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화 (139/189)

새로운 이벤트

침대의 감촉을 만끽하며 눈을 뜬다. 익숙한 침대, 익숙한 이불이지만 조금 다른 향을 풍기는 환경. 침대와

이불이 같아 잠결에 집이라고 착각할 뻔했지만 눈을 뜨니 호텔의 고풍스러운 전등이 눈에 들어온다. 그

제서야 이 곳이 중국이라는 것을 다시 실감한다.

‘참, 인생 스펙타클하네. 히어로에, 용사에, 드라마에 테러리스트를 잡다가 테러범이 되고...’

중학생때는 체육부 활동에 미쳐서, 고등학생때는 초능력이 막 각성하고 그걸 다루느라 바빠서, 막 성인

이 된 다음에는 금수저 집안의 더러운 뒷거래를 보고 성녀타임이 와서, 대학 졸업하고 히어로의 의무를

다할 때에는 모든 게 귀찮아져서.

인생을 열심히 살았던 것은 학창시절이 전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대충 살았었는데.

핑계거리는 많았다. 가장 큰 이유는 인생의 목표가 제 멋대로 뒤죽박죽 흔들렸으니까. 나름 진지하게 체

육 선수를 목표로 삼았는데 초능력의 각성으로 취소. 기왕 육체 강화 히어로가 된 김에 빌런 전담부로 바

로 지원하려 드니 가족들의 반대로 무산.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와 아버지 네 명 전부 히어로와 정치계에 한 발 걸치고 있는 상태다 보니 히어로

등급이 높게 측정되어도 바로 빌런 전담부에 들어가는 것이 막혀버린 것이다. 잘 해봐야 본전, 못하면 가

족들의 약점이 되니 어쩔 수 있나. 빌런에 대한 원한으로 가득 찬 것도 아니고 부유한 생활은 그대로라서

그대로 의무 활동만 행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만나게 된, 사랑스러운 연인.

지하 도시에서 기괴한 괴물들(아마 악마들의 하수인...?)에게 납치당할 뻔하던 것도 잠시, 어마어마한 성

장 속도로 성장하더니 사실은 하늘이가 흡혈귀였고, 나는 용사인데다, 마왕을 막기 위해 악마와 계약을

하고 미쳐 날뛰는 천사를 제압하고 인류에 위협이 될 오염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불법 공장을 철거하고.

근데 이거 천사랑 악마랑 너무 역할 바뀐 거 아니야?

새벽녘의 쾌락 때문인지 머리가 말끔하게 비어서 그 안으로 자꾸 엉뚱한 생각이 비집고 들어온다. 옆에

누워서 곤히 잠든 작은 남자아이 때문에. 이제 스무 살 성인이 되었지만 유약한 외형과 작은 키, 새하얀

피부 때문인지 계속해서 무구한 소년처럼 보이는 나의 연인.

그리고 거짓말쟁이.

저 작은 소년이 무시무시한 괴력과 다양한 마법을 사용하는 흡혈귀임을 안다. 순찰이 지겹다며 놀러 나

가는 어린 아이처럼 슬그머니 사라지지만 그 발걸음의 끝이 범죄자들의 군상인 지하도시임을 안다. 피냄

새를 지우고 게임으로 돈을 벌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에게 쌓이는 업보를 바라볼 수 있는 게 용사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적이 아니었다.

사소한 일상 생활에서 부터 악마와의 계약 같은 거대한 이야기까지 전부 자신을 돕기 위한 발걸음이었으

니 빤히 보이는 거짓말조차 추궁할 수 없었다. 심지어 손등에 잠든 성검조차 하늘이가 흡혈귀임에도 불

구하고 받아들였으니.

물론 성검 때문에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보여준 그 모든 태도를 바탕으로 한 판

단일 뿐. 물론 아리따운 소년이 살갑게 달라붙어서 조금 헤벌레 한 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미워할 수

없는 소년이었다.

점심시간에 같이 먹자며 도시락을 싸줄 때, 맥주에 어울리는 요리를 만들겠다고 단말기에 매달려 있을

때, 학교 수업이 지루하다고 슬그머니 경비실로 찾아와 들러붙을 때. 재미 있는 프로그램이 없다며 소파

에서 몸을 기댈 때.

그 모든 순간이 인생에 없었던 행복함으로 다가왔으니 푹 빠졌다고 봐도 되겠지. 남자한테 푹 빠져 이성

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적어도 하늘이의 행동은 인류를 위한 행위였다. 정확히는

인류를 구할, 나를 위한 행동들. 침대에서 부드러운 극세사 이불을 한껏 그러모아 껴안고 잠든 모습을 보

니 마음 깊숙한 곳 부터 따끈따끈한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따듯함이 뜨거운 열기로 변하는 것 또한.

빛으로 온 몸을 정화하고, 옷장을 열어본다. 코 끝을 찌르는 향기로운 냄새와 각양각색의 옷들. 남성용과

여성용이 양 옆으로 정돈되어 있었는데 그 중 몇 가지는 당장 입고 공식 석상에 나가도 될 정도로 정갈하

였고, 반대로 몇 가지는 입은 모습을 보여지는 순간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정도로 음탕하고 음란한 복장

도 있었다.

그사이에 있는 새하얀 셔츠와 기묘한 까만 바지. 자연스럽게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설 때까지 하늘이는

깨어나지 않았다. 안내인까지 전부 사라진 호텔에서 자연스럽게 1층으로 향하니 아직까지도 술잔을 나

누고 있는 두 악마가 보인다.

“셔츠는 천사의 날개 깃털을 뽑아 짠 녀석이고, 바지는 레비아탄의 가죽을 다듬어 만든 녀석이지. 가죽을

얻는 것 다듬는 것까지 고생이 많았어.”

“혼자 나가도 괜찮겠나요? 둘이서 하는게 편할 텐데.”

술잔을 기울이며 태연하게 물어보는 그들의 모습에 살짝 짜증이 나려고 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호

텔 최상층으로 올라가 침대에 드러눕고 싶었다. 잠결에 주변에 있는 걸 껴안고 자는 습관이 있는 그의 곁

으로.

“곤히 자는데 뭐 하러 깨워.”

“참으로 자상한 배우자로군. 좋은 밤 보내기를 빌겠네.”

호텔 문 밖에서 넘실거리는 더러운 기운에도 가만히 있는 걸 보아하니, 이건 일종의 테스트려나. 하늘이

에 대한 테스트는 아마 그 공장지부에서 끝낸 것 같고. 무너진 공장의 면적을 생각하면 테스트라 보기엔

과하지만. 문득 체육 동아리에서 신입생들에게 텃세를 부리던 선배들이 떠오른다.

문을 열자 훅 풍겨오는 유황 냄새에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느새 손 근처에 나타난 백색의 검. 분명히

문 밖은 자동차들이 들어올 수 있게 둥글게 꾸며진 도로가 있는 호텔 입구였는데 문을 여니 어두컴컴하고

다른 건물은 전혀 보이지 않는 다른 세상이 있었다.

“빛의 종자 따위가!”

저 멀리서 기괴한 목소리가 외치는 것이 들려온다.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 훅훅 끼쳐오는 비릿한 불길이

섞인 냄새.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조심하라고 속삭이는 기분이 든다. 슬그머니 등 뒤를 돌아

보니 유리 문 너머에서 나를 구경하는 두 악마가 보인다.

묘하게 나른한 감각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공장 부지를 통째로 가라앉히려고 마력을 쓰면서 안개화

까지 유지해서 그런지 조금 뻑적지근했던 몸이 말끔하게 치료된 느낌. 방 안에서 소희의 기척이 느껴지

지 않아 간만에 호텔 샤워실에서 뜨거운 물에 몸을 조금 지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아, 이제야 내려 오나. 하기야 피곤할 만한 일을 했지. 땅을 통째로 호수로 만들다니 정말 마음에 드는 일

처리였네.”

여전히 술잔과 먹거리를 들고 다니는 폭식.

“촬영도 막바지니 곧 한국으로 돌아갈 거에요. 볼일이 있다면 2일 내로 마쳐주세요.”

“2일이라, 그때 그렇게 촬영을 많이 했는데 아직도 남은 겁니까?”

“말이 드라마지 거의 영화처럼 촬영 방식을 도입했으니까요. 최대한 영상 담아낸 다음 거기서 골라 집는

거지. 요구대로 대사 없는 대본으로 바꾸느라 그런 거니까 감내하세요.”

태블릿을 보며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소희와 김샛별.

“이야, 자네가 그 흡혈귀인가? 반갑... 이크, 너무 살기를 날리지 말게.”

온 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의문의 여성.

이건 또 뭔가 싶어서 슬그머니 살펴보니 일단 악마는 맞는 것 같은데. 붕대 너머로 슬쩍 보이는 피부는 퍼

렇게 부어올라 있었고 온 몸에서는 약초 냄새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발을 감은 붕대 뒤쪽으

로는 부목까지 보이는 상황.

무슨 일인가 싶어 소희 옆으로 다가가니 그녀가 팔을 쓱 둘러 나를 껴안는다. 애정 표현이 아니라 마치 자

기 뒤로 가라는 것처럼 팔에 힘을 주기에 순순히 움직였다.

“무슨 상황이야?”

그런데 질문을 들은 소희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린다. 두 악마, 아니 붕대를 칭칭 감은 여성까지 포함한 세

명은 심각한 부상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허허 껄껄 웃으며 술을 마신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오직 소희

만이 조금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누나? 무슨 상황이냐니까?”

“음, 하늘아... 그게...”

늘 당당하던 그녀가 우물쭈물 말을 더듬는다. 꼿꼿하던 허리는 슬금슬금 뒤로 빠지고, 눈동자는 나와 악

마들 사이를 바쁘게 오간다. 이런 반응 전에도 본 적 있었는데.

“... 누나, 어제 밤에 뭐 했어?”

시원하게 만들려고 냉동실에 넣어 둔 맥주 두 캔을 혼자서 다 마셔버리거나, 안주로 사둔 슬라이스 치즈

를 입이 심심하다고 먹어버리거나, 사오라고 했던 맥주를 깜빡하고 안 사오거나. 뭘 잘못 했는데 딱히 핑

계거리가 없을 때마다.

“이상하게 푹 잤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일 있었구나?”

절로 목소리가 뾰족하게 올라간다.

[작품후기]

싸이버 강의 시작... 토론식 수업이라고 아침 9시에 카메리 키라는 교수님... 마스크 빌런... 총체적 난국...

제발 카메라는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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