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벤트
이쪽 세상은 참으로 현실 같으면서도 게임 같았다. 마치 토끼와 오리 그림 마냥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니 이 쪽 세상 사람이 되고 몇 년이 지나도 명쾌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지금 내 심정이 그랬다.
“그래서, 어쩐 일로?”
“뭐, 좋은 인연 만들고 싶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요?”
살풋 눈웃음 짓는 남성. 금색 머리카락에 우락부락한 근육질. 내게는 금발 보디빌더처럼 보이지만 이쪽
세계에서는 섹시의 상징인 금발 글래머인 남성의 모습으로, 색욕의 악마가 우리 집 앞에 강림해 있었다.
마지막 순찰을 돌고 저녁에 돌아오니 집 앞에 대악마가 있다니, 터가 좀 안 좋은 것 같은데.
같은 남자라서 그런지 정말 재수 없을 정도로 잘생겼다고 생각될 외모였지만 소희의 인상이 풀어질 일은
없었다. 하긴 자기 애인한테 포르노 배우 될 생각 없냐고 제의 한 사람을 누가 곱게 보겠는가. 사람이 아
니라 악마긴 하지만.
경계하는 눈초리로 우리 집 현관문을 여니 우리 집 마루가 아니라 번쩍번쩍한 황금 궁궐이 보인다. 우리
집 문이 지옥문이 되었으니, 진짜 터가 안 좋은 게 맞았다. 그리고 이러한 점이 마치 게임과 같다고 생각
하면 너무 게임 중독자의 생각인 걸까.
미뤘던 이벤트가 강제로 닥쳐오는 기분이 든다.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앉아 일본산일지 중국산일지 모르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테이블에 잘 놓여 있던
화과자를 집어 드니 소희 또한 조금 느리게 걸어와 내 옆에 앉는다. 맞은 편에 앉는 것은 색욕과 탐욕.
엉덩이가 녹아내릴 것 같은 푹신한 쿠션감에 등허리를 깊게 뒤로 쭉 빼고 삐딱한 자세로 앉아 달달한 화
과자를 한 입 깨물고, 쌉싸름 하면서도 향긋한 차를 호로록 마시니 나는 내버려 두고 세 사람, 용사와 두
악마가 대화를 시작했다. 슬슬 이 새끼들이 내 취급 방법을 아는 것 같아서 정말 마음에 들어.
“그래서, 어쩐 일이죠?”
“너무 성급하게 굴지는 말자고, 용사!”
무슨 일인지 캐묻는 소희, 유쾌하게 말을 돌리는 탐욕, 그저 미소 지으며 단말기를 만지작거리는 색욕. 내
가 이름 모를 화과자를 한 바구니 다 먹어갈 즈음, 세 사람의 대화가 그제서야 시작되었다. 이야기가 길어
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바구니에서 화과자가 솟아오른다.
“자, 먼저 계약서부터 보게나. 우리가 할 일도 없는데 그저 놀러 왔을 리 있나. 나름대로 인간 세상에서 영
향력 꽤나 있는 회사의 CEO 들이라고.”
“악마는 언제나 계약을 하죠. 악마의 입에서 신뢰와 우정, 믿음이라는 이야기 보다는 계약과 거래라는 단
어가 나오는 게 더 어울리지 않나요?”
이러니 저러니 말이 길어졌지만, 결국 두 명의 악마가 제안한 것은 간단했다. 일본 쪽에서 발견된 분노를
좀 잡아오라는 제안이었다. 소희는 우리가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는지 물어봤고, 간단 명료한 대답에 격추
되었다.
‘그래야지 오로바스를 치료할 수 있는데?’
그 마법의 한 문장으로 소희는 조용히 입을 닫고 두 사람이 내민 파일을 전송받았다. 지옥에서 내게 정보
를 물어오기 위해 자기 군대를 전부 이끌고 왔다가 소희에게 신성력 세례를 받아 지져진 오로바스는 아직
까지도 지옥 깊숙한 곳에서 요양 중인 듯했다.
대체 분노의 악마와 오로바스의 치료에 무슨 연관이 있는 지는 몰라도, 계약서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
는다는 대악마의 주장에 따르면 집 나간 사탄을 잡았을 때 얻을 수 있는 물건으로 치료해주겠다는데.
오로바스의 외형이 매력적이었다지만 성적으로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별 상관이 없었지
만, 소희는 나와 계약해서 나를 위해 발로 뛰던 존재를 자기 손으로 지져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는 것
같았다. 역시 용사라고 해야 하나.
우스꽝스러운 것은 분노의 악마 사탄이 발견된 곳이 ‘일본’이 아니라 ‘일본 언저리’ 라는 것이었다. 서류
를 천천히 읽어보니 다른 악마 군주들의 말이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분노의 악마 사탄을 평가하는 잣대는
다들 제각각이었지만, 어째 틀린 말은 하나도 없는 것 같네.
“아니 무슨, 악마가 이러고 있어?”
오만이 평가하기를 ‘가장 악마다운 악마’
식탐이 평가하기를 ‘인간의 관점으로 이해하려 들지 말 것’
탐욕이 평가하기를 ‘7대 군주의 직책과 악마의 직책을 완벽히 녹여낸 자’
색욕이 평가하기를 ‘저걸 이해하면 우리 모두를 이해할 수 있을 것’
일곱 악마 군주 중 가장 괴짜이면서, ‘분노’에 충실하며 ‘악마’로서의 행위를 누구보다 잘 하고 있는 분노
의 군주 사탄은 일본의 언저리에서 발견되고 있었다. 악마의 존재를 아는 극소수의 마법사나 흑마법사,
연금술사 같은 악마 계약자가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까지도 행해지고 있는 불법 어업선과 과격파 국제환경단체 앵거 오브 네이처(Anger of Nature)의
충돌로 인해-]
그냥, 국제 뉴스에 나오고 있었다.
※
[한편, 앵거 오브 네이처는 에코 테러리스트로 분류된 지구해방연합과 손을 잡은 것으로 보이는데-]
영상 속에서 복면과 두건으로 얼굴을 둘둘 말아 가린 사람들 사이에서, 눈꼬리가 사납게 위로 올라간 미
녀가 얼굴을 가릴 생각도 없이 카메라를 향해 양 팔을 번쩍 들어올리고 있었다. 손에 들린 것은 푸른 금속
으로 만든 삼지창.
누군가 몰래 촬영한 것인지 화질은 좋지 않지만, 사나운 눈매의 라틴 미녀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고함
을 지르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사람들은 초능력이라 생각하겠지만 우리들의 눈에는 저게 지옥 마법이
란 게 똑똑히 보인다. 내가 맨날 쓰던 마법과 비슷한 마력이니까.
바다의 뜨거운 햇빛 아래 까무잡잡하게 탄 피부를 드러내며, 피부에 묻은 소금기를 털어 낼 생각도 없는
라틴 미녀가 허공에 삼지창을 찌르며 고함을 지른다.
[인간들, 너무 많은 인간들! 바다를 죽이고 스스로를 죽이는 인간들이 너무 많아!]
콰직! 카메라가 미쳐 형상을 잡기도 전에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내리쳐진 삼지창에 일본의 어선
이 반으로 동강나고, 회오리치는 해류 속으로 사람들이 빨려 들어간다. 익사할 게 분명해 보이는 일본의
어부들을 다른 초능력자들이 물방울을 만들어 익사 직전에서야 꺼내 준다.
토플리스의 미녀들이 얼굴만 가린 상태로, 젖가슴을 덜렁거리는 모습은 마치 기획물 AV 같다는 감상이
조금 들어 재미있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소희의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사탄이 조금 많이 미친 년 같아
서?
“확실히, 악마의 관점에서는 저게 맞긴 하지...”
“무슨 뜻이야?”
갑자기 카메라맨이 바다 코끼리 닮은 여자가 출렁이는 뱃살과 가슴을 잡았길래 고개를 돌려 소희를 바라
보니, 그녀가 악마들의 말을 이해했다며 설명을 시작했다. 나 또한 어느 정도 감이 잡혔지만 수수께끼라
도 풀었다는 듯 말해주려는 소희의 모습이 귀여워 모르는 척 들었다.
정보를 대략 종합하자면...
사탄이 관장하는 것은 ‘분노’이며, 악마들은 인간들의 멸종을 막기 위해 자연 보호를 하고 있었다. 그렇기
에 에코 테러리스트라 불리는 과격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는 것 까지는 좋았지만, 빠르게 발전하는 인간
의 문명과 그에 비례해서 더욱 빨라지는 오염 속도가 발단이 되었다.
처음에는 다른 악마들이 인간 세상의 직위를 만드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만든 것이지만, 멸망을 부르는
인간의 몇몇 행태에 사탄이 진짜 분노해 버렸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요컨데, 과몰입을 해버렸다 이거지.
눈깔이 뒤집혀서 삼지창을 휘두르고 어선을 토막 내며 빌런, 에코 테러리스트 취급을 당하며 온 바다를
누비고 다니는 것이 사탄의 현 상황.
가을이 다가오며 고래 사냥을 다시 시작한 일본의 어선을 공격하기 위해 일본으로 향했고, 에코 테러리
스트로 너무 유명해져서 악마들은 물론 한국 히어로 지부에도 연락이 올 지경. 브라질의 열대우림부터
일본의 고래 잡이까지 전 세계를 돌며 테러를 벌이다 보니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이 추악한 낮짝을 보아라! 멸종 직전으로 몰린 생명을, 고작해야 미식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사냥하는 낮
짝을!]
땅땅땅!
삼지창이 검고 붉은색으로 위협적으로 도색된 앵거 오브 네이처의 요트 난간을 두드리자, 그녀 휘하의
초능력자들이 바닷물을 잔뜩 먹고 기절한 어부들을 난간에 양 팔을 벌린 상태로 매단다. 십자가 모양으
로 매다는 걸 보니 그 와중에 깨알같이 신성 모독도 곁들이는 구나.
탐욕과 색욕이 원하는 것은 그녀를 진정시켜서 데려오거나, 대화가 결렬되면 그 순간 즉시 자신들을 소
환하는 것. 처음에는 단순히 단체를 만들어 바지 사장으로 존재하다가, 활동을 하면 할수록 분노가 깊어
지고 과몰입 해서 날뛰기 시작하는 사탄의 모습 때문이었다.
악마들이 빌려준 배가 점차 사건 현장으로 다가가고 있었지만 내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만 들었다.
‘소희도 어찌 보면 30살이고 아줌마인데 덥다고 벗고 다니면 좋겠는데...’
토플리스(Topless)는 엄청 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도 왠지 보게 된단 말이지.
[작품후기]
이번 이태원 클럽 사건으로 대면/비대면 선택하라고 내려왔던 대학 강의중 제가 듣는 모든 수업이 비대
면, 중간고사 취소로 결정났습니다. 근데 중간고사 취소니까 과제 더 내도 되겠다면서 과제가 추가됨
교수님 중간고사 시험공부 하는 만큼 과제를 시킨다는게 말입니까 방굽니까.
엑셀 함수도 까먹었는데 R-studio 함수 외우는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