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
학교는 매우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지금도 겪고 있었다. 백 단위의 범죄자들이 무력으로 학교를 점
거하여, 건물의 절반가량이 붕괴되었는데 변화가 없으면 이상하긴 하겠지. 건물이 무너져서 지원과는 설
비 문제로 학교를 쉬지만, 격투반과 사격반은 아니었다.
“이신우! 자꾸 설렁 설렁 할래? 그딴 식으로 할 거면 빠져서 지원과나 도와!”
“아닙니드아악!”
“야 이 새끼들아! 페이스 배분 똑바로 해라! 전투가 3분만에 끝나는 컵라면인 줄 알어!?”
강제로 넓어진 운동장 지부에서 땀 흘리며 뛰는 아이들. 욕설이 섞인 고성을 내뱉는 교사들. 한 달 전 까
지만 해도 무덤덤하게 대련만을 지시하던 학교라고 생각할 수 없는 상황. 학교 친구가, 동료 교사가 빌런
에게 당해 쓰러지는 것을 직접 목격한 만큼 다들 과격해진 상황.
오전에 학생끼리 하던 적당한 대련은 몇 명이 지쳐 쓰러질 수준의 체력 단련으로 변경되었고, 오후에 있
던 격투술 훈련은 지도 교사가 자세만 교정하는 수준에서 직접 싸워서 나가 떨어지는 학생이 수두룩해졌
다.
“이 새끼, 아직도 빠져가지고! 그 때 그 빌런들이 멈춰 달라 하니까 멈춰주니? 그러고도 니가 여자야!”
“야! 지금 3구역을 빌런이 습격하는 세상인데 그렇게 설렁해서 히어로 딱지 달 수 있냐?! 때려 치고 민간
기업에 취직하러 가던가! 남자라고 빌런이 봐 줄 것 같아?”
사람이 죽었다는 트라우마로, 과격해진 훈련을 버티지 못해서, 부모의 걱정 때문에. 다양한 이유로 학생
의 수가 절반가량 줄어들었지만 남은 학생들은 악기와 독기로 똘똘 뭉쳤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체육복
을 입은 남학생이 땀을 식히려고 지퍼를 조금만 내리면 여학생들의 시선이 득달같이 모였지만 지금은 그
럴 기운도 없어 보인다.
“아 시파… 디지겠다 진짜.”
“진짜 뒤지는 것 보단 낫지. 희영이도…”
“시발, 걔 얘기는 꺼내지 마라. 그 빌런 새끼 등을 찔렀어야 했는데.”
“거기! 잡담할 기운이 있으면 한 바퀴 더 뛰엇!”
안색이 어두워지는 여학생을 목격한 교사가 곧바로 이야기를 끊고 달리게 만든다. 이 어린 학생들이 민
간인이라면 당장 정신병원에 가서 심리 치료를 받겠지만, 아무리 어리다 해도 어엿한 히어로 지망생들.
초능력으로 악당을 물리치고 사회를 지킨다는 선택을 스스로 한 초능력자들이다.
물론,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으악! 능력이 갑자기 왜 이렇게 늘었어?!”
올곧게 내뻗어진 주먹이 바람의 장벽을 찢어낸다. 주변의 학생들이 무심코 돌아볼 정도로 커다란 소리.
가녀린 팔이 허공을 후려치자 마치 금속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허공을 휘젓는 잔해를 발판삼아 뛰어
다니는 나, 그리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이하린.
캉- 콰아앙-!
접근을 방해해야 할 발판이 되려 자신의 시야를 가리고 나의 발판이 되어준다는 걸 깨달은 그녀가 전략을
바꾼다. 운동장을 어지럽히며 흙먼지를 일으키던 광범위한 바람의 기류가 그녀에게 몰려든다.
“좀, 여교사 체면이 있지 살살 해라!
수십 kg짜리 콘크리트 덩어리도 날려보내는 폭풍이 집중되자 그녀의 옷자락이 펄럭거리며 붕 떠오른다.
허공으로 떠올라 눈에 보일 정도로 강렬한 바람을 휘감은 그녀.
“꼬우면 소희부터 이기던가!”
콰앙-! 굉음이 다시 한 번 운동장을 어지럽힌다.
※
결국 승부는 무승부로 끝난다. 사건 이후부터 지금까지 20전 20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결과이기도 하
다. 날개를 펼치고 달려들 수도 없고, 지옥 마법이나 혈마법처럼 사람을 반드시 죽이려는 끈적끈적한 마
법을 학생 앞에서 사용할 수 없으니까.
더군다나 학교 구석구석에서 악의가 넘쳐 흐르더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진화한 흡혈귀의 신체는
그 기운을 곱게 받아들여 비축하고 있었고. 들끓는 학교에서 나의 육체는 내가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진
화했다. 날개도 흡혈귀의 것 보단 악마족의 것과 닮았고, 마력도 이상하게 들끓고. 괜히 대련 때 사고 내
느니 무승부로 끝내지.
“아오… 커플이 쌍으로 괴물이여, 아주. B급으로 위장 취업하니까 좋냐?”
“으하하, 하늘이한테 맞은 거냐? 잘 했어, 하늘아!”
뉴스나 신문에는 방송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단신으로 빌런 수십을 썰어 죽인 소희를, 공간을 지배하는
소희의 할머니가 모를 리 있나? 나는 예비 B급 히어로에서 정식 B급 히어로, 소희는 A급으로 한 단계씩
승급했다.
협회에 끌려가거나, 능력이 이상하다는 지적을 받거나 하는 것을 각오했지만 이번에도 소희 선에서 정리
가 된 건지, 아니면 소희의 할머니 선에서 정리가 된 건지 내게 무언가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밖에 내보일 수 있는 것은 흡혈귀의 징표인 뾰족한 이빨과 괴력뿐. A급 히어로 등록을 할 때 마법도 같이
등록 해야지 원.
“아니 이상하다니까? 흡혈귀로 변신하는 건 알겠는데 전투 센스가 과해!”
“그래서, 6살 어린 애한테 쳐 발리고 이상하다고 태클 거는 거야?”
“말을 해도, 씨바!”
교직원 겸 전 연예인, 공무원 겸 이사장 손녀의 힘으로 불고기 도시락을 배달시켜 식사를 하는 와중 서로
가 서로를 젓가락으로 삿대질하고 있었다. 남자는 커서도 애라더니, 여기서는 여자가 커서도 애구나.
“아니 이상하잖아! 전에 격투기 같은 거 배운 적 없다며. 싸움 해본 적 없는 남고생이 보일 몸놀림이 아니
지! 날아다니는 파편을 발로 차서 다른 파편을 쳐내는 건 둘째 치고, 단증 딴 나랑 비슷하게 움직인다니
까?”
“아오, 니가 방송하느라 대충 살았겠지.”
“야! 나도 A급 중에서는 나름 상위권이야. 방송하느라 실전을 별로 안 뛰어서 그렇지.”
편의점 도시락보다 5배 비싼 도시락은 대체 뭘로 만들었을까 싶었지만 역시 과학 기술의 힘은 위대하다
는 결론으로 도달한다. 플라스틱 뚜껑에 고무줄로 묶여 배달된 도시락이지만 밥솥에서 막 꺼낸 따끈따끈
하고 새하얀 쌀밥에선 윤기가 좌르르 흐르고 있었으니까.
동봉된 플라스틱 수저로 기름기가 쫙 제거되어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불고기를 밥 위에 삭삭 비비고 있자
니 두 명의 멍청한 대화가 끝나질 않는다. 이하린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소희는 밥을 든든히 먹어야 하
니 깔끔하게 대화를 종결시켜 버려야겠군.
“흡혈귀화 하면서 뇌도 바뀌는지 본능적으로 알겠던데요.”
“어… 뇌까지? 그게 말이… 하긴 다른 능력자들 중 변신 관련된 능력자들은…”
“본능적? 크흠, 음…”
도시락 위에 젓가락을 내려둔 이하린은 둘째 치고, 소희의 뺨이 살짝 달아오르고 콧볼이 벌름거리는 걸
보니 본능적으로 변한다는 말에 야한 생각을 하는게 빤히 보인다. 그 모습을 보니 골려주고 싶다는 생각
이 무럭무럭 드는 걸 보니, 다른 게임에서 악녀나 요녀들이 왜 남자들을 가지고 노는지 알 것 같은데.
“아무튼 말은 되네… 초능력 중 수인화 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게 본능 제어라고 하던데.”
“아, 그 애완 동물 하는 것처럼?”
“엉, 특히 밖에서 영역 표시한답시고 자기가 맡은 영역에 노상방뇨를 하고 다니는 히어로는 조금 곤란하
잖아. 여자는 둘째 치고 남자는 정신 차리면 자괴감이 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불고기 도시락을 먹는다. 뜨거운 고기와 밥 사이에 껴서 배달되었지만 차갑고
싱싱한 상추에 양념에 비벼진 밥과 쌈장을 얹어 입에 우겨 넣는다. 혓바닥에 느껴지는 달콤 짭조름한 불
고기의 맛에 입꼬리가 배실배실 올라간다. 아삭거리며 씹히는 상추 꼬다리를 음미하다 양이 줄어들지 않
는 두 사람의 도시락이 보인다.
흘끗 시계를 보니 1시 20분. 귀에 익은 멜로디가 다시 흘러나온다.
“아 씨, 벌써 예비종이야?!”
“밥 먹을 때는 입 좀 닫고 먹어!”
사이 좋게 툭탁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식사를 마무리한다. 도시락 그릇이야 대충 두고 가면 알아서 치우
겠지.
“먼저 가요~”
“아, 오후 실습에는 대규모 모의전 할 거라고 전해줘!”
“하늘아, 학교 끝나고 장보러 갈 거면 교문에서 기다려!”
도시락을 씹지도 않고 목구멍 너머로 밀어 넣는 두 미련한 생명체에게 배웅을 받으며 천천히 복도를 걷는
다. 식당으로 쓰이는 1층과, 실전 훈련을 하는 운동장만 사용하니 학교에서의 행동 반경이 반의 반으로
줄어든 느낌.
“야! 다리 똑바로 펴! 지금 그게 발차기야 각선미 자랑이야! 빌런을 종아리로 홀리려고!”
“악!”
“어, 그래… 지원과 애들 설비는 언제 들어온다 했지? 슬슬 기자들은 없어졌는데 인터넷에 사진 올린 것
좀 추적하고 싶어서… 그랴, 부탁 좀 할게.”
셋이 느긋히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밖에서는 학생들이 열심히 히어로의 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빌런을
증오하고 자신의 무력함을 저주하면서. 손등이 찢어지고 손가락 뼈가 뒤틀릴 때 까지 샌드백을 치다 실
려가는 여학생. 뭘 하다 발목이 돌아갔는지 눈물을 흘리며 두 사람에게 부축 받아 이동하는 남학생.
정말로 좋은 광경이었다.
[작품후기]
연재 주기는 2일에 1번을 목표로 노오오오력 하고 있지만 더위와 습기가 저를 막고 있네요.
정확히 말하자면 노트북 쿨러 받침대부터 사야할듯. 손가락이 익는 것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