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돈의 라이안-15화 (14/57)

제15장 에드코르 제국의 패배

그렇게 양측은 쥐죽은 듯 고요한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 해가 떠오르자 에드코르 제국의 진영으로 군량미와 마도시대의 거인병기 타이탄이 운송되어 왔다. 하이븐 후작과 귀족들은 이 소식을 듣자 크게 기뻐하며 달려 나왔다.

“오, 드디어 왔구나.”

“드디어.”

“이제야 저 얄팍한 히매인을 누를 수 있겠군!”

그러자 운송에 대한 책임을 맡은 자가 하이븐 후작의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운송의 소임을 맡은 리산드 하 우노크 남작이 하이븐 후작각하를 뵙습니다.”

“자네가 운송을 맡았었군. 반갑네. 반가워. 피곤한 여정이었을 것은 알지만 지금 당장 쉬게 해줄 수 없다네. 미안하지만 지금 현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어쩔 수 없다네.”

“아닙니다. 운송만 하는 것이라 오히려 지루했지요.”

“타이탄은 어디 있는가?”

“이쪽으로 오시지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하이븐 후작이 같이 따라왔던 몇 명의 기사 중 한 명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는 지금 당장 파이어기사단에게 가서 새로 편성된 1조를 데리고 오너라.”

“넵!”

기사가 서둘러 달려가는 것을 확인한 하이븐 후작이 리산드 남작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하이븐 후작의 눈에 멀리 커다란 물체가 천을 걸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눈으로 그 수를 세어보니 그 수가 열이었다.

“저것인가 보군.”

라산드 남작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후작각하의 짐작이 맞습니다. 저것이 바로 제국에서 발굴한 타이탄이지요.”

“어서 보여주게나. 과연 어떤 물건일지 궁금하군.”

어떤 형태의 물건인지는 말로 들어 알고 있었지만 하이븐 후작도 실제로 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알겠습니다.”

리산드 남작이 손을 들어 하나의 줄을 당기자 정체불명의 물체에서 천들이 흘러내렸다.

“오오, 바로 이것이구나.”

주위에 있던 귀족들도 탄성을 내지르기 바빴다.

“이것이 타이탄이구나…….”

“엄청난 크기다!”

“대단하군. 대단해.”

하이븐 후작을 포함한 귀족들이 감상에 젖어 있을 때 멀리서 10여 명의 기사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바로 갈천혁과 혁마소의 공격으로 죽은 파이어기사단의 나머지 기사들이었다.

“총사령관님, 부르셨는지요?”

“그렇다.”

하이븐 후작은 타이탄을 보며 기사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벌써 많은 동료를 잃었다. 너희도 자신들의 동료를 잃게 만든 원인 제공자가 누군지 알고 있을 것이다.”

“크윽! 스피어 마스터…….”

“그렇다! 바로 그 원인 제공자가 지금 노크리 성에 있는 스피어 마스터이다! 나 또한 그로 인해 평생의 지기를 잃었다. 그래서 너희에게 이것을 주어 복수를 할 기회를 줄 것이다!”

그때서야 파이어기사단원들도 타이탄을 보게 되었고, 감동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파이어기사단원들은 하이븐 후작의 말에 모두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제국에 충성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제국에 충성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그런 파이어기사단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하이븐 후작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모두 각자 리산드 남작의 설명을 듣고 타이탄과 계약을 하여라!”

“충!”

“충!”

하이븐 후작의 말에 리산드 남작이 앞으로 나서 파이어기사단원들에게 설명했다.

“이 타이탄과 계약하는 것은 무척이나 간단하오! 모두 각자 타이탄의 앞에 서서 타이탄의 가슴 부분에 마나를 흘려보내도록 하시오. 그리하면 타이탄과의 대화가 가능할 것이며,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오!”

리산드 남작의 설명을 들은 파이어기사단원들이 한 명씩 타이탄의 가슴에 손을 얹고 마나를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어서 그들의 머리로 울려 퍼지는 말들이 있었다.

“맹약자여……그대는 나와 계약을 맺겠는가…….”

약간 당황스러워 하는 기사들도 있었으나 곧 대답했다.

“그렇다, 계약을 맺겠다.”

“맹약에 의하여 그대와의 계약이 성사되었음을 알린다. 나는 너의 목숨이 끊어지는 그날까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허나 너의 목숨이 끊어진다면 나는 또 다른 누군가와 계약을 할 수 있음을 알라…….”

“알겠다.”

파이어기사단이 동시에 그러한 계약을 맺자 갑자기 10여 개의 공간이 열리더니 그곳으로 사라져 가는 타이탄들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귀족들과 하이븐 후작이 놀라움에 리산드 남작에게 물었다.

“아니! 저것이 어떻게 된 것인가?”

“타이탄이 사라지다니!”

“어떻게 된 건가?”

귀족들의 반응을 미리 예상했는지 리산드 남작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놀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들은 기사들이 필요로 할 때만 계약에 의해 그 모습을 나타낼 것입니다.”

“오오, 그러한 기능이 있었군.”

“그것 참 편리한 것이군.”

리산드 남작이 파이어기사단을 바라보며 또 하나 당부의 말을 했다.

“파이어기사단은 모두 들으시오! 타이탄에 탑승하면 그 안에 두 개의 구슬이 있을 것이오. 그곳에 두 손을 얹고 마나를 흘려보내면 타이탄을 조종할 수 있을 것이오. 탑승은 타이탄이 나왔을 때 가슴 부분이 앞으로 튀어나오니 그곳으로 탑승할 수 있을 것이오.”

리산드 남작의 말을 들은 파이어기사단원들이 모두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븐 후작이 엘던 백작에게 명했다.

“모든 준비가 끝이 났으니 노크리 성의 공격을 알리시오.”

“드디어 시작이군요. 알겠습니다!”

엘던 백작과 귀족들이 모두 물러간 후 리산드 남작이 돌아가려던 하이븐 후작을 불러 세웠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후작각하.”

“으음? 무슨 또 할 말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이쪽으로 저를 따라와 주십시오.”

“무슨 일이기에… 그래, 앞장서게나.”

또다시 리산드 남작의 뒤를 따라 길을 걷던 하이븐 후작은 운송되어진 물건들 중 가장 뒤쪽에 커다란 천으로 둘러싸인 것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리산드 남작이 그곳에서 뒤돌아 하이븐 후작을 향해 말했다.

“이것은 요르민 공작각하께서 하이븐 후작각하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선물?”

그와 동시에 하이븐 후작은 나타난 물체에 놀라워했다.

“아, 아니! 이것도 타이탄이 아닌가? 그것도 조금 전의 타이탄들보다도 그 크기가 훨씬 크군!”

“그렇습니다. 가장 최근에 발굴된 타이탄으로서 그 성능이 다른 타이탄들보다 좋은 것이라고 모두 판단하고 있습니다.”

“으음…….”

하이븐 후작의 앞에는 녹색의 빛깔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하이븐 후작은 그랜드 마스터가 쳐들어온다고 해도 자신이 있음을 느꼈다.

* * *

다음날 아침, 에드코르 제국의 진영을 살피려고 나온 와이파른 백작과 팔튼, 그리고 라이안이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오는군요.”

라이안의 말에 와이파른 백작의 눈썹이 가운데로 모였다.

“저들이 반드시 함정에 걸려야 할 텐데…….”

“걱정하지 마세요. 분명 잘될 거예요.”

팔튼이 서서히 다가오는 에드코르 제국의 병사들을 보며 서둘러 명을 내렸다.

“적군이 몰려온다! 모두 전투준비를 하여라!”

“전투준비!”

“전투준비!”

팔튼의 명을 이어 몇 몇 병사들이 그러한 말을 곳곳에 알렸고 병사들이 성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라이안은 자신이 만든 함정에 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것이 더 궁금했다.

노크리 성 가까이에서 멈춘 에드코르 제국의 병사들은 총사령관인 하이븐 후작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부터 노크리 성을 함락한다! 영광스런 제국군의 병사들이여! 목숨을 걸고 나라에 충성하여라! 돌격!”

“와!”

“와!”

하이븐 후작은 맨 앞줄에 서 있던 파이어기사단원들에게 명을 내렸다.

“파이어기사단은 타이탄에 탑승하라!”

“충!”

“충!”

10개의 일그러짐이 일어나더니 그곳에서 사람의 열 배 정도 될 법한 덩치 큰 타이탄들이 동시에 나타났다.

“와! 제국의 타이탄이다!”

“타이탄이다!”

하이븐 후작도 자신과 계약했던 타이탄에 의념을 보내어 꺼냈고, 곧바로 타이탄에 탑승했다.

하이븐 후작은 타이탄에 탑승해 좌석에 앉았다. 그러자 곧 리산드 남작이 말했던 두 개의 구슬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이군.”

두 손을 구슬에 올려놓고 마나를 불어넣자 하이븐 후작의 앞으로 노크리 성의 영상이 나타났다.

“흠, 대단하군. 마법영상으로 앞을 볼 수 있도록 해놓았군. 이것이라면 그랜드 마스터들이 나타난다 해도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겠어.”

하이븐 후작은 구슬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타이탄도 따라서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타이탄에서 하이븐 후작의 목소리가 큰 소리로 들렸고, 에드코르 제국의 모든 병사들과 기사들이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모두 돌격하라!”

그의 목소리를 들은 모든 병사들과 기사들이 노크리 성을 향하여 진격했다.

한편 노크리 성에서 그것을 바라보던 모든 귀족들과 와이파른 백작은 갑자기 나타난 타이탄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이럴 수가!”

“타이탄!”

“10여 기나 된단 말인가!”

와이파른 백작은 떨리는 손으로 성벽의 난간을 움켜쥐었다. 라이안이 의아한 듯 그에게 물었다.

“저 덩치 큰 물체가 타이탄인가요?”

라이안의 물음에 와이파른 백작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 저것이 바로 마도시대의 거인병기 타이탄이지… 이를 어찌 할꼬…….”

“흠, 함정을 믿어볼 수밖에요.”

“으음…….”

그때 간테츠 백작이 라이안에게 다가와 큰소리로 소리쳤다.

“만약 저들을 막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네놈이 져야 할 것이다! 그토록 자신했던 함정이 얼마나 잘 먹히나 두고 보자!”

간테츠 백작의 목소리에 라이안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내가 성공하면 당신의 목을 주시오.”

“이, 이런 미친!”

“왜? 겁나시오? 자신의 희생으로 나라가 살 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 겁이 난단 말이오?”

“이잇……!”

라이안의 말에 간테츠 백작은 본전도 못찾고 붉어진 얼굴로 다른 귀족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괘씸한 놈 같으니… 두고 보자 내 반드시…….”

하지만 총사령관인 와이파른 백작도 이러한 상황에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인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라이안이 실패할 경우 그것을 수도에 알려 라이안과 와이파른 백작을 징계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는 간테츠 백작이었다.

‘와이파른 백작은 작위에서 물러나야 하고 저 건방진 애송이는 목숨으로 그 책임을 물으리라…….’

그러한 간테츠 백작의 속마음도 모른 채 라이안은 서둘러 땅의 상급정령 노에스를 불렀다.

“노에스 소환!”

“계약자여, 나를 불렀는가.”

“그래, 노에스 내가 신호를 보내면 땅속에 있는 지지대를 모두 무너뜨려줄 수 있겠어?”

“저 넓은 땅을 꺼트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 것들을 치우는 것은 간단하다.”

“좋았어!”

그런 후 혹시나 에드코르 제국에서 마법사단이 마법을 쏘아올지 몰라 또 다시 물의 상급정령 엔다이론을 소환하는 라이안이었다.

“엔다이론 소환!”

“불렀는가, 계약자여.”

“응, 반가워 엔다이론. 엔다이론, 저들이 마법공격을 해오면 너는 물의 장막을 펼쳐줘.”

“알겠다. 계약자여.”

라이안은 두 정령을 소환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마나가 소모되고 있음을 느꼈다.

‘이거 오래 끌면 큰일 나겠는데? 그래, 그렇게 정신없이 공격해 와라. 죽을지도 모르는 불속으로…….’

그리고 잠시 후, 역시나 라이안의 예상대로 마법사단이 플라이마법으로 날아와 성벽에 마법을 퍼부었다.

“콜드 미사일!”

“파이어 볼!”

“매직 애로우!”

라이안이 엔다이론을 소환하자마자 날아오는 마법들을 보며 급히 명령했다.

“엔다이론! 물의 장막을!”

부슈우우우우!

엔다이론의 입에서 수많은 물줄기가 쏟아지더니 그것이 곧 물의 막을 형성해 나갔다.

펑!

퍼벙!

“크악!”

“으악!”

물의 장막이 아직 퍼지지 않은 곳에 몇 개의 마법이 먼저 부딪히며 성벽을 허물고 병사들을 태워갔다.

“이런 제길! 이제 조금만 다가와 봐라!”

에드코르 제국은 타이탄을 앞세워 성문을 부시고 들어오려는 듯 가장 앞에 타이탄이 병사들보다 먼저 돌격했다.

라이안도 유독 다른 타이탄에 비해 크고 푸른색의 빛을 띠고 있는 타이탄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앞에서 지위하고 있는 타이탄에는 그자가 탔겠군.’

라이안은 역시나 하고 예상하고 있었다.

‘저자가 함정의 시작이 되는 지점까지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노크리 성의 모든 병사들과 기사들 그리고 귀족들은 엄청난 기세로 몰고 들어오는 에드코르 제국을 바라보며 손에 땀을 쥐었다.

와이파른 백작은 이제 상당히 가까워진 그들에 조급해 하며 라이안에게 물었다.

“지금 시행해야 하지 않겠느냐?”

“아직입니다. 조금 더 와야 합니다.”

“흐음…….”

와이파른 백작은 손에 땀을 쥐며 긴장했고 라이안은 정확한 함정의 발동 시간을 찾고자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조금만…….”

에드코르 제국의 타이탄들이 지척에 다다른 것을 보던 라이안이 소리쳤다.

“지금이다! 시작해! 노에스!”

라이안이 사자후를 터뜨렸고, 그 소리는 에드코르 제국의 병사들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컸다. 하이븐 후작도 라이안의 목소리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수가! 상급정령사가 저자였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보다도 라이안의 말이 그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헉! 노에스! 땅의 상급정령?!”

하이븐 후작은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늦은 감이 있었으니, 그 순간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지며 땅이 꺼져버렸다.

쿠과과과과광!

쿠구구과과광!

천재지변! 대륙 전체가 무너질 듯한 소리가 퍼지며 에드코르 제국의 병사 절반이 땅속으로 꺼져버렸다. 지룡이 현신하는 듯 땅이 열리며 병사들을 집어삼켰다.

에드코르 제국의 병사들은 자신들이 디딜 수 있는 땅이 사라졌음을 알고는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으! 으악!”

“이게 뭐야! 으악!”

“살려줘!”

땅이 꺼져버린 후에서 뒤에서 달려오던 병사들로 인해 수백 명이 또다시 그곳에 몸을 빠트렸다.

“크아악!”

“으악! 밀지 마! 으악!”

“사람 살려!”

“안 돼! 떨어지고 싶지 않아! 으악!”

엄청난 크기의 함정이었다. 하이븐 후작은 떨어지는 충격에서 간신히 정신을 찾았다.

“이, 이런 함정이라니… 이것이 그들이 만든 함정이었단 말인가!”

상당한 깊이의 함정을 본 하이븐 후작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타이탄을 비롯해 병사의 반수 이상이 함정에 빠진 것을 보고는 절망하고 있을 때, 그나마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을 보았다.

함정에 빠져 있기는 하나 함정에 빠진 인원 중 반수 이상은 살아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비록 상당수가 중상일지라도 아직 함정에 빠지지 않은 병사들과 합심하면 충분히 노크리 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하이븐 후작이었다.

함정에 빠진 이 순간에도 그러한 냉철한 생각을 할 수 있었으니 대단한 심기를 가진 자였다.

“부상자는 놔두고 움직일 수 있는 자는 모두 위로 올라가라! 빨리 피하라!”

매몰된 타이탄들도 하나둘 흙들을 밀치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10기 모두가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타이탄에는 타격을 주지 못한 듯했다.

“타이탄부대 또한 서둘러 위로 올라가라!”

“넵!”

“넵!”

팔이 부러진 병사들은 넘어지면서도 함정에서 올라가려고 뛰고 또 뛰었다. 하지만 다리가 부러지거나 척추를 다친 사람들은 움직이지 못하는 몸으로 소리만 질렀다.

“나도 데려가줘!”

“이봐! 하먼! 자넨 내 친구가 아닌가!”

“미, 미안하네! 나도 팔이 부러져 자네를 데려갈 수 없어!”

“안 돼! 이런 치사한 놈아!”

그렇게 누워있던 병사는 곧 서둘러 함정을 벗어나려던 타이탄 중 하나의 발아래서 생을 마감했다.

“안 돼! 크악!”

퍼벅!

타이탄의 발에 밝힌 병사가 짓눌려 죽었다.

“빨리 벗어나라! 어서!”

하이븐 후작의 갈라지는 목소리에 매몰된 에드코르 제국의 병사들이 함정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였다. 어느 한 병사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고 그 병사는 자신의 손에 묻어나오는 끈적거리는 액체를 만질 수 있었다.

“이것은… 기름?”

그것이 그 병사의 마지막 말이었다.

노크리 성에서는 함정에 빠진 에드코르 제국의 군사들을 보며 환호에 빠져 있었다.

“와!”

“와! 성공이다!”

“성공이다! 적들이 함정에 빠졌다!”

모든 병사들이 두 손을 들며 환호하고 있을 때 라이안은 하나의 선택을 해야 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팔튼이 서둘러 라이안에게 달려오며 말했다.

“라이안! 어서 불을 붙여야 하네! 저들이 빠져나가고 있어!”

“제길, 부디 다음 생에는 행복한 세상에서 태어나기를… 불의 상급정령! 샐라임 소환!”

존재감을 느끼기도 전에 엄청난 열기를 머금은 존재가 공중에 나타났다.

다른 사람들은 그 열기에 뜨거움을 느끼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라이안은 오히려 훈훈함을 느꼈다.

“불렀는가… 계약자여…….”

“샐라임! 저곳에 기름이 있어! 저곳에 평생 꺼지지 않을 정도의 불을 붙여줘!”

“알겠다. 계약자여, 불의 영들이여! 끝없이 타올라라!”

화라라라락!

부솨아아아!

“크악!”

“으악!”

“살려줘!”

“뜨거워! 으악!”

아비규환! 아마도 지옥의 불이 이러할 것이다.

죄를 짓고 살면 죽어서 지옥의 불구덩이에 빠진다고 했던가? 그러한 형상이 실제로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었으니, 노크리 성에서 시작된 불길은 에드코르 제국이 있는 곳으로 끝없이 퍼져 나갔다.

아직 다 오르지 못한 병사들이 뜨거워진 등 뒤의 열기에 뒤를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어느 한 병사의 한마디를 끝으로 함정에 빠진 모든 병사들이 화염의 파도에 휩쓸렸다.

* * *

노크리 성에 있던 병사들도 타오르는 엄청난 불의 열기로 인해 그곳을 바라보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와이파른 백작도 그곳에서 올라오는 열기를 손으로 가려가며 말했다.

“정말 대단하구나… 대단해…….”

와파른 백작 자신도 함정을 만드는 장소를 가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 만들어진 함정은 자신이 생각한 규모의 몇 배나 되었고, 거기에 이렇게 두 번째 함정을 발동시키니 그 위력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는 그 열기가 뜨거움에도 그곳에서 눈을 땔 수가 없었다.

기름과 합쳐진 불의 상급정령 샐라임의 위력은 대단했다. 기름으로 인해 샐라임은 자신의 능력 100배에 달하는 능력치를 보일 수 있었으니 그것을 태우는 샐라임도 흐뭇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라이안은 힘겨움에 땀을 흘렸다. 이미 땅의 정령과 물의 정령을 사용함에 있어서 상당한 마나의 소모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현재도 끝없이 태워야만 하는 함정에 상당한 마나가 소모되고 있었다.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흘러 함정에 빠진 에드코르 제국의 병사들이 다 죽었겠지만 라이안은 멈출 수 없었다. 적당히 탄 시체로 인한 전염병이 발생할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시체가 다 타지 않고 남아 있다면 그 이후 썩는 시체로 인해 이 근처에 전염병이 발병할 것이고, 그로 인해 또 다시 사람들이 죽어갈 것이다.

사람의 시체가 썩어서 나오는 시독은 사람에게 치명적이다.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그로 인해 아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라이안은 거의 바닥나가는 마나를 끝까지 불어넣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 때 라이안이 샐라임을 불렀다.

“크윽! 샐라임, 이제 그만 돌아가.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

“알겠다, 계약자여. 빠른 시일 내에 또 불러주길.”

그렇게 아쉬움을 남기며 샐라임이 사라지자 라이안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샐라임이 돌아가자 타고 있던 불씨는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라이안이 겨우 벽을 잡고 일어나고 있는 것을 와이파른 백작과 팔튼이 서둘러 부축해 주었다.

“수고했구나. 정말 잘해 주었다.”

“라이안, 자네가 우리 히매인 왕국을 살렸다네. 정말 고맙네. 정말 고마워.”

“헉헉, 하지만 저들에겐 아직도 30만의 병력이 있는데 이렇게 당하고 물러갈까요?”

“우리도 10만의 병력이 있으니 사기가 땅에 떨어진 저들에게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수성하는 우리가 더 이로우니 문제는 없을 것이라 생각이 드는구나. 또한 그토록 위험천만한 타이탄이 함정 속으로 사라졌으니 이는 하늘이 도운 결과인 듯하구나.”

“그래, 맞아 라이안. 저들은 사령관으로 보이는 자 또한 잃었으니 이젠 오합지졸이 따로 없을 거라고 보네.”

라이안이 힘겹게 웃으며 팔튼을 바라보았다.

“하하, 그런가……?”

말을 함과 동시에 에드코르 제국의 진영을 바라보던 라이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렇지 않은 것 같군. 제길, 그 열기 속에서도 멀쩡히 살아 움직이다니. 타이탄, 타이탄 하는 것이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었나보군.”

와이파른 백작과 팔튼이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라이안에게 물었다.

“무슨 말이냐 그게?”

“그 말은 지금 적들의 타이탄이 무사하단 말인가?”

아직 불길이 꺼지지 않아 그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으나 부족한 마나를 끌어올려 안력에 집중한 라이안에게는 너무도 선명히 보였다. 불에 검게 그슬린 11개의 커다란 물체가.

에드코르 제국의 병사들 중 함정에 빠졌던 병사들은 모두 저승길로 뛰어가듯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러한 시체들을 밟아가며 함정위로 올라온 물체들이 있었으니 바로 11기의 타이탄이었다.

가슴 쪽의 해치를 열고서 나온 하이븐 후작은 그 엄청난 참상을 보며 바들바들 떨리는 주먹을 멈출 수 없었다.

지금까지 절반이나 되는 병력을 잃었다. 보충한다면 또다시 처음과 같은 병력을 얻을 수 있겠으나 징계는 피할 수 없었다.

하이븐 후작은 알고 있었다. 그 징계는 자신의 목숨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이대로… 이대로 물러서야 한단 말인가… 크윽!”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하이븐 후작이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엘던 백작이 보이지 않았다.

용맹했던 그는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중간부분에서 병사들을 이끌었고, 그 결과 아직도 꺼지지 않은 불구덩이 속에서 구워지고 있었다. 그것을 본 하이븐 후작의 눈가가 분노로 바르르 떨려왔다.

“어차피 죽을 거… 이대로는 못 죽는다. 이대로 물러선다면 내 명예가 아닌, 친구의 복수도 아닌, 대 에드코르 제국의 명예를 땅에 떨어트리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분노에 떨고 있던 하이븐 후작의 곁으로 쓰레기 같은 겁쟁이 귀족들이 다가왔다.

“총사령관님, 어찌해야 할까요?”

“후퇴를 해야 하는 것인지요?”

“더 이상 공격은 불가능합니다.”

하이븐 후작은 그들의 말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이런 자들과 이 험난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니… 미쳤지. 미쳤어.’

하이븐 후작이 타이탄에서 내려와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대들은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단 말이오! 지금 용맹했던 엘던 백작이 저 뜨거운 불구덩이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이 그대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단 말이오!”

하이븐 후작의 말에 그곳에 있던 모든 귀족들이 땅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후퇴는 없소! 그대들은 나와 같이 가장 선두에 서서 군대를 이끌 것이오! 만약 뒤로 쳐지는 자가 있다면 이유 불문하고 단칼에 처단하겠소!”

“헉!”

“서, 선두?!”

한 귀족이 한 발 앞으로 나오며 하이븐 후작에게 따지려고 했다.

“총사령관님!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처사…….”

창!

푸하하학!

퉁구르르르.

갑자기 하이븐 후작에게서 하나의 빛줄기가 나오더니 말을 하던 귀족의 머리를 잘라버렸다. 그에 그곳에 있던 귀족들은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헉!”

“가…가닐 자작이!”

“이럴 수가!”

귀족들이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하이븐 후작이 오러로 인해 피조차 묻지 않은 칼을 귀족들에게 들이대며 말했다.

“분명! 이유 불문이라고 말했소.”

살기 넘치는 하이븐 후작의 말에 귀족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지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할 뿐이었다.

‘그 냉철하던 제국의 마스터가 미쳐버렸구나!’

생각은 이러했으나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하이븐 후작은 민첩한 몸놀림으로 검게 그을린 푸른색의 타이탄위로 올라가더니 크게 소리쳤다.

“기사들과 병사들은 동요하지 말라! 아직 대 에드코르 제국의 소드 마스터인 내가 있으며, 저 간악한 함정에서도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돌아온 불멸의 타이탄이 있는 한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우리는 저 불이 꺼짐과 동시에 치졸하게 숨어서 함정이나 파고 있는 저들에게! 동포의 복수를 할 것이다!”

하이븐 후작의 말에 병사들이 서서히 동요를 하며 소리쳤다.

“그래, 맞아! 아직 우리에게는 총사령관님과 타이탄이 있어!”

“그래! 타이탄만 있다면 저 치사한 히매인에 복수를 할 수 있다!”

“복수해야해!”

“복수!”

“총사령관님 만세!”

“총사령관님 만세!”

하이븐 후작은 서서히 자신의 뜻대로 병사들의 사기가 일어서자 또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누구냐!”

“대 에드코르 제국의 군사입니다!”

“대 에드코르 제국의 군사입니다!”

“너희는 약한 존재들인가!”

약함이라는 말이 에드코르 제국의 병사들에게 치욕스러운 말인 듯 병사들이 발악하며 함성을 질렀다.

“대 에드코르 제국의 군사는 최강입니다!”

“그렇다! 우리는 최강의 전사다! 다함께 힘을 모아 죽어간 동포들의 한을 달래자!”

“와!”

“와!”

“총사령관님! 만세!”

“대 에드코르 제국 만세!”

병사들도 하이븐 후작의 자신감에 힘을 얻었는데 급격히 사기가 올랐다.

하이븐 후작도 이정도로 오른 사기라면 노크리 성을 단숨에 쓸어버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노크리 성을 노려보았다.

* * *

한편 그러한 모습과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은 라이안은 하이븐 후작과 눈이라도 마주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라? 저놈 내가 보이나? 나도 겨우 보일 정도인데?”

노크리 성에 있는 사람들은 에드코르 제국의 진영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천리지청술을 사용한 라이안은 그들의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불이 꺼지면 쳐들어오겠군. 타이탄이라는 것이 상당히 위험한 물건 같아. 저것들이 들고 있는 검으로 성벽이나 성문을 친다면 분명 단숨에 방어선이 뚫려버릴 것인데. 이를 어찌 한다…….’

우선은 서둘러 내공을 보충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라이안이 팔튼에게 부탁했다.

“팔튼, 난 잠시 내려가서 마나를 보충하겠어. 금방 오겠지만 저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면 나에게 서둘러 알려줘.”

“알겠네, 그리하겠네.”

팔튼의 방으로 들어간 라이안은 혈기공을 운용했다.

계속된 내공소비와 충전으로 인해 라이안의 내공이 급격히 늘어가고 있었으니 이 또한 좋은 일이었다.

운기가 끝난 후 라이안은 노크리 성의 위기에 대하여 깊이 걱정하기 시작했다.

‘노크리 성의 양쪽으로는 산세가 험하여 많은 병사들이 쳐들어오기에는 문제가 있으니 그리로 오지는 않을 거야. 분명 어느 정도 적들이 그곳을 통과하여 교란작전을 벌이겠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교란일 뿐이지. 산으로 다수의 병력을 보낼 경우 이쪽에서 불을 놓으면 저들이 전부 몰살당할 테니까. 전면전이 아니면 저들로서도 방법이 없을 거야. 하지만 그들을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라이안은 지금의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지 고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이탄의 위력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방법이 생각나질 않았다.

‘좋아, 그렇다면 우리의 상황이 아닌 적들의 악조건을 생각해보자. 우선 저들은 이 추운 날씨에 바람을 막는 것조차 힘겨워하고 있어. 첩자의 보고로 봐서는 이미 군량미가 도착하여 식량의 부족은 없을 것이고… 수가 많이 줄었지만 아직 히매인 왕국의 세 배가 넘는 병력인데, 저들이 타이탄을 이용한 정공법으로 인해전술을 이용한다면 절대 필패다. 악조건 중 가장 큰 요인은 분명 추위인데… 추위라…….’

에드코르 제국의 가장 큰 적은 분명 추위였다. 하지만 현재 상황으로는 저들의 앞에서 타오르는 불길로 인해 오히려 상당히 몸이 녹아 있었으니 그것으로는 이 난관을 타개할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라이안이 손뼉을 치며 탄성을 질렀다.

“아! 그래, 바로 그거야! 하하하, 역시 난 천재라니까!”

라이안의 생각은 이것이었다.

라이안은 이 세계에 넘어오기 전 텔레비전에서 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영화 속 전술 중 하나인 진흙을 떠올린 것이다.

급히 성벽으로 올라가려하던 라이안의 눈에 헤인드 등 자신의 친구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 헤인드! 여기서 뭐해?”

“아! 라이안이군!”

“어머, 라이안 오빠!”

“이보게, 함정이 정말 잘 먹혔다네! 정말 대단했어. 그놈들이 쳐들어올 때는 심장이 두근거려서 정말 혼났었는데 말이야.”

“정말 대단했습니다.”

역시나 간단명료한 라드이라였다.

“아하하, 나도 그렇게 잘 먹힐 줄 몰랐어. 사실 들킬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

“조마조마하다니, 내 살면서 그토록 기막힌 방법은 처음 보았다네. 그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단 하루 사이에 그런 엄청난 함정을 팔 줄이야.”

친구들의 칭찬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음 짓는 라이안이었다.

“아! 그런데 너희는 여기서 뭐해?”

라이안의 말에 헤인드 일행은 서로 눈을 마주쳤고 헤인드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말이야. 우리가 딱히 할 일이 없는 거 같아서… 저들이 성안으로 쳐들어온다면 정신없이 싸워야겠지만 지금은 기사들도 너와의 관계로 인해 우리한테 일거리를 주지 않는단 말이지. 우리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일을 하거나 도우려고 하면 그들이 더 부담스러워하고 우리를 더 도와주려고 하니 우리가 오히려 부담스러워서 이러고 있을 수밖에…….”

헤인드의 말에 라이안은 자신 때문에 친구들이 왕따를 당한다고 생각했다.

‘나로 인해 특별한 취급을 받는 이들이 오히려 너무 불편해 하는구나. 흠… 아! 그렇다면 특별한 취급이 아닌 정말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면 되지? 그래, 이들을 강하게 해준다고 해놓고 지금까지 미루고 있었구나. 이번 위기만 넘기고 나면 이들과 같이 대륙의 영웅이 되어보는 것도 재밌겠는데? 헤헤.’

라이안이 음흉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좋아! 내가 이번 전쟁만 끝나면 너희에게 좋은 임무를 한 가지 내줄게.”

“좋은 임무?”

“이러고 있는 것보다야 낫다면 뭐.”

“하긴요. 이렇게 있으려고 하니까 몸이 근질거려요.”

“좋아, 우선 지금은 내가 할 일이 있으니까. 다음에 다시 이야기 하자.”

그런 말을 하면서 손을 흔들며 가는 라이안이었다. 하지만 곧 다시 생각난 것이 있어 뒤돌아보았다.

“아! 너희들 지금 당장 떠날 준비해.”

“으응?”

“떠날 준비라니?”

“그래요. 라이안 오빠, 아직 우리가 그렇게 밀리거나 그렇지도 않잖아요.”

그때 라이안이 굳어지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야, 이제 곧 이곳은 무너지게 되어 있어.”

라이안의 말에 친구들 모두가 놀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저들의 타이탄조차 모두 불바다에서 화장되어진 것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네. 저들의 군사가 아직도 많기는 하나 이제 승산은 우리에게 있다고 보이는데?”

헤인드의 말에 라이안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저들의 타이탄이 한기도 부서지지 않고 건재한 이상 이곳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라는 것이지.”

“아니! 저들의 타이탄이 전부 건재한 것인가?”

“하여간 내말 믿고 얼른 서둘러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 될 수 있으면 주위에 아는 사람들한테도 말들을 해놓고.”

“아, 알겠네. 서둘러 준비하겠네.”

그들도 라이안이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서둘러 준비를 위해 움직였다.

아직도 꺼지지 않은 불길을 보던 팔튼이 성벽 외곽으로 올라오는 것을 보고는 라이안에게 다가갔다.

“운기는 마친 것인가?”

“응, 그래. 이제 멀쩡해졌어.”

팔튼의 말에 대답한 라이안이 와이파른 백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아버님, 긴히 상의드릴 말이 있습니다.”

“으음? 그래, 말해 보아라.”

“아직 적들의 타이탄이 건재한 이상 더 이상 이곳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적들의 타이탄이 무사하다면 한 기의 타이탄조차 없는 우리가 버틸 여력은 없겠지.”

“그래서 말인데요. 지금 당장 모든 군사들을 다음 저지선인 케로틴 성으로 이동했으면 합니다.”

라이안의 말에 와이파른 백작이 놀라며 말했다.

“아니! 지금 이곳을 버리자는 말이냐?”

“너무 그렇게 놀라지만 마시고 제 말을 들어주세요.”

“어흠, 그래. 한번 말해 보거라.”

“지금 노크리 성의 병력으론 저들을 막을 수 없습니다. 아버님의 말씀대로 확실히 몇 기의 타이탄이라도 있다면 어느 정도 수성하는데 이로운 점이 있고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지요. 하지만 아직 이쪽에는 단 한기의 타이탄도 없지 않습니까? 이대로 있으면 칼을 든 저들에게 목을 가져다 대주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와이파른 백작의 생각도 솔직히 라이안의 생각과 같았다.

막기는 해야 하지만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그리고 왜 아직도 수도로부터 타이탄이 오지 않는지도 답답할 노릇이었으니 그로서도 상당히 애가 탈 지경이었다.

와이파른 백작은 라이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방도가 있음이겠지. 지금껏 이 아이에게 모든 것을 의존해 버틸 수 있었으니 끝까지 믿어보는 수밖에…….’

생각을 마친 와이파른 백작이 라이안을 보며 물었다.

“그래, 그럼 방도는 있느냐? 내 네가 말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방법도 마다하지 않겠다.”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설명을 해드릴게요. 먼저 노크리 성의 모든 병력을 적들 몰래 빼내고 나면 이곳을 진흙으로 꽉 채울 것입니다.”

“진흙?”

“그렇습니다. 물의 정령과 땅의 정령으로 물과 흙을 모은다면 빠른 시간 내에 성안 전체를 진흙천지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통 안을 진흙으로 채운 다음 한 곳에 구멍을 뚫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아니! 혹시?!”

“그렇습니다. 지금은 혹독한 추위가 몰려오고 있지요. 아니 지금도 저들에게는 바람막이 하나 없는 현재가 견디기 힘든 상황일 것입니다. 그리고 노크리 성의 앞에서 아까의 함정으로 인해 상당히 깊이 파여 있는 상황이지요. 저들은 노크리 성의 양쪽 산 쪽이 아닌 저곳으로 쳐들어 올 것인데, 만약 타이탄을 앞세워 성문을 부실 경우 타이탄을 따라서 진격한 적군을 또 한 번 진흙으로 저곳에 매몰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죽지 않은 에드코르 제국의 병사들도 진흙에 의한 추위로 인해 우리가 케로틴 성으로 도주한다 하여도 따라잡기 힘들 것입니다. 진흙이 그들의 온몸에 묻으면 그로 인해 움직임까지 둔해질 것이니 이야말로 최고의 방책이 아닐까 생각되어집니다.”

와이파른 백작은 라이안의 설명에 너무 놀라 말조차 하기 힘들었다. 정말 이보다 대단한 방책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성을 버리긴 하지만 공격과 방어, 그리고 도주에 대한 저지까지 할 수 있으니 이야말로 일석삼조의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정말 대단하구나. 마스터급의 경지에 그토록 대단한 전략을 짤 수 있다니. 오늘의 이 전투는 우리 히매인 왕국의 역사상, 아니 대륙의 역사상 가장 대단한 전략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자부할 만하구나! 하하하!”

그 옆에서 듣고 있던 팔튼조차 라이안의 생각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러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적들은 차마 더 이상의 공격을 강행하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한다면 히매인 왕국은 진흙으로 더럽혀진 노크리 성의 청소밖에 없을 것이 아닌가. 이것이 진정 손 안대고 코푸는 격이었으니.

‘라이안을 적으로 둔 에드코르 제국이 불쌍하구나…….’

오히려 이제는 히매인 왕국의 위기가 아닌 에드코르 제국의 위기를 걱정하게 되는 팔튼이었다. 그러한 생각으로 정신이 없는 팔튼에게 와이파른 백작이 말했다.

“팔튼, 어서 전 병력에게 케로틴 성으로의 후퇴를 명하거라.”

“알겠습니다. 총사령관님!”

와이파른 백작의 말을 들은 팔튼이 서둘러 100명 정도의 병사들을 소집하여 이 사실이 전 병력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와이파른 백작이 또 다른 걱정이 있는 듯 라이안을 보며 말했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있구나.”

“그것이 무엇인지요?”

“만약 저들이 쳐들어올 때 저들도 우리의 상황을 보고는 의심할 수도 있다고 보여 지는구나. 저들을 속이려면 성벽 위에 일정 병력을 남겨두고 가야하지 않겠느냐?”

와이파른 백작의 생각은 이랬다.

1,000명의 인원을 성벽 위에 가득 올려 노크리 성의 상황을 적들이 의심하지 않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1,000명의 목숨으로 10만의 병사를 살리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라이안의 생각은 달랐다. 라이안은 이곳에서 단 한 명의 희생도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전쟁에 100중 1의 희생이면 큰 성공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갑자기 조용해진 노크리 성을 어떻게 생각할지…….”

와이파른 백작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라이안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라이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짓는 게 아닌가.

“네게 또 다른 방도가 있구나? 허허. 답답하구나. 빨리 들어보자꾸나.”

이제는 라이안이 보물창고처럼 보이는 와이파른 백작이었다. 두드리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타개할 방법이 나왔으니 이는 천금의 보화를 주고도 바꾸지 않을 보물창고인 것이다.

“후훗, 그러면 또 한 번 놀라셔야 할 것입니다. 팔튼이 다른 곳으로 가서 다행이에요. 다른 친구들이 알면 또 괴물 보듯이 대할 것 같아서요.”

라이안은 그런 말과 함께 그 옆 기사에게 병사 50명만 불러달라고 말했고, 곧 50명의 병사들이 성벽 위에 나란히 서 있게 되었다.

와이파른 백작은 곧 어떤 방법을 사용할지 궁금해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만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라이안이 병사들을 향하여 손을 내밀었고 곧 외쳤다.

“미러 이미지!”

라이안의 말과 함께 50여 명의 병사 옆으로 또다시 50여 명의 똑같은 병사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마, 마법!”

와이파른 백작은 믿을 수 없었다.

‘마스터급에 정령사… 거기에 마법까지…….’

놀라고 있는 와이파른 백작을 보며 고개를 흔드는 라이안이었다.

“역시나 놀라셨군요. 이것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요?”

와이파른 백작은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충분하지, 충분해…….”

“적들의 선두에 섰던 기마병과 마법사단이 모두 사라진 이상 이것을 알아볼 자는 없을 것입니다. 완벽하지요.”

충분한 조건과 방법이 갖추어졌다. 이로서 모든 것이 완벽해진 것이다.

모든 병사들이 그렇게 후퇴를 위해 빠져나가고 있을 때, 간테츠 백작과 피에른 남작이 올라와서 와이파른 백작에게 따졌다.

“총사령관님!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후퇴라니요! 아직도 적들이 저렇게 건재하거늘! 지금 후퇴를 한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입니까!”

“부사령관은 내가 이 모든 상황을 책임질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아직 아무런 상황도 모르고 있는 간테츠 백작이 와이파른 백작의 말에 말뚝을 박았다.

“어흠! 분명 총사령관님께서 책임지신다 말했습니다! 딴말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소리치며 서둘러 내려가는 간테츠 백작을 바라보는 와이파른 백작이 한심함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그에 라이안이 한마디 했고 와이파른 백작이 호탕하게 웃었다.

“정말 짜증나는 스타일 아닌가요?”

“으음? 허허. 하하하, 네 말이 맞구나. 맞아. 하하하!”

* * *

함정의 불이 다 꺼질 무렵 노크리 성의 모든 병력이 빠져나가고 뒷문으로 와이파른 백작과 팔튼,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팔튼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정말 괜찮겠나?”

“어쩔 수 없잖아. 미러이미지의 지속시간을 늘이려면 시전자가 꼭 옆에 있어야 하니까. 그리고 나머지 함정도 내가 만들어야 하니 난 반드시 남아야 해.”

“하지만, 라이안 오빠.”

에나가 울듯이 머뭇거리고 있었고 헤인드와 디로안도 걱정스러운 듯 쳐다보았다.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모두들이었다.

“에휴, 정말 아직은 보여주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라이안이 등에서 창을 뽑더니 청룡창의 기수식을 취한 후 청룡일섬을 시전했다.

“청령일섬!”

쉬이이익!

퍼버벙!

지금까지의 라이안이 펼쳤던 창술이 아니었다. 하나의 강기가 창에서 뿜어져 나와 수십 개의 나무를 초토화시켰으니 그것을 보고 있던 모두가 똑같이 놀랐다.

“저것은!”

“오러탄!”

“이럴 수가! 벌써 그랜드 마스터라니!”

“그, 그랜드?”

계속된 마나 소모와 운기로 인한 마나 충전이 라이안의 상태를 어느 정도 호전시켰던 것이다. 그로 인해 사용할 수 있는 마나가 급격히 늘어갔으니 라이안의 몸이 빠르게 호전되고 있었다.

모두가 그렇게 놀라고 있을 때 라이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언젠가 이야기한 적이 있었잖아. 그때는 내가 몸이 좋지 않아서 약했던 것이라고. 뭐 아직도 다 나은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걱정거리가 덜었겠지?”

미칼투 대륙에 전해지는 전설이 하나 있었다.

-오러를 쏘아낼 수 있는 자가 곧 그랜드 마스터이다. 그 경지에 들어선 자는 한나절동안 오러를 펼칠 수 있으며, 천군만마를 상대할 수 있으리라.

미칼투 대륙에 떠도는 전설의 구절이었으니 그것을 목격한 이들이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지금껏 인간이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들어선 적은 없었다. 모두가 드래곤들의 유희에서 만들어졌던 전설이었다.

결국 라이안이 자신의 경공술까지 보며주며 자신은 그 어떤 상황에도 도망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줌으로서 그들을 보낼 수 있었다.

홀로 성문을 닫고 성안으로 들어온 라이안은 두 팔을 걷어붙였다.

“후훗,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라이안은 물의 정령 엔다이론과 땅의 정령 노에스를 동시에 소환시켰다.

“엔다이론 소환! 노에스 소환!”

라이안은 자신의 몸에서 상당한 마나가 빠져나감을 느끼며 눈앞에 나타난 두 정령을 바라보았다.

“계약자여… 불렀는가…….”

“계약자여, 불렀는가.”

두 정령을 바라보던 라이안이 두 정령에게 할 일을 시켰다.

“너희에게 일을 시키려고 그러는데 도와줄 수 있지?”

“어떤 일을 말하는 것인가?”

“이 성을 진흙으로 가득 채우려고 하거든. 너희가 힘을 합쳐서 진흙을 만들어 줘. 그리고 엔다이론은 먼저 성벽의 틈새나 성문의 틈새를 물로 막고 얼려준 다음 진흙을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어.”

“알겠다. 계약자여.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우리가 물과 흙을 공급한 후 그것을 휘젓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응, 맞았어. 엔다이론. 그리고 노에스는 이 성의 오른쪽 산에 땅을 파고 옮겨놓았던 흙이 있어. 그것을 운반해 오면 쉬울 거야.”

“그리 하겠다. 계약자여.”

라이안의 명령대로 물의 정령 엔다이론은 성 둘레를 돌며 물을 부었고 그곳의 온도를 낮추어 얼려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 땅의 정령 노에스가 산에 있던 흙을 모두 옮겨왔는데, 그 흙의 양이 성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다.

노에스가 성과 산을 연결하는 땅의 구멍을 메우고 나자 엔다이론이 그곳에 물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부슈우우우우.

솨아아아아아.

서서히 물과 흙이 섞이며 진흙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물의 정령인 엔다이론이 일부러 한쪽 방향으로 물을 뿜어냈기에 성 가운데를 중심으로 물이 소용돌이처럼 돌았고 자연스럽게 진흙이 생성될 수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라이안은 만족스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오기만 해봐라. 진흙 맛을 볼 것이니까. 큭큭.”

라이안이 희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무렵 에드코르 제국의 군사들은 불이 거의 다 꺼져버린 함정을 바라보며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이제 거의 다 꺼졌군. 반드시 네놈만은 죽이고 말리라. 스피어 마스터…….”

하이븐 후작은 이 모든 것이 라이안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고 믿었다. 라이안이 정령사라는 것까지 확인한 마당이기 때문에 모든 분노는 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드디어 불이 다 꺼졌다.

함정 속에는 재만 남았다. 병사와 기사들의 타다 남은 갑옷들이 진군에 방해가 되겠지만 타이탄이 먼저 그것들을 밟고 간다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모든 기사들과 병사들은 진군 준비를 하라!”

“진군 준비를 하라!”

“드디어 출진이다! 진군 준비를 하라!”

하이븐 후작의 명령을 전달하는 기사들의 말에 모든 병사들이 진군을 준비했다. 그들의 눈에는 복수심이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친우를 잃었다. 그중에는 같이 병사로 지원한 형제도 있었다. 그들을 잃은 슬픔을 말로 어찌 표현하겠는가.

하이븐 후작의 눈에는 성벽에 있는 병사들이 보였다. 그가 보기에 노크리 성의 병사들에게선 전혀 동요가 보이지 않았다.

“크흐흐, 얕보이고 있단 말인가. 대 에드코르 제국의 군대가 그토록 우습단 말인가? 그렇지, 지금까지 승승장구 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모두 죽이리라. 너희를 모두 죽이고 수많은 병력을 잃은 죗값으로 스스로 자결하리라!”

이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하이븐 후작이었다.

‘이미 내 평생의 지기인 에드먼드까지 잃었다. 이 이상 무엇을 더 잃겠는가. 에드먼드, 자네의 복수는 내가 반드시 해 주겠네. 지켜봐 주게나!’

미러이미지 마법으로 비춰진 병사들을 알아보지 못한 하이븐 후작은 거울에 비친 듯한 허상을 보고서 그러한 생각을 했었으니… 라이안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배를 잡고 굴렀을 것이다.

하이븐 후작이 자신의 타이탄에 타자 그것을 보고 있던 나머지 파이어기사단도 따라서 탑승했다. 그리고 이내 하이븐 후작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 에드코르 제국의 힘을 똑똑히 느끼게 해주어라! 공격!”

“공격!”

“공격이다!”

“와!”

“와!”

하이븐 후작으로 인해 사기가 오른 병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노크리 성으로 진격했다.

라이안은 성벽위에서 에드코르 제국의 군사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고는 다시 앞을 보았다. 뒤에서는 물의 정령 엔다이론이 열심히 물을 뿜어내며 진흙을 섞고 있었다.

“이런, 아직 다 채우지 못했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진격해 오는군. 그렇게 큰 피해를 주지는 못하겠어, 이거.”

진흙은 노크리 성의 중간 이상을 채우고 있었다.

라이안은 두 정령을 불러 돌려보내고 에드코르 제국의 군사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혈기공을 운기했다. 물의 정령인 엔다이론의 과다한 움직임으로 라이안 또한 심한 마나손실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주위에 퍼져있던 마나들이 급속히 라이안의 몸속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타이탄의 안에서 성을 바라보는 하이븐 후작의 눈에 성벽 위로 급격히 모이는 마나가 눈에 띄었다.

하이븐 후작은 타이탄에 걸려있는 방어마법을 믿었다. 실제로 그 대단한 불길에서도 멀쩡히 돌아오지 않았는가. 그러한 생각을 하며 나머지 타이탄에 탑승하고 있는 파이어기사단에게 명령했다.

“성문은 내가 맡겠다! 너희는 성문의 주위를 부셔라!”

“넵!”

“넵!”

가장 처음으로 노크리 성이 떨리는 충격이 전해졌다.

하이븐 후작의 타이탄이 검을 높이 들고는 그것을 노크리 성의 성문을 내려쳤기 때문이다.

콰광!

쾅!

쾅!

하이븐 후작의 타이탄을 시작으로 다른 타이탄들이 그 주위의 벽을 내려치고 있었다.

그제야 운기를 마친 라이안이 살며시 일어나며 심하게 떨리는 성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나의 역할도 여기까지가 끝이군. 그럼 나도 이제 친구들을 따라서 가 볼까나?”

라이안은 몸을 돌리려고 하다가 잠시 생각하고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성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에이! 그냥 상황이나 지켜보다가 가야겠다.”

하이븐 후작의 타이탄이 강하게 노크리 성의 성문을 계속해서 칼로 내려찍고는 있었으나 성문이 쉽게 부서지지가 않았다.

그런 상황에 하이븐 후작도 잠시 당황해 하였으나 서서히 성문이 파여 가는 것을 보고는 타이탄에 더 강한 마나를 불어넣으며 강하게 문을 부수어갔다.

물의 정령인 엔다이론으로 인해 물기를 머금은 성문이 얼기까지 했으니 그 견고함은 오히려 주위 성벽들보다 더했다.

쾅!

쾅!

한참 성문과 성벽을 부수고 있는 타이탄을 바라보던 라이안이 중얼거렸다.

“이제 슬슬 때가 되었는데…….”

그 순간!

벽을 때리던 타이탄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타이탄의 안에서 마법영상으로 보이는 장면을 보고는 모두가 의문점이 들었던 것이다. 특히 하이븐 후작은 그 정도가 심했다.

“어이해 부서진 곳으로 물이 흐른단 말인가?”

그런 생각도 잠시 갑자기 성문과 성벽이 쩌적쩌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어느 한 타이탄이 그것이 기회라는 생각에 칼을 휘둘러 성벽을 내리치려던 순간!

하이븐 후작은 불길함에 그곳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뭔가 이상하다! 멈춰!”

하지만 하이븐 후작의 말은 타이탄의 칼보다 늦었고, 그 칼은 성벽에 박혀들었다.

퍽!

쩌저저저저적!

“뭔가 잘못됐다!”

하이븐 후작이 불안감에 중얼거리던 순간!

퍼어엉!

“크윽!”

“으윽!”

“이게 뭐야!”

“으악!”

봇물 터지듯 노크리 성의 성문과 벽이 무너지며 엄청난 양의

진흙들이 타이탄과 병사들을 덮쳐갔다.

쏴아아아아아

“이런, 제길!”

하이븐 후작의 타이탄도 그러한 진흙들에 의해 뒤로 휩쓸려 나갔다. 뒤에 있던 병사들도 해일같이 몰려오는 진흙으로 인해 두려움에 떨며 서둘러 뒤로 후퇴했다.

“으악!”

“저게 뭐야?!”

“해일이다!”

“도망쳐!”

“으악!”

“살려줘!”

진흙은 해일과도 같이 병사들을 휩쓸었고, 병사들은 진흙에서 해엄치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물과는 다른 진흙에서 발버둥을 치던 병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서히 비명을 지르며 진흙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진흙은 늪처럼 병사들을 하나씩 집어삼켰다.

라이안의 생각보다 그리 많은 진흙을 만들어 내지 못하여 앞쪽에 있던 병사들만 진흙 속에 묻히고 나머지 뒤에 있던 병사들의 상당수는 가슴 높이까지만 차오른 진흙으로 인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역시 조금 부족했군. 그래도 적군 병사의 3분의 1 정도 손실을 주었으니 저들도 당장은 진격하기는 힘들겠지?”

라이안이 혼자 중얼거리고 있을 때 라이안의 반지에서 챠둠의 음성이 들려왔다.

“인공위성으로 알아본 결과 오늘 저녁부터 눈이 내립니다.”

갑작스런 챠둠의 말에 놀란 라이안이 한순간 휘청거렸다.

“그, 그래? 하하하… 진흙을 뒤집어 쓴 저들이 과연 얼마나 살아남을까?”

“저체온증으로 인해 상당수 죽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겠지. 물기를 뒤집어 쓴 상태로 눈이 내리는 겨울에 바람을 맞고 있으면 버티기 힘들 거야.”

대답하는 라이안의 눈에 반드시 친구들을 지키고 말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어려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챠둠의 말 그대로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3권에 계속>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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