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각
간만에 온 지하 도시는 뭔가 변한 것 같았다. 뭐,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지만 조직 하나가 통째
로 사라졌으니 변하긴 해야지.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녀도 쏠리는 시선이 금세 사라지는 것은 달라졌지
만.
‘소문 퍼졌나?’
인신매매와 인육거래가 활발한 이 곳에서 헐렁한 옷차림의 어린 남학생이 슬리퍼 질질 끌면서 혼자 돌아
다니는데 슬쩍 접근해 오는 사람이 없다. 이 주변을 클럽 주인이 확실하게 통제한다는 증거. 폭력 앞에서
빌빌 기던 푼수로 보였지만, 자기 입으로 자화자찬 한 만큼 장사 수완은 좋은 것 같았다.
허공에 권총을 쏘며 호객 행위를 하는 총포상. 헐벗은 차림으로 여자의 팔짱을 끼고 으슥한 뒷골목으로
사라지는 남성. 정체 불명의 액체가 가득 들어 있는 주사기를 쫙 늘어놓은 포장마차. 약에 취한 시민들이
허공에 총을 쏘고 남녀가 대로변에서 물고 빨며 난리가 났지만.
“야! 씨발 내가 까오가 없지 돈이 없냐!”
“으햐햑! 이 새끼 벌써 취했어!”
“가자가자 2차 가즈아!”
행인들끼리 길거리에서 충돌 사고가 나고, 차량끼리 얽히고 얽혔지만 싸움은 나지 않았다. 마치 싸구려
삼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풍경 속에서 화려한 조명이 번쩍거리는 건물로 향했다. 간판도 이름도 없이 그
저 ‘클럽’으로 통하는 건물.
“어서오십시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허리를 구십도로 꺾어 인사하는 여성들의 모습에 줄을 서서 기다리던 손님들의 시선이 모인다. 여전히
헐렁한 옷차림의 남성들과 한껏 차려 입은 여성들.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모이지만 금세 흩어진다.
“여기는 언제나 붐비네.”
“예, 지하 도시는 언제나 유흥거리에 목말라 있으니까요.”
클럽 내부는 여전했다. 1층에선 헐벗은 남녀가 번쩍거리는 조명 아래에서 춤을 춘다. 엉밑살이 드러나는
짧은 핫팬츠를 입은 남자가 허리를 털자 쌔끈하게 차려 입은 몸매 좋은 여자가 그의 허리를 잡고 등 뒤에
서 박자를 맞춘다.
2층에서는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아래층에 흘끗 시선을 주며 테이블 위에 차려진 술인지 약인지 모를
액체를 들이켜고, 테이블 사이를 분주히 오고 가는 직원들이 나를 보며 고개를 꾸벅 숙인다.
그렇게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자 마자 느껴지는 향긋한 내음. 방금 전에 과학 기술이 만들어준 포장
스테이크에 감사했지만 역시 전문 요리사가 정성을 들여 만든 요리랑 비교할 수는 없지.
고작 두 번째 방문이지만 익숙한 장소에 들어서자 테이블 위에는 꼬치에 꿰여 잘 익혀진 고기들이 준비되
어 있었다. 와인을 홀짝이는 김한나의 맞은편에 앉자 그녀가 와인잔을 내려놓고 말을 걸어온다.
“오늘은 혼자 오셨군요.”
“어, 바람 좀 쐬러 왔지.”
“빌런 조직의 잔당은 완벽하게 소탕되었습니다. 지하 도시에 대해 떠벌리고 다닐 녀석들도 다 정리되었
고. 자산도 적당히 분배되었습니다, 물론 수고비는 따로 준비했고요.”
우아하게 와인으로 다시 입술을 축인 그녀가 획득한 이익에 대해 설명한다. 몇 구역 까지의 제어권, 마약
200kg, 소총과 수류탄을 포함한 각종 무기들, 지폐와 수표, 지상의 땅문서가 어쩌구 저쩌구.
“그래서 말입니다, 뭘 하시러 오셨었죠?”
그녀의 말에 문득 사고가 정지하는 게 느껴진다.
여길 왜 쳐들어왔더라?
햄버거 먹다가… 내가 벌인 사건의 여파를 조사했는데, 별 거 아니라고 넘어가길래 주변에서 제일 큰 조
직 찾아서 깽판 치러 왔지. 여름 햇볕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회까닥 돌아버린 상태로 급발진. 조직 덩치를
키우겠다고 그냥 쳐들어왔으니까 이미 이루어진 거 아닌가? 아무튼 부하 비슷한 거 생겼으니까.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이 지하 도시에서 가장 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만, 가장 발이 넓다고는 자부하니까요.”
하하, 하고 웃어 보이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는 내가 뭔가 대단한 이유 때문에
왔다고 생각한다. 아니,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그게 당연하지.
갑작스레 지하로 들어온 젊은 3인방. 1달도 되지 않아 50명 정도의 조직원을 꾸려, 타고난 수완으로 근처
의 사창가를 접수. 돈벌이 보다 정보 수집에 공을 들이더니 갑작스레 지하도시의 중앙 관리자가 직접 나
설 정도로 커다란 사건을 일으킴.
그 이후 조직을 정비하고 인근에서 가장 거대한 거래소인 이 클럽을 단신으로 습격, 제압. 거대 경매장의
보스를 제압하고 그녀가 원하는 일을 말끔히 처리하여 지하 도시의 치안을 지키고 빌런 예비군들을 싸그
리 쓸어버림.
그 모든 이유가 햄버거 먹다가 햇빛이 뜨거워서 짜증이 나서~
라고 말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괜사리 고민하는 척하며 잘 익은 고기를 한 입 먹는다. 꼬치에
꿰인 상태로 한 점 먹을 때 마다 하나씩 얇게 썰어주는 부드러운 소고기. 무언의 기대에 가득한 그녀의 눈
동자가 기분 나빠 말을 돌린다.
“지하 도시에 경매장이 있나?”
“당연히 있죠. 지상에서 구하기 힘든 물건이라도 이곳에는 잔뜩 있을 겁니다. 신생 조직이라면 초대장을
받지 못하겠지만 어차피 경매장 관리인 중 하나가 저니까요. 뭔가 노리시는 물건이 있으셨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에 맘 편히 소파에 몸을 뉘였다. 뭐 어떠랴, 잊고 있었지만 이 세상에 강화석
도 있고 천사와 악마, 용사와 마왕이 있으니 관련된 아이템도 좀 있겠지. 스테이크를 썰다 예전에 사용했
던 강화석이 떠오른 것이지만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이전에 있던 강화석은 굴라들에게 실험으로 사용했지만, 이제 소희가 용사가 되었으니 쓸 곳이 많을 것
이다. 마왕이 내일 나올지, 내년에 나올지 모르지만 일단 장비는 전부 풀강화 하고 싸우는 게 RPG의 맛
아니겠는가.
“경매장에 동그란 파란색 보석이 나온 적 있나? 사파이어는 아니고 유리 구슬처럼 결 없이 매끄러운 녀석
인데.”
“아, 강화석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있죠.”
이번에는 내가 소고기를 씹다 말고 포크를 내려놨다.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당연하다는 생각도 뇌리에
스쳐간다. 누군가의 비밀 창고에 쌓여 있던 게 강화석이다. 그 창고를 털어 먹고 저주로 난동을 벌였는데
별 거 아닌 사건으로 치부되지 않았던가?
히어로와 빌런, 천사와 악마, 영웅과 마왕, 남녀 역전 모드에 학원물 세팅. 어쩌면 내가 발견 못한 모드가
더 있을지도 모르지. 기존의 단일 모드를 즐겨 왔던 나의 상식으로 판단하니 일이 자꾸 꼬이는 기분이 든
다.
강화석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소고기를 씹으니 후식으로 잘 구워진 파인애플이 계피 가루를 뿌려서 나온
다. 역시 파인애플은 피자 위에만 올라가지 않으면 맛있어.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와인으로 입을 행구니
그제서야 설명이 끝난다.
이쪽 애들은 강화석을 쓸 줄 알지만, 제대로 사용하지는 못한다. 유저와 NPC의 차이일까, 아니면 모드의
차이일까. 아마 모드 차이 같기는 한데. 히어로와 빌런 모드 기준이라면 강화된 장비, 강화되지 않은 장비
두 종류지만, 천사와 악마, 영웅과 마왕 기준으로는 강화 수치가 +9강 이런 느낌으로 있으니까.
“경매는 내일 모레, 11시에 시작되니 10시까지 오신다면 곧바로 경매장으로 모시겠습니다. 원하시는 건
강화석 하나인가요?”
“다른 물건도 겸사 겸사 볼 거야.”
좋은 물건이 있으면 소희랑 내가 쓰고, 적당한 강화석 같은 게 있으면 굴라들을 쓰고. 처음에는 적당히 쓰
고 잊힐 두 명이라 생각했지만… 아니 생각해보니까 그 두 명도 참 대단해. 김세민과 이소정.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는 범생이와 양아치.
평범한 고등학생이라 굴라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리버리 할 줄 알았는데, 지금 지하 조직의 정비부
터 인근 치안 유지와 평정까지 문제없이 해 왔다. 나한테 문제 보고가 들어오지 않아 깨닫지 못했던 사실.
평범한 고등학생 두 명이 지하 도시에서 반년간 문제 하나 없이 조직을 운영했다는 점.
생각보다 유능한 부하들이었다. 여차하면 굴라가 아니라 하급 흡혈귀로 올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이미 굴라가 되어버린 상황이라 흡혈귀로 종족을 변화시키려면 재료 아이템이 좀 필요하지만…
유능함을 따져보면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슬며시 요리사가 사라진 문으로 익숙한 발걸음이 들려온다. 지난 번 봤던 그 접대부 3인방인가? 즐거운
시간 보내시라며 눈웃음을 살살 치고 나가는 김한나를 지나쳐 세 명이 지난번처럼 자리를 잡는다.
머리를 감싸는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과, 살며시 신발을 벗기고 발을 주무르기 시작하는 부드러운 손가락
들의 감촉. 식사를 방금 마쳤다는 것을 아는지 등을 살살 문지르는 손바닥. 뻐근할 리 없는 흡혈귀의 신체
가 드득 뼛소리를 내며 풀어지는 게 느껴진다.
“마사지는 되었고… 그냥 바로 빨아.”
헐렁한 반바지가 스스륵 내려가자 누군가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난다.
[작품후기]
냉수샤워하고 에어컨 앞에서 팥빙수 먹다가 배탈나서 하루를 날렸습니다.
화장실에서 몇시간동안 식은땀 흘리며 과유불급이 뭔지 온 몸으로 느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