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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시대-1화 (1/159)

1화

1980년 1월 3일 오전 7시 45분.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청년이 양복을 차려입고 종로에 위치한 8층 회색빛 건물에 들어서고 있었다.

지하철 역에서, 혹은 버스에서 내린 정장차림의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 건물로 들어오고 있었다.

청년이 로비에 들어왔을 무렵, 건물 반대편에 위치한 입구에서는 검정색 그라나다 한 대가 도착하고, 차 문이 열리면서 한 신사가 내렸다.

그는 서울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종로 한가운데에 8층짜리 오피스 빌딩을 소유한 무등그룹 사장인 오남현(吳南賢)이었다.

올해로 60살인 오 회장은 특유의 상거래 능력으로 79년도 기준 재계 12위의 기업을 일구어냈다.

그가 로비에 걸어오자 그를 알아본 몇몇 직원들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검은 뿔테의 이 청년도 마찬가지였다. 청년은 올해로 26살인 박기범.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한 그는 이 무등그룹 경영지원실 소속이 되어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 경영 지원실로 향한 박기범은 그가 일하게 될 자금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몇몇 직원들이 도착해 있었다.

“어. 우리 부서에도 신입사원이 들어왔군,”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부장이 그를 맞이했다.

“황영식이라고 하네. 우리 부서에 신입사원이 오니까 좋군. 그래.”

활달한 목소리에 벌써부터 업무를 시작하던 몇몇 직원들이 고개를 돌려서 오늘부터 같이 일을 하게 될 신입사원을 쳐다보았다.

“반가워요. 난 여기 자금부 과장이요. 내 이름은 김승엽이고. 앞으로 김 과장님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어쨌든 같이 일하게 되어서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여기는 앞으로 자네가 모시게 될 계장이고. 유철희 계장이니까. 자금 수금 및 계획 담당으로 일하게 될 걸세.”

“감사합니다. 오늘부터 일하게 된 박기범 신입사원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비교적 큰 소리로 당당하게 자기소개를 하자 직원들은 웃으면서 그를 맞이했다.

“뭐 오일쇼크다 뭐다 해서 회사분위기가 연초부터 심상치가 않아. 그런 만큼 우리 자금은 위험을 축소하여 회사가 더 안정될 수 있도록 하는 거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신입사원도 제 역량을 발휘하기를 바라는군. 자. 김 과장. 우리 자금부 사람들 인사시키고 옆에 회계부서도 인사시키게.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왔으니만큼 회사의 기대도 크다고.”

“알겠습니다.”

김 과장은 짧게 말하고 새로 들어온 사원을 소개시켜 주었다. 회사에서의 직위는 사원. 하지만 남들은 그를 부를 때, 기범 군이라고 부른다. 물론 몇몇은 기범 씨라고도 하지만 대다수는 그를 기범 군이라고 한다.

그가 속한 자금부는 부장 1명, 차장 2명, 과장 2명에, 대리 1명, 계장 3명, 사원 5명으로 모두 13명으로 구성되어있었다. 회계부는 조금 커서 18명이 근무하며, 그 옆에 관리회계부는 6명이 근무했다.

각 부서마다 돌면서 인사를 드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다들 연초라 바쁜데다가 무엇보다 오일쇼크로 회사에 비상이 걸린 상태라 대충 인사만 받고 끝냈기 때문이다.

“어차피 사람이 많아서 다들 기억도 못해.”

김 과장은 그렇게 대충 말하고서 신입인 박기범을 데리고 원래대로 예정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회의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렇게 경영지원실을 한바퀴 돌고 난 후, 김 과장은 회의실에 박기범을 앉혀놓고 칠판에 간략하게 회사소개를 하기 위해 분필을 집었다.

“자. 우리 회사는 지난 79년도 회계연도 기준으로 매출액이 총 1020억 원. 영업이익이 45억 원. 이 중 각종 세금을 전부 제하고, 영업외 이익과 비용을 전부 감안한 당기순이익은 30억 원. 그래서 2.9%의 매출액 순이익률을 올렸지.”

약간 덥다는 듯이 넥타이를 살짝 풀어헤친 그는 열의를 올리며 신입사원을 교육시킬 준비가 되어있었다.

“우리 회사의 총 사업부가 4개야. 중공업본부, 농산물본부, 경공업본부, 수출입본부로 되어있지. 이 중공업본부는 말 그대로 중화학 및 중공업분야지. 우리가 추구하는 조선, 자동차 화학, 전부 여기에 있어. 농산물본부는 뭐 사장님이 고향이 전라도여서 농수산물 관련 사업도 하고 있어. 엄밀히 말해 식품본부야. 쌀을 사다가 과자로 만든다던가, 뭐 그런 거지. 경공업본부는 우리가 쓰는 이런 분필이나 공책 따위를 취급하고 아. 섬유본부는 경공업본부 산하에 있어. 수출입본부는 우리가 만든 제품을 수출하거나 반대로 필요한 원자재를 사오는 부서야. 각 사업본부에서 요청이 오면 진행하거나 독자적으로도 진행하곤 하지.”

칠판에 간략하게 조직도를 그린 김 과장은 분필을 내려놓고 손에 묻은 가루를 없애기 위해 손을 문질렀다.

“각 사업본부별로 매출액 현황을 보게 되면 섬유사업본부가 있는 경공업본부가 전체 그룹 매출의 절반을 차지해. 무려 500억 원이지. 우리도 본격적으로 중화학으로 나가려고 하지만 아직은 많이 약하지. 섬유가 주축이야.”

분필가루를 턴 손으로 안경을 매만졌다.

“자네는 여기 경영지원실 자금부 사원이지만 우리 회사 전통은 자금부 출신은 임원이 보장된 자리나 마찬가지라는 거야. 기획실 상무님도 그렇고 경영 지원실 최 전무님도 그렇고 사장님 자신도 원래 회계학을 깊게 공부하신 분이거든.”

김 과장은 화제를 돌렸다.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자원은 없고 인구는 많아. 지금 우리나라 인구가 올해로 3800만명이나 된다는 거야. 이 속도라면 2천년에는 무려 5천만 명. 이 좁디좁은 땅에 인구는 바글바글. 그렇다고 잘사는 처지도 아닌데 말이야. 거기다가 돈도 없는 나라고. 자네 가장 최근 경제동향자료 본 적 있나? 1978년도 국민소득 통계나 뭐 그런 거 말이야.”

그 말에 박기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심한 친구로군. 그런 건 훤하게 꿰뚫어야만 하네. 그게 자금을 다루는 직원으로서 해야 할 일인거야. 자 내 기억이 맞는다면 우리는 이제 국민소득이 1천 달러를 돌파했지. 엄청난 거라고 언론에서는 난리를 피웠지만 솔직히 초라한 금액이야. 중공(현재의 중국)은 그렇다 쳐도 자유중국(대만을 뜻함)이나 이웃 일본은 얼마나 되는 줄 아는가? 무려 8500달러가 넘는다고. 거의 9천 달러야. 미국은? 1만 달러고, 영국은? 5천 달러야. 2차 대전 때 승전국인 영국보다 패전국인 일본이 더 풍요롭고 호사스런 삶을 누리는 거지. 왜 그런 거라 생각해?”

문답법으로 학생의 교육열을 이끌어내는 교사처럼 김 과장은 질문을 던져 답을 유도해냈다. 여기에 걸려든 박기범은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뭔가 말을 해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뭔가 뾰족한 대답이 없었다.

“통산성(우리나라의 지식경제부에 해당. 現 경제산업성)인가요? 대장성(우리나라의 기획재정부에 해당. 現 재무성)인가?”

“오. 그런 것도 알다니. 제법인걸. 대학생치고 통산성이나 대장성이 뭔지 모르는 친구들이 많던데 자넨 제법이야.”

한번 씩 웃은 후 다시 김 과장이 대답했다.

“물론 통산성이나 대장성이 한 요인이 된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들이 왜 저렇게 잘 사는가? 참고로 우리 회사에 자동차를 가진 사람은 사장님, 부사장님, 그리고 전무님 몇 분과 상무님 몇 분에 불과하지.”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침을 삼킨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일본에 다녀온 전무님 말씀으로는 그들은 나와 같은 일개 과장급뿐 아니라 사원급도 차가 있고 아내와 남편이 공평하게 차를 한 대 씩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라더군. 일본의 중소도시를 가도 서울보다 차가 많다고 하던데, 그 이유는 우리와 같은 기업들이야. 즉 기업들이 막대한 돈을 벌어서 국민을 풍요하게 하는 거지.”

그는 자신이 일을 하고 있는 수출위주의 기업인 이 무등그룹의 경영지원실 과장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듯 말을 했다.

“간단한 거지. 자. 우리가 수출을 했어. 백만 달러를 벌면 원화로 바꾸지. 달러는 한국은행의 외화보유고가 되고 그 대산 백만 달러에 해당하는 돈을 받아. 그 돈으로 직원들 월급을 주지. 나도 월급받아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 그럼 나도 부유해지는거지. 그럼 수출기업이 많고 수출이 많으면 자연히 더 많은 돈이 들어오는 거지. 그럼 더 잘살게 되는 거야. 간단해.”

한때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를 오늘날처럼 어느 정도 부유한 나라로 만든 일등공신이 자기와 같은 회사원이라고 굳게 믿는 듯 했다.

“지금 몇시지?”

김 과장은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박기범 계장은 손목시계가 없어서 회의실 벽에 설치된 세이코 시계를 쳐다보았다. 벽에 걸린 시계는 아침 9시를 가리켰다. 이제 본격적으로 은행이 문을 열 시간이었다. 은행이 문을 연다는 것은 금융기관의 모든 업무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일단 회사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은 이렇게 대충 끝내도록 하고 이제부터 일을 하도록 하지. 자. 지금 나와 함께 은행에 가자고. 은행을 돌아다니면서 최근 오일쇼크로 자금압박을 받고 있는 우리 무등 그룹에게 자금지원을 하러 가야지.”

“알겠습니다.”

============================ 작품 후기 ============================

사진의 출처는 http://en.wikipedia.org/wiki/File:Seoul_dusk2.jpg 입니다. 박기범이 입사한 무등그룹은 무등산의 이름을 따왔고 경쟁기업인 팔공그룹은 팔공산의 이름을 따왔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불필요한 오해를 가지시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이 소설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바는 기업을 옥죄는 부조리한 권력에 대한 비판과 세계최빈국에서 세계적 공업강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을 만든 기업, 그리고 이를 일군 기업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필자의 절친들이 모두 마산과 부산출신이며 사전 검증을 받아서 불필요한 오해를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해가 생기셨다면 제가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절대 기분나빠하지 마시고 대한민국 경제번영의 역사를 읽으신다는 느낌으로 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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