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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시대-2화 (2/159)

2화

과장은 정장을 걸치고 박기범과 같이 건물 밖을 나갔다. 이 근처에 위치한 은행본점을 돌아다니며 자금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모색했다. 자금부 금고에서 꺼낸 통장과 인감을 몸에 지닌 과장은 제일먼저 주거래은행인 고려은행을 찾아갔다. 본점 3층. 기업뱅킹 업무본부.

“여. 김 과장님. 오셨습니까?”

고려은행 기업뱅킹 담당자인 최 철 대리는 반가운 목소리로 그를 맞이했다.

“이쪽은 우리 신입사원 박기범 군이에요. 인사드리지.”

“처음 뵙겠습니다. 박기범입니다.”

그가 꾸벅 인사를 하자 최 대리도 인사를 했다.

“오늘 첫출근이거든. 아직 명함이 안 나와서.”

짧게 김 과장이 말을 했다.

“아니. 첫날부터 은행 돌아다니게 시켜요?”

최대리가 말하자 김 과장이 말을 받았다.

“당연하지. 월급은 뭐 공짜로 주는게 아니잖아.”

최 대리는 의자에 앉자마자 자기 책상에 가득 쌓인 서류를 뒤적이더니 김 과장이 은행에 찾아온 의중을 한 번에 알아차린 듯 했다.

“그런데 어쩌죠? 저희도 대출연장이 힘들어요. 뿐만 아니라 신규대출도 힘들고요. 이자가 천정부지로 치솟거든요. 저희가 잘해드리고 싶지만 그게 어려워요. 아시잖아요. 재무부가 허락을 하지 않는 한 특혜융자는 불가능해요.”

“그럼 팔공그룹은?”

김 과장이 흥분된 목소리로 말하자 최 대리가 흥분을 진정시키라는 듯 타이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실만한 분이 왜이러실까? 거긴 재무부의 특혜융자를 늘 받는 곳이에요. 이번에도 저희은행에 와서 120억 원 특혜융자 받아가셨어요. 금리가 무려 13%. 대단한 특혜융자죠? 무등 그룹은 이번에 120억 원 빌리려면 이자가 26%입니다. 현행금리가 솟구치는데, 별 수 있겠어요?”

“말도 안 돼. 26%라니. 이자비용이. 그건 있을 수가 없잖아. 아무리 지금 오일쇼크고 경제가 어렵다고는 해도 솔직히 18%이자면 4년이면 빌린 돈이 갑절이 된다고. 26%면 2년 반만에 120억이 240억이 되는데? 우리 파산해요. 그러면.”

“어쩔 수가 없어요. 재무부와 한국은행이 돈을 찍어서라도 유동성공급을 해서 기업들에게 어떻게든 자금을 융통시키려고 하고 있죠. 재무부, 한국은행 다 미친년 널뛰기하듯 뭔가 하려고 한다만, 뭐 옛날에도 그랬듯이 무등그룹에게 돌아갈 혜택은 없는 것 같아요. 그 혜택은 뭐 팔공그룹이 가져가겠죠.”

팔공그룹은 특혜융자를 받는다는 말에 의구심이 난 박기범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특혜융자라는게?”

“아. 그거요? 말 그대로 특혜융자입니다. 실제 대출금리보다 더 싸게 은행에서 대출을 해주는 거죠. 물론 그렇게 되면 은행은 손실을 볼 수도 있지만 그 경우 그 손실분은 정부가 다 메워주니 은행으로서는 아무 손해가 없죠. 그리고 그 특혜융자를 받으려면 재무부와 관계가 깊어야 하죠. 아니면 정치가에게 많은 돈을 주던가. 무등그룹은 재계에서도 유명해요.”

최 대리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정치인에게 돈 한 푼 안주고, 미움을 산데다가 사장님이 광주 사람이죠? 뭐 이건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대한민국 1등국민은 대구와 경북지역 주민인데 거기에 기반을 둔 팔공그룹은 언제나 특혜융자를 받는 거죠. 한국경제가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된다고 하더라도 광주. 전남에 기반을 둔 무등 그룹에게는 떡고물 하나 주지 않겠다 이거죠. 그래서 무등그룹은 정부주도 관급공사나 사업입찰에서 철저하게 배재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공장을 하나 짓는데 상공부의 허가가 너무 까다롭죠.”

길게 설명을 한 최 대리는 김 과장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은행 측도 알아요. 무등그룹의 사업이 더 탄탄하다는 거. 수출로 돈을 벌고, 외국에서는 팔공그룹을 잘 몰라도 무등그룹의 신용을 더 높게 쳐주죠. 물론 그래봤자 어차피 외국에선 돈을 못빌리지만. 헌데 정부에서는 융자를 허가해주지 않으니까요.”

“그럼 방법이 있을까요? 국내은행이 다 거절한다면?”

“방법은 하나.”

이 말에 김 과장도 귀를 기울였다. 혹시나 비책이 있을까하는 눈치였다.

“해외차입입니다.”

“해외차입? 최 대리. 웃기지 말라고. 국내 최대 대기업인 현대 그룹이나 삼성 그룹도 해외차입이 아주 어려워. 잘해야 국내 은행보다 금리가 3%정도 낮은 수준으로 밖에는 빌리지 못해. 그래도 일본이나 미국 대기업보다는 몇 배의 이자부담을 떠않는다고.”

최 대리는 그렇게 자신의 말에 반박을 하는 김 과장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돌려 수많은 서류와 두꺼운 책자를 잠시 뒤적이더니 기업금리에 관해 인쇄된 작은 책자를 하나 꺼내서 펼쳐보았다.

“아니 그럼. 미국이나 일본의 대기업과 같은 이자부담을 떠안는걸 기대했단 말입니까? 일류기업인 미국의 GM이나 일본의 미쓰비시와 같은 은행이자를 적용받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GM의 매출액이 얼마나 되는데요. 요즘 선진국의 대기업은 우리나라 경제규모보다 더 커요. 김 과장이 너무 무등그룹을 과대평가 하시는군.”

그는 자기 책상에 놓인 찻잔을 들어 차를 한모금 마셨다.

“현재의 무등그룹은 국내에서는 신용등급이 트리플 B거든요. 그런데 국내 B급은 외국에서 아예 쳐주지도 않아요. 국내에서는 트리플 A를 받는 굴지의 대기업들도 일본 가서는 겨우 정크본드를 유지할까 말까인데.”

“그렇게 말하고도 부끄럽지 않아? 어차피 안 된다는 거지.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뭐 저희도 할 수 있는 한 만기연장은 하겠지만 기대는 하지 마세요.”

“그래. 뭐 잘 알았어요. 그러면 저기 삼국은행은?”

“한국의 은행은 다 재무부와 상공부의 똘마니 일뿐이에요.”

최 대리가 툭 던진 이 말을 박기범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그날 하루 동안 은행을 돌아다니면서 그는 최 대리의 말을 몸소 그것도 아주 뼈저리게 느깔 수 있었다. 주요 은행인 고려, 삼국, 수산 등 주요 은행들은 다 대출연장을 거절했고 그나마 규모가 작은 삼엽, 공주 은행은 대출을 연장해 주었다.

은행과의 치열한 싸움을 일단 마무리 하고 회사로 복귀하자 김 과장은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부장에게 달려갔다. 반면 박기범은 자기 책상에 앉아 읽어야 할 자료와 매뉴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가 자금담당 직원으로서 해야 할 일은 많았고 차근차근 배워야하기 때문에 자리에 앉아 책을 보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타이프용지에 적어 내려갔다. 최 대리의 말을 그대로 옮겨 적고 있을 무렵, 뒤에서 그는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뒤를 돌아다보니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자금부 부장인 황영식이었다.

“아. 부장님.”

박기범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목을 가볍게 숙여 인사를 했다.

“오늘 소감이 어때. 기업 자금부서 직원으로서의 일이.”

미소를 지으며 부장이 말하자 박기범이 바로 답을 했다.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무엇보다 고려은행 담당자의 말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뭐라고 했는데.”

“우리는 특혜금융을 받기가 어려워서 해외차입을 해야 한다고요.”

“말이야 바른말이지. 허나 그게 어디 쉬운가?”

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사 첫날 신입사원이 작성한 문서를 쳐다보았다. 그는 들고 온 종이 한 장을 박기범의 책상에 얹어놓았다. 그 용지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간략한 요약과 읽어야 할 책에 대한 내용을 적어야 하는 공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도 야근을 해야 하는데 자네 이들 서류 작성하는거 다 끝나면 나랑 같이 밥이나 먹고 가지. 그게 더 좋을거야. 괜히 먹고 오면 일을 하기가 싫어지거든.”

“알겠습니다.”

부장의 말에 대답한 후, 박기범은 볼펜으로 적어야 하는 내용을 알차게 적었다. 특히 해외차입에 관한 부분은 빨간색 볼펜으로 글을 써서 언제 보아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최 대리가 말한 그 해외차입이라는 말이 강렬히 귀에 박혔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서류가 작성되었을 무렵, 부장은 다시 박기범의 책상으로 다가왔다.

“다 작성했으면 같이 밥이나 먹지. 다른 직원들은 뭐 벌써 퇴근들을 했군.”

“알겠습니다.”

부장과 함께 회사 문을 나선 박기범은 회사근처에 위치한 작은 식당에서 소주를 곁들이면서 소주를 한잔 곁들이며 저녁을 먹었다.

“일을 해보니까 어때. 신입사원 첫날부터 은행 돌아다니며 자금연장 부탁하는 등 뛰어보니 힘들지 않은가?”

“아닙니다. 할 만합니다. 오히려 고려 은행 최 철 대리님의 말이 귓가에 아직도 생생하게 맴돕니다.”

“그래? 어떤 게?”

“무엇보다도 해외차입을 시도해 보라는 거지요.”

소주를 한잔 쭉 들이키며 부장이 대답했다.

“그 친구 참 재미있군. 그런 말을 할 줄 알고."

“그래서 저도 기회가 되면 해외차입을 해볼 생각입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나중에는 일본이나 미국에서 CP를 발행하거나 현지 은행에서 자금을 조달해보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듣고 황 부장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가 비웃는 것인지 아니면 신입사원의 객기를 보고 웃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주 그 뜻은 대단하지만 얼마나 현실적일지 모르겠군. 확실히 우리가 자금조달 면에서 아주 어려운 현실에 놓여있지. 기업자체가 그다지 우리나라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기업이니까 말이지.”

“하지만 수출비중이 아주 높고 수출로 매출 대부분을 올리는데 왜 환영받지 못할까요?”

“간단하지. 적어도 이 대한민국은 수출로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많은 돈을 정치권에 기부를 하는지, 그 기부액수의 크기가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는 거지. 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의 입맛에도 맞아야 해. 우리 무등그룹은 매출액이나 자산규모로는 나름 일류기업축에 속하지만 국세청이나 정부, 은행에서는 삼류만도 못하게 취급하지. 오죽하면 대구경북지역에 위치한 다 쓰러져 가는 중소기업이 우리보다 대출이자가 쌀까?”

담배를 태우면서 부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변해있었다. 한 기업의 자금담당 부장으로서 그가 해야할 일도 많았고 그가 부담해야할 짐도 많았다.

1935년생인 그는 45살 이라는 나이에 이미 부장을 달았지만 장차 임원으로 승진을 하기 위해서는 이번 제 2차 오일 쇼크로 인한 자금경색을 완전히 극복해야만 했다.

지난 1973년 12월에 터진 제 1차 오일쇼크때 과장이었던 그는 그 당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생각만 하면 몸서리가 처졌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전산시스템도 더욱 구축되지 않은데다가 더 손으로 해야 하는 작업도 많았다.

그런데 그런 일까지 터졌으니 시재를 맞춘다던가 하는 단순작업에 소요되는 시간이 많아 작업이 밀리기도 하는데 오일쇼크로 더 정신없었으니, 그 때 평균 퇴근시간이 자정이었다.

지금도 초유의 사태로 늦게 퇴근하는 날이 많지만 업무의 효율이 높아지고 전산화덕분에 불필요한 작업이 줄어들어 다행히도 자정에 집에 가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조직이 커진 탓이겠지만.

“그러고 보니 자네. 서울대를 나온 인재인데, 보통 삼성이나 현대, 아니면 팔공그룹에 많이 가지 않나? 팔공그룹은 정권의 수혜를 많이 받아서 자금문제도 덜하고 사업이 한결 수월해. 거기 신입사원만 되어도 중앙청 사무관들과 술도 한잔 할 정도지. 반면 우리는 재무부 은행과장하나 만나는 것도 힘들어. 내가 가도 잘 안만나줘.”

그는 소주를 한잔 들이켰다.

“경영지원실 전무님은 가야 과장이 만나주지만 팔공그룹은 신입사원이 과장을 마음대로 만나니 정말 다행이지. 그거 아니? 거기 대리가 재무부 은행국장만나서 특혜융자 받아내기도 했지만 우리는 언제나 시장금리대로 자금조달하고 늘 어려운 환경에 있지. 공장하나 짓는데도 서류가 열 번은 넘게 반려돼. 상공부가 허가를 내주지 않아. 그나마 미국이나 일본기업과 손을 잡으면 상공부도 허가를 바로내주지. 통산성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중앙청 놈들도 알아.”

부장은 자신이 속한 무등그룹의 현실에 화가 난 듯 소주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왜 그렇게 저희회사를 괴롭히는 걸까요? 기업이 해외에 나가서 돈을 많이 벌어야 우리나라가 번성할 텐데요. 과장님 말씀 들어보니 일본이 이렇게 부자나라가 된 것도 기업들이 해외에서 돈을 쓸어 담고 있어서 그렇다고 하시는데요.”

황 부장은 그 말을 듣고 한번 씩 웃고는 안주로 놓인 오징어를 뜯어 입에 넣었다.

“말이야 맞는 말이지. 하지만 내가 방금 전에 말했듯이 우리나라 정치인이나 관료라는 작자들은 우리나라가 잘살고 못살고 하는 거에는 관심이 없어. 자기들 세력이나 자리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돈만 있으면 돼. 솔직히 정치가나 고위관료들은 우리나라가 지금보다 못산다 해도 개의치 않아. 이미 그들은 자동차도 있고, 미국시민권을 가진 자들도 있으니까. 그들은 지금 일본인들처럼 풍요롭게 살거든. 그 누구야 재무부 은행국장은 아내와 아들이 미국시민권자거든. 여차하면 미국으로 가면 돼. 그 전에 있던 은행국장도 7억을 팔공그룹으로부터 받고 문제가 되니까 지난 78년에 미국으로 이민 가던데. LA에서 잘살고 있겠지.”

“7억 원이나요? 어마어마하군요.”

“그래. 7억 이면 무려 144만 달러야. 달러당 환율이 485원이니까. 자. 보라고. LA에 사는 재미교포중에 제대로 된 놈이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고 그래. 전부다 여기서 뇌물 받아쳐먹고 미국으로 날아간 거지. 뭐. 일본이나 중국은 다 독립운동가요, 강제징용당한 사람들인데. 뇌물 받아 처먹고 미국으로 도망간 것들이 나 미국인입네하고 거들먹거리더라고. 정작 미국에서는 백인의 식모 노릇하는 멕시칸들 아파트 청소나 해주는 주제에.”

한심하다듯이 한숨을 내쉬며 부장은 오징어 다리를 더 뜯어 집어 먹었다.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진 후 부장이 재차 입을 열었다.

“지금 시간이 꽤 됐군. 그러니 이제 일어나야지. 집이 어디라고 했지? 영등포? 그럼 국철타고가면 되겠군 그래.”

“네. 지금 가면 딱 시간 맞춰 갈 수 있을 듯합니다.”

“난 집이 수유리 근처라. 나야 택시로 가도 되고. 그럼 내일 보자고.”

“들어가세요. 부장님.”

술자리에서 헤어진 후 박기범은 전철을 탔다. 집에 까지 오는데 고작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는 집에 오자마자 잠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작품의 배경은 1980년초입니다. 이 당시 우리나라는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5%수준의 경기침체를 겪었습니다. 1998년. IMF의 영향으로 -7%를 기록했을 때 국가파산설까지 나돌았으니 가히 그 영향을 알만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당시에는 정부의 입김이 매우 강해서 20대 중반에 고시를 통과해 관료가 되면 대기업 전무나 사장한테도 반말을 찍찍 갈겨대던 시대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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