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157화 (157/369)

157화

<4천명의 아리아>

“큭큭, 지루한 일상. 나는 지루함에 찌들어 비일상을 버렸다.”

집으로 돌아가며 서라는 중2병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오늘도 그녀는 교내에서 열띤 모습으로 수많은 남정네들의 마음을 훔쳤다.

하는 행동은 4차원 그지없으면서, 얼굴과 몸매는 어찌나 아름답고 예쁘던지… 아마 집에 돌아온 수많은 남정네들이 서라를 생각하면서 요상한 행위를 할지도 모른다. 다들 건강한 나이대였으니까.

“인벤토리에서 아이템 8강 열쇠를 빼고 손에 장착! 데미지 1짜리 무기를 이용합니다!”

주머니 속에서 집 열쇠를 꺼내는 서라였다. 오늘부터 약 3일간 집에는 부모님이 안 계셨다. 둘 다 맞벌이를 하였고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두 분 다 출장을 가게 된 것이다. 고로 3일 동안 집 내에서 서라는 혼자 빈둥빈둥 거릴 수 있는 것이다.

“재밌겠다능! 벽에다가 우유 뿌리고 놀아야겠다능!”

장난감가지고 혼자 노는 유아들이 약해 보일 정도로, 서라는 혼자 놀기에 유독 강한 타입이었다. 그러다 보니 교내에서 왕따를 당한다 가정해도 그건 왕따가 아닐 터고, 무시를 당한다 해도 그건 무시가 아닐 터다. 그녀는 매사에 혼자 있든 둘이 있든 중요치 않게 생각했으니까!

‘비제이하면서 룰루랄라 놀아야겠네여!’

민국에게서 예나가 자신의 정체를 알았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지만 사실 서라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꽤나 죽이 맞는 예나가 그 소식을 접하고 이해해주자 고마워 할 따름이었다. 서라는 신명나게 열쇠 구멍에다가 열쇠를 넣으려 했다. 캉.

“읭?”

서라는 일순간 의문을 품었다. 그도 그럴 게 아주 부드럽게 들어가야 할 서라의 열쇠가 구멍에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마, 마치 이건 동정을 때려는 남자의 현장을 보는 거 같음!”

동정을 때려는 불쌍한 열쇠에게 힘을 보태주기 위해 서라는 좀 더 신중하게 열쇠를 움직여 보았다. 그리고 구멍에 꽂는 순간… 팅.

“…….”

굵기가 너무 큰 가?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이유이리라. 서라는 자신의 수중에 쥐어져 있는 열쇠와 열쇠 구멍을 확인했다.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아주 큰 실수를 한 가지 범했음을 짐작하게 되었다.

“망했네여.”

하필이면 서랍장에 놓인 열쇠 중에 집 열쇠가 아닌 자기 방문 닫는 열쇠를 가져와버렸다. 열쇠가 워낙 거기서 거기다 보니 일순간 헷갈려 버린 것이다. 고로 서라는 3일간 집에서 신명나게 노는 것이 아닌, 3일간 집에 못 들어갈 처치가 되고 말았다.

***

민국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불쌍한 자식.”

“으어어어어엉 소인은 불쌍하고 가엾기 짝이 없습네다. 부디 짐에게 100만원만 건네주시면 그보다 기쁠 게 있을 거 같네여.”

민국의 집에 와서 사정을 말하는 서라였다.

“그냥 문 뚫어주는 아저씨 고용하면 되는 거 아니냐?”

“허억! 지금 행님은 내 소중한 1만원을 그런 시시한 곳에 낭비하라는 건가염? 지는 낭비벽이 아니구만유!”

“흐음, 하긴 나도 네 나이 때를 경험해봤으니 조금은 공감하지. 그땐 1만원이 100만원처럼 보일 터.”

“그건 아닌 데여? 오바 노노.”

어찌 됐든 서라는 민국의 집으로 오게 되었다. 예나나 은별의 집은 위치를 몰랐기 때문에 갈 수가 없었고, 민국이 가장 연락하기 쉬웠으니까 말이었다.

“우선 이 약이나 받아먹어라.”

“으앙… 메로나 맛은 없음? 이 쭈글쭈글한 맛으로 내 혀를 고통스럽게 만들라닝.”

“오, 야 그거 괜찮네. 여기에다가 딸기나 우유 섞어서 줘도 효과 있지 않겠냐?”

“부, 부들부들….”

그냥 민국이 주는 병의 내용물을 한 방울 톡 혀에 떨어뜨리는 서라였다. 그러자 마치 전기에 감염된 사람처럼 쭈뼛쭈뼛 댄스 같은 걸 추었다.

“야, 그럼 너 3일 동안 집에 못 들어가는 거냐?”

“읭 그렇져?”

“흠. 정 뭐하면 그냥 내 집에 있어라. 3일 동안 내가 밥 먹고 재워주고 키잡을 해주도록 하지.”

“이 맛은 패도의 맛!”

사실 끌리는 제안은 맞았다. 어차피 민국이 서라를 덮칠 일은 거의 없을 테고, 민국이랑은 비제이 시절부터 워낙 오랫동안 함께 해온 친분 관계였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었다.

“하지만 행님 여친이 가만있지 않을 거임여! 어쩌면 단도 들고 와서 ‘이히히, 감히 나말고 다른 여자랑 잠자리를 해?’하면서 휘익! 푹! 할지도 몰라여!”

“와, 시방 그러면 은별이는 얀데레 속성도 가진 거냐? 모든 걸 다 가진 여자네. 츤데레 얀데레 속성이라니.”

여기서 얀데레란? 집착이 심하다 못해 어느 경지에 이를 정도에 도달해 목숨까지 앗아갈 수 있는 수준을 의미했다. 장점 중 하나라면 남자 친구에게 굉장히 잘해준다는 것?

“어찌 됐든 그럼 한 번 기다려 봐라. 은별이랑 예나에게 다 연락해보고. 유이 씨도 괜찮을 지 확인해봐야지.”

“읭읭 가슴느님은 제외시켜주세여! 발차기가 너무 무섭무섭!”

실제로 유이가 민국에게 선사하던 환상의 발차기에 공포의 넋을 놓았던 서라였다. 서라 입장에서 유이는 뭐랄까… 눈치를 봐야 하는 절대 악이라고 할까! 민국은 ‘알았다’하고 고개를 끄덕인 뒤 은별과 예나에게 차례대로 연락해보기 시작했다. 일단 은별이었다.

“뭐, 꺼져. 저리 꺼져. 다신 얼굴도 보이지마. 꺼져.”

“아니 어제부터 왜 갑자기 이러는 거요 낭자? 내가 뭐 죽을 잘못이라도 했소?”

“어. 죽을 잘못했어. 죽어. 나가서 죽어. 가버려.”

“가, 가버리라니… 가버렷!”

서로 투닥투닥 말다툼을 나누길 어연 5분. 은별이가 무슨 일이냐며 본론을 캐물었고, 민국은 진지하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 사정은 아니고 서라에게 조금 문제가 생겼어. 열쇠 때문에 집에 못 들어가는 상황이라는데 은별이 네 집에서 재워줄 수 있나?”

“…내 집? 부모님 때문에 어려울 거 같은데….”

“전에 서라가 가서 한 번 잤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낮잠이었으니까 괜찮았던 거지. 밤에 재우는 건 거의 안 해주는 분이셔.”

“흐음, 의외로 보수적이시구먼.”

결론적으로 은별이의 집에서 서라가 자는 건 불가능한 것이다.

“알겠소 낭자. 그럼 이따가 봅세. 내 생각 많이 나도 꾸욱 참고?”

“네. 꺼지세요 이제.”

뚝하고 전화를 끊어버리는 은별이었다. 민국은 ‘흐음’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말이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온니쨩 뭐감뭐감여?”

“아니, 은별이가 어제부터 갑자기 태도가 쌀쌀맞아졌단 말이지. 원래 쌀쌀맞긴 했지만 그보다 더 쌀쌀맞아졌어. 혹시 생리라도 하나?”

“행님! 그거 정말 몰라서 그래여? 지는 답을 알겠는디유?”

“넌 뭐라고 생각하는데?”

“지가 지금 배가 고픈데 밥을 안 주니까 은별 언니찡이 화를 내는 거임! 나님한테 밥을 주면 은별 언니찡은 화를 식힌다능!”

“오냐, 밥으로 해드락이나 먹어라.”

“으아닛.”

어찌 됐든… 이번엔 예나에게도 연락을 걸어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예나 역시 집에 가족들이 많았고, 동생까지 있어서 선뜻 잠을 재울 수가 없는 처지였다.

‘이렇게 되면 유이 씨밖에 없는데 말이야.’

유이는 집에서 혼자서 살고 있었다. 늘 혼자로서의 삶을 영위해온 그녀 입장에서 서라 같이 발랄한 애가 껴들면 좋아하지 않을까? 워낙에 분위기를 띄우는데 메이커 역할을 하는 그녀였으니까 말이다.

“너 진짜 슴가왕 집은 싫냐?”

“나, 나님은 발 패티쉬가 아니라서리…!”

따지고 보면 유이는 정말이지 주변 사람들과 친해지기 어려운 타입이었다. 그나마 친해진 사람 중에 민국이 있는 거 아닐까? 민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중에 너 까불까불거릴 때 슴가왕을 출격시키면 되겠구먼.”

“으아닛, 온니쨩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었나여? 지나가는 길에 개미가 있는 것도 모르고 밟고 지나가는 사람이었나여!”

옷자락을 붙잡고 애절하게 외치는 서라였다. 어차피 다 장난이었지만 말이다. 민국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 다음 부엌으로 가서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서라는 그동안 안방에서 놀고 있기로 했다.

“야, 컴퓨터 만지는 건 좋은데 D드라이브의 찍빠구리랑 수능 열강 토론은 들어가지 마라.”

“우왕, 폴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강렬함이 물씬 드네여.”

“그렇지? 분위기에 이끌려 그 강렬함을 우리끼리 맞보고 싶지 않으면 자제하는 게 좋을 거다.”

아무리 친분이 있는 비제이 사이라 할 지 언 정 민국과 서라는 결국엔 남녀였다. 단 둘이 있는 집안에서 음흉한 행위가 벌어져도 결코 이상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 때문에 민국은 경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내면 속에 불타오르는 늑대의 고추를 맵게 하지 말라는….

“형, 근데 나 여기서 방송해도 됨?”

“방송? 아 너 해야 되냐?”

“이응이응! 안하면 시청자들에게 몰매 맞음! 해야 된다능!”

“야 그냥 정 뭐하면 여자라고 말해. 여자라고 하면 대우가 확연히 틀려질 텐데 왜 항상 욕을 먹고 있냐?”

“형님. 밥을 먹을 때 젓가락보다 숟가락이 편한 사람이 있어여.”

“뭔 소리여?”

“그러게여?”

어쨌든 이따가 민국의 집에서 방송을 하기로 예약한 서라였다. 민국은 대충 요리를 한 뒤 상을 들고 안방으로 가져왔다.

“옛다 먹어라.”

“우와앙. 행님은 좋은 주부가 되실 수 있을 거 같아여! 자 내가 보답으로 선물을 드릴게염!”

그러면서 수저로 밥을 움푹 파서 민국의 입가 근처에 건네주는 서라였다.

“아앙♡”

“와, 슈밤 덮치고 싶다.”

“하앍!”

맛있게 식사를 하는 둘이었다.

“그나저나 온니쨩 나님 사실 고민이 한 가지 있어여!”

“뭔데?”

“남자는 혼또니 좋아하면 고백을 하나염?”

민국이 식사를 하다 말고 서라를 쳐다보며 반문했다.

“그건 왜 묻냐?”

“아니아니 종말 지구종말 궁금해서여!”

“흐음.”

밥을 먹다 말고 진지하게 대화해주는 민국이었다.

“두 가지 분류가 있지. 하나는 이 여자애가 자기 자신한테 호감이 있다고 보여지면 사귀어볼까 해서 고백하는 거. 둘째는 맘에 들어서 먼저 고백하는거.”

“행님은 어디였심?”

“난 전자인 줄 알았는데 후자더라?”

처음에 고백할 때는 그저 은별이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으니, 한 번 만나볼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고백을 한 뒤에서야 직감한 것이다. 민국 역시도 은별이에게 이성적 호감을 꽤나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호옹이.”

서라가 눈을 크게 뜨면서 감탄한 듯 쳐다보았다. 그러다 말을 하는 것이었다.

“행님.”

“왜 그러냐.”

“지 사실 고백 받았구만유.”

쨍그랑! 수저를 상에 떨어뜨리듯 내려놓는 민국이었다. 서라가 ‘읭?’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고, 민국이 진심으로 놀란 얼굴로 서라의 어깨를 양손으로 붙잡으며 흔들었다.

“누구야? 어떤 놈이야? 어떤 놈이 아청법에 위반되는 로리 아이를 건드려!”

“의? 의히이익!”

서라가 진정하라는 듯 소리를 토해냈다.

“같은 반 남정네임! 안경을 쓰고 pmp를 두드리는 전형적인 오타쿠느님!”

“뭐? 이 슈밤 오타쿠 같은 쉐리가….”

“근데 공부를 잘하고 반장하는 애임. 갑자기 나 좋다고 고백함.”

“너랑 친한 사이였냐?”

“노노! 나님은 원래 교내에서 혼자 다니는 데여? 근데 갑자기 나타나서 좋다고 고백함.”

민국은 진심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그 어리석고 빨갱이 같은 노무 자식이… 감히 4천명의 아리아를 건드려?”

“?? 3천명에서 1천명 늘었넹.”

“야, 그놈 좋은 놈 아니다. 애초에 pmp랑 친하게 지내는 사람치고 좋은 남자는 없어 인마!”

“온니쨩도 pmp 있잖아여?”

“그래! 그러니까 난 좋은 놈이 아니야!”

“히익. 왠지 병신 같은데 논리적이라서 할 말이 없음.”

어찌 됐든 서라에게 고백했다는 그놈의 면상이 보고 싶어지는 민국이었다. 이건 단순히 민국의 순수한 욕심이 일으킨 질투가 아니었다. 서라를 멀리서 바라보는 수많은 남정네들의 마음을 지켜주기 위함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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