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장 카오스 라이안
다음날.
발크르스 마왕의 군대는 생각보다 빨리 포스안 제국이 있는 곳으로 도착했다.
챠둠이 하늘에서 정확한 위치를 말해주고 있어 라이안은 보다 철저히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라피네 신의 신상 앞에는 라이안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뒤로는 로빈슨과 수많은 기사들이 있었고, 또 그 뒤로 수십만의 병사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검과 창을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그들 각자의 손은 이미 땀에 젖어 있었고 심지어 옆 사람의 목구멍에 침 넘어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대륙의 운명이 걸린 전쟁을 목전에 두었으니 그들의 이러한 모습들은 당연했다.
라이안은 멀리서 검은 무리가 몰려오는 것을 보며 메르지아를 뽑았다. 그리고는 뒤를 보며 로빈슨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로빈슨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안은 메르지아를 앞으로 내민 채 신상으로 걸어갔고 곧 신성력의 빛 속에서 신상을 앞에 두고 있었다.
라이안은 잠시 눈을 감았다.
‘메르지아, 너와 하나가 되는 법을 가르쳐줘.’
그리고 한순간 눈을 뜨며 신상에 메르지아를 찔러 넣었다.
파밧!
메르지아가 박힌 곳에서는 강한 빛이 쏟아져 나왔고 신상은 곧 빛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수아아아아.
수아아아아.
하늘로 올라간 빛이 모아들며 모든 신성력을 모으더니 한순간 터지며 공기 중에 퍼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로빈슨은 그러한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대륙을 위해!”
“와아아아아!”
“대륙을 위해 싸우자!”
로빈슨이 검을 치켜들며 앞으로 나아갔고 기사들과 병사들 또한 그를 따랐다.
라이안은 이미 신성력이 대륙으로 퍼져나가기도 전에 마물들에게로 쏘아져갔다.
마물들과 라이안은 빠르게 가까워졌고 마물들에게 다가선 그 순간 라이안이 그 자리에서 멈추며 발도술을 시전했다.
슈아아아악!
스스스스슥.
라이안의 일 검의 위력은 엄청났다. 라이안의 발도술로 나아간 강기는 수백의 마물들을 베고 지나갔고, 가장 선두에 있던 마물들 모두가 몸이 두 동강이 난 채 땅에 처 박혔다.
라이안은 하나의 빛이 되어 검은 곳을 밝혀갔다. 라이안의 뒤로 신성력의 빛들이 마물들을 덮쳤다.
“끼아아악!”
“쿠아아악!”
약한 마물들은 마치 몸이 타들어가는 듯 불타 재가 되었고 강한 마물들도 크게 고통스러워하며 몸을 가누기 힘들어보였다.
라이안은 잠시 뒤를 돌아보며 퍼져가는 신성력의 위력이 생각보다 엄청나다는 것을 알고는 쾌재를 불렀다.
무능력해진 마물들을 로빈슨과 그를 따르는 성기사들이 베어가며 진군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던 중 라이안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엄청난 마력이 담긴 검은 빛줄기를 급하게 피했고 라이안이 있던 자리의 마물들은 한순간 터져나갔다.
콰과과광!
라이안은 간신히 그것을 피하며 하늘로 떠올랐고 곧 자신과 같이 하늘에 떠 있는 발크르스 마왕을 볼 수 있었다.
아직 전투형태로 변하기 전의 발크르스 마왕이었지만 라이안이 그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다시 만났군.”
“역시 살아 있었군. 인간.”
발크르스 마왕은 라이안이 들고 있는 검을 보며 말했다.
“메르지아군. 어째서 그 검이 너에게 있는지 알 수가 없군.”
발크르스 마왕의 말에 라이안이 답했다.
“혼돈이 주더군.”
“혼돈! 혼돈의 신 카오스를 말하는 것이냐?”
라이안은 발크르스 마왕의 말에 답하지 않은 채 검을 내밀었다. 라이안의 행동에 발크르스 마왕이 얼굴을 굳히며 전투형태로 변신했다.
“그아아아아아!”
발크르스 마왕의 변신은 조금 달랐다.
마치 연기와도 같은 것들이 그의 몸에서부터 피어오르더니 곧 그것들이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나타난 모습은 라이안이 가장 처음 발크르스 마왕을 만났을 때의 모습이었다.
“드디어 시작이군. 가자, 메르지아.”
라이안은 메르지아의 이름을 부르며 발크르스 마왕에게 달려들었고 메르지아의 손잡이에 있는 혼돈의 구슬은 밝게 빛을 냈다. 곧 두 존재는 빛이 되어 하늘에서 부딪치는 것을 반복했다.
그들이 한차례 충돌할 때마다 대륙 전체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고 인간들은 커다란 함성을 지르며 마물과 싸웠다.
가장 앞줄에서 싸우는 기사들은 동료의 피가 얼굴로 튀는 것을 느끼며 악에 바친 듯 검을 휘둘렀고 그런 기사들로 인해 병사들 또한 높아진 사기로 기사들을 따랐다.
라이안이 발크르스 마왕과 싸우고 있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던 10인의 영웅들과 그들의 군사들은 신성력의 물결이 대륙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보며 커다란 함성과 함께 마왕군의 허리 쪽을 쳤다.
“대륙을 구하자!”
“와아아아아!”
10인의 영웅들이 군대를 이끌고 가세하자 마왕군은 허리에 칼이 찔린 듯 휘어졌고 차츰 밀리는 듯싶었다.
하지만 마왕군에서 발군의 실력으로 인간들을 잔인하게 죽여 가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칸드였다.
칸드가 이동해 빠르게 검을 휘두를 때마다 병사들 수십이 난도질당하며 그 시신이 허공을 날았고, 그 피를 뒤집어 쓴 병사들은 칸드의 엄청난 힘 앞에 창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피해 다녔다.
칸드의 뒤로 중급마족들 10여 명이 따르자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수백의 병사들이 죽어나갔다.
그런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 바로 샤린과 10인의 영웅들이었다.
창!
칸드는 자신의 검을 막는 샤린을 보며 인상을 굳혔다.
“아니, 너는!”
“오랜만이네요. 칸드 님?”
“갓 상급마족이 된 주제에 샤린, 네가 감히 나를 막겠다는 것이냐!”
“호호호, 이전의 저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하지요.”
창!
스앗!
“크윽!”
“거 보세요. 방심하시니까 그렇게 당하는 거랍니다. 호호호.”
칸드는 샤린의 공격에 생긴 어깨에 작은 상처를 만지며 물었다.
“어찌해 네가 인간의 편에서 싸우는 것이냐!”
“그거야 제가 그러고 싶으니까요.”
요염하게 웃는 샤린이었고 칸드가 검을 바로 세우며 공격해갔다.
10인의 영웅들이 나서자 중급 마족들은 힘을 못 쓰고 밀려만 갔다.
신성력의 영향을 받은 그들은 평소보다 많이 약해진 듯싶었고 라드이라는 불타오르는 듯한 갓블레이드를 시전하며 중급마족 하나를 베어갔다.
갈천혁과 혁마소 또한 중급마족을 가지고 놀듯 처리했고 헤인드와 디로안은 중급마족과 동등하면서도 조금 앞선 전투를 하고 있었다.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마왕의 군대는 많은 타격을 받았고 거의 반 이상이 죽어갔다.
그러나 곧 신성력의 영향은 점점 사라져갔고 마족들은 힘을 되찾아 가는지 차츰 포스안 제국쪽으로 밀고 들어갔다.
전투는 점점 서로 죽고 죽이는 소모전으로 들어갔고 그로 인해 죽어가는 인간들 또한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늘어갔다.
발크르스 마왕은 점점 자신의 몸에 상처가 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했다.
혼돈의 검 메르지아는 자신의 살갗을 찢기에 충분했고 라이안의 움직임은 점점 빨라지는 듯싶었다.
물론 라이안 또한 상처를 입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는 자신만 상처를 입고 발크르스 마왕에게는 전혀 타격을 주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메르지아의 힘을 빌려 그에게 상처를 줄 수 있었으니 그들의 전투는 용호상박이었다.
라이안은 메르지아로 하여금 자신의 힘 또한 늘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것이 메르지아와 함께 되어가는 느낌인가.’
알 수는 없었지만 왠지 그런 것만 같았고 몸이 전혀 지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전투의 형태가 변해갔으며 발크르스 마왕이 라이안을 강하게 공격하고는 뒤로 빠졌다.
“크르르르. 빌어먹을, 역시 메르지아로 인해 이런 일이 일어나는군.”
라이안이 발크르스 마왕의 말에 상처 입은 얼굴을 만지며 물었다.
“왜 그러느냐? 그 대단하다는 발크르스 마왕이 겨우 이 정도로 지쳤나?”
“크르르르. 인간, 그 힘은 정말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그러나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는 것도 지금뿐이다!”
한순간 발크르스 마왕의 모습이 다시 변해갔다.
커진 몸에서 오히려 절반 정도로 작아지는 그의 육체였고 그의 모습은 마치 매끄러운 금속으로 된 듯 빛이 번쩍였다.
라이안은 또 다시 변신한 발크르스 마왕에게서 엄청난 위압감을 느끼며 뒤로 조금 밀려났다.
“크윽! 역시 다른 마왕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네가 그들을 흡수해버렸기 때문이었군.”
라이안의 말에 변신을 마친 발크르스 마왕이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크흐흐, 역시나 힘이 넘쳐나는구나. 마신의 율법에서 벗어나 얻게 된 힘이 이 정도일 줄이야. 인간, 네가 이 힘으로 상대하는 첫 존재임을 영광으로 생각해라.”
“크윽, 너는 단지 괴물일 뿐이다!”
라이안은 메르지아를 강하게 잡으며 발크르스 마왕에게 달려들었다.
쉬익!
퍽!
쉬익!
퍼버벅!
“크헉!”
이미 라이안이 따라갈 수 없는 속도를 지닌 발크르스 마왕이었고, 라이안은 제대로 된 공격 한 번 하지 못한 채 당하고만 있었다.
하지만 너무 자신의 힘에 빠져 마구 공격을 펼치던 발크르스 마왕은 라이안이 빈틈을 이용해 찔러 넣은 검에 팔 안쪽이 살짝 베였고, 그에 분노한 발크르스 마왕은 보다 강렬하게 라이안을 공격해갔다.
지상에서는 이미 마족들과 마물들의 숫자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포스안 제국의 군사들은 이미 반 이상으로 줄어 있었고 로빈슨이 겨우겨우 검을 휘두르며 버텨가고 있었다.
기사들은 이미 전멸한 지 오래였고 이제 뒤에 있는 약한 병사들만이 겨우겨우 마물들에게 대항해갔다.
칸드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쓰러져 있었다.
샤린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이다.
“어찌하여… 어찌하여 네가 이렇게 강하단 말이냐?”
“호호호, 중간계에 나온 상급 마족들 중 절반 이상을 내가 흡수했지요.”
“이… 이 마계의 배신자…….”
“배신이라니요? 배신자는 저기 위에 있는 발크르스 마왕이며 그를 따르는 당신이지요. 그대들은 마신님의 율법을 배신하지 않았나요? 상위 마왕이 하위 마왕의 힘을 흡수할 수 없는 것이 율법이지 않았나요?”
샤린의 말에 칸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 그렇게 굴욕적이라는 표정을 지을 필요 없어요. 당신은 이제 곧 저에게 흡수될 것이니까요.”
“젠장.”
그것이 칸드의 마지막이었다.
칸드의 목을 잘라버린 샤린은 곧 칸드의 힘을 흡수하기 시작했고 얼마 안 있자 샤린은 자신의 몸속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힘에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이제는 지쳐 힘겹게 마족들과 싸우고 있는 라드이라에게로 날아갔다.
“빌어먹을.”
수백의 마물과 수십의 하급마족을 베어버린 라드이라는 이젠 너무 지쳐 더 이상 끌어낼 신성력도 없었으며 겨우겨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도움을 청하고 싶었으나 그것은 헤인드나 디로안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들은 자신보다 더욱 상태가 안 좋아보였다.
그러나 곧 갈천혁과 혁마소가 그들을 도와주는 것을 보며 얼굴에 미소를 그렸던 라드이라였다.
그런데 그러는 사이 한 마물의 날카로운 뿔이 자신에게 날아오는 것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는 속으로 생전 처음 욕을 했다.
‘젠장.’
절체절명의 순간 라드이라는 자신의 허리를 잡는 손길을 느꼈고 그 손길이 너무도 부드럽다고 느꼈다.
다시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린 라드이라였고 곧 자신을 안고 마물들을 죽여 나가는 샤린을 볼 수 있었다.
“샤린.”
“여기는 내가 처리할게요. 우리 귀염둥이는 푹 쉬어요.”
“크윽. 나한테… 귀염둥이라고… 하지 말…….”
라드이라는 하던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기절해버렸고 샤린은 그를 더욱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에나와 이미화는 이미 모든 마나가 고갈되었는지 한쪽에서 주저앉은 채 가쁜 호흡을 내쉬고 있었고 그것은 타미르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타미르안은 이제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커다란 몸으로 마물들을 짓밟으며 싸우고 있었다.
마왕군은 그렇게 단 하나의 마족도 남기지 않고 죽어갔고 그나마 살아남은 인간들은 더 이상 검을 들 여력조차 남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이제 라이안과 발크르스 마왕의 전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이안의 상태는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다리와 옆구리에서는 피가 흘러내렸고 한쪽 팔은 더 이상 쓰지 못하는지 늘어져 있었다.
발크르스 마왕은 겨우 처음에 생긴 팔 안쪽의 상처와 가슴의 기다란 상처뿐이었다.
“크흐흐흐, 질기고도 질기구나. 하지만 너도 이제 여기까지가 끝인 듯하구나.”
“하아… 하아.”
발크르스 마왕의 말대로 라이안은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었다.
지금 허공에 떠 있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였다.
발크르스 마왕은 그런 라이안을 보며 양손에 검은 마력이 담긴 원형 구를 생성시켰고 그것을 라이안에게 쏘아 보냈다.
아래에서 둘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모두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릴 그때, 두 개의 금빛이 라이안에게 날아갔고 발크르스 마왕이 쏘아 보낸 마력에 부딪쳤다.
콰광!
과광!
대기를 울리는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고 라이안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두 명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갈 할아버지… 혁 할아버지.”
둘은 라이안을 향해 밝게 웃고 있었고 발크르스 마왕의 공격에 녹아들며 사라져가고 있었다.
‘살아남거라… 라이안…….’
‘사랑한다… 라이안…….’
라이안은 그 말을 남기고 사라져 가는 갈천혁과 혁마소를 바라보며 악에 바친 소리를 질렀다.
“안 돼에에에에에!”
라이안은 어디서 그러한 힘이 나는지 분노하며 발크르스 마왕에게 달려들었다.
메르지아를 앞으로 세우며 날아가듯 찔러오는 라이안은 발크르스 마왕에게도 충분히 위력적으로 보였다.
“아니, 아직도 이런 힘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메르지아에게서 루시의 환영이 나타났고 그 환영은 라이안을 안은 채 발크르스 마왕에게로 날아갔다.
메르지아도 갈천혁과 혁마소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크나큰 분노를 느꼈던 것이고, 라이안과 동일한 분노에 둘은 하나가 되어 발크르스 마왕에게로 쏘아져갔다.
발크르스 마왕은 라이안의 공격을 막으려고 했지만 순간 이 공격은 막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피했다.
하지만 메르지아를 잡은 라이안은 발크르스 마왕이 피하는 방향으로 따라갔고 그를 지나쳐갔다.
스악!
“끄아아아악!”
라이안은 가슴을 노렸으나 발크르스 마왕은 자신의 팔을 희생해 겨우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발크르스 마왕은 너무도 큰 고통에 몸부림쳐야 했다. 라이안의 공격에 잘려나간 그의 팔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는 몰랐으나 발크르스 마왕은 빠르게 판단하며 다른 손으로 자신의 팔을 어깨부터 잘라내었다.
“크윽!”
떨어져 내리는 발크르스 마왕의 팔은 서서히 사라져갔고 다행히 빠른 판단 덕분에 발크르스 마왕은 팔 하나의 희생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라이안은 힘을 다했는지 메르지아를 떨어뜨렸다.
체력을 다한 라이안에게 극도로 분노한 발크르스 마왕이 달려들었고 그의 등을 향해 손을 찔러 넣었다.
푸욱!
“커억!”
라이안의 등이 뒤로 휘어졌고 발크르스 마왕이 손을 빼자 곧 땅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래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모든 인간들은 마지막 희망이 그렇게 사라진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며 절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발크르스 마왕을 누가 막는단 말인가.
떨어져 내리던 라이안이 막 바닥에 닿기 전 샤린이 잡아내었고 곧 땅에 눕혔다.
라이안의 곁으로 그의 친구들이 다가왔고 하나같이 몸을 떨며 슬퍼했다.
라이안은 가늘게 뜨고 있던 눈으로 그들을 확인하고는 스르르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모두가 살아 주었구나. 모두들 미안해… 나… 더 이상 힘이 없어.’
“크흐흑, 라이안.”
“라이안… 일어나! 라이안!”
헤인드와 디로안이 라이안의 곁에서 눈물을 흘렸고, 에나 또한 그 곁으로 다가왔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죽은 듯했으나 그 미약한 숨만은 절대 끊지 않았던 라이안이었다.
에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런 라이안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의 표정은 점점 더 슬프게 변해갔다.
“이제 당신에게 오빠라는 말은 하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왜냐하면… 난 당신을 사랑했었으니까요…흐흐흑.”
에나는 마음속으로부터 복받쳐오는 슬픔에 말을 멈추며 흐느꼈고 라이안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전…아직도 당신을 사랑해요. 만나는 순간부터 당신을 사랑했어요. 처음부터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어요. 당신은…당신은…너무도 멋있는 분이니까요.”
라이안이 죽음에 이르러서야 겨우 사랑고백을 할 수 있었던 에나였고 주위에서는 그런 에나로 인해 더욱 큰 슬픔을 느꼈다.
그 순간 라이안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에나의 눈에는 마치 살며시 웃는다고 느껴졌고, 에나는 자신의 손을 통해 그의 미약했던 숨결이 사라져 간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야…흐흐흑, 이대로는 보낼 수 없어요. 라이안, 제발 살아나 줘요! 부탁이에요. 흐흐흑…이대로는 보낼 수 없단 말이에요. 이렇게 사랑 고백을 할 수는 없단 말이에요, 흐흐흐흑.”
모두가 참기 힘든 슬픔을 이겨내고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라이안은 정말 이대로 모두와 헤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마지막 숨결을 내뱉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폐와 심장은 멈추었으나 그의 머리만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라이안 자신도 자신의 숨이 멎었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에나의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에나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어. 하지만…내가 그것을 받아들이면 왠지 루시에게 죄를 짓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서 그럴 수 없었어. 미안해…에나.’
라이안이 진정으로 에나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 라이안의 머리에 울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진정 이대로 끝내고자 하는가.
‘이 음성…당신인가?’
-알고 있지 않은가. 다시 한 번 묻겠다. 진정 이대로 끝내고자 하는가.
‘끝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끝이 날 수밖에 없으니 어쩔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너의 몸이 죽어버려서? 단지 그 이유 때문인 것인가?
‘그렇다. 그렇지 않는다면 이대로 끝낼 이유도 그럴 생각도 없다.’
-살고 싶은가?
‘살고 싶냐고? 큭큭큭,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내 앞에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 앞에서 울고 있다. 그런데 살고 싶냐고? 당연한 것이 아니냐? 살고 싶다. 정말 미치도록 살고 싶다. 그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정말…살고 싶다.’
-어떤 수단이라…방법은 있다. 하지만 네가 동의를 해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라이안은 하나의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인가?! 정말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단 말인가!’
-그렇다.
‘어떤 방법이라는 것이냐? 말하라.’
-그것은 너와 나의 융합이다.
‘융합? 그것은 너와 내가 합쳐진다는 것인가?’
-그렇다.
‘흠.’
라이안은 걱정스러웠다. 왠지 융합이라는 것이 라이안 스스로가 자신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었다.
카오스에게는 라이안의 모든 생각과 걱정스러운 마음까지 모두 들려왔다.
-걱정하지 마라. 너와 나는 영혼의 융합을 하게 된다. 너는 너 자신으로만 있으면 된다. 단지 지금까지의 나의 모든 힘과 기억을 네가 가져간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너는 나이고 난 곧 네가 된다. 네가 허락하는 그 순간 넌 혼돈의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며 곧 혼돈의 신 카오스로 재탄생하게 될 것이다.
‘그런가. 그런 것인가… 그래, 그게 아니라면 또 어때. 어차피 죽으면 모든 게 끝인 것을… 좋다. 너와의 융합을 허락하겠다.’
-좋다. 이제부터 너와 난 하나가 된다.
발크르스 마왕이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그때 라이안의 몸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왔다.
라이안의 곁에서 슬퍼하고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일어나는 현상을 보며 뒤로 물러났고 라이안의 몸은 서서히 떠올랐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라이안의 몸이 빛과 함께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빛은 조금씩 옆으로 퍼져 나갔지만 그리 많이 퍼지지 않았다.
라이안의 몸은 이제 빛이 되었다.
그러다 순간 흩어진 빛들이 모여들었고 곧 다시 어떠한 형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발크르스 마왕은 위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서서히 빛이 사라지며 나타나는 형체는 전혀 상처가 없는 라이안이었다.
라이안은 백색의 옷을 입고 있었으며 서서히 땅으로 내려오며 두 발로 바로 섰다.
팟.
라이안의 두 눈이 빠르게 떠졌고 그는 에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나 또한 두 손을 모은 채 라이안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눈만을 응시한 채 걸어갔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이 갑작스러운 현상에 아직도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라이안은 다가온 에나를 포근히 안아주었다.
“에나야, 너의 마음… 잘 받았어.”
“라이안.”
라이안의 입술이 에나의 입술에 포개졌고 곧 다시 떨어지며 라이안이 말했다.
“잠시만.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줘.”
라이안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어느새 하늘 위에 있는 발크르스 마왕 앞에 나타났다.
“인간, 참으로 끈질기구나.”
라이안은 발크르스 마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인간이라… 아직도 내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가?”
“흥! 네놈이 인간이 아니라면 뭐란 말이냐!”
라이안은 부드럽게 웃다가 곧 멈추고 발크르스 마왕을 쏘아보며 말했다.
“나는 태초의 혼돈이며…….”
순간 라이안의 앞말을 들은 발크르스 마왕이 몸을 떨었다.
“신들 중 가장 먼저 태어난 존재이며…….”
“서, 설마! 말도 안 돼는……!”
발크르스 마왕이 경악에 찬 표정을 짓고 있음에도 라이안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 모든 차원에서 가장 강인한 존재, 혼돈의 신 카오스. 내 이름은 카오스 라이안이다.”
발크르스 마왕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감을 느끼며 공포에 떨었다.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다!”
발크르스 마왕은 자신이 지금 들은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지 달려들었고, 라이안이 한곳으로 손을 뻗자 하나의 섬광이 날아와 손에 쥐어졌다.
그것은 바로 메르지아였다.
순간 빛이 번뜩였을까.
발크르스 마왕과 라이안이 있던 장소가 뒤바뀌었고 발크르스 마왕은 자신의 몸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아악!”
발크르스 마왕의 비명은 상당히 길게 이어졌고 그의 얼굴까지 마지막으로 사라져서야 끊어졌다.
라이안은 사라진 발크르스 마왕을 보며 말했다.
“그 무엇도 창조되기 이전… 무로 돌아가라.”
이것이 바로 혼돈의 검 메르지아의 원래 능력이었다.
모든 창조되어진 것들을 무로 되돌릴 수 있는…….
라이안이 서서히 허공에서 내려오자 아직도 멍해져 있는 라이안의 친구들이었다.
헤인드가 라이안을 보며 물었다.
“라이안… 정말 살아 있는 것이 맞아?”
“후훗, 지금 보고 있잖아.”
라이안이 미소를 지어 주었고 헤인드가 얼굴을 구기며 안겨들었다.
“으아아앙!”
헤인드의 어린 아이 같은 울음을 시작으로 모두가 이제 슬픔의 눈물이 아닌 기쁨의 눈물을 흘렀다.
헤인드를 에나가 급히 밀어제치며 말했다.
“헤인드 오빠, 좀 떨어줘요! 라이안이 힘들어 하잖아요!”
그러면서 라이안의 팔짱을 끼는 에나였다.
“하하하하.”
“호호호호.”
모두가 그렇게 평화로움에 울다가 웃고 있을 때 라이안은 자신의 친구들 뒤에 서 있는 노인을 볼 수 있었다.
“노인장.”
“허허허, 드디어 각성하셨군요. 카오스 님.”
노인은 바로 라이안에게 창을 주고 메르지아의 검집을 주었던 그 대장장이 노인이었다.
주위 친구들이 노인의 카오스라는 말에 라이안을 쳐다보았다.
“저, 정말 라이안이 카오스야? 그 혼돈의 신인 카오스?”
“설마… 그럴 리가…….”
모두가 의심의 눈초리로 라이안의 대답만을 기다렸고 라이안은 자신을 난처하게 만든 노인을 보며 말했다.
“그렇군. 노인장… 아니, 주신 라피네.”
“헉!”
“라, 라피네 신!”
“말, 말도 안 돼! 라피네 신이 이런 노인이었단 말이야?!”
가장 놀란 것은 바로 라피네 신을 모시는 라드이라였고 그는 지금 이 황당한 대화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알아차리셨군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떤가? 보기 추하군.”
라이안의 말에 노인의 몸에서 빛이 흘러 나왔고 곧 하얀 옷을 걸친 여인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 모습은 포스안 제국에 있던 라피네 신의 신상과 무척이나 흡사했다.
라드이라는 라피네 신의 모습을 확인하며 넙죽 엎드렸다.
“라피네 신이시어, 주신의 어린양 라드이라가 인사드립니다.”
라피네 신은 라드이라의 행동에 흡족해 했고 라이안이 그런 라피네 신을 보며 말했다.
“너 그대로 있을 거냐? 감히 내 친구에게 절을 받아?”
“음, 음! 그만 일어나세요.”
라피네 신이 헛기침을 했고 라이안이 라드이라에게 말했다.
“라드이라, 너 이제 더 이상 라피네 믿지 마라. 이 녀석 어렸을 때 업고 키운 존재가 바로 나였단 말이다.”
라이안의 말에 라피네 신이 얼굴에 홍조를 만들어내며 부끄러워했다.
“오라버니도 참.”
“그건 그렇고 너는 왜 네가 만든 세상이 혼란스러워지고 있는 데도 나서지 않았던 거지?”
“제가 나서지 않았다니요? 제가 얼마나 힘을 썼는데요?”
“네가, 뭘?”
“카오스 님께 창도 드리고 검집도 드렸잖아요?”
“흠. 결국은 나를 각성시켜 내가 이 모든 것을 해결하도록 이끌었다는 말이군.”
“후훗.”
그때 하늘에서 거대한 챠둠이 나타났고 홀로그램으로 나오며 라이안에게 말했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크으. 넌 또 어디 갔다가 왔냐? 나 죽고 살아나는 동안 말이야.”
“그게 갑자기 어떤 노인이 허공에서 나타나 저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정말 어떻게 해볼 수도 없었습니다.”
챠둠을 막았던 것도 바로 라피네 신의 짓이었다.
라이안이 라피네 신을 보며 말했다.
“내 할아버지들과 루시를 되살릴 수 있겠나?”
“네, 하지만 굳이 제가 할 필요가 있을까요?”
라피네 신의 말에 라이안이 살며시 웃었다.
“그렇군.”
아직은 라이안의 기억이 더 강하게 머물러 있는 상태라 자신의 능력을 자세히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라이안이 허공에 손을 내밀자 어느 한 순간에 갈천혁과 혁마소가 생겨났고 곧 하늘에서 떨어지며 땅에 착지했다.
“아니, 우리가 어떻게…….”
“죽은 것이 아니었던가.”
아직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모르는 그들이었다.
라이안은 마지막으로 루시 공주까지 되살려 내었고 루시 공주는 그동안 벌어졌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라피네 신은 율법을 어긴 드래곤 로드 티모스탄에게 평생 드래곤 로드로 살아가도록 죽지도 못하게 만들었고 티모스탄은 눈물을 흘리며 그것을 받아들였다.
중간계의 얼마 남지 않은 인간들은 서로 모여 마을을 형성해 힙을 합쳐 살아가게 되었고, 라이안은 인간의 육체로 돌아가 루시와 에나를 아내로 얻어 한 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그 나라의 이름을 히매인이라 지었다.
타미르안은 그 나라의 수호룡이 되었으며 나머지는 그 나라의 고위직 귀족이 되었다.
헤인드는 자신이 공작위에 올랐다고 기뻐하며 몇날 며칠을 술을 마시며 돌아다녔고 라드이라는 신전을 차렸다. 그리고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신관의 부인이 바로 마족이라는 사실이었다.
마지막으로 갈천혁과 혁마소는 마계로 갔다. 아직도 분이 덜 풀렸는지 마계를 자신들이 정복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라이안은 그런 두 사람에게 혼돈의 힘을 부여하고 마계로 보내주었다.
그렇게 모든 혼란이 정리가 되었고 라이안은 드디어 조용한 나날을 보낼 수 있어서 행복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