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너자 (7/9)

7. 너자

너자는 워린의 거침없는 발걸음을 멍하니 따라갔다. 그의 오른발이 그렇게 걷지 말라며, 아파 죽겠다며 비명을 질러댔지만 너자는 지금 정신이 없었다.

너자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워린이 작은 친구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너자에게 작은 친구들이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친구들은 전쟁 중 간신히 도망 보낸 후계와 아이들 여섯 명뿐이었다.

분명 자신이 도망 보냈다. 무사히 대륙을 빠져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아니, 그전에 여기는 맥켄지가 사는 곳이었다. 아니다, 맥켄지와 워린은 형제라고 했다. 아니다. 그래도 이상했다.

너자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워린이 곁눈질로 너자를 바라보았다. 너자의 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해져 있었다. 색노의 청명하고 밤하늘을 닮은 듯한 검은색 눈이 정처 없이 떨렸다.

너자가 워린을 따라가다가 발이 엉켰는지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 모습에 워린이 혀를 차며 깍지를 낀 손에 힘을 줘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리고 후작 성의 후원에 있는 커다랗고 낡은 탑의 문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여럿 죽어 있었다.

“…….”

시체가 되어 죽어 버린 기사들을 멍청하니 응시하다 너자가 자신의 손을 끄는 워린을 따라갔다. 낡은 탑의 문을 여니 밀폐된 공간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풍겼다.

워린과 너자는 밑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하염없이 걸었다. 횃불만을 의지하며 걷자 커다란 철문이 보였다. 워린의 고갯짓에 해리가 철문을 열었다. 그곳은 지하 감옥이었다.

“조심.”

워린이 너자를 잡아끌었다. 그들은 깊이, 깊이 들어갔다. 점점 깊이 들어갈수록, 어린 것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너자의 몸이 워린의 앞을 따랐다. 그리고 워린의 손을 뿌리치고 찢어질 것 같은 오른발목을 무시하고 뛰듯이 걷기 시작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좁았던 공간이 점점 넓어졌다. 그리고 무척 어두웠다. 족히 60평은 될 것 같은 넓은 공간이 나왔다. 그 가운데에 어린것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흑… 흐… 흐으….”

“괜찮아. 울지 마.”

너자는 귓전에 울리는 어린것들의 목소리와 얇지만 강한 목소리의 어린아이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

쇠창살이 쳐 있는 커다란 방 안에, 제 손으로 직접 도망 보낸 후계와 아이들이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너자의 발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풀석, 하는 소리와 점점 커지는 사람 소리에 어린 것들을 어르고 달래던 여자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쇠창살 앞에 주저앉아 있는 너자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여자아이의 눈이, 입가가 벌벌 떨렸다.

너자와 여자아이의 눈이 마주쳤다. 너자가 쇠창살 앞으로 기어가며 중얼거렸다.

“리마, 리마….”

“…너자?”

리마의 얇은 목소리에 너자가 덜덜 떨며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리마… 아르, 욘, 로가, 준, 도아…!”

너자의 목소리에 구석에서 웅크려 떨고 있던 아이들이 한둘씩 앞으로 튀어나왔다. 너자가 손을 뻗어 자신에게 손을 뻗는 아이들의 손을 잡아 주려 할 때, 그의 머리채가 워린에게 잡혔고, 뒤로 질질 끌려갔다. 너자는 아픔도 잊고 몸부림을 치며 반항했다.

“놔! 놓으라고!”

“쉬… 진정해. 쉬….”

너자는 자신을 바닥에 처박고 자신의 위에 올라탄 워린의 몸을 내치려고 했으나, 자신의 양팔을 구속하는 기사들에 의해 제압당해 버렸다. 하지만 너자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자신을 옭아매는 기사들의 손에 쥐어뜯기고 발로 차였지만 너자는 반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놔! 나쁜 새끼야, 놓으라고!”

너자의 외침에 워린이 기어코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너자의 얼굴을 한 손에 잡으며 말했다.

“눈물 젖은 가족 상봉은 잘 봤어. 그런데 일단 내 얘기를 들어 봐.”

“저리 가!”

워린은 제 말을 듣지 않는 너자의 뺨을 날렸다. 짝, 하고 잔인한 파열음이 지하 감옥을 차게 울렸다. 어린것들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윽!”

“단장님!”

하지만 너자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제게 손찌검을 하느라 한순간 무게중심이 위로 들렸을 워린을 몸을 비틀어 옆으로 내려치고 제 단장의 쓰러짐에 당황한 전사들을 제압했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쇠창살 앞으로 달려갔다.

제 단장을 내려친 간악한 색노에게 제9대대 기사들이 분노했다. 사방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너자는 어린것들의 앞으로 가 그들을 지키는 것처럼 양팔을 벌리고 앉았다. 그때였다.

리마가 코만치의 언어로 말했다.

-너자, 가만히 있어.

-뭐?

-몸을 낮춰. 가만히… 욘, 촛불을 위로 들어 올려.

리마의 명령에 욘이 얼른 협탁으로 뛰어가 촛불을 들었다. 그리고 협탁으로 올라가 까치발을 든 채 촛불을 최대한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두웠던 지하 감옥의 사방에서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제6대대 기사들이 튀어나와 총을 갈기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총소리에 너자가 등을 쇠창살로 바짝 대어 어린것들이 총탄에 맞지 않게 방패가 되었다.

제9대대 기사들이 워린을 감싸느라 하나둘씩 죽어 갔다. 그리고 지하 감옥의 좁은 터널에 수많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불 켜렴.”

나른하면서 청명한 소리, 맥켄지 도노반의 목소리였다.

워린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제 앞에 쓰러진 기사의 리볼버를 쥐어 맥켄지를 향해 쏘려고 했지만, 사방에서 불이 켜졌고 어두웠던 지하 감옥 안을 환히 밝혔다.

“…시팔….”

제6대대 기사들이 지하 감옥 벽면을 모두 감싼 채로 자신을 향해 머스킷을 들이밀었고, 어느새 자신의 앞까지 온 맥켄지의 뒤에는 제1대대 기사들이 있었다. 워린의 이가 우드득, 갈렸다.

너자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맥켄지를 응시했다.

맥켄지는 그런 너자를 응시하며 워린에게 말했다.

“너는 끝났어. 에르베.”

“…….”

“이 개 같은 새끼야.”

맥켄지의 옆에 있던 샬로메가 콜트를 쥐고 조심스럽게 워린에게 다가갈 때였다.

“윽…!”

“너자!”

혼란을 틈타 너자의 머리통에 리볼버를 가져다 댄 해리가 있었다. 해리는 어깨에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너자의 머리채를 강하게 잡고 그의 관자놀이에 리볼버를 당장에라도 갈길 듯 격발 자세를 취했다.

워린이 그 모습의 해리를 보다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갈며 말했다.

“내가, 재밌는 얘기 해 준다고 했지?”

“…….”

“그 애새끼들, 여기에 왜 있을 것 같아?”

워린의 말에 맥켄지가 외쳤다.

“닥쳐, 에르베!”

하지만 워린은 맥켄지의 말에 더욱 크고,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 애새끼들을 잡아 오고, 이 지하 감옥에 감금하고, 개처럼 기른 게 바로…!”

“당장 저 입을…!”

“맥켄지 도노반이야!”

워린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지하 감옥을 울렸다. 샬로메의 얼굴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그의 손가락이 조용히, 조심스럽게 콜트를 다시 쥐었다.

워린이 너자를 바라보았다. 너자는 워린의 예상대로 혼이 빠진 얼굴이었다. 그는 이대로 죽을 수 없었다. 아니, 죽어도 저 새끼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그가 말했다.

“또, 너네 민족을 죽게 만든 것도, 맥켄지 도노반이지!”

“…뭐?”

“맥켄지 도노반이, 제 집안을 일으키겠다고 대륙 전쟁을 일으켰다! 너희 부족을 모두 뒈지게 만든 총! 네가 그렇게 무서워하는 총! 그거 맥켄지 도노….”

“닥쳐, 에르베!”

탕!

샬로메가 쏜 총에 해리의 머리통이 터져 버렸다. 샬로메가 얼른 뛰어가 너자에게 쓰러지는 해리의 몸통을 발로 찼다. 퍽, 하고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지하 감옥을 울렸다. 그 잔악한 모습에 어린것들이 펑펑 울기 시작했다.

워린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가 악에 받친 듯 소리 질렀다.

“너희 부족, 병에 걸려 다 뒈졌지? 그거 맥켄지가 알려 준 방법이었어! 저놈이 너희….”

너자의 안전이 확인된 것을 본 맥켄지가 워린의 허벅지에 콜트를 갈겼다. 찢어지는 소리와 워린의 억눌린 비명이 지하 감옥을 울렸다. 맥켄지가 서릿발 같은 표정으로 실실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워린의 머리통을 터트리려 했으나 뒤따라온 페리가 그를 말렸다.

“맥! 살려 놔야 한다. 지금 죽이면 안 돼!”

냉정하기 짝이 없는 페리의 목소리와 옆에 호위하고 있던 티모시의 만류에 맥켄지가 이를 갈며 콜트에 안전쇠를 잠갔다. 제1대대와 제2대대가 맥켄지를 뒤로한 채 워린과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그 일당들을 제압하고 포박했다.

사방이 소란스러운 와중에 맥켄지가 너자에게로 다가갔다. 너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맥켄지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응시했다.

“너자….”

“…….”

저런 표정, 자신은 알지 못한다.

맥켄지가 자신을 차가운 눈으로 응시하는 너자를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당당히 뻗은 맥켄지의 하얀 손이 덜덜 떨렸다. 맥켄지는 자신의 떨리는 손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너자에게 말했다.

“이리 온.”

“…….”

“너자,”

“…사실이야?”

너자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맥켄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자는 그런 맥켄지의 표정에 턱을 덜덜 떨며 말했다.

“워린이 한 말… 사실이야?”

“…….”

맥켄지는 눈을 깜빡이며 기어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묻는 너자에게 답하지 못했다.

이상했다.

당장에라도 기사들에게 명령해 너자의 몸을 구속하고, 자신에게 불손한 눈빛을 보내는 너자를 개 패듯 패 버리면 됐다. 지금껏 한 것처럼 노예가 말을 들을 때까지 패며, 노예 구실을 하게 하면 됐다. 아니면 지금껏 한 것처럼 너자의 앞에서 연기하면 됐다. 저 새끼의 간악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고, 눈물을 흘리며 연기하면 됐다. 그러면 푸딩처럼 말랑한 너자의 마음은 금세 풀어지고 자신을 지금껏 그래 왔듯 맹목적으로 사랑해 줄 것이다.

그런데, 맥켄지는 아무런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너자는 자신을 보며 표정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은 맥켄지를 보며 무너져 내렸다.

“왜… 왜 말을 못 해?”

“…….”

“아니잖아…. 그치? 아니지?”

“…너자.”

그의 표정은 슬픈 것 같으면서도, 냉정한 것 같으면서도… 이상했다. 우는 것 같으면서도 냉정해 보였다.

너자의 속에서 천불이 끓어올랐다.

“왜 말을 못 해!”

“…너자.”

“왜… 왜 얘들이 여기에 갇혀 있어? 저 새끼가 한 말, 그거 뭐야? 네가… 네가… 우리 부족을….”

너자가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너자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주륵 쏟아졌다.

맥켄지는 하염없이 우는 너자에게 다가가며 멍청이처럼 그의 이름만을 불렀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너자…….”

그의 손끝이 너자의 얼굴에 닿으려는 순간, 너자가 그의 손을 세게 쳐냈다.

“만지지 마!”

서릿발 같은 너자의 표정과 목소리에 맥켄지의 눈이 천치처럼 깜빡였다. 그리고 옆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는 샬로메를 응시했다.

“저리… 저리 가! 이….”

샬로메가 너자의 몸을 일으켰다. 너자가 몸부림을 쳤으나 현역인 샬로메의 힘을 당하지 못했고, 멀리서 티모시가 뛰어와 너자를 제압했다. 마찬가지로 메트가 다가와 마치 짐승처럼 몸부림을 치는 너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너자의 양팔을 뒤로 꺾어 밧줄로 동여맸다.

너자가 몸부림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애들, 애들은! 너자가 목을 꺾어 아이들을 보려고 했지만 아이들이 우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티모시와 샬로메가 너자를 짐승 옮기듯 상체와 하체를 들어 올려 지하 감옥을 빠져나갔다. 지하 감옥을 빠져나온 너자가 순간적인 쨍한 햇빛에 눈을 찌푸리고 눈물을 질질 흘리고 있을 때, 너자의 흐린 시야에 커다란 체격의 애쉬 블론드를 가진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너자의 눈을 똑바로 맞추며 입 모양을 만들어 냈다.

‘기다려.’

남자는 호쾌하게 미소를 지으며 입에 캔디를 까서 넣었다. 그리고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너자에게 한쪽 눈을 깜빡인 후 비아를 데리고 사라졌다.

샬로메와 티모시는 너자를 맥켄지의 방에 데려다 놓으려 했지만 마치 짐승같이 몸부림을 쳐대는 너자의 몸에 결국 정원의 잔디에 내려놓고 말았다. 샬로메가 근처에서 같이 따라오는 대원 한 명에게 손짓으로 도우라고 할 때 맥켄지가 손을 들어 올렸다. 맥켄지의 신호에 너자를 다시 옭아매 들어 올리려던 샬로메와 티모시가 직립했다. 너자의 눈에서 말간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코만치는 본디 유목민이었다. 끝없는 대륙을 말을 타고 달리며 질 좋은 땅을 찾아 헤매어 살아왔다. 끝없는 유목 생활 끝에 좋은 땅을 찾았다. 그곳은 드넓은 평원이었고 기름진 대지가 있었다. 말을 주로 타고 다니며 기마술에 능통했던 코만치는 그 땅이 마음에 들었다. 수많은 말에게 먹여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대지였다. 또 흙이 고르고 기름기가 있어 옥수수나 감자 따위를 심을 수 있었다. 옆에는 작은 강이 흐르고 있었고 말을 타고 달리면 숲이 있어 그곳에서 열매와 짐승을 사냥할 수 있었다.

부족민들은 드디어 찾은 선물 같은 땅에 입을 맞추며 신에게 감사했다. 너자가 일곱 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코만치는 참으로 평화로웠고, 너자는 무럭무럭 자랐다. 남보다 발육이 남달랐고 몸이 잽싸며 힘이 셌다. 그리고 짐승과 교감을 잘해 스물두 해에 코만치 부족의 알파가 되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쉴새 없이 부족에 침입하는 다른 부족민들을 늑대를 타고 물리쳤으며, 부족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고를 해결했고, 후계자를 직접 가르쳤다. 산에서 고립되었을 때 살아남는 방법, 짐승을 만났을 때 대응하는 방법, 짐승을 길들이는 방법, 조난했을 때 방향을 찾는 방법, 활을 쏘는 방법.

힘들었지만 좋았다. 내 친구 들이고 내 이웃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온몸이 하얀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이 보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족에 역병이 돌았다. 그리고 내 친구들을, 내 이웃들을 공격했다.

있는 힘껏 저항했지만 부질없었다. 화이트들은 ‘총’이라는 무기로 너자의 친구들을 학살했다. 일 년간 그들과 대항을 하며 너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너자의 친구들은 죽었고, 너자 또한 배에 총알이 박혔다. 너자는 배때기에 박힌 쇳조각을 보며 내심 안심했었다.

어린아이들은 피난시켰다. 후계인 리마는 힘은 약했지만 무척 총명한 아이였다. 분명 어디에서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드디어 나도 친구들 곁으로 가는구나. 차마 자살할 수 없어 구차하게 바득바득 싸워 오며 이어 온 삶이었다.

하지만 이 질긴 목숨은 끊기지 않았다. 워린의 성에서 벌레같이 살았다. 자신은 한순간에 친구도, 이웃도 잃은 피해자인데 나를 공격한 인종의 인간들이 자신에게 침을 뱉고 자신의 등에 채찍질했다. 너무 외로웠다. 죽고 싶었다. 하지만 죽는 게 무서워 아득바득 살아남았다.

목숨만 겨우 연명해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그가 구해 줬다. 그와 있으니 곰팡내 나는 밀실에 갇혀 있지 않았다. 씻을 수 있었다.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아프고 이상한 짓을 강요당하고 당했지만, 지붕이 있는 따듯하고 쾌적한 공간에서 지낼 수 있었다.

지혜의 여신처럼 아름다운 그를 보며 넋을 잃었다. 간혹 잘해 주는 그의 행동이 좋았다. 그에게 다리가 부러졌지만, 자신의 잘못이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워린에게 다시 붙잡혔을 때, 그가 다시 자신을 구해 줬다. 그리고 자신에게 좋아한다, 지금껏 못되게 군 것이 미안하다 했다. 자신을 보며 웃어 주고 사랑스럽게 자신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런데… 그런데….

“너자….”

“…….”

너자는 자신을 응시하는 맥켄지를 보며 이를 갈았다. 맥켄지는 그런 너자를 보며 한숨을 쉬곤 너자의 입가를 동여맨 재갈을 풀어냈다. 너자는 막혔던 입이 풀리자 한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왜… 왜 그랬어?”

“…….”

“당신이 죽였다며, 내 친구들. 내 이웃들.”

“대체 왜…?”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저 살아갔을 뿐이다. 현재에 감사하며 열심히 살아갔다. 우리 부족이, 맥켄지에게 잘못한 게 있었을까? 아니, 잘못했다 하더라도… 한순간에 그렇게…….

맥켄지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너자를 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너자의 눈가에 가져다 대었다. 하지만 너자는 몸서리를 치며 그의 손길을 거부했다.

“…….”

본래였다면 너자는 자신의 손길을 유순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 우울한 낯빛에 미세한 홍조를 띠고 항상 굳게 닫혀 있는 입매가 사르르 풀리며 자신을 보며 하얗게 웃었을 것이다.

허공에 떠 있는 맥켄지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너자가 자신을 경계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저런 표정, 자신은 모른다.

허공에 떠 있는 맥켄지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맥켄지의 화사한 얼굴이 음울하게 침전되었다. 그의 시커멓게 탄 마음속에서 치졸한 자존심이, 자기애적인 방어본능이 대가리를 들었다. 그가 말했다.

“힘이 없으면 빼앗기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뭐?”

너자는 자신이 들은 말이, 자신이 이해한 말이 맞나 싶었다. 그만큼 맥켄지의 말은 어처구니가 없었고 이기적이었다. 맥켄지의 얼굴이 점점 음울하게 침식되었다.

맥켄지는 그래야 했다.

사방에서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기술을 빼앗아 가려고 했다. 제 회사의 개발자들에게 거액의 돈을 줘 가며 빼 가는 타 왕국 놈들에, 비등비등한 수준이었던 스와포네 코퍼레이션 그룹의 상권이 점점 거대해지고 공작이라는 지위와 권력으로 자신의 회사가 가질 이익을 줄여 가는 것에, 왕국에 거의 헐값으로 제품을 납품하며 헌신을 하는데 아직도 왕과 귀족들이 자신을 보며 근본 없는 비렁뱅이 귀족 취급하는 것에, 가주인 다비드는 정신병에 걸렸었다.

다비드는 평소에는 온화했지만, 이따금씩 그의 감정은 널뛰었다. 온화하게 웃다가도 저 위의 것이 생각나면 제 부인인 페리에게 폭언을 했고 주위에 있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던졌다. 그리고 맥켄지에게 개발실에 있는 보고서와 납덩어리들을 던지며 쓸모없는 놈이라고, 당장 가문이 영광스럽게 될 방안을 내놓으라며 발작을 해댔다.

러트에게 해가 되지 말라고 욕망을 거세시켰다. 그러다 러트가 쓰레기처럼 변하자 지금껏 방치하고 인형처럼 키웠던 어렸던 맥켄지를 닦달하고 손찌검을 해대며 교육했다. 보통의 아이라면 견디지 못할 폭력과 폭언을 맥켄지는 감내했다. 맥켄지는 아직까지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을 하고 폭언을 일삼는 다비드에게 이를 갈았다.

그리고 결과는 이것이었다. 온갖 개고생을 다 하지만 가문의 가주도 되지 못했고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수석 대표도 되지 못했다. 그가 세운 공은 모두 러트와 다비드에게 돌아갔고 자신은 도노반 가문의 얼굴 예쁘장한 차석 대표, 성격 더럽고 도덕 없는 서쪽의 개망나니 맥켄지 도노반으로 알려졌다.

이 굴레에서 빠져나가려면 다비드의 말대로 가문이 영광스럽게 되어야 했다.

맥켄지 자신의 공으로 가문에 자신의 지분을 더욱더 견고하게 쌓았어야 했다. 안 그러면 자신은 평생 이따위로 착취당하며 가문의 장기 말로 살아갈 것이었다.

그러다 코흘리개 시절 비밀 사교클럽에서 우연히 알게 된 편지 친구 W와 주고받았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M, 그거 알아? 권력을 가지려면 공통의 적이 있으면 된대.

-그게 무슨 말이지?

-한 집단에 공통의 적이 있다고 쳐, 그 공통의 적이 있으면 모두 그 적을 해치우고 싶어 하잖아? 그때 그 적을 해치우면 내 명성과 인지도가 올라가는 거지.

-일리 있는 말이군. 집단의 열등감을 자극해 공동의 적을 선정하고, 그것을 해치우면 집단은 나에게 권력을 주는 것이겠네.

-뭐, 말은 쉽지만… 아, 미지의 대륙 있잖아. 거기 야만인들은 아직까지 활과 칼로 싸운다고 하더라. 문제는 그따위 구석기 같은 무기를 휘두름에도 강한 것이지만… 그 대륙에 묻혀 있는 금괴와 보물들이 엄청나다고 하더라고.

-강해 봤자 자연재해나 병에는 손쓸 도리가 없겠지. 야만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면역력의 병을 전파시키면 되지 않나?

-오, M 너는 악마 같아. 전염병이라니! 생각도 못 했어.

-W,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더는 다비드의 정신병에 휘둘리기 싫었다. 머저리 러트의 그림자 노릇을 하기 싫었다. 그렇게 열심히 해 봤자 너는 고작해야 차남이고 너의 공은 내게 돌아오고, 너에게 돌아가는 영광은 없다며 의기양양한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러트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정말 이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야 자신이 살 것 같았다.

맥켄지가 예쁜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나는 그래야 했어.”

“그래야 하는 게 어딨어?”

“내가 그래야 살았어.”

“네가 죽인… 내 부족들, 억울하게 죽어간 내 친구들… 미안하지도 않아? 그렇게 허망하게 죽은 이유가….”

맥켄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남의 기분을 조금도 헤아려 본 적이 없었고, 그가 제멋대로 굴 수 없는 상대는 아비인 다비드밖에 없었다. 맥켄지의 주변에 있는 것들은 맥켄지의 뜻에 토를 달지 않았고 그가 하는 말이라면 껌뻑 죽었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용인의 혀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뽑아버렸고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들은 돌로 머리를 쳐 죽였다. 그 러트 또한 주제넘게 주둥이를 나불거리기는 했지만 맥켄지의 뜻을 거스른 적은 없었다.

내가 살려면 그랬어야 했어. 아니면 내가 정신병에 걸려서 뒈질 것 같은데 어떡하라고? 맥켄지는 자신을 노려보며 원망하는 너자가….

“아니, 후회 안 해.”

“…뭐?”

“전쟁을 일으켰기에, 내가 산 거야.”

“…….”

너자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하고 흘러내렸다. 맥켄지는 당장에라도 그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다. 울지 말라며 다독여 주고 싶었다.

그래, 맥켄지도 사실 안다. 자신이 벌인 죄를. 자신이 하는 이야기는 모두 자기 합리화라는 것을.

너자는 자신이 벌인 일 때문에 가족과 친구들을 한순간에 잃었고 혼자가 되어 노예가 되었다. 자신이 대륙정복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너자는 지금 제 친구들과 함께, 이웃들과 함께 잘 살아가고 있을 것이었다.

맥켄지는 남의 감정에 무감했지만, 상황과 맥락은 아주 잘 파악하는 똘똘한 놈이었다. 하지만 그는 인정하기 싫었다. 인정하면, 너자가 자신을 떠날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만의 잘못인가? 자신은 추진했을 뿐이다. 이 계획을 확인하고 받아들인 건 이베아 왕국의 귀족들과 베타미 왕이었다.

또, 대륙정복을 하지 않았으면? 너자와 자신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너도 나를 사랑하잖아. 그러면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결국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데 문제 될 게 뭐 있어?

“그거 알아?”

“…….”

“내가 만약 대륙정복을 계획하고 추진하기 전의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

“다시 한번 대륙정복을 계획하고 추진할 거야.”

맥켄지의 잔인한 말에 너자의 입이 벌어졌다. 그의 입에서 과호흡이 일어났다. 맥켄지가 말했다.

“그리고 널 다시 내 곁으로 데려올 거야. 넌, 죽어도 나한테서 못 벗어나.”

천하의 나쁜 놈이었다. 어떻게 제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여, 내 세계를 부숴 놔. 어떻게 미안한 기색 하나 없어, 적어도 슬픈 흉내라도 내야지, 적어도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변명이라도 해야지, 너 머리 좋잖아. 나를 사랑한다며. 그런데 어떻게….

“…미친 새끼….”

너자의 입에서 기어코 험한 말이 나왔다. 하지만 그 말을 내뱉는 너자의 가슴도 찢어질 듯 아팠다. 너자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맥켄지가 너무도 미웠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다 지난 일이야. 그만 잊어.”

독하기 짝이 없는 맥켄지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마치 미워하지 말아 달라는 것같이 자신을 응시하는 푸른 호수 같은 눈이 형편없이 떨렸다. 항상 당당하기만 했던 그 모습이 잔뜩 위축되어 있는 게…….

“날 사랑하잖아. 내가 널 사랑하잖아.”

“…….”

“내가… 잘해 줄게. 정말 잘해 줄게….”

맥켄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맥켄지는 상처 입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꺽꺽거리며 우는 너자를 보며 결국 애원했다.

“제발… 제발 울지 마….”

맥켄지가 입술을 잘근거리며 깨물었다. 밤하늘을 축소해 갖다 박은 것 같은 너자의 까만 눈이 서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너자는 지금껏 소리 내어 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부당한 일을 당해도, 서러운 일을 당해도 너자는 입을 조개처럼 꽉 다물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너자가 맥켄지에게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며 서럽다는 듯 울었다.

신뢰감과 애정이 가득했던 이의 눈이 불신과 상처로 침식된 모습에 맥켄지의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그저 수단으로 여겼던 야만인 노예 너자는 어느새 맥켄지의 텅 빈 가슴에 자리를 잡았고 그가 알아차릴 새 없이 스며들었다.

맥켄지는 저 눈이 사랑스럽게 빛났으면 했다. 자신을 보며 슬퍼하고 분노하는 게 아니라 수줍어했으면 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옆에 있으면 했다. 손을 뻗으면 항상 그랬던 것처럼 유순하게 제 손바닥에 뺨을 비볐으면 했다. 너자에게 뻗어진 손이 너무도 외로웠다.

그가 한 발자국 걸어 너자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너자는 야속하게도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애가 탔다. 그리고 자괴감이 들었다. 지금껏 했던 것처럼 연기를 했어야 했다. 무슨 일이냐 묻는 자신에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흘리며 모른다고 답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더는 너자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너자와 맥켄지의 거리가 도무지 좁혀지지 않았다. 제가 부리는 사용인들이 처녀에게 푹 빠져 머저리같이 구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는 것도 상관없었다. 손을 뻗어 마른 뺨을 적시는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다. 그때였다.

눈이 멀 것 같은 강한 섬광이 도노반 후작 성의 정원을 터트렸다. 맥켄지의 귀에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가 손을 뻗어 외쳤다.

“너자!”

하지만 그의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맥켄지의 위로 티모시와 샬로메가 몸을 던졌다. 강한 폭발음과 섬광에 제 주인을 감싸고 있는 기사들의 귀에 피가 흘렀다. 주변에서 누군가가 소리 질렀다.

“공격이다!”

“에르베가, 에르베가 탈출했습니다!”

“귀를 막으세요!”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기사들이 다시금 몸을 들어 탈주했다는 워린을 잡아 처넣으려 했으나 다시금 들리는 귀를 찢을 것 같은 이명에, 소름 끼치는 소음에 몸을 웅크렸다.

맥켄지가 자신을 짓누르는 기사들을 뿌리치려 했으나 샬로메가 다시금 제 주인의 몸을 강하게 안고는 외쳤다.

“위험합니다! 그로기Groggy라고요!”

그로기는 신성 마법의 몇 안 되는 공격 계열 마법이었다. 그로기는 충격파로 일정 시간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또 그로기에 걸린 상태에서 함부로 움직이면 기절하거나 상태 이상으로 죽을 수도 있는 신성 마법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가?

신성력은 크게 회복과 공·수력으로 나뉘었다. 회복은 어지간한 사제는 모두 걸 수 있었다. 신성력 자체가 신의 힘을 빌려 사람에게 축복을 내려 회복되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공격·수비는 사제의 본래 정체성과 반대인 속성이었다. 거기에 신성력으로 공격 마법을 익히려면 수많은 시간과 수련이 필요해 어지간한 사제는 꿈도 꾸지 못할 경지였다.

맥켄지가 알기로 이베아 제국에서 그로기를 걸 수 있는 사제는 성하 외로 딱 여섯 명이 있었는데, 세 명은 성하 휘하에 있었으며 두 명은 제국의 황궁에서 베타미 황제를 보필하는 감투를 썼고 한 명은 은퇴 사제로, 스와포네 가문에 귀속되어 있었다.

“…!”

순간 스치는 불안감에 맥켄지가 잘 보이지 않는 눈을 미친 듯이 깜빡여 흐릿한 시야를 선명하게 만들었다. 맥켄지의 입에서 기어코 고함이 튀어나왔다.

“스와포네!”

비아는 밀가루 포대 메듯 어깨에 들쳐 올려 멘 노예의 몸뚱이를 감싸 안은 오른팔에 힘을 꽉 주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놓은 마차에 당도했다. 마차에는 청색 제복을 입고 있는 스와포네 코퍼레이션 그룹의 정예 기사단이 마차를 지키듯 서 있었다. 정예 기사단은 비아가 옴과 동시에 귀에 틀어막고 있었던 특수 제조된 귀마개를 빼내었다. 비아는 마차 앞을 지키고 있는 스와포네 코퍼레이션 그룹의 정예 1대대 기사단들에게 외쳤다.

“가자!”

비아의 명령에 기사 한 명이 굳게 닫힌 마차의 문을 열었다. 비아가 마차의 안에 들어서며 어깨에 들쳐멨던 노예를 마차 바닥에 던졌다.

쿵, 하고 너자의 몸이 넓은 마차의 바닥에 힘없이 굴렀다. 캔디스가 귀마개를 뽑아내며 마차의 좌석에 앉은 비아에게 짜증 난다는 듯 말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타이밍이 안 맞았거든요.”

비아가 마차를 구르는 너자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읏차, 하며 일으켰다. 그리고 지금껏 잘 참아 준 제 주인의 옆에 고이 앉혔다. 투박하기 그지없는 손길과 거칠게 출발하는 마차의 흔들림에도 기절한 너자의 눈은 뜨일 기미가 없었다. 마른 얼굴에 눈물범벅이 된 너자의 뺨을 손끝으로 쓰다듬던 캔디스가 맞은편에서 죽을 듯 숨을 헉헉거리는 40대 후반의 남자에게 말했다.

“변태같이 그만 헉헉거리고 얘한테 회복 좀 걸어.”

네, 도련님. 그는 전투 사제 메이엄이었다. 그는 미래가 유망한 주교였다. 지금껏 신만을 섬기며 전투 사제로 살아 왔던 메이엄이었지만 어쩌다 한번, 정말 우연히 딱 한 번 접해 본 도박에 그는 불나방이 빛에 이끌리듯 속세에 타락했다.

그는 야심한 밤 중앙 교회를 빠져나가 이베아에서 제일 큰 스와포네 코퍼레이션 그룹이 은밀히 운영하는 도박장에 발을 들이고 말았고, 스와포네 코퍼레이션 그룹에 속한 온갖 타짜들의 먹잇감이 되어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 사제는 신을 섬기는 종이어서 월급이라는 것이 없었다. 사제는 돈이 필요 없었다. 그들의 의식주는 모두 중앙 제국 교회에서 제공되었고 사제란 물욕 따위 없었어야 했다.

그것은 주교인 메이엄도 마찬가지였다. 간혹 베타미 황제가 신년을 기념해 보너스 개념으로 주는 작은 주화가 전부였고 일평생 기도와 수련만 했던 순진한 그는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다. 그는 발가벗겨진 채로 직접 행차하신 프럼 스와포네에게 강요받았다.

도박 때문에 막대한 빚을 진 것을 교회에 알려 불명예 제명을 당할 것이냐, 본인 발로 교회를 나와 스와포네 코퍼레이션 그룹에 귀속되어 빚을 갚아 나갈 것이냐. 그는 고민도 하지 않고 후자를 택했다.

캔디스의 불손한 말투에, 메이엄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느껴 속이 울컥했지만 비굴하게 미소를 짓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캔디스의 품에 안겨 그로기 때문에 기절해 있는 검은 머리의 야만인에게 회복 기도를 내렸다. 그가 땀을 뻘뻘 흘리며 기도를 십 분쯤 했을까, 굳게 감겨 있던 너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다 곧 완전히 떠졌다.

캔디스는 몽롱하게 떠진 밤하늘과 같이 까만 너자의 눈동자를 보며 벅차오름을 느꼈다. 캔디스가 제 품에 안긴 너자를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헉…!”

마치 숨통을 터트릴 듯 억세게 안은 캔디스의 손에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너자가 제정신을 차렸다. 그가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들어 사방을 훑었다.

“맥… 맥은? 맥켄….”

캔디스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어미 새가 아기 새를 찾듯 맥켄지를 찾아대는 너자의 모습에 언짢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지금껏 그랬듯 제 언짢음을 숨기지 않고 표출했다. 그가 몸을 돌려 너자의 몸뚱이를 창가로 밀어 넣었다. 너자가 단단한 마차의 창가와 캔디스의 커다란 몸뚱이에 끼어 발버둥을 쳤다. 그가 한쪽 손을 들어 너자의 뺨을 한 손에 부여잡으며 말했다.

“이 씹새끼가… 지금 너 빼 오려고 돈을 얼마나 처뿌린 줄 알아?”

“놔! 놓으라고!”

예전의 너자였다면 캔디스의 강압적인 말투와 행동에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너자의 머릿속에는 분노와 슬픔, 그리고 걱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너자는 더 미칠 것 같았다.

맥켄지가 미웠다. 그가 증오스러워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을 구해 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뭘 잘했다고 울어!”

“흑… 흐….”

자신을 지옥으로 처넣은 장본인이었다. 그가 자신의 세계를 부쉈다고 했다. 지금껏 제 원수를 그토록 사랑했다. 할 수만 있다면 맥켄지의 그 예쁜 얼굴에 주먹을 갈기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미워하지 말라며, 그만 울라며 형편없는 얼굴로 자신을 달래는 맥켄지의 모습이 너무도 가여웠다.

처음으로 사랑한다 해 주었다. 지난번 제 목을 조르고 눈물을 흘렸을 때와는 달랐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혼나는 것을 두려워하듯, 그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모진 말을 내뱉으며 상처 받은 듯 울먹였다. 오열하는 자신이 안타까워 어찌할지 모르겠다는 듯 손을 떨었다.

캔디스는 자신을 응시하고 있지만,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은 너자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아직도 모르겠어? 넌 도노반한테 속은 거야.”

알고 있다. 맥켄지가 제 입으로 직접 말했다. 너자가 더욱 서럽게 울었다. 캔디스는 그런 너자에게 말했다.

“그 새끼는 네 부족을 모조리 죽게 만든 장본인이야. 그뿐이야? 너 생각 안 나? 나한테 너 따먹으라고 손수 갖다 바쳐 준 게 그 새끼야!”

그랬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윽박지르고 때려서 저놈에게 갖다 바쳤다. 그리고 자신은 저놈에게 강간당했다.

“잊어! 그딴 쓰레기 잊으라고!”

맞다. 쓰레기도 그런 쓰레기가 없다.

“그뿐이야? 그 새끼는 네 작은 친구들을 잡아 와서 지하 감옥에 처넣어 사육했어! 이래도 그 새끼를 용서하면 넌 진짜 등신이야.”

너무 외로웠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제 친구들이, 제 이웃들이 왜 너만 살아 있냐며 원망스럽다는 듯 절규했다. 그리고 워린의 손에 끌려간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어린것들의 모습이….

너무 울어 몽롱한 정신 속에서 너자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리마는 왜 그때 자신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했을까? 리마는 왜… 욘에게 촛불을 들어 올리라고 했을까? 욘이 촛불을 들어 올리자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전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어둠 속에서 기어 나와 워린의 전사들을 죽였다.

왜…? 마치… 마치 계획을 공모한 것 같아….

너자가 순간 떠오르는 무언가에 숨을 멈추고 눈을 크게 뜨자, 캔디스는 그 모습을 보며 너자에게 자신의 말이 먹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너… 노예가 아니라 내 정부로 둬 줄게.”

캔디스는 이미 시술 준비를 끝냈다. 미친 듯이 달리고 있는 마차의 종착지는 스와포네 가문의 영지 깊숙한 곳에 있는 ‘그곳’이었다. 그는 워린과 비밀리에 이중 공모를 했다. 표면적으로 스와포네 가문은 이번 일에 동조와 개입을 할 뿐 맥켄지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겠다고.

그것의 대가는 너자였다. 워린은 많은 것도 바라지 않는다 했다. 만약 자신이 ‘실패’한다면 자신이 도망갈 틈만 달라고. 그 후에 당신과의 유착 관계에 대해서는 함구하겠다고. 어차피 돈도 주고받지 않았으니 꼬리를 밟힐 일도 없다고. 노예가 갖고 싶으면 가지라고. 단, 다시 자신이 도노반 후작 가문을 집어삼키면 가지고 있는 노예를 일정 시간 대여해 달라고, 그러면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지분 반을 주겠다고.

캔디스는 워린의 계획이 성공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는 시술을 통해 너자를 임신할 수 있는 몸으로 만들 것이고, 며칠이 걸리더라도 너자를 임신시킬 것이다. 이베가 제국 법률상 아이를 가진 미혼 여성은 무조건 임신시킨 남자에게 귀속시킬 수 있었다. 그것이 설령 남의 가문의 노예라도 말이다.

캔디스가 손가락을 들어 올려 너자의 눈가를 닦아 주며 말했다.

“평생 맛있는 것만 먹여 줄게. 온갖 귀한 걸로 몸에 휘감아 줄게. 그리고… 내 애를 가지게 해 줄게.”

너자는 그 와중에 헛소리를 지껄이는 캔디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마 예전에 했던 개소리를 다시 하는 것 같았다. 캔디스는 자신을 바라보고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너자의 모습을 보며 비틀어진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야 날 보네, 존나 비싸게 구는 것도 여전해.”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너자는 자신의 턱을 움켜쥔 캔디스를 밀어내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드디어 노예를 손에 넣었고,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잔뜩 고양된 캔디스는 너자의 몸부림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되레 너자의 다리 사이에 파고들어 너자의 뺨에 제 뺨을 비볐다. 그리고 손을 뻗어 너자의 하체와 엉덩이를 은근하게 쓰다듬었다.

그 징그러운 감촉에, 순간 떠오르는 캔디스의 학대에 너자가 거부감이 들어 몸서리를 쳤다. 캔디스는 너자를 억누르는 양손에 힘을 줘 너자를 막으며 꿈꾸듯 말했다.

“이제… 이건 없어질 거야. 어차피 쓸모도 없잖아.”

“미친 소리 하지….”

“이제 여기에 자궁이 심어져서 내 애를 밸 거야. 설레지 않아?”

오랜만에 본 캔디스는 여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너자가 기겁을 하며 캔디스를 밀어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꼼짝을 하지 않았다. 캔디스가 제정신이 아닌 목소리로 말했다.

“네 발목도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완전히 고쳐 줄게.”

-내가… 내가 잘해 줄게….

“평생 내 정액에 절어져서… 애를 끊임없이 낳게 해 줄게. 행복하겠지? 응? 너와 날 닮은 아이.”

-제발 울지 마.

캔디스의 목소리 사이로 환청이 들렸다. 너자의 눈에 웃기게도 맥켄지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그 새끼들 한 시간 정도 못 움직일 거야. 못 따라오니까 걱정하지 마.”

제정신이 아닌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너자는 이 순간에도 맥켄지가 걱정되었다. 그 어린것들보다도 맥켄지가 먼저 떠올랐고 걱정됐다. 자신도 그 섬광에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는데 그는 괜찮을까? 혹시라도 워린의 전사들이 더 남아 있으면… 퇴각하는 맥켄지를 죽인다면….

너자의 가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음울하게 침전된 너자의 얼굴에 캔디스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아까보다 작아진 목소리로 무언가를 참듯이 속삭였다.

“내가 그 새끼 모르게 너 숨겨 줄게. 지금은 못 데리고 왔지만 네 작은 친구들도 데려와서, 잘 먹여 살려 줄게.”

“…….”

“…….”

“…….”

너자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다시 눈물을 흘리자 그것을 보고 있던 캔디스의 얼굴이 사정없이 찌그러졌다. 캔디스가 다시금 조여 오는 심장에 제 손을 가져다 대었다.

평소처럼 너자의 의사 따위 묻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을 대로 휘두르면 됐다. 너자가 싫어하든 말든, 그냥 자신의 좆대로 하는 게 캔디스 스와포네인데.

“…그런 표정 짓지 마.”

…이딴 머저리 같은 부탁을 하는 자신이 어이없었다. 마치 사랑에 빠진 머저리 같지 않은가!

“지금 그 새끼 생각하고 있지?”

“…….”

항상 제 주위에 사람이 넘쳐났다. 남녀 불문하고 모든 이들이 자신의 관심을 받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서 캔디스는 항상 제멋대로 사람을 휘둘렀고 그런 자신을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밀어내는 너자의 모습에, 자신을 질색하는 너자의 모습에 애가 탔고,

“울지 마.”

자신을 보며 맥켄지를 떠올리는 너자가 안타까웠다. 그래, 미운 게 아니라 안타까웠다. 저를 보며 웃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아니 웃는 것은 꿈도 안 꿨다. 그냥… 도노반 그 좆같은 놈이 너자에게 심한 말을 했을 때, 제가 덩그러니 서 있는 너자의 손목을 부여잡고 그곳에 벗어났었을 때, 한순간 저를 의지하는 것처럼 응시했던 그 눈이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캔디스가 너자의 가슴에 무너지듯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제발 울지 마.”

부정맥이 도진 것 같았다.

지금껏 마차에서 지껄이는 것은 캔디스밖에 없었다. 그가 입을 다무니 거칠게 흔들리는 바퀴와 마차를 끄는 말의 힘찬 투레질 소리, 그리고 마차를 호위하는 스와포네 코퍼레이션 그룹의 정예 기사단의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콰앙!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크게 났다.

비아가 숙연히 제 주인을 응시하던 것을 멈추고 마차의 창문을 열어 물었다.

“무슨 일이지?”

비아의 말에 기사가 말했다.

“도노반 후작 성에서 난 소리입니다!”

기사의 우렁찬 소리에 너자의 몸이 움찔거렸다. 비아는 곁눈질로 노예가 발작하듯 몸부림을 치는 것을 힐끔 보고 기사에게 이를 갈며 말했다.

“이 눈치 없는 새끼….”

“…예?”

“이따 공작 성에서 보자… 새끼야….”

억울하다는 듯 입을 크게 뻐끔거리는 기사를 노려보던 비아가 마차의 창문을 거칠게 다시 닫았다. 숙였던 몸을 다시 마차 안에 집어넣은 비아의 귓구멍에 너자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 도노반 후작 성에서 난 소리야?”

“…….”

너자의 말에 비아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런 비아를 너자가 절박한 눈으로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너자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던 캔디스가 말했다.

“어. 맞아. 그 새끼 집 터졌나 보네.”

“안 돼!”

“도련님!”

비아가 캔디스의 말에 발작하듯 소리를 질렀다. 그의 눈이 캔디스의 뒤통수를 보며 일그러졌다. 거, 가만히 있지 왜 노예를 자극합니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어지지 못한 말이 그의 입안에서 맴돌았다.

너자는 캔디스의 말에 애가 달아 미칠 것 같았다. 너자가 겪어 봐서 안다. 그 정도 폭발이면 정말 큰 폭발이고 공격이었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분명 워린은 붙잡… 아니, 아까 그 하얀 섬광이 있었잖아. 워린의 잔당이 남아서 맥켄지를…!

몹시 혼란스러운 머릿속에 캔디스의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워린 에르베 짓이야.”

“…하지만…!”

“이 폭발도, 아까 그 하얀 섬광도 모두 워린 에르베의 짓이야. 그놈의 잡히지 않은 부하들이 꾸민 일일 거야.”

캔디스의 말에 비아와 메이엄이 입을 꽉 다물고 캔디스를 응시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믿을 정도로 확신에 찬 목소리였고 탄탄한 구성이 있는 거짓말이었다. 그들은 물이 흐르듯 거짓말을 내뱉는 캔디스의 저의를 짐작하려 애썼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을 내뱉은 캔디스가 다시 말했다.

“아까 뒤에서 상황을 봤는데, 워린의 부하 레너드. 그놈은 그 자리에 없던데.”

“…!”

너자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그 재수 없는 놈이 보이지 않았다.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리는 너자에게 캔디스가 힘없이 말했다.

“…너도 알 거야. 워린이 데리고 있는 부하 중 그 새끼가 제일 잔인하고, 제 주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놈이지.”

“…….”

“놈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온몸에 폭탄을 두르고 맥켄지에게 달려갈지도 모르지. 같이 폭사하려고.”

“아… 안 돼!”

절망으로 뒤덮인 너자의 목소리를 음미하듯 듣던 캔디스가 말했다.

“네 작은 친구들도… 무사하진 않겠지….”

너자가 과호흡을 일으켰다. 그는 두려웠다. 맥켄지가 정말 자살 테러에 휘말릴까 봐, 겨우 찾은 어린아이들이 죽어 버릴까 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는 지금 캔디스에게 잡혀 억류되어 있었고 맥켄지는 자신의 원수였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아직 도노반 후작 성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왜 리마가….

너자가 생각을 하다 말고 자신의 입에 입술을 맞댄 캔디스에 질색하며 고개를 비틀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다시 강간하려고 한다면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캔디스는 너자의 거부에 순순히 몸을 뒤로 물렸다.

“…?”

캔디스는 지금껏 자신의 거부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너자가 놀란 눈으로 캔디스를 응시하자 캔디스가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다시 한 번 물을게.”

“…….”

“맥켄지가 아직도… 좋아? 널 지옥에 쑤셔 넣은 새끼인데? 네 작은 친구들을 감옥에 처넣어 가둔 새낀데?”

절절한 캔디스의 목소리에 너자가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 생각을 고르듯 숨을 크게 쉴 때, 다시 한번 큰 굉음이 들렸다. 복잡했던 너자의 생각이 한순간에 지워졌다. 너자가 눈을 번뜩 뜨며 말했다.

“용서할 수 없어.”

“…그럼….”

“하지만….”

“…….”

“그가 죽는 것도 싫어.”

너자의 한심한 말에 캔디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 캔디스에게 너자가 자신에게 말하듯 단호하게 말했다.

“살릴 거야. 그리고 나한테 평생 미안하게 만들 거야.”

“…….”

“그리고 물어볼 거야. 내 어린 친구들한테 무엇을 시켰느냐고. 강제로 시킨 것인지, 아니면 애들이 자발적으로 한 것인지.”

“…하.”

노예는 여전히 물러 터졌다. 캔디스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하긴, 그러니까 제국 아카데미에 있을 때도 강간마인 자신이 곁에 있어도, 그렇게 못되게 굴어도 거북한 얼굴만 할 뿐 저를 증오하지 않았다.

도노반이 없을 때 친한 척 너자에게 가 말을 걸었을 때도, 자신의 이름을 말하니 순진한 얼굴로 이름과 행동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웃음을 지었다. 세 치 혀로 너자를 꼬드겨 사흘간 학대하며 따먹었다. 그로 인해 전날처럼 자신을 보며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던 너자가 아쉬워 입속에 항상 가지고 다니던 캔디를 집어넣어 줬을 때도, 입에 퍼지는 단맛에 토끼처럼 놀라 자신을 바라보았다.

도노반에게 노예를 잃어버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정말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 당장 자리를 뛰쳐나가 너자를 찾고 싶었다. 얼마나 무서울까.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애인데 잔악하기로 소문난 록시의 노예 밀매 조직에 끌려갔으면 어쩌지?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었다.

“…….”

그 순진한 눈이 좋았다. 헛소리를 따박따박 하며 제게 말대꾸를 하는 엉뚱함이 좋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너를…….

캔디스는 시원하게 인정했다. 그는 경험 많고 자신에게 솔직한 스와포네 공작 가문의 하나뿐인 외동아들이었다. 그래, 너자의 몸만을 원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자를 임신시키고 싶다고 생각했다. 임신시키면 완전하게 자신에게 귀속되니까, 제 침대를 데울 정부로 두려고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캔디스가 눈을 감고 조용히 계산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눈을 뜨고 자신을 도와 달라는 듯 응시하는 너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도와줄게.”

도련님! 제정신입니까! 비아가 결국 입 밖으로 비명을 질렀다. 고작 저 노예를 가지려고 캔디스는 도박을 했다. 베타미 황제에게 도노반 후작 가문을 도와주겠다 약조했는데 도노반 후작 가문을 배신했다. 워린과 이중 계약을 했다. 이것이 베타미 황제의 귀에 들어가면 황제 모독죄로 크게 벌을 받을 게 분명했다. 거기에 메이엄을 이용해 도노반 후작 가문의 장자와 가주를 죽인 범죄자인 워린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그런데!

캔디스는 자신에게 빽 소리를 지르는 비아를 무시하고 자신을, 그때와 같이 자신을 의지하는 것같이 바라보는 너자의 순진한 눈에 비뚤어진 마음을 숨기며 근사하게 웃어 보였다.

“내가 도와줄게.”

그의 시커먼 마음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 아름다운 눈을 기만하며 생각했다. 포기하는 게 아니다. 기회는 언제나 있었다. 언젠가 저 맹목적인 사랑이 제게 오게 할 자신이 있었다.

스와포네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 준다.

캔디스가 너자에게 말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

조건이 있다는 그의 말에 너자의 눈이 떨렸다. 캔디스가 도움의 대가로 궤짝에 금을 가득 담아 달라고 요구해도 그는 정말 빈털터리였다. 그는 가진 게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남들보다 크고 힘이 센 몸뚱이밖에 없었지만, 그 몸뚱이도 이제는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그나마 할 줄 아는 것은 다리를 벌리고 사내의 자지를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었다.

캔디스가 요구하는 것은 뻔했다. 캔디스는 이상하게도 자신의 몸을 무척 좋아했다. 너자의 처음을 가져간 것도 캔디스고 맥켄지에게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너자를 취했다. 그는 더는 남에게 억지로 갈취당하고 싶지 않았다.

하기 싫다. 하지만 해야 했다. 캔디스는 귀한 집안의 영식이었고 그가 너자에게 물질적인 것을 달라고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너자의 눈이 비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캔디스는 그런 너자의 얼굴을 보며 작게 속삭였다.

“날 싫어하지 말아 줘.”

“…뭐?”

너자가 머리를 세게 맞은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캔디스를 바라보았다. 그런 너자에게 캔디스는 꾸며낸 것같이 슬픈 얼굴로 그의 턱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가끔 내가 널 찾아가도….”

“…….”

“도망가지 말아 줘.”

처연하리만치 힘이 없는 캔디스의 목소리에 너자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너자가 멍청하니 눈을 깜빡이다 저도 모르게 물었다.

“고작 그거야?”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물어오는 너자에게 캔디스가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 그거면 돼.”

“…….”

그의 머릿속에는 너자를 꼬실 방대한 계획이 몇십 가지나 있었다.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원래, 

더 사랑하는 쪽이 아쉬운 것이다.

스와포네 코퍼레이션 그룹의 마차는 다시 도노반 후작 성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너자는 거칠게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불안한 눈으로 입을 꾹 다물고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도노반 후작 성에 가까워질수록 후작 성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더욱 커졌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캔디스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너자의 정강이에 발을 슥 가져다 대 마치 희롱하듯 위로 쓸었다.

“뭐… 뭐하는…!”

“너 말이야.”

기겁하는 너자에게 캔디스가 제 발끝에 걸려 위로 올라간 너자의 검은색 바지 때문에 드러난 그의 얇은 발목을 핥듯이 보며 말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가서 뭐 하려고?”

“…….”

“위험하니까 기사들만 보내자고.”

캔디스의 말은 지당했다. 처음 캔디스는 제 기사 중 한 명에게 스와포네 공작 가에 한시라도 빨리 달려가 지원요청을 하고 제1대대 기사 중 넷만 남기고 도노반 후작 성으로 지원 사격을 보내, 상황이 끝나면 도노반 후작 성으로 갈 계획이었다. 아무리 비아가, 메이엄이 있다 하더라도 워린은 결코 허투루 볼 놈이 아니었다. 재수 없이 휘말리면 그냥 세상 하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 명령하는 캔디스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아니야, 내게 말을 빌려줘. 나도, 나도 갈 거야.

-제정신…인가?

-제발….

캔디스는 저를 바라보며 애절하게 비는 너자를 한참을 응시하다 한숨을 쉬며 비아에게 말했다.

-우리도 간다.

-도련님!

물론 비아의 울분에 찬 비명도 덤이었다. 아직도 비아는 숨을 거칠게 쉬며 너자를 노려보았다. 저 찢어 죽일 남창 새끼 때문에 제 주인이 위험의 구렁텅이로 제 발로 들어가는 것이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상황을 제 주인이 만들기는 했다.

그냥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여태 가자미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비아에 너자가 말했다.

“미안, 너까지 위험하게 만들어서… 나만 가면 되니까… 그냥 말 한 필만….”

“그러니까 어떻게 할 작정이었냐고.”

퉁명스럽게 묻는 캔디스에게 너자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지만, 그 속에 담긴 걱정에 너자의 목구멍이 간지러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너자와 캔디스는 수없이 몸을 섞었고 몸을 섞은 자들만의 묘한 유대감이 있었다. 비록 그들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

…캔디스가 위험 속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거기에 캔디스와 맥켄지는 사이도 좋지 않았다. 대가도 받지 않고 자신을 도와주려는 캔디스에게 너자는 너무 미안했다.

일이 이만큼 커진 것이 캔디스의 탓인 걸 모르는 너자가 죄책감에 작게 중얼거렸다.

“총알 두어 방 맞아도 안 죽으니까….”

많이 맞아 봐서 알아….

그러니까 맥켄지 대신 총알받이가 될 생각이라는 말이었다. 캔디스는 어처구니가 없어 잘생긴 이마를 사정없이 구겼다. 여전히 미련했고 대책 없는 야만인이었다.

캔디스가 한숨을 쉬며 제 뒤쪽 허리춤에 걸린 작은 가죽가방을 떼어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너자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가죽가방을 쥔 커다란 손이 너자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너자가 학습된 공포감에 몸을 움츠리며 그를 피하려 할 때 캔디스가 아이를 어르듯 숨소리를 길게 냈다.

“쉬….”

“…….”

“괜찮아. 이상한 짓 안 해.”

그의 목소리가 이상하리만치 침착했다. 묘하게 신뢰감이 있는 캔디스의 말에 너자가 차창에 등을 바짝 기대 그를 피하려 몸을 움츠렸던 것을 조금씩 폈다. 캔디스가 조금씩 펴지는 너자의 상체를 조용히 바라보다 가죽가방에 달린 고리를 너자의 바지 고리에 달았다.

너자는 제 허리춤에 묵직하게 달린 갈색의 가죽가방을 응시했다. 가죽가방은 무언가를 감싼 듯 길게 늘어져 있었고 가죽의 똑딱이 덮개 옆에 튀어나온 것은 눈에 익은 그것이었다.

“…….”

“너 총 쏴 본 적 있어?”

캔디스의 질문에 너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고개를 저었다. 그럴 만하지. 캔디스가 가죽 덮개를 열어 그 안에 들어 있는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그의 커다랗고 고운 손에 검은색의 리볼버가 들렸다.

도노반 리피팅 암즈와 스와포네 코퍼레이션 그룹은 서로에게 서로가 최대의 고객이었고 그 어떤 거래처보다 중요도가 높은 기업이었다. 도노반 리피팅 암즈가 스와포네 코퍼레이션 그룹에 물건을 납품해 받는 금전적 수익은 전체 총 수익의 68%였고 스와포네 코퍼레이션 그룹의 매출 71%가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총기류였다.

그래서 두 가문은 매년 친교의 행위로 자신들이 내어줄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서로 교환했다. 올해 도노반 리피팅 암즈에서 갖다 바친 것은 반자동 리볼버였는데 지금껏 나온 리볼버보다 무게가 가벼웠고, 탄환을 끼고 발사할 때 행하는 가스 빼기를 없앴고, 실린더를 돌려가며 장전을 하는 번거로움을 최대한 없앤 리볼버였다. 아마 이것을 초기 모델로 새로운 반자동 리볼버를 개발한다고 하는 것 같았는데…….

캔디스가 알기로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콜맨이 도노반 리피팅 암즈에서 나온 제일 최신 모델이었다. 그것은 오직 스와포네 코퍼레이션 그룹의 수석 대표이자 스와포네 공작 가문의 가주 프럼 스와포네와 그의 후계자 캔디스 스와포네만 가지고 있는 귀한 리볼버였다. 뭐, 또 도노반이 개발했다면 말이 다르지만.

그런 귀한 리볼버를, 캔디스는 고민 없이 너자의 손에 쥐여 주었다. 비아는 마치 도도한 처녀에게 제가 가진 귀한 것을 모조리 바쳐대는 풋내나는 얼간이 짓을 자처하는 캔디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가주가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크게 경을 칠 것이다.

자신을 불손하게 바라보며 헐뜯는 비아를 알지 못하는 캔디스가 콜맨을 억지로 든 너자의 창백한 손을 감싸며 말했다.

“피하지 말고 봐.”

“…….”

“너는 지금 다리 병신에, 제대로 싸울 수도 없는 한심한 놈이야.”

죽창으로 너자의 아픈 곳을 사정없이 찔러대는 캔디스에 너자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워린의 성에서 맥켄지에 의해 탈출되고 처음 그의 휘핑보이로서 제국 아카데미에 왔을 때, 그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투견처럼 싸우는 샬로메와 비아를 한 손에 들어 그들을 떼어냈을 만큼 그는 여전히 근력과 힘이 강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말대로 자신은 다리 병신에 제대로 뛸 수도 없는 한심한 놈이었다.

캔디스는 분한 듯 제 손에 들린 콜맨을 바라보는 너자를 보며 목 안으로 작게 웃었다. 귀여운 새끼. 그가 말했다.

“이걸 써.”

“…….”

캔디스도 안다. 너자의 부족은 도노반 리피팅 암즈가 계획하고 스와포네 코퍼레이션 그룹의 원조로 실행된 대륙학살의 희생양이었다. 이 총으로 너자의 친구들이, 이웃들이 모조리 죽었을 것이다. 마치 악마가 들린 흉악한 물건을 손에 쥔 듯 몸서리를 치는 너자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 무섭겠지. 하지만 이걸 써야 해. 너는 제대로 걷지도, 뛰지도 못하니까.”

“…….”

“하지만 이걸 쓰면 돼. 장거리에서, 몸을 숙이고… 죽이는 거야. 그 되먹지 못한 폭도들을.”

캔디스의 달콤한 말에 너자가 자신의 손에 들린 콜맨을 응시했다. 캔디스가 그 모습을 보다 손을 들어 너자가 콜맨을 제대로 쥘 수 있게 교정해 주었다.

마차가 멈추었다. 도노반 후작 성과 불과 4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스와포네 코퍼레이션 그룹의 기사가 솜씨 좋게 마차를 수풀이 우거진 곳에 숨기듯 정차했고 마차를 호위하던 기사들이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마차가 열리며 너자와 캔디스, 메이엄과 비아가 차례로 내렸다. 그리고 기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몸을 숨겼다. 그들은 제1대대의 기사들로서 실력이 제일 좋았고 노련했다.

그들은 수풀이 우거진 곳에 몸을 숨기며 동태를 확인했다. 그들은 손에 들린 장검을 발도해 언제든 공격할 수 있도록 자세를 고치며 조심스럽게 도노반 후작 성 안으로 진입했다.

너자도 그들을 따라 도노반 후작 성 안으로 진입하려고 할 때 그의 뒤에 서 있던 캔디스가 너자를 수풀 사이로 숨겨 껴안듯 품에 가두는 양팔을 넓게 벌려 너자의 팔뚝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들의 덩치는 서로 엇비슷해 서로의 몸이 겹쳐졌다. 무슨 짓이야! 너자가 이 와중에 희롱을 하려는 캔디스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캔디스의 양손이 콜맨을 들고 있는 제 양손을 감싼 것에 반항을 멈추었다.

너자의 귓속에 캔디스의 낮은 목소리가 속삭여졌다.

“활 쏴 본 적 있어?”

“…응.”

“그것과 비슷할 거야. 자….”

저기 보여? 에르베의 부하야. 운 좋게도… 혼자 떨어져 있네.

사실 캔디스는 총을 갈기는 것보다는 스피어를 찌르거나 장검을 휘둘러 사람을 베는 것에 익숙했고, 또 즐겨 했다. 하지만 그는 스와포네 공작 가문의 예비 가주로서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소양의 사격술 또한 맥켄지보다는 못했지만, 꽤 잘하는 편이었다.

너자의 양손을 감싸 깍지를 낀 캔디스가 팔을 들어 올렸다. 그에 너자의 팔도 그의 손에 이끌려 들어 올려졌다. 뒤에서 조종하는 캔디스의 손길은 무척이나 부드러웠고, 너자의 귓가에 조용히 내뱉는 캔디스의 숨결은 뜨거웠다. 그 이상한 느낌에 너자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 캔디스가 말했다.

“이 느낌을 기억해.”

“…….”

“그래, 엄지로 콜맨 위에 달린 해머를 내려. 옳지. 그리고… 실린더를 반대쪽 손으로 돌려, 딸깍 소리가 나도록. 그리고 네 검지에 걸린 그것… 그걸 방아쇠라고 하는데….”

“…….”

“자… 한쪽 눈 감고… 저놈의 대가리를 조준하고… 방아쇠를….”

“…….”

“당겨!”

캔디스의 속삭임에 너자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에 탕! 하고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너자의 몸이 반동으로 뒤로 밀렸다. 하지만 뒤에서 그를 단단히 잡고 있는 캔디스 덕에 너자는 꼴사납게 엉덩이를 찧지 않았다.

너자는 손끝에 느껴지는 파동과 독한 연기 냄새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리고 그 괴물 같은 것을 자신이 사용했다는 죄악감과,

“잘했어. 처음인데 이 정도면 훌륭하지.”

“…….”

제가 쏜 총알에 워린의 기사가, 자신의 부족을 멸망시킨 것에 공조한 놈이 게거품을 흘리며 어깨를 쥐어 잡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에, 

“어때, 기분 최고지?”

“…….”

“이게 손맛이라고 하는 거야. 도노반 새끼들, 어떻게 이딴 걸 만들어 놨는지.”

너자의 눈이 묘한 고양감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캔디스가 걸음을 옮기자 사방에 진을 치듯 몸을 숨겼던 스와포네 코퍼레이션 그룹의 기사들이 함께 은밀히 움직였다. 메이엄과 비아는 캔디스의 양옆에 딱 붙어 그를 지키듯 몸을 긴장시켰다. 잔뜩 긴장해 사방을 훑는 제 기사들을 바라보던 캔디스가 너자에게 말했다.

“아까 그 빛, 그건 그로기라고 하는데 그 빛을 쐬면 한 시간 정도 몸을 움직일 수 없고 심한 경우엔 간질을 앓듯 쓰러져.”

“…….”

“보통 사람이라면 그랬지만, 기사들에겐 정신력이 있어서 그렇게 오래 그로기 상태에 걸리지 않는다고 해. 아마 워린 쪽도 마찬가지겠지. 그리고… 도노반 리피팅 암즈 놈들도 마찬가지일 테고. 내가 알기론… 흠… 아마 외곽 쪽으로 도망갔거나 아니면… 의외로 아직 후작 성에 남아서 몸을 숨기고… 놈의 숨통을 끊어 버릴 것을 고대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너자가 눈을 또륵 굴려 캔디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을 꺼내려고 할 때, 캔디스가 저를 보고 자신의 입가에 검지를 댔다. 마치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 같은 그의 행동에 너자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때였다. 쾅! 다시 한번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고 폭발의 여파로 강한 돌풍이 들이닥쳤다. 폭발은 너자와 캔디스 일행이 있던 곳 근처에서 터졌는지 그 충격 여파가 그들을 집어삼켰다.

그들이 있던 곳은 도노반 후작 성의 시종들이 이용하는 숙소였는데, 숙소의 반이 날아가 건물이 와르르 무너졌다. 바로 근처에서 커다란 건물이 무너져 돌조각이 사방으로 튀는 탓에 근처에 있던 너자와 캔디스 일행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메케한 검은 연기와 여기저기에서 쏟아지는 잔해에 너자가 한쪽 손으로 입을 막고 몸을 숙이는데, 저 멀리서 눈이 부신 플래티넘 블론드의 남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너자의 몸이 본능적으로 남자를 쫓았다. 연기 탓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허리쯤에서 찰랑거리는 금사 같은 머리카락에 사슴처럼 호리호리한 몸을 가진 남자는 맥켄지밖에 없었다.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캔디스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로 너자가 홀린 듯이 뜀박질을 시작했다. 그의 발목이 비명을 질러대며 제발 뛰지 말라고 아우성쳤다. 하지만 너자는 멈출 수 없었다.

“안 돼…!”

짧은 블론드의 남자가 짐승처럼 달리며 맥켄지의 뒤를 쫓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쫓으면 쫓을수록 총소리가 크게 들렸다. 샬로메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너자가 이를 갈며 그들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성치 않은 다리 때문일까, 아니면 죽을힘을 다해 싸우며 뛰는 그들 때문일까.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탕! 워린의 총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맥켄지의 몸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너자가 입에서 튀어나오려고 하는 비명을 간신히 억눌렀다.

“……!”

“……!”

맥켄지와 워린이 고함을 질러 가며 싸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과의 거리와 사방에서 들리는 폭발 소리와 총소리 때문에 제대로 분간이 가지 않았다. 워린이 맥켄지에게 점점 가까워져 갔다. 너자는 터질 것 같은 심장에 폭발적으로 뜀박질해 그들에게 달려가려 할 때, 워린이 손에 쥔 리볼버를 땅바닥에 거칠게 던졌다. 아마, 총알이 다 떨어진 듯했다.

너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기척을 죽이고 천천히, 물이 흐르듯 몸을 숨기며 그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간혹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너자의 귓가에 들려왔다. 너자가 흡, 하고 몸을 멈추다 전진하다를 반복했다. 너자의 커다란 손에 들린 콜맨이 식은땀에 젖어 갔다.

다행이었다. 메케한 연기와 사방에서 들리는 소음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맥켄지와 워린이 서로 뒤엉켜 주먹질하며 싸우고 있었다. 아니, 일방적으로 워린이 맥켄지를 발로 걷어차며 고함을 질러댔고, 맥켄지는 워린에게 걷어차이면서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며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너자가 몸을 숨기며 그들에게 점점 가까워졌다.

그가 몸을 곧게 펴고 손을 들어 올렸다. 너자의 손에 잡힌 콜맨이 잘게 떨렸다.

그의 귓가에서 맥켄지를 죽이고 부족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이미 죽은 친구들이, 이웃들이 속삭였다. 둘 다 대가리를 깨 버리고 어린것들을 데리고 도망치라 말했다.

“제발 조용히 좀 해….”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에서 맥켄지를 죽이면? 도노반 가문은 높은 계급의 일족이었고 제국의 황제와 나란히 설 정도의 권력이 있었다. 이 싸움은 워린이 일으켰지만 둘 다 죽일 경우 재수가 없으면 자신이 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뒤집어써 수배가 내려질 수 있었다. 어린것들을 데리고 제국의 전사들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한심하게도 너자는, 맥켄지가 죽지 않았으면 했다. 너자는 아직도 맥켄지를…….

“누구 좋으라고….”

죽으면 끝이다. 그가 죽으면, 자신의 원망은 누구에게 향해야 하는 것일까? 다리 병신인 자신이 어린것들을 데리고 온전히 살아갈 수 있을까?

“죽게 내버려 둘 것 같아?”

어떻게든 살릴 것이다. 보상받아야 한다.

사실 자신 없다. 너자가 총을 쏴 본 것은 아까 캔디스가 도움으로 한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항상 먼 발치에서, 화이트들이 총을 쏴대며 제 친구들을 죽이는 것만 보았다.

맥켄지와 워린은 서로 뒤엉켜 엎치락뒤치락 움직였다. 재수 없으면 이 총알이 맥켄지의 머리를 터트릴 수 있었다.

…몸이라도 온전했으면 맨손인 워린 따위 제압하는 것은 쉬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몸을 이렇게 만든 것은 맥켄지였다. 그의 억눌린 분노가 천천히 타올랐다.

너자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에 힘을 줘 몸의 떨림을 멈추었다. 이 정도 거리는 위험할 것 같아 그들에게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분노에 이글거리던 맥켄지의 호수 같은 파란 눈동자가 너자를 발견한 듯 크게 떨렸다. 너자가 왼손을 들어 자신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워린은 맥켄지가 몸을 움찔거리자 자신에게 흠뻑 두들겨 맞아 힘이 빠진 줄 알고 킬킬 웃으며 맥켄지의 몸에 올라타 그의 가느다란 목에 양손을 쥐었다.

“큽…!”

너자가 콜맨을 쥔 손을 조준했다.

워린이 맥켄지의 목을 강하게 졸랐다. 맥켄지가 숨을 급하게 들이쉬었다. 하지만 너자와 눈을 맞춘 것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손을 바들거리며 올리고 검지를 밑으로 까딱였다.

“…….”

너자가 맥켄지의 눈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콜맨을 쥔 손을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새끼야, 뒤져! 뒤지라고!”

맥켄지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리고 켁켁거리며 잠시 눈을 까뒤집었다. 곧 죽을 듯 눈을 감은 맥켄지에 너자가 콜맨의 방아쇠를 당기려고 할 때 맥켄지가 손을 활짝 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눈을 떠 검지를 위로 올렸다.

너자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맥켄지의 수신호에 따르기 시작했다. 맥켄지의 파란 눈의 실핏줄이 터져 시뻘겋게 변해갔다. 한 시간 같은 몇 초가 흘렀다. 그리고.

맥켄지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탕!

단단한 과일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맥켄지의 피멍이 든 얼굴에 피가 쏟아졌다. 부족했던 산소가 그의 폐를 가득 채우며 생명력을 돋워 주었다. 맥켄지가 눈을 감고 미친 듯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너자가 손에 콜맨을 꽉 쥔 채로 그에게 맹렬히 달려가 그의 위에 엎어진 워린을 한순간에 들어 옆으로 던졌다. 맥켄지를 닮았던 아름다운 얼굴의 반이 없어진 시체는 반항 없이 옆으로 굴렀다.

“맥… 맥….”

너자의 눈에 그 예쁜 얼굴이 워린의 발에 걷어차여 엉망으로 다져진 게 보였다. 너자가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숨을 크게 내쉬었다.

장점이라곤 저 예쁜 얼굴밖에 없는데…….

그의 하얀 목에 시퍼런 손자국이 둘러져 있었다. 너자가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맥켄지의 목에 손등을 가져다 대 부드럽게 마사지하듯 어루만졌다. 그의 조심스러운 손길에 맥켄지가 기침을 하다 말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도 조르려고?”

“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고함을 지르려던 너자가 맥켄지의 가느다랗고 하얀 손가락이 자신의 손을 감싸는 것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맥켄지의 호수 같은 파란 눈동자가 일렁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그 예쁜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졸라도 돼.”

여상한 목소리였다. 너자가 숨을 멈추고 맥켄지를 응시했다.

맥켄지가 자신을 응시하는 너자를 바라보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손바닥에 느껴지는, 뼈가 불거진 너자의 손등을 꽉 잡으며 말했다.

“울지 마… 왜 우는 거야?”

“…….”

“날 죽이라고 하면… 기뻐할 줄 알았는데.”

맥켄지의 슬픈 목소리에는 꾸밈이 없었다. 맥켄지는 대꾸 없이 자신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너자를 바라보며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울지 말래두….”

“…나 안 울어. 내가 왜 울어?”

허세를 부리듯 잔뜩 고양된 너자의 대꾸에 맥켄지가 슬픈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너자는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보는 맥켄지를 견딜 수 없었다. 지금껏 꾹꾹 눌러 왔던 무언가가 그의 안에서 폭발했다.

“하여간 제멋대로야, 너는 왜 이렇게 사람이 못됐어?”

“…….”

“혼자, 혼자 그렇게 정하면 내가 좋다고 네 목을 조를 줄 알았어?”

너자가 제 손을 감싸는 맥켄지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 다시 그의 아름다운 손을 꽉 쥐며 말했다.

“너는 나한테 죽을 때까지 나한테 미안해해야 해. 전쟁을 추진해서 내 부족을 몰살시킨 거, 나를 캔디스한테 팔아넘긴 것, 나한테 막말한 거, 내 다리 부러뜨린 거, 내 어린 친구들… 아니, 대체 왜 걔들을 지하 감옥에 가둔 거야? 그 어린애들한테 대체 뭘 시킨 거야? 왜 사람을 짐승처럼 가둬 놔!”

억울하다는 듯 외치는 너자에게 맥켄지가 조용히 말했다.

“…처음 네 친구들을 잡아 오라고 명령한 것도, 그 지하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한 것도 나야.”

“…….”

“그 애들을 볼모로 잡아 네가 도망가려고 할 때, 협박하려고 가둬 놓은 거야.”

이 나쁜 새끼! 너자가 주먹을 쥐어 맥켄지의 어깨를 꽝 하고 쳤다. 워린에게 맞은 것보다 더 아팠다. 맥켄지가 너자에게 얻어맞은 어깨를 쥐며 말을 이었다.

“그래, 처음엔 그 용도였어. 너를 쥐고 흔들려면 걔네와 말은 통해야 할 것 같아서 글을 가르쳤다. 그런데 대강 글을 익힌 네 작은 친구 중 제일 큰 계집아이가 협상을 시도하더군.”

“…….”

“바로 죽이지 않고 먹을 것을 주고 교육을 시키는 것을 보면 우리가 필요한가 보다고, 더 도움이 될 테니, 당신이 원하는 바를 알려 주면 무조건 그 일을 수행할 거라고. 그리고 그 일을 수행하고 너한테 우리가 도움이 되었다면 우리를 지하 감옥이 아닌 지상으로 올려 줘 자신들을 사용하라고.”

“…리마….”

너자가 탄식을 내뱉듯 리마를 부르자 맥켄지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똘똘한 친구더군. 그래서, 이용했어.”

“…….”

맥켄지의 말에 너자가 한숨을 깊게 쉬며 중얼거렸다. 그래, 걔는 예전부터 그랬어. 어른인 나보다 의젓하고 똑똑했어. 그런 너자의 중얼거림에 맥켄지가 목 안으로 쓴웃음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내 욕심 때문에 너를 슬프게 해서 미안해….”

“…….”

“구해 줘서 고마워.”

속삭이듯 말하는 맥켄지에 너자가 한동안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자신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맥켄지에게 말했다.

“네가 증오스러워.”

“…….”

분노가 밴 너자의 목소리에 맥켄지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져 왔다. 너자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만으로도 살기 싫었다. 항상 총명하게 빛났던 맥켄지의 눈이 흐려졌다.

그 눈을 응시하던 너자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 어린 것들을 이용한 죄도 받아야 해. 아득바득 받아낼 거니까 각오해.”

“…!”

맥켄지의 흐리게 빛나던 맥켄지의 눈이 순식간에 총명함을 되찾았다. 자신을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맥켄지에게 너자가 이를 갈며 말했다.

“책임져.”

“…너자….”

“그 애들한테 미안하다고 사죄해. 그 애들을 지하에 가두지 말고 지상의 성에 지내게 만들고 제대로 된 교육을 시켜 줘. 맛있는 것도… 윽!”

너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책임… 책임질게. 내가 다 책임질게.”

“…….”

“나 가진 거 돈밖에 없어. 다 내가 책임질 수 있어.”

“…….”

맥켄지는 너자가 하나뿐인 동아줄인 듯 그를 절실하게 끌어안았다. 너자는 아직도 남아 있는 앙금에 맥켄지를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콧속에 맡아지는 맥켄지의 냄새에,

“…두고 볼 거야.”

그 또한 절실하게 맥켄지를 끌어안았다.

여백 없이 서로를 끌어안은 그들의 머리맡 위로 여명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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