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2화 (162/189)

새로운 이벤트

어색하고도 기묘한 침묵 속에서 차량은 한적한 도심지를 주행했다. 고른 숨소리와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

가 어색한 차량 속 공기를 좀먹고 나서야 멈춘 차량. 새하얀 담장에 감싼 넓은 마당이 있는 집. 아무리 봐

도 식당은 아니어서 살짝 눈치를 보니 소희의 표정이 살짝 희게 변한다.

식당이 아니라 집이구나? 하긴 식당에서 이야기하기는 좀 그런가?

드라마에서 나오는 재벌 집 같이 생긴 담장 철문이 자연스럽게 열리고 차량이 마당 안 쪽으로 들어간다.

솔직히 말하자면 현대 모드에선 맨날 초고층 아파트나 펜트 하우스 같은 곳에 살아서 정원 딸린 저택은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 마차를 타고 정원에 들어간 적은 있어도 자동차를 타고 집 정원을 가로지르는 건

거의 처음이라서.

잘 다듬어진 정원 한 구석에 깔린 자갈밭. 우드득 소리를 내며 자갈밭 위로 차량이 지나가니 벨소리 하나

없이 차고지의 문이 열린다. 슬그머니 멈춘 차량에서 소희가 먼저 내리더나 반대편으로 돌아와 문을 열

고 나를 에스코트해준다.

낮은 기계음을 울리며 올라가는 차고의 문과 자연스럽게 차고 속으로 들어가는 고급 자동차. 차고 자갈

길에서 옆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와 잘 다듬어진 정원의 잔디들. 이전 세상 아이돌로 플레이 할 때 정원 딸

린 집 관리가 얼마나 귀찮은지 들어 보기만 했는데 이렇게 보니 참 예쁘기 그지없었다.

말이 부쩍 없어진 소희의 손을 잡고 차고로 이어진 자갈길에서 정원의 곱게 꾸며진 정원길을 걷는다. 둥

글둥글한 돌로 만들어진 길에는 물자국이나 이끼 따위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매일 가꾸는 걸까, 아니면

정원 관리사를 따로 둔 걸까. 아마 관리자가 있으려나.

“아버지, 저 왔어요.”

정원을 지나쳐 새하얀 현관으로 향하니 감시카메라 렌즈가 이쪽을 슥 스캔한다. 달칵, 문 열리는 소리와

코 끝으로 파고드는 진한 고기 냄새. 갈비찜이라도 한 건지 넓은 집 안에 달짝지근한 향이 감돈다.

“그래, 어서 오렴. 네가 하늘이구나?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소희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다르게 내가 생각하던 이미지와 똑같았다. 단정하게 차려 입은 회색 정장에

하얀 셔츠, 녹색 넥타이. 잘 빗어 넘긴 머리카락이 단정히 정리되어 있어서 한 눈에 봐도 지식인이라는 느

낌이 와 닿았다.

“네 엄마는 어디로 갔니?”

“주차하러 가셨으니까 곧 오실거에요.”

“같이 들어오지 그랬어. 식사 준비되려면 조금 남았으니까 네 방 구경이나 시켜주고 있으렴.”

떠밀리다시피 거실을 지나 소희의 방으로 향한다. 투덜대더라도 가족 관계가 나쁜 것은 아닌지 소희의

방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컴퓨터 한 대. 뻣뻣한 종이 때문에 읽지 않은 게 확실해

보이는 오래된 자기계발서들 몇 권.

“음, 앉을까?”

나는 책상 의자에 앉고, 소희는 침대에 앉는다. 양복 웃옷을 벗어 두라는 말에 넘겨주니 자연스럽게 소희

가 자신의 옷장에 집어넣는다. 그 뒤로 한 마디도 없이 달달 다리를 떠는 게, 어지간히 부담스럽나 보다.

제국에서 귀족들과 시종에게 둘러 쌓인 귀찮은 맞선보다 이게 훨씬 낫다고 생각하며 소희를 계속 바라보

고 있어도 그런 시선을 느끼지도 못하는 소희. 긴장한 모습으로 달달 떠는걸 보니 슬슬 식사 시간이 다가

온다. 대체 어떤 소리를 들었길래 저리 긴장한걸까?

소희의 가족은 뭐라 해야 할까, 정말 ‘생긴 대로 논다’ 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가족이었다. 털털한 어머니

와 얌전하고 지적인 아버지, 무뚝뚝한 할머니까지. 사람이 왜 관상을 믿는지 알게 될 정도로 눈에 보이는

세 가족.

“그래? 이 년이 그런다고? 그래도 남자 하나는 잘 만났네!”

초능력의 경지는 조금 낮은 건지, 식사에 곁들여진 약주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소희의 어머니가 껄

껄 웃으며 잔을 내려놓는다. S급에 도달한 소희와 소희 할머님은 술을 병째 비워도 취하지 않을 것이고,

소희 아버지는 술잔이 오가니 얌전히 소희 어머님 곁에서 시중을 들다시피 한 결과였다.

“야 소희야, 따라 나와봐라.”

“왜요, 어머니.”

“어머니는 무슨, 이럴 때만 어머니지. 나이 서른 먹고 잘만 엄마 엄마 찾았으면서.”

“아, 엄마!”

그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소희의 어머니가 소희를 잡아 끌고 나간다. 그 직후 식탁 위에 널브러진

술병 몇 잔을 들고 자연스럽게 소희의 아버지가 퇴장하자 테이블에는 나와 소희의 할머니만 남게 되었

다.

“얘, 아가.”

피부를 짜릿하게 만드는 목소리. 아마 술에 취해서 막무가내로 데려간 것도 이런 이유였을까? 역시 지난

번 테러 사건때에 느낀 거지만 장난 아닌데. 소희가 후다닥 달려오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식탁을 감싸는 무형의 기운 안에서, 백전연마의 노파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소희가 잘 해주니?”

순간 손에서 힘이 빠져 물잔을 깨트릴 뻔했지만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아니, 온 가족 다 물려 놓고

식탁에 소희가 느끼지 못할 보호막까지 쳐놓고서는 묻는 게 고작 저거인가? 술기운 하나 없는 두뇌를 최

대한 굴린다.

“네, 누나는 늘 잘 해주죠.”

“그래... 애가 가끔 험한 모습을 보여주더라도 심성은 착한 아이란다. 여자는 커서도 애라는 말이 있는데,

나이 상관없이 네가 잘 돌봐주면 좋겠구나.”

허공에서 술잔을 집어든 그녀가 입술을 적실 정도로 홀짝이며 말한다. 일종의 무력 시위인가 싶었지만

주름 가득한 인자한 인상과, 총기가 가득한 눈동자에는 적의가 아닌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고마움과 미

안함, 그리고 약간의 걱정.

‘... 아, 테러 사건 때 뒷정리를 이 할매가 했던가?’

고등학교 테러 사건 때, 소희는 나를 구하기 위해 테러범을 사살했다. 공식적인 발표로는 S급 초능력자인

할머니, 전희민이 공간 조작으로 인질을 구출. 그 와중에 반항하다 좌표가 휩쓸린 일부 빌런이 사망했다

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그래, 심지가 굳은 아이구나. 그러니까 영웅의 길을 걷는 거겠지.”

실제로 소희는 많은 빌런을 죽였다. 용사로 각성하는 여파 때문에 힘조절을 못해서 좀 잔인하게 죽인 애

들도 있었지. 레이저로 깔끔하게 절단하거나 꿰뚫는 게 아닌, 타인의 초능력을 흡수했다 방출하는 식으

로.

꼬챙이에 꿰인 시체부터 반으로 갈라져서 죽은 시체, 불에 녹은 시체까지 다양하게 양산했으니까 걱정이

좀 되었나 보다. 걱정의 대상은 하나가 아니라 두 명 전부. 소희도, 나도 그녀가 보기에는 어린 나이니까.

생각해보면 동네 공익이 10명 넘는 사람을 직접 죽였으면 정신상태를 걱정하는 게 우선인데, 게임 감성

에 너무 찌들어 있었다. 용사로 각성한 소희와 익숙한 내가 넘겼지만, 그녀의 가족들은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겠지.

자기 딸내미가 테러에 휩쓸렸다가 사람을 10명이나 죽이면 일단 걱정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어쩌면 꽤 몹쓸 짓을 소희에게 했단다. 지금 생각해 보면 헛된 걱정이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

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겨운 트라우마로 남을 게야. 아가, 내가 그 때 느끼기로는

소희가 네 앞에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니?”

3년 전의 일을 떠올린다. 피투성이가 된 복도, 강간당하는 남학생들, 지루해서 멍하니 바라보던 시계, 복

도에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빌런들, 호기롭게 달려들다 반으로 갈라져서 죽은 빌런과 역한 고기 타는

냄새.

‘좆도 상관없긴 한데...’

제가 사람 뒤지는 모습에는 많이 익숙하다고 말하자니 분위기가 너무 깨질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고 고

개만 살포시 숙였다. 지금 눈 마주치면 웃을 것 같아.

“그래, 그래도 소희 옆에 있어줘서 고맙구나. 어쩌면 네가 있어서 저 아이가 굳건하게 버틴 걸지도 모르

지. 저 녀석은 죽어도 인정하지 않지만, 무른 부분이 너무 많거든. 그 때문에 히어로가 되는 걸 막았는데

돌고 돌아서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니.”

술기운 가득한 한 숨이 퓨 하고 흘러나와 노파의 주름진 얼굴을 지나쳐 사라진다.

“아가, 다시 한 번 잘 부탁한단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해 오는 모습에 마주 고개를 끄덕인다. 그와 동시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소희

가 성큼 성큼 다가오더니, 내 팔짱을 끼고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아니, 누나?”

“식사 잘 했어요! 나중에 뵈요 할머니!”

일단 거스르지 않고 따라서 현관으로 향해 신발을 신으니, 흐뭇하게 웃는 소희 할머니와 어머니의 모습

이 보인다. 대체 무슨 상황이길래 저러나 궁금해하는 와중,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소희의 아버지가 내 정

장과 무언가를 같이 들려준다.

“얘, 아무리 급해도 네 남편 될 사람 물건은 챙겨 줘야지. 우리 애 좀 잘 부탁해요.”

그와 동시에 거실에서 툭 튀어나온 아버지가 끼어들어 소희를 놀린다.

“그럼 그럼. 임마, 남자도 여자 하기 나름인데 잘 챙겨야지. 10살 차이가 나는데 니가 연하도 아니고.”

낄낄 능글맞게 웃는 목소리에 소희가 고개를 팩 돌리고 현관에서 나가자, 차키가 휙 하고 날아온다. 얼떨

결에 받으니 웃음을 그친 소희 어머니가 가보라며 손사래를 치며 말한다.

“갈 때 운전해서 가고. 어차피 초인이라 취하지도 않았을 거 아니야. 아니면 어디 오붓한 곳에 데이트나

가던가.”

이 사람, 역시 안 취했었네. 술냄새가 나고 얼굴이 붉지만 심장 뛰는 소리와 피 흐르는 게 정상이었다. 대

체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소희가 저런 반응을 보일까. 그리고 양복 사이에 있는 이 두툼한 건 뭘

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소희는 씨근덕거리며 차를 출발시켰고, 등 뒤에서는 세 가족이 단란하게 우리

를 배웅하고 있었다.

[작품후기]

교수님들은 과제를 낼때 짜고 치는 걸까요. 왜 모든 강의 진도가 다른데 과제를 주는 기간은 겹치는 것이

지? 뭐지? 사실 교수들끼리 내통하며 학생들의 고통을 위해 타이밍 맞춰 과제를 주는 것인가? 왜 진도가

늦은 강의와 진도가 빠른 강의가 동시에 과제를 주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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