁주렁 매달고 나오는 겁쟁이가 웨펀 마스터라니. 무기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면 싸울 수도 없는 주제에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정곡을 찔린 웰런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감히 나를 모욕하다니! 혀를 잘라 버리겠다!”
웰런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는 F 등급의 투사답게 제대로 된 검술을 사용하지 못했다. 검을 마구잡이로 풍차처럼 휘두를 뿐이었다.
나는 검의 움직임을 끝까지 지켜본 후 살짝살짝 몸을 움직였다.
사람들이 비명과 응원의 함성을 질렀다. 대부분 웰런을 응원하는 소리였다.
검술에 무지한 그들에게는 웰런이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는 경기처럼 보였을 것이다.
나비 가면을 쓴 귀족 영애가 지루한 눈으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품이라도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 역시 배울 것 하나 없는 싸움을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쉭!
나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검이 귀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웰런이 빙글 회전하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검은 나의 허리를 노리며 날아왔다.
나는 오른손 주먹을 휘둘렀다.
깡!
너클과 칼날이 부딪치며 불꽃이 일었다. 검의 움직임을 보지 못한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위험한 방어법이었다.
웰런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는 열 종류의 무기를 들고 나온 투사답게 약삭빠른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나의 방어를 보는 순간 바로 실력 차이를 깨달은 것이다.
“내, 내가 졌…….”
웰런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방어만 하다 끝내기에는 너무 흥이 올랐다.
나는 순식간에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곤 너클을 낀 주먹으로 배를 올려쳤다.
퍽!
“꺼억!”
웰런의 눈이 뒤집혔다.
힘을 조절했으니 죽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피똥을 좀 싸겠지.
“끄르르륵!”
웰런은 게거품을 물며 앞으로 쓰러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웨펀 마스터가 왜 쓰러진 거야?”
사람들이 웅성웅성했다. 환성도 환호도 없었다.
나의 움직임을 보고 감탄한 몇몇 귀족만이 가볍게 박수를 보냈다.
카렌이 있는 쪽으로 쳐다보니 언제 사라졌는지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나왔던 입구로 돌아갔다. 카스트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감탄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놀랍습니다. 잔상이 남을 정도의 몸놀림이라니.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기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를 겁니다.”
다시 말해 카스트로는 나의 움직임을 보았다는 뜻이었다.
나는 투사들의 관리를 맡고 있는 성격 삐뚤어진 관리인을 흘끔 쳐다봤다.
아무리 보아도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은연중에 나오는 기세도, 위압감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평범하여 오히려 위화감이 들었다.
‘좀 더 조심해야겠군.’
나는 카스트로에 대한 경계수위를 한 단계 높였다.
“첫 승을 축하합니다. 이것은 대전료입니다.”
카스트로가 돈주머니를 건넸다.
돈주머니 안에는 1루덴이 들어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카렌이 9루덴을 가져갔다는 말이었다.
평민 가족의 한 달 생활비가 5루덴 정도였으니, 첫 출전한 F 등급 투사의 대전료치고는 그리 적은 액수는 아니었다. 물론 대부분의 돈이 카렌의 호주머니로 들어갔지만.
두웅!
어느새 북소리와 함께 다섯 번째 경기가 시작되었다.
“오늘의 마지막 경기입니다. C 등급 투사들의 경기니 봐 두시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카스트로의 말처럼 마지막 경기는 볼만했다.
투사들은 C 등급이었으며, 서른 번이 넘는 격전을 치러 온 베테랑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싸우는 모습에서 현재 나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실력은 두 번째 문제였다.
사실 실력만 놓고 보면 C 등급 투사보다 나의 실력이 더 뛰어났다.
하지만 나는 경기장에서 싸우는 C 등급 투사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들보다 강하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나에게 없는 것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장의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두 명의 투사가 온갖 방법으로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정정당당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신발에 숨긴 암기를 던지고, 바닥의 모래를 얼굴에 뿌리고, 침을 눈에 뱉고.
살기 위한, 죽이기 위한, 처절한 투쟁이었다.
투지를 넘어선 잔인함.
살기를 넘어선 잔혹함.
그리고 적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무정함.
그들에겐 있고, 나에겐 없는 것.
애초부터 항복을 하거나 항복을 받아 주겠다는 의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적을 죽이겠다는 살귀와 같은 마음뿐이었다.
나는 걸음을 돌려 방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 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등 뒤에서 거대한 함성이 일었다.
방으로 돌아온 후 지칠 때까지 마나 수련만 하였다. 하인이 가져다준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웠다.
단검으로 벽에 작대기 하나를 그었다.
작대기의 의미는 1승 0패.
그제야 첫 경기가 끝났다는 실감이 들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육체적인 피로가 아니라 정신적인 피로였다.
나는 C 등급 투사들의 경기를 머릿속으로 재구성해 보았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 * *
잠에서 깨자마자 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나 수련을 시작했다.
연무장에서 수련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잠재적인 적 앞에서 수련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또한 F 등급 최강자라는 웰런과의 경기를 통해 F 등급 투사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들이 수련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보다 마나 수련을 하는 쪽이 훨씬 이득이었다.
마나 수련을 하고 난 후 무기를 손질했다. 하인이 가져온 기름을 헝겊에 묻혀 너클의 녹을 닦아 냈다.
“자국이 남았군.”
어제 경기에서 나는 웰런의 검을 너클로 쳐 냈다. 녹을 벗겨 내니 그 자리가 움푹 파여 있었다.
너클의 관절 부위를 비틀었더니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헐렁거렸다. 꼴을 보아하니 조마간 부서질 듯했다.
“괜히 잡동사니로 버려진 게 아니었어.”
F 등급 투사와 나의 실력 차를 봤을 때 나는 빠르게 승급할 확률이 높았다.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게다가 한쪽밖에 없는 녹슨 너클을 끼고 계속 싸울 수는 없었다.
좀 더 제대로 된 무기가 필요했다.
점심을 가지고 온 하인을 불러 심부름을 부탁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것과 비슷한 모양의 너클을 사다 줘.”
나는 녹슨 너클을 보여 주며 말했다.
“일단 이것으로 계산하고 모자라면 외상으로 가져오도록. 다음 경기 때 받은 대전료로 갚을 테니까.”
나는 아직 화폐 가치에 대한 기준이 없었다. 때문에 너클의 가격이 얼마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전 재산이라 할 수 있는 1루덴을 하인에게 모두 건네주었다.
“저기……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지?”
“음…… 그게…… 다음번에 반드시 대전료를 받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하인은 겁에 질린 얼굴로 조심스럽게 이유를 말했다.
투사는 경기에 지든, 이기든 대전료를 받게 된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한 가지. 경기 중에 죽어 버렸을 때다.
즉, 하인의 이유는 투사에게 절대로 언급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투사였다면 즉시 주먹이 날아갔을 터였다.
“외상이 안 된다면 금액에 맞춰서 너클을 사다 줘. 모자라면 그냥 와도 된다.”
“알겠습니다.”
하인이 도망치듯 사라졌다.
점심을 먹고 다시 마나 수련을 시작하려고 할 때 카스트로가 찾아왔다.
그는 좀처럼 본론을 말하지 못했다. 어색하게 웃으며 뺨을 긁적일 뿐이었다.
“무슨 일이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곤란하군요.”
“곤란?”
난처해하는 카스트로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역시 안젤리아 님은 귀족 영애라서 그런지 투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시더군요.”
카스트로는 안젤리아, 즉 카렌이 투기장에 요구했다는 것을 내게 알려 주었다.
그녀는 나의 경기 간격을 3일 이내로 해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나는 카렌의 속셈을 알아챘다.
그녀는 돈독이 오른 게 확실했다.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허탈한 웃음만 새어 나왔다.
“하지만 저희들은 안젤리아 님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어째서지?”
투사가 많이 싸울수록 돈을 버는 곳이 투기장일 텐데 카렌의 요구를 거절하다니 뜻밖이었다.
“투사들의 경기는 목숨을 담보로 하기 때문에 상처 하나 없이 승리하였다 할지라도 정신적으로 상당한 피로를 받게 됩니다. 따라서 상처가 없다는 것에 방심하고 연이어 경기에 나갔다가는 일순간에 긴장이 무너져 버려 허무하게 죽을 수도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엄청난 손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저희 투기장에서는 투사들의 경기 간격을 최소 일주일로 잡고 있습니다.”
“그녀 성격에 그냥 물러났을 리가 없는데.”
카스트로가 빙긋 웃었다.
기분이 더러워졌다. 역시나 노예라서 그런지 주인의 성격을 잘 알고 있구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기 때문이다.
내 생각처럼 카렌은 그냥 돌아가지 않았다.
“장시간에 걸친 회의 끝에 결국 저희들은 안젤리아 님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저희로선 손해날 게 없었고, 오히려 새로운 시도인 만큼 손님들의 반응도 좋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손해 보는 것은 나뿐이겠지. 그래서 결론이 뭐야?”
카스트로는 다시 빙긋 웃었다. 재미 삼아 개구리를 죽이는 악동과 같은 웃음이었다.
“큰 상처를 입지 않는 이상 칼리온 님은 일주일마다 경기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역시.”
생각한 대로였다.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대화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카스트로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문 앞에 가만히 서서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할 말이라도?”
카스트로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아무리 봐도 당신은 노예답지가 않습니다. 노예가 지니고 있어야 할 복종심과 패배 의식이 전혀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노예가 맞습니까?”
“노예가 맞아. 다만…… 노예가 된 지 얼마 안 돼서 예의를 못 배웠을 뿐이야.”
나는 별일 아닌 것처럼 대꾸해 줬다.
카스트로가 피식 웃었다.
“……바로 그 점이 노예답지 않다는 것입니다. 노예는 배워서 되는 게 아니니까요.”
카스트로가 사라지자마자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마나가 천천히 눈을 떴다. 고통을 참기 위해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 *
일주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깡!
나는 하인이 사다 준 너클을 낀 후 가볍게 주먹을 부딪쳤다.
슈슛!
허공에 대고 주먹을 휘둘렀다.
전 재산을 털어서 산 너클이었다. 하인의 말에 따르면 병기점에서 가장 비싼 너클이라고 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상 하인이 거짓말을 했을 리 없었다.
그러므로 좋은 너클일 것이다.
아마도 평범한 사람들에겐.
끼기긱!
주먹에 힘을 주자 너클이 삐거덕거렸다.
“너무 약하군.”
이래선 잡동사니에서 주워 온 녹슨 너클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단지 깨끗하냐, 녹이 슬었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준비가 끝났으면 가시죠.”
카스트로가 문 앞에 서서 재촉했다.
나는 너클의 강도를 확인하기 위해 주먹을 꼼지락거리며 카스트로의 뒤를 따라갔다.
와아!
와아아아!
경기장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수천 명이 동시에 내지르는 광기 어린 고함은 그 자체로 주술이나 다름없었다.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투기가 끓어올랐다. 마나가 스스로 기지개를 켰다.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겨우 두 번째 경기인데 벌써 경기장의 분위기에 동화되다니. 역시 칼리온 님은 대단하군요.”
“아직 수련이 부족해 흥분한 것뿐이야.”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한 겁니다. 웬만한 투사는 경기장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자멸하고 말죠. 그만큼 이곳의 분위기는 매력적이면서도 위험합니다.”
쿵!
쿵!
사람들이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경기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 아니었다. 인간과 몬스터의 싸움이었다.
크아아앙!
리자드맨Lizardman이 포효했다.
인간, E 등급 투사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손에 들린 창이 좌우로 흔들릴 만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재프가 가져다준 책, 몬스터도감의 내용이 떠올랐다.
리자드맨.
이름 그대로 도마뱀 머리를 가진 몬스터. 주로 축축한 늪지에 서식하며 인간처럼 직립보행을 한다. 인간보다 지능이 떨어지지만 힘이 세고 민첩하다.
두꺼운 피부는 레더아머 이상으로 단단해 웬만한 공격으론 타격을 입지 않는다. 무기를 사용할 줄 알며,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러 공격할 수 있다…….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있는 리자드맨의 상대인 E 등급 투사를 쳐다봤다.
“죽겠군.”
“그렇겠죠.”
“어째서지?”
나의 물음에 카스트로가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어째서라니요?”
“균형이 맞지 않아. 어째서 리자드맨 같은 몬스터를 E 등급 투사와 싸우게 한 거지? 리자드맨 정도면 C 등급 투사도 벅찬 상대일 텐데.”
카스트로가 피식 웃었다.
“관객들이 투기장을 왜 찾는지 아십니까?”
“눈요기 아닌가? 싸움 잘하는 놈들이 서로를 죽이기 위해 피 터지게 싸우는 꼴을 보려는 거겠지. 덤으로 돈도 벌고. 물론 대부분 돈을 날리겠지만.”
“절반만 맞았습니다.”
열 받게도 카스트로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를 다독이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머지 절반은 뭐지?”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관객들이 진짜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싸우는 모습이 아닙니다. 물론 비등한 실력의 투사들이 화려한 기술을 사용해 치고받는 모습은 흥미진진하죠. 하지만 그뿐입니다. 흥미를 자극할 뿐입니다. 인간의 본능까지는 자극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것은 바로…….”
와아!
함성 소리에 경기장이 들썩거렸다.
크아아앙!
리자드맨이 투사의 양다리를 한쪽씩 잡은 채 포효했다. 투사는 거꾸로 매달린 채 울부짖고 있었다.
“찢어 버려!”
“죽여라!”
“뭘 망설이고 있는 거냐, 괴물 주제에! 빨리 죽여 버려!”
어느 누구도 같은 인간인 투사를 응원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같은 인간인 투사를 동정하지 않았다.
미쳐 버린 곳에서 미쳐 버린 사람들이 미친 듯이 추악한 욕망을 배출하고 있었다.
“죽여!”
모든 관객들이 한마음이 되어 외치는 순간.
찌이익!
“으아아악!”
가죽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투사의 절규가 경기장에 메아리쳤다.
와아아아!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기억을 통틀어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거대한 함성이었다.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것은 바로…… 죽음이지요. 피와 살육이 넘치는 잔인한 죽음 말입니다.”
와아아!
함성이 카스트로의 말을 집어삼켰다.
“슬립Sleep!”
피를 보고 흥분한 리자드맨이 날뛰기 직전 마법사들이 나타나 리자드맨을 마법으로 잠재웠다.
리자드맨이 두꺼운 창살이 달린 짐마차에 실려 나가자 진행 요원들이 달려 나와 죽은 투사의 시체를 치웠다.
시체는 갈기갈기 찢겨 있어 청소를 하는 데 제법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메우고 있는 사람이 바로 미소년 듀란이었다.
“꺄아아! 여기예요, 여기! 이쪽을 봐 줘요!”
“사랑해요, 듀란!”
“저와 결혼해 줘요!”
“기생오라비 자식아!”
“희멀건 낯짝 따윈 보기 싫다! 꺼져 버려라!”
“이 남창 같은 놈아! 등짝 좀 보자!”
여자들의 열정적인 구애와 남자들의 정열적인 욕설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듀란이 미소 띤 얼굴로 다음 경기를 소개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오늘의 메인이벤트! 몬스터와 F 등급 투사들의 처절한 사투! 몬스터를 무찌르고 살아남는 투사는 과연 누구일까요? 아니,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듀란은 화려한 미사여구를 사용해 흥을 돋운 후 경기에 나설 투사를 차례차례 호명했다.
내 이름은 다섯 번째로 호명되었다.
“나가십시오.”
카스트로가 나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첫 번째 경기와 다르게 카스트로는 기원의 말을 해 주지 않았다.
듀란이 호명한 투사는 모두 17명이었다. 몇 명은 낯이 익었고, 몇 명은 생면부지였다. 그리고 한 명은 아는 놈이었다.
“이어서 17명의 F 등급 투사들과 사투를 벌일 몬스터를 소개하겠습니다.”
드드드드!
수레를 타고 커다란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쿠오오오!
경기장 밖에서 들려온 짐승의 포효가 공기를 진동시켰다. 리자드맨의 포효와는 질이 달랐다.
짐승의 포효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공포심을 자극했다.
광기에 미쳐 있는 관객들조차 숨을 죽이고 있었다.
“걸어 다니는 재앙! 몬스터를 잡아먹는 몬스터! 지상에 강림한 날개 없는 드래곤! 드레이크Drake입니다!”
듀란은 옆에 위치한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촤르르르!
쇠사슬이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경기장 왼쪽에 위치한 거대한 문이 좌우로 활짝 열렸다.
문 안쪽에서 창살에 갇혀 있는 드레이크가 수레에 실려 나왔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온 드레이크는 낯선 분위기에 당황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드레이크 옆에 서 있는 마법사가 마법을 준비하며 듀란의 신호를 기다렸다.
“그럼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듀란이 마법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법사의 손이 하얗게 빛났다. 동시에 드레이크의 목에 채워진 목걸이가 번쩍 빛을 뿜었다.
무슨 마법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어떤 마법인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몬스터의 본성을 억제하는 구속 마법이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봉인이 풀렸다.
주눅 들어 있던 몬스터들의 왕이 위엄을 되찾았다.
드레이크는 쭈그리고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크기가 거의 인간의 세 배에 달했다.
제대로 일어서기도 전에 드레이크의 머리가 감옥의 천장에 닿았다. 행동을 구속받은 드레이크는 분노의 포효를 지르며 꼬리를 휘둘렀다.
쾅!
단 한 방에 감옥이 박살 났다.
몸을 완전히 곧추세운 드레이크가 오만한 눈으로 경기장을 둘러보았다.
와아아!
드레이크의 늠름한 모습에 숨죽이고 있던 관객들이 환호성을 보냈다.
그때였다.
크아아앙!
왕은 자신을 구경거리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위엄을 담아 일갈했다.
공기의 울림이 폭풍이 되어 경기장을 후려쳤다. 진짜로 바람이 분 것처럼 격렬한 공기의 파동이 느껴졌다.
찌릿찌릿!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죽음과 같은 침묵이 경기장에 내려앉았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드레이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르렁거렸다. 그러곤 감히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우리들, 17명의 F 등급 투사들을 바라보았다.
드레이크의 붉은 눈이 희번덕거렸다.
“히익!”
겁에 질린 투사 한 명이 오줌을 지리며 주저앉았다.
“거, 거짓말이야. 약속하고 다르잖다. 기껏 해야 오크라고 했는데.”
다른 투사들도 주저앉지만 않았지 겁에 질린 것은 똑같았다. 그들의 얼굴에서 투지의 투 자도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오직 두 명만이 앞으로 있을 사투를 대비하고 있었다.
나는 내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F 등급 최강의 투사, 웨펀 마스터 웰런을 쳐다봤다.
“헤헤헤! 이렇게 또 뵙게 되는군요, 형님.”
서른 살도 넘어 보이는 웰런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형님?”
“이 바닥에선 힘센 놈, 아니 강하신 분이 곧 형님 아니겠습니까? 헤헤헤!”
나는 조금씩 가까워지는 웰런을 경계했다. 지난번의 패배를 복수하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것인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
웰런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다.
쿵!
드레이크가 발을 구르는 순간 웰런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잽싸게 내 뒤로 숨었다.
“그럼 형님! 잘 부탁드립니다!”
열 개가 넘는 무기로 전신 무장한 웨펀 마스터가 드레이크 쪽으로 나를 떠밀었다.
“어?”
크르르르!
동시에 드레이크의 고개가 내 쪽으로 획 돌았다. 주먹만 한 눈동자에 당황한 내 얼굴이 아른거렸다.
“……젠장.”
등골이 오싹했다.
몬스터 특유의 비릿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벌어진 입으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반짝였다. 허연 침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드레이크는 나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몸을 둥글게 말았다. 뒷다리의 근육이 부풀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팟!
드레이크가 땅을 박차며 용수철처럼 앞으로 튀어나왔다.
“헙!”
인간의 세 배에 달하는 몸집에서 나올 만한 속도가 아니었다.
간신히 땅바닥을 굴러 몸을 피했다.
쾅!
일직선으로 날아간 드레이크가 경기장 벽에 부딪쳤다.
관객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법사들이 쳐 놓은 실드Shield가 일순 깨어질 것처럼 흔들렸다.
실드 앞에 있던 관객들이 기겁을 하며 비명을 질렀다.
드레이크가 머리를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히익!”
조금 전 오줌을 지리며 주저앉았던 투사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드레이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잠시 후 자신에게 닥쳐올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멍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드레이크가 크게 입을 벌렸다. 침 한 방울이 뚝 투사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정신이 나가 있던 투사가 화들짝 놀라며 악몽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현실은 악몽보다 더 잔인했다.
“으아아아! 저리 가! 살려 줘!”
덥석!
우드득!
드레이크의 입이 투사의 상반신을 물어뜯었다. 날카로운 이빨 사이사이로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관객들이 드레이크를 연호했다.
사투가 시작되었다.
피 맛을 본 몬스터의 눈에 광포한 살의가 넘실거렸다.
나를 포함한 16명의 투사들이 미리 약속이나 한 듯 드레이크 주위를 원형으로 포위했다.
공격을 하기 위한 진형이 아니었다. 드레이크를 피해 흩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진형이었다.
“형님, 어떻게 하죠?”
등 뒤에 숨어 있는 웰런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가 네 형님이냐?”
나는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당연히 저를 한 주먹에 쓰러뜨리신 분이지요.”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웰런이 넉살 좋게 미소를 지었다.
한마디 더 쏘아붙이려다 그만두었다.
실실 웃고 있는 얼굴과 다르게 웰런의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놈은 죽음의 공포를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잔머리나 굴리는 놈치고는 의외로 의지가 강했다.
“……일단 붙어 봐야지. 덩치만 크지 의외로 허당일 수도 있잖아.”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요. 드레이크가 어째서 몬스터들의 왕이라 불리는지 모르십니까? 덩치만 크다고 왕이 된 게 아닙니다. 드레이크보다 덩치가 큰 몬스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웰런은 내 뒤에 숨어 있는 주제에 계속 구시렁거렸다.
드레이크를 향해 확 집어 던져 줄까 고민하던 찰나 첫 번째 식사를 마친 드레이크가 몸을 움직였다.
쿵! 쿵! 쿵!
투사들이 모두 당황했다. 순식간에 진형이 붕괴되었다.
드레이크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통나무 같은 앞발을 휘둘렀다. 거의 단검만 한 길이의 날카로운 손톱이 투사들을 찢어발겼다.
“크아악!”
“사, 살려 줘!”
투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핏줄기가 하늘로 솟구치고, 어깨에서 분리된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말 그대로 학살이었다.
한 마리의 몬스터에게 17명의 투사가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있었다.
붉디붉은 선혈.
악몽에서 깨기 위한 비명.
공포와 절망이 경기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드레이크를 향해 뛰었다. 등을 돌리고 있던 주제에 어떻게 알았는지 드레이크가 꼬리를 휘둘렀다.
공중으로 점프해 꼬리 공격을 피한 뒤 드레이크의 등을 밟고 다시 뛰어올랐다. 그러곤 다리에 온 힘을 실어 드레이크의 머리를 걷어찼다.
퍽!
휘청!
아홉 번째 먹이를 향해 돌격하던 드레이크의 머리가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대신 분노한 듯 살기 넘치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봤다.
쿵! 쿵! 쿵!
아홉 번째 먹이로 나를 선택한 드레이크가 입을 쩌억 벌린 채 달려들었다.
드레이크는 빨랐지만 커다란 체구 탓에 좌우 방향 전환이 느렸다.
나는 그 약점을 철저히 이용해 다람쥐처럼 이쪽저쪽 방향을 틀며 도망 다녔다. 그러면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드레이크의 다리를 걷어찼다.
수십 번이나 걷어찬 끝에 마침내 드레이크가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자아, 와라!”
나는 도발적으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크아아앙!
약이 바싹 오른 드레이크가 포효를 지르며 멍청할 만큼 정직하게 달려들었다.
나는 몸을 낮춰 공격을 피한 후 드레이크의 다리 관절을 걷어찼다.
퍽!
콰당!
다리가 풀린 드레이크가 마침내 쓰러졌다. 경기장이 진동했다.
“검!”
나는 웰런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웰런은 잔머리가 좋은 놈답게 내 말을 단숨에 알아들었다.
“여기 있습니다요, 형님!”
웰런이 내 쪽으로 검을 집어 던졌다.
휘리리릭!
덥석!
빙글빙글 회전하며 날아온 검을 공중에서 낚아챈 후 그대로 드레이크의 귀에 찔러 넣었다.
“후우…… 후우…….”
쥐 죽은 듯 정적에 휩싸인 경기장에 나의 거친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형님! 역시 대단하십니다!”
웰런이 감동한 얼굴로 뛰어왔다.
나는 손을 저었다. 피곤하니까 다가오지 말라는 신호였다.
용케 내 신호를 알아들었는지 웰런이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감동에 젖어 있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그리고……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아니 내 위쪽을 쳐다봤다.
툭!
찐득한 액체가 머리 위에 떨어졌다. 서늘한 기운이 꼬리뼈를 타고 올라왔다.
부스럭!
무언가가 움직이는 기척을 느낀 순간 몸을 날려 바닥을 굴렀다. 덕분에 조금 더 살 수 있었다.
끈적한 피가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그르르르.
드레이크가 귀에 검을 꽂은 채 낮게 으르렁거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분노한 몬스터의 눈빛이 아니었다. 미쳐 버린 몬스터의 눈빛이었다.
미쳐 버린 몬스터의 광기가 어깨를 짓눌렀다. 갑자기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휘익!
퍽!
위태롭게 도망치던 나는 결국 드레이크의 꼬리에 격중당하고 말았다.
“커헉!”
스쳐 맞은 탓에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옆구리를 맞은 까닭에 제대로 숨을 쉴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죽음이 술래잡기를 끝내기 위해 서서히 다가왔다.
그때였다.
“이 빌어먹을 도마뱀 새끼야! 덤벼! 덤벼 보라구!”
웰런이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다. 드레이크를 향해 단검을 날리고, 암기를 던지고, 채찍을 휘둘렀다.
그중 하나가 드레이크의 눈꺼풀에 맞았다. 신경에 거슬린 듯 얼굴 근육이 꿈틀하더니 드레이크가 웰런을 향해서 돌아섰다.
“나 잡아 봐라! 이 도마뱀 새끼야!”
웰런은 바지를 쑥 내리더니 드레이크를 향해 허연 엉덩이를 흔들었다.
일곱 살짜리 아이도 하지 않는 도발에…… 몬스터들의 왕이 홀랑 넘어갔다.
“우아아아!”
웰런은 미처 치켜올리지 못한 바지를 한 손으로 잡은 채 괴성을 지르며 경기장을 뛰어다녔다.
그러다 하필 내 앞에서 자빠졌다.
“대체 뭐하는 짓이냐? 죽고 싶어 용쓰는 거냐?”
“쓰벌! 나라고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저 망할 도마뱀 새끼를 죽일 수 있는 놈이 너밖에 없으니까 이러는 거 아냐! 네놈이 죽으면 어차피 우린 다 죽어!”
웰런이 등에 메고 있던 검을 꺼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러곤 진심 어린 눈빛과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잘 좀 부탁합니다, 형님.”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웨펀 마스터라는 웃기지도 않은 별명을 지닌 웰런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강인한 사내였다. 경기장 구석에 몸을 움츠린 채 넋 놓고 죽음을 기다리는 놈들보단 백배 나았다.
어느새 부서져 버린 너클을 벗어 던진 후 웰런이 쥐여 준 검을 거대한 몬스터에게 겨눴다.
“자아, 다시 한 번 붙어 보자.”
나의 말을 알아들은 듯 드레이크의 기세가 급변했다.
쓰으으읍!
드레이크가 피로 물든 공기를 빨아들였다. 목 부분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콧구멍에서 하얀 연기가 흘러나왔다.
“서, 설마! 브레스Breath?”
웰런이 경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드레이크를 가리키는 말 중 하나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날개 없는 드래곤.
생김새만으로 얻은 별명이 아니었다.
쿠아아아!
드레이크가 목구멍에서 일렁거리던 불꽃을 뿜었다. 거대한 불꽃 기둥이 일직선으로 날아왔다.
옆으로 몸을 날리려던 순간 웰런이 필사적으로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살려 주십시오, 형님!”
“젠장!”
웰런 때문에 피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죽어 버린 투사의 금속 방패를 들어 얼른 앞을 가로막았다.
쾅!
불기둥이 방패를 때렸다.
나는 숨을 멈춘 채 전진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끝장을 봐 보자는 심정이었다.
한 발.
그리고 한 발.
금속 방패가 벌겋게 달구어졌다.
한 발.
그리고 한 발.
치이익!
방패를 들고 있는 왼손이 타들어 갔다.
드레이크에게 다가갈수록 불기둥의 열기가 더욱더 강해졌다.
한 발.
그리고 한 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피부가 녹아내리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아니, 실제로 녹고 있었다. 방패를 들고 있는 왼팔에 기포가 부글거렸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나는 모든 힘을 그러모아 외쳤다.
“웰런, 이 새끼야!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방패를 집어 던진 후 있는 힘껏 도약했다.
푸확!
불기둥이 몸을 덮쳤다.
오른팔을 뒤로 잡아당긴 후 드레이크의 목구멍을 향해 내질렀다.
푹!
검이 이빨을 부수고 혀를 자른 후 목젖을 지나 뒤통수를 뚫고 나왔다.
거짓말처럼 불기둥이 뚝 그쳤다.
하지만 이미 내 몸은 잘 익은 고기나 다름없었다. 몸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콰당!
털썩!
드레이크와 함께 바닥에 널브러졌다.
“형님! 정신 차리십쇼, 형님!”
웰런이 허겁지겁 나에게 달려왔다.
그러니까 네 형님이 아니래도.
웰런의 모습이 희미하게 깜박이다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