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화 (141/189)

새로운 이벤트

중국에 다녀온 이후 우리들의 일상이 조금 바뀌었다.

“이건 또 어디서 온 거야?”

“중국 내륙 9지방에서 온 특산물이라는데?”

안락한 가구, 값비싼 가정부 로봇으로 도배되었던 우리들의 보금자리가 한층 더 진화된 것이다.

주방 냉장고를 정리하는 로봇의 일이 끝나지를 않아 주방으로 향하니 냉장고가 아니라 베란다를 포함하

여 식재료 창고가 만들어져 있는 수준. 그 외에도 단말기에 가득하게 쌓이는 온라인 상품권들. 호텔과 연

계하여 식재료 산업에 손을 뻗친 폭식과, 게임과 IT 업계 전반에 뿌리를 뻗은 탐욕의 합작품이었다.

냉장고에는 동네 슈퍼에서 보지도 못한 각종 음식들이 쌓여 나간다. 호텔에서 자주 먹었던 북경 오리를

진공 포장하여 보낸 것 부터 다양한 슬라이스 햄이나 과일 치즈 등 비행기 타고 물 건너온 음식이 잔뜩.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 소시지 하나를 대충 입에 물고 거실로 향하자 육포 비슷한 걸 식탁에 대충 내려놓

은 소희가 뒤따라온다. 식탁에 육포를 내려놓은 그녀가 주머니에서 황금색 메달을 공중에 던지자 허공이

일렁거린다.

“참, 마법이란 게 언제 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초능력이랑 다를 게 없지 않아?”

아마이몬이 우리에게 준, 지옥으로 가는 문이 열린 것이다.

자연스럽게 일렁이는 막을 통과하니 시야가 온통 금색으로 가득 찬다. 황금으로 이루어진 바닥, 보석을

깎아 만든 기둥과 유리창, 천장을 가득 채운 귀한 마법 광물들. 궁전의 조각만 팔아도 억 소리는 나올 찬

란한 공간이 우리를 맞이한다. 역시 탐욕의 악마. 천사와 악마가 전쟁을 벌일 때 전쟁보다는 황금이 좋다

며 궁전 안에서 보물이나 모으던 악마의 보금자리 다운 화려함이 있었다.

여기서 앞으로 향해 들어가면 온갖 귀한 보물들이 잔뜩 있는 아마이몬의 황금 궁궐을 구경할 수 있겠지만

그건 우리의 목적이 아니었다. 화려한 궁궐과 어울리지 않는 트레이닝 복에 운동화를 신고 온 이유는 대

련이니까.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 궁궐 밖으로 나가니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런, 더 감상하지는 않고 가는 거야?]

“운동하러 왔지 눈 호강하러 온 게 아니야.”

[자랑하고 싶은 게 정말 많은데... 아쉽네]

궁 밖은 내부와는 정 반대되는 황폐한 황무지였다. 식물 하나 못 자라는 척박한 땅은 걸음걸음마다 뿌옇

게 바스러지며 먼지를 일으키며 우리를 맞이한다. 온갖 보물과 귀금속으로 치장된 궁전과, 아무것도 없

는 궁전 밖.

그렇기 때문에 나와 소희가 마음 놓고 날뛸 수 있는 곳이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커녕 건물이나 어떠한

시설조차 설치하지 못할 정도로 황폐하고 넓기만 한 황무지니까. 자연스럽게 성검을 뽑아 든 소희와 거

리를 벌리며 마주보았다.

“정말 하려고?”

“그럼, 마왕이 내려오면 지구에서 싸워야 하는데 다른 나라도 똑같이 날려 먹게?”

그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무는 소희.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가며 핑계거리를 찾아보지만 더이상 댈 핑계는 없는지 망설이기만 한다. 게임 패

키지를 준비하던가, 거실을 영화관처럼 꾸며 놓던가, 자신이 요리를 해서 나를 대접하는 둥 다양한 노력

과 핑계를 준비했지만 나는 꺾이지 않았다.

되려 침대에서 나를 설득시키려 하길래 내가 역으로 물어버렸지. 아마이몬이 온갖 혜택과 현금으로 억

단위의 뇌물을 협회 몰래 전달하며 부탁한 일이기도 하니까. 나 또한 아마이몬의 걱정에 동의하였고.

“누나, 실수로 아군인 악마에 일곱 군주한테 유효타를 먹였는데 힘 조절 연습 안 하면 진짜 큰일나. 누나

가 지금 얼마나 강한지 자각을 못해서 그런데, 걸어 다니는 핵폭탄이랑 비슷한 수준이라고.”

“그 정도야?”

“핵폭탄은 한 번 터지면 끝이지, 누나는 나 때문에 회복력이 올라가서 수십 번 터지니까... 얌전히 대련이

나 합시다?”

소희의 유일한 약점. 어찌 보면 소희만의 약점이 아닐 것이다. 강대한 힘을 갑작스레 가진 상태로 성장을

시작해버린 모든 존재의 약점이다. 거미에 물려 거미인간이 된 남자가 문고리를 부수는 것과 비슷한 이

야기.

자신이 강함을 모른다는 것.

소희가 생각하는 ‘용사의 강력함’은 초능력자 수준이다. 탈진을 감내하고 전력으로 후려치면 도시 한 두

개에 영향을 미치는 S급 초능력자의 정도. 소희가 무식하거나 둔감한 게 아니다. 그녀가 상상하는 최강의

인간은 그 정도 수준이니까. 단신으로 도시를 무너트리고 군대를 굴복시키며 태풍과 지진을 막아내는 존

재.

하지만 내가 아는 ‘용사의 강함’은 고작해야 도시 수준으로 이야기하면 섭섭하다. 도시 하나? 그 정도야

마왕이랑 싸우다 빗나간 평타 하나로 붕괴시킬 수 있다. 소희가 이 세상의 상식에 의거하여 상상하는 힘

의 한계와, 진짜 용사와 마왕의 싸움은 그만큼 차이가 난다.

인류를 멸망시키는 것이 마왕’군’이 아니라, ‘마왕’ 이니까.

그에 대적하는 용사 또한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싸우자고 하면 안할 것 같으니까 나를 붙잡아봐.”

“그 정도라면 뭐.”

용사의 힘을 각성한지 얼마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하린과 삼파전으로 대전할 때와 상황이 다르다. 그녀가

불안해하는 이유는 용사의 힘이 강해서 두렵다든가, 마왕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대련 상대인 내가 상

처 입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기분이 좀 그래.’

남녀 역전 세계의 방식대로 생각한다면 ‘내 여자가 나를 소중히 여기고 있어~’ 같은 느낌으로 감격하겠지

만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고 방식. 오히려 내 여자한테 얕보이고 있다는 감각에 아랫배가 조금 부글부

글 끓어오른다. 얕보인다는 짜증과 진짜 약하다는 굴욕감과 나를 지켜주는 여성에 대한 성욕이 뒤섞여서

몸을 뜨겁게 달군다.

“그래 누나, 누나가 나를 많이 걱정하는 걸 알겠는데...”

그러니까 대련을 하자.

“누나라면 못 알아듣겠지만, 한 마디만 할게.”

“음?”

“내 PVP 승률은 95%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어.”

세상이 붉게 물들며 아지랑이 너머로 속삭임이 들려온다.

황야에서 미소 짓는 미소년, 우아하게 뻗어 올라가는 새하얀 손.

“내 PVP 승률은 95%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어.”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말.

“으, 뭐야 이건?!”

잡기만 하라고 해서, 그대로 달려 나가 허리춤을 껴안을 생각이었다. 민간인도 아니고 육체 강화 정도는

나와 비슷한 정도니까 그러면 다치진 않겠지. 하늘이가 다루던 그림자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기에 그

렇게 생각했었다.

“누나, 1시간 내로 나를 잡지 못하면... 그래, 나를 1시간 내로 잡을 때까지 우리 독방 쓸까?”

“그렇게는, 안되지!”

콰앙- 하고 소리가 머리 뒤편으로 사라지는 기분이 든다. 황야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갈라지고, 시야가

길쭉하게 잡아 늘려지며 폭풍이 피부를 긁고 지나가는 게 느껴진다. 이대로라면 허그가 아니라 바디 태

클일까 걱정이 될 정도의 속도.

“뭐, 뭐야?!”

하지만 그 자리에 하늘이는 없었다.

“용사는 마왕 이외에게 데미지를 입지 않아. 그렇다고 그게 상태 이상의 완전 면역을 뜻하지는 않거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고요하고 부드러운, 언성 하나 높히지 않은 잔잔

한 목소리인데 어째서인지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것이 느껴진다. 혹시 껴안고 대충 넘어가려는

음흉한 속셈이 들켰을까?

“시간, 자금부터 잰다?”

그 직후, 시야가 흐려진다. 눈 앞에 아지랑이가 보이고, 시야의 초점이 제멋대로 흔들려 망막에 뭔가 보이

는 듯한 기분이 든다. 눈을 한 번 깜빡이자 갑자기 눈물이 주륵 흘러나와 시야가 흐릿해진다.

한 걸음,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몸을 돌린다. 왼쪽 발 뒤꿈치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디딤 발이 조금 밀

려나고, 내딛은 오른발이 살짝 휘청인다. 허리를 숙이고 앞으로 도약하려 하자 등허리와 척추에서 불쾌

하게 뻐근함이 느껴진다.

오른발을 내딛으며 뒤로 쭉 빠진 왼팔이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뒤로 올라간다. 힘이 빠진 어깨 때문에 앞으

로 뻗어진 우반신이 조금 틀어진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흔들리고 시선이 조금 내려가며 내딤발로 박살낸

지면의 흙먼지가 눈 앞을 가린다.

“제한 시간은 한시간... 음, 대기권 밖으로 도망은 치지 않고 누나 주변에 있을 게.”

다시 한 번, 눈을 깜빡여 시야를 확보한다.

박쥐 날개를 펼치고, 허공에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하늘이의 모습. 그리고 그 손 끝에서 마치 거미줄처럼

얽혀 허공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수천개의 마법진들.

“오늘 당장은 무리겠지만, 누나는 용사니까 점점 면역력이 생길 거고, 그러면 마왕도 손쉽게 쓰러트릴 수

있을 거라 믿어. 그러니까 누나,”

집중력으로 인해 극도로 느려진 세상 속에서 본능이, 성검이 저 마법진들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대로

성검을 휘둘러 허공을 찢어버리지만 소용없었다. 수백의 마법진이 부서지지만 그 자리를 수천의 마법진

이 다시 차지하니까.

“효과 저항 100% 될 때까지 힘내자?”

시야가 검게 물든다.

[작품후기]

MISS는 없이 1뎀은 들어가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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