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사 오병호-7화 (7/45)

7. 비행기 납치

시간은 자정이 지나 7월 22일로 접어들고 있었다.

병호는 온갖 잡동사니를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채 그 앞에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 팔굽을 올려놓고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두

시간 넘게 그렇게 웅크리고 있었다.

탁자 위에 널려 있는 잡동사니는 피살된 노엘 화이트의

유품들이었다. 그것들은 처음 신고된 관할 경찰서에 보관되어

있다가 노엘 화이트가 피살됨으로 해서 수사본부로 옮겨진

것들이었다. 병호는 그 유품들 가운데서 어떤 단서를 찾으려고

혼자 잠도 설쳐가며 고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수첩과

여권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재크나이프를 펴보기도 하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유품들 가운데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체코제 세열

수류탄이었다. 그것은 위험부담이 따르기 때문에 다른 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대신 그것을 찍은 흑백 사진이 있었다. 그는

사진을 집어들었다. 그것을 들여다보면서 그는 '에어......'하고

중얼거렸다. 노엘 화이트는 수류탄으로 무슨 짓을 하려고

했을까? 그가 숨을 거두면서 남긴 '에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수류탄은 파괴와 살상을 위해 존재한다. 화이트는

파괴와 살상을 위해 그것을 한국에 가지고 들어왔다. 무엇을

파괴하기 위해, 그리고 누구를 죽이기 위해 그것을 가지고

왔을까? 수류탄과 '에어......'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에어만 떼어놓고 볼 때 그것은 공기 또는 공중, 하늘

같은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 수류탄을 가미시키면 하늘에서

수류탄을 터뜨린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하늘에서 어떤 방법으로 수류탄을 터뜨릴 것인가? 그것은

비행기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비행기 속에서

수류탄을 터뜨린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air......'를 앞에 붙여

이루어진 복합어 가운데 가장 적합한 단어는 airpane,즉

비행기이다. 화이트가 마지막으로 남긴말 'air......'는

airplane을 뜻하는 게 아닐까? 그는 그 말을 마지막까지 끝맺지

못한 채 숨을 거둔 게 아닐까?

침대 위에서는 왕형사가 코를 골며 곤히 자고 있었다.

소퍼에서는 다른 형사 한 명이 입을 헤벌린 채 잠들어 있었다.

화이트가 노린 것이 비행기였다고 치자. 수류탄으로 비행기를

폭파할 수 있을까? 물론 철저히 파괴할 수는 없어도 구멍 정도는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비행기를 폭파할 마음이 있다면

시한폭탄 같은 강력한 파괴력이 있는 것을 사용하지 수류탄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병호는 만화를 집어들었다. 그것 역시 화이트의 유품으로

영어로 된 만화였다. 겉장에는 'Hijacking!'이라는 빨간색

제호가 붙어 있었다. 그것은 공중 납치, 즉 비행기 납치를

뜻한다. 표지의 그림은 아주 자극적이고 선정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납치범 한 명이 스튜어디스 뒤에 달라붙어 권총으로

관자놀이를 겨눈 채 찢어진 유니폼 밖으로 흘러나온 풍만한

젖가슴을 한 손으로 움켜잡고 있고, 승객들은 공포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저께 파출소에서 대충

훑어보았기 때문에 내용은 대강 알고 있었다. 그것은 비행기

납치라는 위기상황을 꾸며놓고 그린 일종의 포르노 만화였다.

일단의 납치범들은 기내에서 승객들을 꼼짝 못하게 해놓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스튜어디스들을 강간하고 있었다.

스튜어디스들은 엉덩이를 높이 쳐든 채 통로에 엎드려 있었고,

납치범들은 그 뒤에 바싹 붙어서서 그녀들을 능욕하고 있었다.

납치범은 모두 네 명이었다. 그들은 제각기 다른 무기들, 즉

기관단총, 권총, 도끼, 수류탄 등을 들고 있었다. 수류탄을 들고

있는 자는 털보에다 한쪽 눈에 안대를 대고 있었다.

"바로 이거야! 화이트가 노린 것은 비행기 납치였어!"

그는 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말할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에는 아직 증거가 부족했다. 결정적인 증거를

포착하기 전에 섣불리 그런 말을 꺼냄으로써 소동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었다.

만일 화이트가 노린 것이 비행기 납치였다면 틀림없이 공범이

있을 것이다. 그런 엄청난 짓을 자행하려면 적어도 2명 이상의

인원이 필요하다. 아니, 앞뒤에서 승객들을 위협하고, 조종실에

들어가 기장을 위협하려면, 그리고 기내에서 장시간 버티려면

적어도 4,5명 정도는 있어야 할 것이다.

노엘 화이트는 테러를 앞두고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공범들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비행기 납치

계획은 취소되고, 화이트를 살해한 테러리스트들은 한국에서

철수했을까?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들이 철수했다는

어떤 증거도 아직까지는 없다. 그들의 존재를 찾아내어 추적해야

한다. 그들이 아직 한국에 있는지, 아니면 이미 출국했는지

그것부터 알아내야 한다. 만일 그들이 아직까지 한국에 남아

있다면 그것은 계획을 취소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행기

납치를 전제로 하고 수사를 전개해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노엘 화이트는 H호텔에 숙박카드를 남기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그 호텔에 투숙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카드에 기재하지 않고 다른

사람, 그러니까 공범과 동숙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실제로 화이트의 사진을 본 호텔 종업원들 가운데 그를

호텔내에서 본 적이 있다고 증언한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은 호텔 안에 있는 식당, 코피숍, 바 등에서 그를

목격했다고 증언하고 있었다. 그런데 목격자들은 하나같이 그가

동행이 없이 혼자였다고 말하고 있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 화이트를 포함한 일당은 남의 눈에

띄는 곳에서는 함께 동행하거나 일절 서로 아는 체하지 않기로

약속했을 것이다.

화이트가 생전에 H호텔 구내 여기저기서 목격되긴 했지만,

그가 어느 방에서 누구와 동숙했는가 하는 것은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가 H호텔에 투숙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안전을 위해 일당이 모두 한 호텔에

투숙하지 않고 여러 호텔에 분산해서 투숙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모임을 위해 H호텔에 나타나곤 했는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에 대비해서 지금 수사요원들은 서울 시내에 산재해

있는 모든 숙박업소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노엘 화이트가 투숙한

적이 있는지 그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병호는 탁자 위에 널려 있는 화이트의 유품들을 그의 누런

가죽가방 속에다 쓸어담은 다음 수사자료 파일을 꺼내놓았다.

파일의 두께는 어느 새 한 주먹이나 되어가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그는 공항에서 가져온 자료들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대부분 지난 한 달 사이에 입국한 사람들의 명단과 그들의

인적사항을 복사한 것들이었다. 거기에는 노엘 화이트가 피살된

시간 이후에 출국한 사람들의 명단도 들어 있었다.

그 명단 속에는 피살된 노엘 화이트와 행방을 감춘 토머스

러트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그 자료에 따르면 화이트는 지난

7월 14일에 입국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러트는 그보다

하루 전인 13일에 입국한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러트가 H호텔에 투숙한 것은 7월 18일이었다. 그 전에는 그

호텔에 투숙한 기록이 없었다. 그렇다면 13일에 입국해서

17일까지 다른 곳에 있다가 H호텔에 투숙했다는 것이 된다.

H호텔에 투숙하기 전에 그는 어디에 있었을까? 13일에

입국해서부터의 그의 행적을 알아내기 위해 경찰은 지금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서울에 도착하기 전의 러트의 출발지는 파리였다. 그가 이용한

항공편은 에어프랑스 271편기로 기종은 보잉 747점보기였다.

항로는 '파리→앵커리지→도꾜→오사카→서울'순이었다. 파리

드골공항을 출발한 일시는 7월 12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도착일시는 13일 오후 16시 10분이었다.

노엘 화이트의 죽기 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다행히 그의 여권이

있기 때문에 러트보다는 좀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공항의 입국카드에는 그가 도꾜로부터 입국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가 도꾜를 출발한 것은 7월 14일 오후 6시의

일이었다. 그때 이용한 항공편은 KAL706편으로 기종은 보잉

747점보기였다. 그리고 서울 도착시간은 두 시간 쯤 후인 오후

8시 10분경이었다. 입국카드에는 그 정도의 자료밖에 나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여권에는 그 이전의 행적이 나와 있었다. 그의

낡은 여권의 빈 칸에는 스탬프가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그것은

출입국할 때 찍어주는 스탬프였다. 그러니까 그것은 출입국

허가증명이나 다름없는 것으로서 거기에는 출입국 날짜도 함께

찍힌다.

노엘 화이트의 여권에 어지럽게 찍힌 스탬프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도교 출발 이전의 그의 여행코스는 다음과 같았다

"뉴욕→프랑크푸르트→로마→나폴리→파리→암스테르담→앙카

라→카이로→리스본→취리히→리오데자네이로→멕시코시티→도꾜

."

그가 처음 뉴욕을 출발한 날짜는 1년 전인 1985년 4월

15일이었다. 그리고 긴 여행 끝에 도꾜에 도착한 것은 1986년

6월 25일이었다. 그때까지의 그의 여행기간은 14개월이나 되었고

방문한 나라는 13개국이나 되었다.

그동안 그가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녔는지는 몰라도 겉으로

드러난 그의 궤적으로 보아서는 그는 마치 세계를 지붕으로 삼고

살아가는 코스모포리탄 같았다. 그런데 그는 일본에 20일 동안

체류하다가 지난 7월 14일 한국에 입국, 비참한 최후를

맞음으로써 기나긴 여행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국 경찰은 주한 미국대사관에 노엘 화이트의 죽음을

통보하면서 그에 대한 신원조회를 의뢰했다. 그와 함께 그의

유족들이 그의 시신을 운구해 가도록 그들에게 통보해 줄 것도

아울러 부탁했다.

병호는 냉수를 한 컵 마시고 나서 욕실로 들어가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자리로 돌아온 그는 다시 자료철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7월 13일 토머스 러트가 타고온 AF 271편기의 탑승객수는 그를

포함해서 369명이었다. 병호는 7월 13일부터 7월 20일 사이에

H호텔에 투숙한 투숙자 명단과 AF 271편기로 입국한 입국자

명단을 세밀히 대조해 보았다. 양쪽 명단에서 혹시 같은 이름이

나오지 않을까해서 대조해본 것인데, 그 작업은 4시경에야

끝맺을 수가 있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는 다섯 장의

숙박카드를 따로 분류해 놓았다. 그리고 369장의 입국자 카드

가운데서도 다섯 장을 따로 뽑아놓았다. 양쪽에서 가려낸 각

5명씩의 명단은 서로 같은 동일 인물들이었다. 그러니까 지난

13일 AF 271편기를 타고 입국한 사람들 가운데 5명이 H호텔에

투숙한 것이었다. 그중에는 물론 토머스 러트도 끼어 있었다.

러트를 제외한 4명의 인적사항은 다음과 같다.

1. Philip Roi(필립 로이) : 미국인 남자. 1954년 9월9일생.

여권번호 08829613X. H호텔 투숙일자 7월 13일.

2. Allain Gavee(알렝 가베) : 프랑스인 남자. 1943년 19일생.

여권번호 754993X. 호텔 투숙일자 7월 16일.

3. 장길모(張吉模) : 한국인 남자. 1944년 11월 5일생.

여권번호 1024589X. 호텔 투숙일자 7월 13일.

4. 薩摩賢治(사쓰마 겐지) : 일본인 남자. 1944년 9월 10일생.

여권번호 03752892X. 호텔 투숙일자 7월 13일.

병호는 즉시 프런트로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가 직접 내려가

보기로 했다.

프런트 데스크가 자리잡고 있는 1층 로비는 이른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조용하지만도 않았다. 나이트클럽에서 밤샘한

것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들이 서성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로비는

생각했던 것보다 어수선해 보였다.

프런트맨은 병호의 신분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듣고 나서 즉시 컴퓨터 단말기 앞으로 다가앉아 키를

두드려댔다. 그동안 병호는 로비를 어슬렁거리다가 화장실에

들어가 소변을 보고 나왔다. 프런트로 다가가자 프런트맨은 이미

조사를 끝내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 사람 중 지금까지 호텔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프런트맨이 말했다.

"모두 정식으로 체크아웃하고 나갔나요?"

"네, 그렇습니다."

병호는 그들이 호텔에서 나간 날짜를 알아보았다. 필립 로이가

호텔에서 나간 날짜는 7월 18일이었다. 알렝 가베는 7월 19일,

그리고 장길모는 7월 21일, 일본인 사쓰마 겐지도 7월

21일이었다.

미국인과 프랑스인은 화이트가 피살되기 전에 호텔을 떠났고,

한국인과 일본인은 사건 발생 하루 뒤에 떠났다. 병호는

임시수사본부로 돌아오면서 장길모라는 한국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는 한국인이면서 왜 집에 들어가지 않고 호텔에

투숙했을까? 장길모는 13일 오후 6시에 호텔에 투숙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가 타고온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 10분이었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시내에 자리잡고 있는

H호텔에까지 오려면 두 시간 가까이 걸릴 것이다. 그러니까 그날

장길모는 공항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H호텔로 달려왔다고 볼 수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자 왕형사가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안 주무셨습니까?"

그가 미안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잠이 와야 말이지. 급히 수배해야 할 인물들을 찾아냈어."

병호는 다시 탁자 앞에 다가앉아 파일을 들여다보았다.

"어떤 인물들입니까?"

왕이 그쪽으로 다가와 앉으며 물었다.

병호는 추려놓은 4명의 명단을 두꺼비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인물인가를 설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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