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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99화 (99/369)

99화

"자,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죽을 죄를 졌습니다!"

그리고 1시간쯤 흐른 뒤였다. 살벌한 싸움이 끝난 후, 유이의 공격에서 그나마 정신을 차린 세 남자는 다섯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게 되었다.

세 남자 입장에선 하도 얻어맞았으니 오히려 폭력죄로 신고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그랬다간 근처에 있는 유이에게 이번엔 진짜로 죽을 듯이 맞을 지도 몰랐다. 유이의 눈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움찔거리는 세 남자의 모습에, 민국은 그들을 냉랭하게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다시는 이런 짓하지 마라."

"네, 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죽을 죄를 졌습니다!"

은별은 다행히 예나가 구해준 덕분에 무사히 살 수 있었다. 허나 충격이 컸는지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서라와 예나가 은별을 부축해주면서 토닥여주었다. 이윽고 은별을 데리고 숙박소로 향하는 두 여자의 모습에 민국은 다시 세 남자를 쳐다보았다.

하나뿐인 여자친구 은별이가 험한 꼴을 당했다. 남자친구로서 열이 받치지 않으면 거짓말이었다.

"유이 씨. 잠시 남아주실래요?"

"……."

유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유이는 민국의 최후의 수단(?)이었다. 또다시 그들이 발버둥치면서 함부로 행동하면 유이를 쓸 수밖에 없었다. 허나! 지금은 세 남자 모두 완전히 유이의 압박에 공포를 느끼는 상황, 지금 이대로라면 민국이 원하는 바를 실현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너희들 기다려라."

그리고 민국은 공동 화장실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유이 홀로 세 남자를 지켜보는 상황이 되었는데, 세 남자는 벌벌 떨면서 유이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잠시 후 공동 화장실에서 무언가를 가져온 민국이 손에 쥐어진 것을 보면서 물었다.

"이게 뭔지 아냐?"

"…예?"

"그, 그게 무슨…?"

"무엇입니까…?"

세 남자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민국에게 더듬거리며 물었다. 민국은 자신의 수중에 들려 있는 투명 병, 그 안에 있는 시큼한 내용물을 보여주면서 음흉하게 웃음 지었다.

"골든 브레스다."

"?!?"

"받아라!"

푸슉! 뚜껑이 열리고 병 안에서 나온 황금빛 물체는 세 남자의 면면을 덮쳤다. '푸억!' 역겨운 냄새가 나는 골든 브레스를 맞고는 다들 몹시도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 이에 가만히 문지기 역할만 하고 있던 유이가 더 크게 침묵했다.

"……."

"우웩!"

"으아! 이 냄새 뭐야?! 서, 설마 오, 오…!"

"아직 한 발 더 남았다 이것들아!"

민국은 또 다른 투명병을 꺼내서 나머지 양을 그들의 면면에 또다시 뿌려버렸다. 옷과 얼굴이 흠뻑 민국의 그것으로 범해지는 마당에 그들은 괴로움만 토해낼 뿐이었다.

"크억!"

당장 바다 속으로 뛰어가는 세 남자를 보면서 민국은 '약한 녀석들.'하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유이를 보면서 말하는 민국이었다.

"가시죠 스승님."

"……."

졸지에 싸움의 스승이 되고마는 유이였다.

*

"으으…."

"고딩데스찡 괜찮으세염?"

옷을 갈아입은 은별은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이마에 젖은 물수건을 올려놓고 있었다. 서라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녈 지켜보았고, 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민국에게 음흉한 손길을 뻗기 위한 변태의 마수라 한들 결국엔 민국의 여자친구였고 사람으로서 소중한 존재였다. 라이벌 의식을 가졌다 한들 기분이 탐탁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끼이익. 그때 현관문으로 인기척이 느껴지자 예나가 고개를 돌렸다.

"민국아, 어떻게 됐어?"

"응. 아니야. 그냥 따끔하게 얘기 몇 마디 해주고 온 거야. 별 일 없었어."

"……."

뒤에서 따라 들어오는 유이는 민국의 골든 브레스를 떠올렸다. 허나 민국은 그러거나 말거나 드러누워 있는 은별에게로 다가갔다.

"낭자. 괜찮소?"

"…괜찮아. 그냥 물 좀 많이 마셔서 그래."

염려하는 민국의 물음에 은별이 간결하게 대답했다. 실은 물도 많이 마시고 밀려나던 충격이 컸던 지라 은별은 도통 일어날 상태가 아니었다.

걱정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다 보니 내심 괜찮은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민국은 차가워진 그녀의 볼을 슬쩍 손으로 만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안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한 벌 꺼내온 뒤 그녀의 목까지 덮어주었다.

돌연 정성스런 민국의 행동에 은별이 열 때문에 붉어진 얼굴로 올려봤다.

"한숨만 자. 그럼 괜찮아질 거야."

"……."

사실 자면 안 되었다. 은별에겐 민국과 함께 하는 바캉스의 특별 연인 계획이 있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이 다른 여자들과는 다른, 확고한 애인 사이임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돌발적인 일이 생기고 나니 뭐랄까… 계획은 둘째치고 몸 성하지 않게 조심하는 게 더 중요했다.

"……."

결국 그녀는 민국이 내려다보는 눈빛 하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 그 모습은 정말이지 상당히 귀엽고 애처로웠다. 이내 그녀가 잠에 들 때까지 조용히 지켜보던 민국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머지 여자들을 향해 말했다.

"그럼 일단 각자 씻고 다시 모일까? 은별이가 깨어날 때까지 안방에서 조용히 놀자."

"예압…."

"응, 알겠어."

"……."

지금은 다들 은별이를 존중하는 모습이었다.

*

은별은 꿈을 꾸었다. 깨어나고 난 뒤에는 까마득한 나락 속으로 지워져버린 꿈이었지만, 그래도 꿈속에서만큼은 너무나도 선명한 이야기에 그녀는 고개를 도리 젓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어디론가 내려가는 꿈. 그러나 내려갈 때마다 나타나는 것은 오로지 깊숙한 어둠. 그 칠흑이 자신을 집어삼켜버릴까 무시무시한 공포에 은별은 몇 번이고 벗어나려 노력했다. 하지만 벗어나려 하면 할 수록, 그 칠흑의 손아귀는 은별의 몸을 붙잡고 같이 끌어내려 하고 있었다. 마치 혼자서는 죽지 않겠다는 듯.

"…핫."

잠시 후, 눈을 뜬 은별이었다. 예나와 서라를 통해 잠옷을 입고 있던 은별은, 옷이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엄청난 악몽을 꾼 게 분명한데… 그것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윽고 목 위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치우고 상체를 일으킨 은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

아무도 없었고 전등빛은 꺼져 있었다. 쏴아아…. 바다 소리가 들려오는 베란다 창가로 고개를 돌리니, 이미 해는 저물고 큰 밤이 찾아와 있었다. 어둑어둑해질 대로 어둑해져 더 이상 모래사장에는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많이 잠들어 있었네…?'

뭔가 희의감 서린 생각을 하며 은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던 도중 조금 휘청였지만, 잠을 자서 생긴 일시적인 빈혈이었다. 이마를 만져보니 열은 떨어졌고… 무거웠던 몸도 가벼워졌으니 이제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하지만 뭐랄까. 마음에는 무거운 혹이 생긴 느낌이었다. 단순히 그 세 남자의 언동 때문에 충격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 놈들이야 원래 이 세상에 비일비재 했으니까. 허나 은별이는 이 여행을 온 목적이 무엇인가 새삼스레 생각하게 된 것이다. 까놓고 보면 은별은 관대한 것이었다.

자기를 비롯해 많은 여자를 데리고 바캉스를 떠나오는 민국을 얌전히 허락했으니까. 또한 그가 성드립을 하면서 놀려먹을 때도, 그가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는가 하는 진위여부는 감춰두고 마냥 어미의 품처럼 받아주었으니까. 그러나… 모든 것을 받아준다고 해서 가슴 속에 있는 내적인 갈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답답해… 너무….'

상복부의 중심부를 잡고 회의감을 억지로 견뎌내던 은별이었다. 끼이익, 쿵. 현관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화들짝 놀란 은별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정면을 보았다. 서민국이었다.

"깨어났구나."

"……."

전과는 달리, 개그스러움이 하나도 묻어 있지 않은 진지한 음성이었다. 은별은 혹시나 이 집 안에 예나가 있나 했다.

"안방에 예나 있어?"

"아니 다 밖에서 캠프파이어하면서 놀고 있어. 마침 옆방에 기타 좀 치던 학생이 있어서 말이야."

"…그렇구나."

은별이 침울한 음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민국이 신발을 벗고 은별에게로 다가갔다.

"왜 그러시오 은별 낭자. 마치 사춘기의 카오스에 빠진 중2학생처럼."

"하아…."

베란다 아래에서는 한 청년의 발랄한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에 환호하는 몇몇 여성. 익숙한 목소리로 보아 서라겠지.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은별은 거실의 소파에 다가가 조용히 앉았다. 이를 말없이 지켜보던 민국이 소파에 따라가 앉았다.

"왜 그래? 설마 베란기라도 온 거야? 하나가 될 순간인가?"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혹시 나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커져서 불안해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오? 바들바들!"

"……."

"은별 낭자. 기운내시오. 내 그 나쁜 놈들은 골든 브레스로 강렬하게 처치했으니. 다시는 그대를 건드리는 일은 없을 것이오."

은별은 침묵했다. 옆에서 민국이 놀려대는대도 가만히 있는 건 정말 보기 드문 현상이었다. 이윽고 모든 전등이 꺼져 있는, 단 둘만이 있는 집안 거실 소파에서 은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민국을 바라보았다.

"난…… 너한테 뭐야?"

그것은 급작스런 물음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머리카락으로 그늘을 만들어 얼굴을 가리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는 은별이었다. 그리고 화장실로 가려는 순간 은별의 손목을 붙잡으면서 따라 일어나는 민국이었다. 민국은 조금 진지해진 얼굴로 은별을 보았다.

"왜 그래? 아직 많이 아파서 그런 거야? 아니면 역시 아까 그 자식들 때문에…."

"아니야…. 그냥 냅둬…."

"어허, 내 애인이 괴로워하는데 가만히 지켜볼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

"……."

그 '애인'이라는 단어가 유독 신경 쓰였다. 은별은 조심스레 고개를 올렸다. 머리로 그늘져 있던 그녀의 얼굴이 민국을 올려다보는 순간, 민국은 은별의 눈동자가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애인…?"

"……."

"정말… 애인이야?"

그녀에겐 확신이 없었다. 지금껏 숨기고 있던 마음이 조금씩 드러나려 하고 있었다. 한 손을 가슴에 포개고, 조금씩 물러나며 은별은 중얼거렸다.

"정말로… 내가 애인이 맞는 거야…?"

"은별아?"

"…정말 내가 애인이라면…."

그녀의 눈동자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난… 너에게 뭐지…?"

"……."

지금껏 힘든 시기가 있을 때마다 꾸역 꾸역 참아왔고, 사랑하는 감정이 커질 때마다 민국이 하는 소리에 크게 오해하고 시기하며, 그런 자신을 항상 한심스럽게 여겨왔다. 딴짓하는 그조차도 실은 그런 마음이 아닐 거라며 신뢰하고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역시 그런 사랑은 혼자 감당하기에 너무나도 힘들었다.

"미안… 미안해…."

"……."

"잠시, 혼자 있게 해줘…."

그런 나약한 모습의 은별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마 오늘 세 남자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녀의 숨겨져 있던 마음이 더 쉽게 열려버린 걸 지도 모른다. 늘 혼자서 갈등해왔던, 짊어져 왔던 그 아픔 말이었다.

'헛!'

민국은 그 순간 떠올렸다. 예전에, 자기 집에 들이닥쳤던 한 어린 소녀가 문득 내뱉었던 소리를. 그리고 그 소녀가 건네주었던 한 가지 무언가를….

"잠깐!"

"놔줘, 힘들어…."

"잠깐만!"

민국은 진심으로 힘겨워하는 은별에게 소리쳤다. 그제야 걸음을 멈춘 은별이 그를 돌아보았다. 민국은 주머니 속을 뒤적여보았다. 없었다.

'이걸 가지고 왔는데 어디 있더라?'

흑마법사의 아이템이니, 만일을 대비해서 필요할 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민국은 바캉스 여행에도 구비해왔었다. 이윽고 민국이 거실의 자기 가방을 뒤적거려 찾기 시작했다. 초췌한 은별은 그를 보면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이내, 5분간의 노고 끝에 제품을 찾아내는데 성공한 민국이었다.

"찾았다!"

"…뭐야?"

"이거 한 번 먹어봐. 그럼 날 믿게 될 테니까."

흑마법사는 말했다. 이걸 이용하면, 마음이 멀리 떨어지는 사람을 다시 붙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민국은 흑마법사에게 받았던 약을 은별의 수중에 건네주었다. 은별은 작은 그 알약을 내려다보다가 조금 욱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난치지마."

"지금 내가 장난하는 거로 보여?"

그러면서 민국은 물 한 잔을 떠와서 먼저 자신이 알약 하나를 먹는 모습이었다. 알약은 총 두 개. 한 명당 한 개씩 먹으면 되었다.

"……."

이윽고 그런 민국의 똑부러진 모습에 의혹을 느끼던 은별은 다시 알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귀찮다는 듯 물잔을 들어 조심스럽게 알약을 입속에 넘고 물과 함께 삼키는 모습이었다.

"…꿀꺽."

"……."

"……."

아무 일도 없었다.

"…장난하지 말랬지?"

"어? 아니 이게 아닐 텐데?"

허나 어떤 진귀한 현상도 벌어지지 않음에 민국이 의문을 느끼는 얼굴을 지었다. 은별은 그러거나 말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몸을 돌리려 했다.

'아! 섹스하고 싶다!'

'…….'

'아 은별이랑 섹스하고 싶다!!!'

허나 그 순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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