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푸헤헤헤헤헤>
"그래서, 예나가 그걸 알게 됐다고?"
"그러하다 여친이여."
"하아… 뭐 예상은 좀 했었지만…."
"으아니, 그걸 어떻게 예상했대? 난 전혀 생각도 못하다가 기습적으로 질문을 받아서 머리 한 대 거세게 맞은 느낌이었는데."
"이전에 바캉스 건도 있었고… 너나 나나 조금 소홀하게 행동했던 것도 있었으니까."
은별은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언젠간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느껴왔던 것이다. 역시 그녀의 직감은 일반인과는 차이가 심한 것일까? 서라와 유이가 약을 받고 제각각 집으로 간 상황, 민국은 은별과 자기 집에 단 둘이 남아 있었다.
"그나저나 낭자."
"왜 그렇게 친근하게 불러? 또 이상한 생각하는 거지?"
"어허~ 무슨 이상한 생각이오? 우린 이미 이상한 행동은 모조리 했으니 이제 그건 이상한 행동이 아니라 정상적인 행동일 뿐! 우리 정상적인 행동을 합시다."
팔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민국의 손을 세차게 때는 은별이었다.
"됐습니다~ 소인은 이만 가봐야 하니까요~ 나중에 봐요~."
"으헝헝, 네 가슴 만져본 지도 벌써 십 년은 된 거 같은데!"
"…무슨 결혼한 사이도 아니고 그런 헛소리를 해? 그리고! 언제까지 운다고 해서 다 봐줄 줄 알아?"
더 이상 우는 수법은 통하지 않는다는 듯 은별이 말하자, 민국이 '훗, 아깝꾼.'하면서 얼굴에 손을 올렸다. 나름 폼나게 제스쳐를 취하는 그의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던 은별이었다.
"…그나저나 너 정말 월요일에 학교 가는 거 맞지?"
"당연하지. 아까부터 왜 그렇게 묻는다냐?"
민국이 '엇, 혹시.'하면서 말을 덧붙였다.
"혹시 대학교 내 학과에 들어와서는 '이 남자는 내 남자야! 만일 내 애인을 건드리는 놈이 있다면 가만두지 않겠어!'라고 반 전체 동기들에게 선전포고를 할 셈인가?"
"에휴… 됐다 됐어. 나 이만 갈래."
"으아니, 진짜 가십니까? 소인이랑 오늘 간만에 찐한 아이스 파티 한 번…!"
"네가 원하는 건 파이어 파티겠지! 아이스 파티는 얼어죽을… 집에 가서 찬물 마시는 게 아이스 파티겠다!"
그리고 '으헝헝.'하면서 개똥벌레 노래를 부르는 민국의 처절한 모습을 외면하고, 집으로 당돌히 향하는 은별이었다. 사실 은별도 이쯤되면 한 번은 다시금 민국과 사랑을 나누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접촉적인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은별이 만사 준비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던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은별이었다.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온 은별은 문을 덜컥 잠갔다. 그리고 문에 등을 기대면서 '휴우….'하고 한숨을 쉬었다. 방안에 어질러진 물건들을 살피는 은별의 안색은 참으로 캄캄하였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한담….'
그녀가 손수 준비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민국을 향한 이벤트였다. 때는 바야흐로 민국이 바캉스에서 은별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던 때였다.
강서라의 스폰서 협찬(?)을 받아 무대에 서게 된 민국은 축축 비가 내리는 날씨 안 좋은 그 날, 삑사리를 내면서 울부짖듯 휘성의 나잇앤데이를 열창했던 것이다. 비록 그 이벤트가 조촐하고 싸구려라고 해도 그지 없는 폼새였지만… 그래도 그 정성만은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는 은별이었다.
'나만 마냥 받기도 뭐하니까….'
은별은 커다란 도화지 종이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은별이 민국에게 해주려는 이벤트는 어느 로맨티스트 영화에서 나왔던 이벤트였다.
도화지에 글자를 적어서 소리 없이 그것을 넘기면서 민국에게 보여주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는 은별이가 호화로운 레스토랑에 민국이를 초청해서 같이 오붓하게 식사를 나누는 것이었다. 본래 마지막은 남자가 해야 멋지다고 하겠지만, 그래도 여자가 한 번쯤은 남친에게 그렇게 해주는 것도 괜찮은 선물이었다.
'월요일에 아무 스케줄도 없는 거 같고… 날씨만 좋기를 바라야지….'
그리고 은별은 창가를 바라보았다. 오늘 주말의 날씨는 매우 좋았다. 그러나 오늘부터 앞으로 이틀 후, 과연 어떤 날씨가 기다리고 있을 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제발 부디 좋기를!
****
쏴아아아아.
"……."
쏴아아아아…. 은별은 생각했다. 이벤트 뒤로 미룰까? 하지만 뒤로 미루기에는 은별이도 내일부턴 빡센 일정이 많았다.
그냥 민국이의 집에 가서 해줄까? 하지만 그건 왠지 귀찮아서 대충 대충 해주려는 거로 보이지 않겠는가? 은별도 고작 자신의 정성이 담긴 이벤트를 그런 귀차니즘 때문에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왜 하필 이런 날에 비가 오는 거야 증말!"
은별은 부리나케 화를 냈다. 하필이면 월요일인 오늘! 민국이가 대학교에 가는 날! 뜬금없이 뭉개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은별은 '하아.'하고 한숨을 내쉰 다음에 현재의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시간은 오전 10시. 이제 슬슬 민국이가 오후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학교로 갈 채비를 할 때였다.
은별은 혹시나 싶어서 민국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뚜루루루루루….
"여보시오."
"…뭐해?"
"나? 지금 학교 갈 준비하고 있지. 흠흠."
민국이는 자신 있게 짐싼 가방 소리까지 내주고 있었다. 은별은 또 저도 모르게 한숨이 쏟아지는 걸 느꼈다.
"왜 그러시나 낭자. 정말 학교에 와서 이 남자는 내 애인이다 선전포고라도 하게?"
"…학교나 가세요! 밤에 약 먹기 애매할 거 같아서 지금 가려고 했던 거거든?"
그 말에 민국이 '아~ 그런 거였어?'하면서 반문하였다. 대충 어떻게든 의심을 풀어낸 은별이 전화를 끊었다. 쏴아아아… 폭우처럼 쏟아지는 창가 너머의 비를 바라보면서 은별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쏴아아아아!
'에잇! 그런다고 포기할 거 같아?'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쏘냐! 이래봬도 강은별! 막장 비제이 랭킹 1위로 소문난 서민국마저 다스릴 줄 아는 밀당의 여인이었다. 비록 당겨지는 신세가 될 때도 있는 그녀였지만!
'딱히 좋아서 해주는 건 아니야! 나도 받았으니까 해주는 거다 뭐….'
츤데레스러움이 가득 묻은 대사를 속내로 읊조리면서 남고딩은 우산을 쓰고 전철로 향했다. 그녀가 매고 있는 끈 가방에는 커다란 도화지들이 여러 개 들어가 있었다. 이 도화지들이 젖지 않게 하기 위해 그녀와의 체구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큰 가방을 들었다.
'…근데 전철 타면 오히려 사람들 때문에 도화지가 부셔질 지도 모르겠어.'
여러 고심을 하던 끝에 결국엔 비용이 좀 깨져도 택시를 타자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택시에 탑승한 은별! 그녀는 민국이가 학교 수업을 마치고 잠시 밖으로 나오는 시간을 노리기로 결심했다. 손목의 시계를 보면서 대충 추리하는 은별이었다.
'서민국 수업이 열 한시에 있으니까 수업이 끝나면 나오는 시간은 오후 12시 30분 정도…. 그때쯤이면 괜찮으려나?'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 고심을 하게 되는 그녀였다. 도화지가 담긴 가방을 코끝까지 들어 보이는 그녀였다.
'으… 하지만 사람들이 보면 어떡하지? 안 그래도 그 녀석 다니는 학교에 학생들 많다고 하던데….'
서민국도 나름 인 서울 출신이었다. 공부를 잘하는 대학이니 만큼 많은 학생들이 다니고 있었고, 그런 그들 곁에서 이런 이벤트를 한다는 게 어찌 보면 매우 창피스런 짓일 수도 있었다.
'몰라… 일단 결심은 했으니까 하긴 할 거야!'
의지의 강은별! 그녀가 결정한 계획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관철하고 만다! 그것이 한예나와 강은별의 공통된 점이었다.
"아가씨, 도착했어유."
"아, 고맙습니다~."
이윽고 이만저만 돈이 깨진 상태로 대학가에 도착한 은별이었다. 민국이 있는 대학교 앞에 도착하자 은별은 곧장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저기가 서민국이 다니는 학교고….'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하는 그녀였다.
'저기는 김밥천국… 저기에 있을까?'
약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은별이 너무 빨리 온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애초에 무언가 계획을 실행할 때는 미리 미리 준비하는 게 버릇되어 있었다. 그 버릇 때문에 늘 기다리는 게 일상인지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말이었다.
'…….'
이윽고 은별이 김밥천국으로 들어가서 대충 아무거나 시키고 의자에 앉아 시간을 때우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창가에 보이는 빗줄기는 도무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기 말고 커피숍이나 그런 데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이 근처에는 그런 게 없네….'
도로 맞은편에는 커다란 커피숍이 있었지만, 만일 그쪽에서 기다린다면 민국이가 언제 대학교에서 나오는지 알 수 없으리라. 은별은 대놓고 학교에서 언제 나올 것이냐고 물어볼까 고민을 했지만, 그랬다간 눈치 빠른 민국이가 이벤트를 간파할까 염려되어 꿋꿋이 참아야만 했다.
"……."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면서 있기를 어연 한 시간. 은별은 슬슬 김밥천국에서 김밥 하나 시켜두고 앉아있기도 뭐하겠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할게요~."
"천 오백원입니다."
"수고하세요~."
예의 바르게 깎듯이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오는 강은별. 하지만 중요한 일은 이제부터다. 은별은 김밥천국 앞에서 비를 피하기 위해 천막 아래에 서 있었다. 쏴아아아아…. 폭우처럼 내리는 비! 그 때문인지 우산을 쓰고 걷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우산 때문에 얼굴을 못 알아보면 어떡하지?'
걱정이 이만저만인 은별이었다. 그렇게 부질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기를 어연 30분!
'왔어!'
드디어 12시 30분! 민국이의 수업이 끝나고 이제 학교에서 나올 때가 되었다. 은별은 고개를 돌려 대학교의 정문을 보았다. 그러자 몇몇 학생들이 모여서 나오는 게 보였다.
은별은 꿀꺽 침을 삼키고 가방에 있는 도화지를 꺼내기 위해 준비했다. 민국을 발견하면 즉시 달려가 도화지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비록 비를 어마무지하게 맞을 테지만, 그래도 두 손으로 들어서 보여주어야 민국이에게 확실히 자신의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을 테니까.
'비록 너는 내가 생각했던 그런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라면 나쁘지 않은 건 분명해!'
대충 그런 식의 말이었다. 어떻게 보면 고백인지 욕인지 분간이 안 갈 수도 있었으나, 그것이 은별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이벤트였다. 이윽고 죽치고 서 있기를 어연 5분…. 슬슬 정문의 학생들이 빠지고, 인적이 드물어지자 은별은 급작스레 초초해지기 시작했다.
'왜 안 나와…?'
이거 이거, 이쯤되면 나와야 할 텐데 말이다. 은별은 혹시나 싶어서 방금 전 정문을 나오던 학생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걔 중에는 절대 없었다. 다들 우산을 쓰고 있었지만 그래도 은별이의 매서운 눈빛 스캔으로 순식간에 얼굴을 전부 스캔한 것이었다.
'…뭐지. 뭐하는 거야?'
혹시 은별이가 모르는 민국이의 또 다른 스케줄이 존재한단 말일까? 은별은 반신반의하는 모습으로 휴대폰을 들어 보았다. 쏴아아아….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그녀가 조심스레 민국에게 메시지를 전송해보았다.
[너… 원래 월요일에 수업 한 개 하지 않아…?]
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지 어연 30분. 답장이 없다. 뭐지? 혹시 무슨 안 좋은 사고라도 생긴 것일까? 불안한 마음에 은별이가 전화를 걸어 보았다. 뚜루루루루…. 그러자 이내 전화를 받은 상대에게서 들려온 것은….
"흐아아아아아아암…."
"……."
"예, 오늘 밤에 보는 거 아닙니까 은별느님?"
어딘가를 긁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상당히 나태한 듯한 민국의 음성이었다. 은별은 잠시 입을 뻥긋거리다가 멈추기를 반복. 얼마지 않아 질문했다.
"너… 오늘 학교 가는 날 아니야…?"
"응? 아, 가는 날은 가는 날이지. 근데 아까 전에 가려고 하니까 월요일 담당 교수님이 이번 주 쉰다고 했던 거 기억났거든. 그래서 그냥 집에서 쉬었지."
"……."
"왜?"
은별은 순간 울컥해서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팍씨!"
"????"
"몰라! 끊어! 나쁜 놈아!"
전화를 끊고 씩씩거리는 은별이었다. 쏴아아아…. 쏟아지는 빗줄기에 천막 너머로 손을 내뻗어본 은별. 정말이지 시간만 낭비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