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듀얼 (26/43)

#듀얼

“무슨 일 있어?”

“네. 숨겨진 던전 하나 찾았어요. 일단 소수만 추려서 공략해 볼 건데 오빠도 시간 있으면 같이 가자고요.”

“벌써 찾아냈단 말이야? 갈게. 마침 시간이 남거든. 성으로 가면 되지?”

“네. 빨리 와요.”

“귓속말 해제. 숨겨진 던전이라……. 재밌겠는데?”

최대한의 속도를 내어 성으로 달려갔다. 성에 도착했을 때, 세르 이외에도 거트 형과 아론, 베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부 함께하는 건가?

“길도 좁고 트랩 던전과 비슷해서 몬스터도 적기에 3, 4명만 가려 했는데 오빠들이 심심하다고 따라붙어서…….”

세르가 나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길이 좁다면 불편하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옛날 생각나고, 좋군.

“마지막엔 뭐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같이 가면 좋지, 뭐.”

“……좋아요. 대신 심심하다거나 하는 말을 입 밖으로 내면 바로 쫓아내버릴 거예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어서 가자!”

“매스 텔레포트!”

세르가 우릴 데려간 곳은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였다. 아니, 하나는 있었다. 어디서 떨어져 나왔는지 모를 바위 하나.

아론이 투덜대는 동안 세르는 바위에 다가갔다.

“이 필드 이름이 목바른 바위의 언덕이더라고요. 바위의 언덕이 목마르다는 걸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바위가 목마른 언덕으로 해석해봤어요. 그래서 이렇게 바위에다 물을 뿌렸더니…….”

세르가 수통의 물을 바위에 뿌리자 조금씩 무언가가 나타났다.

“아쿠아! 아쿠아! 아쿠아!”

수통의 물로는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 대량의 물을 소환해냈다. 바위 전체가 흠뻑 젖자 바위에는 문이 하나 생겨났다.

성격 급한 아론은 바로 문을 열었다. 문 뒤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던전을 이런 식으로 숨겨놓다니……. 대단하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가요!”

세르가 앞장 섰다. 처음 겪어보는 던전인지라 로그 마스터에 가까운 세르가 선두에 서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세르의 말대로 안은 트랩 밭이었다.

몬스터도 트랩의 일환으로 두세 마리 나오는 것이 전부……라고 세르가 말했지만 세르가 워낙 트랩 해제를 잘하다 보니 그 마저도 볼 수 없었다.

“아함, 진짜 트랩 던전인가? 심심해 죽겠…… 헙!”

몬스터 한 마리 안 나오고, 진행 속도까지 늦어지자 참지 못한 베르가 하품하며 말했다. 별것 아닌 말인데, 이상하게도 세르는 트랩 해제하던 것을 멈추고 베르를 쳐다봤다.

“오빤 나가요.”

“세, 세르야. 그게 실수로…….”

“나가요, 나가!!!”

세르는 오기 전의 약속을 어긴 베르에게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뭔가 분위기가 요상하다?

“베르, 아무래도 네가 나가야 할 듯싶다. 약속을 어긴 건 사실이니까.”

“끄응, 할 수 없죠. 대신 나중에 뭐가 있었는지 알려줘요!”

베르는 화가 나 볼이 부어 있는 세르를 보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물러났다. 베르가 나가자 세르는 약간 화가 풀어진 모습으로 말없이 다시 트랩 해제를 시작했다.

세르의 민감한 반응을 보았기에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뭔 놈의 던전에 함정이 이리도 많은 건지 30분 동안 이동한 거리가 50m도 안됐다.

휴우, 얼마나 대단한 걸 숨겨 놓았다고 이런 미친 짓을 해놓은 거야?

“세르, 뒤로!”

세르가 트랩 해제에 열중인 동안 전방에서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 포착되었다. 그것도 사람의 형상을 한. 그걸 발견한 아론이 세르를 뒤로 물리고 앞으로 나섰다.

“세르, 앞에 함정은 몇 개나 있지?”

“트랩은……이제 하나도 없어요.”

아론은 그 말에 안도하며 언제든 뛰쳐나갈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오랜만입니다. 레이지 여러분!”

“아, 아니. 넌!!!”

목소리가 들리며 앞쪽에도 환한 빛이 생겼다. 그러고 나서 나타난 것은 로즌 크랜츠!

“네놈이 왜 여기 있지?”

“왜라니요, 한참을 기다린 사람한테.”

“네놈이 우릴 기다릴 이유가 뭐냔 말이다!”

아직도 로즌 크랜츠에게 강한 적대감을 보이는 아론은 거인의 단검을 고쳐 잡았다.

근데 진짜 무슨 일이지?

“콜로니스트님에게 듀얼을 신청하기 위해섭니다. 계속해서 사람을 보냈는데 답이 없으시니 이렇게라도 해야지요.”

“듀얼? 사람을 보내? 난 전혀 들은 바 없는데?”

“이런, 이런. 중간에서 차단되었나 보군요.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여기서 붙게 될 테니까요.”

로즌 크랜츠의 말에 혈액이 빨리 도는 짜릿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찌릿찌릿한 느낌으로 전투 감각을 살릴 때, 아론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로즌 크랜츠, 저번에도 말했듯이 날 먼저 꺾어봐라!!”

“그 부탁은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최상의 상태에서 듀얼을 치러야 하거든요.”

아론이 달려드는 대도 로즌 크랜츠는 여유 있게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아론이 검강을 뽑아내려는 그때였다.

“오빠, 미안해요.”

“컥? 세…… 르. 네가?”

세르가 아론보다 더 빠르게 달려가 아론의 뒤에서 목에 칼을 꽂아 넣은 것은.

“세르, 네가 왜?!”

회색으로 물들며 쓰러지는 아론을 대신해, 거트 형이 격양된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세르가 왜?

“미안해요. 하지만……길드원이라 페널티는 없을 거예요. 하이딩!”

세르가 거트 형을 향해 달려들며 하이딩을 펼쳤다.

거트 형이 황급히 디바인 실드를 치려했으나 허사.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던 탓이다. 다시 나타난 세르의 칼엔 눈을 부릅뜬 거트 형의 목이 꽂혀있었다.

“미안해요, 오빠들. 저도 목숨으로 사죄할게요.”

푸욱!

같은 길드원이 죽인 게 아닌, 자살은 분명히 페널티를 받음에도 세르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목을 찔렀다.

제기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먼저……얘기가 필요하겠군요. 이쪽으로.”

로즌 크랜츠는 앞장서서 던전 안쪽으로 들어갔다. 내가 암습을 가할지도 모르는데 등을 훤히 보이고서.

“앉으시죠.”

한참을 걷자 제법 넓은 공간이 나왔다. 그곳에는 미리 준비해놓은 책상과 의자가 있었고 로즌 크랜츠는 내게 앉을 것을 권했다.

“궁금해 하실 것부터 말해 드리죠. 나이세르, 그러니까 세르는 제 친동생입니다. 그래서 미안하게도 이런 못할 짓까지 시키게 되었죠. 사적인 욕심을 위해 동생에게 상처를 남기다니, 저도 참 못된 오빠로군요.”

이 말로, 그간 의문에 쌓여 있던 몇 가지 일들이 말끔히 정리됐다.

마비 침에 대한 것도, 밀림에 있을 때 6성 연합이 쳐들어 왔던 것도 세르 짓이었단 말인가? 자신의 오빠인 로즌 크랜츠와 동맹을 맺게 하기 위해서?

하…… 하……. 당했군. 완전히 당했어. 길드 수뇌부에 스파이가 있었을 줄이야!

“제가 이런 말 한다고 세르의 길드 추방에 영향을 주진 못 하겠지만 그래도 동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인지라 몇 마리 더 하겠습니다. 세르에 대해 오해는 말아주십시오. 처음부터 거짓 연기로 길드에 가입한 건 아니었습니다. 못난 오빠 때문에 몇 가지 정보를 빼낸 적은 있지만 역으로 제게 정보를 얻어내 움직인 적도 적지는 않습니다. 저와 콜로니스트님의 2번 째 격돌 때, 몸으로 비도를 막았을 때도 그랬죠. 오늘도……. 사실 트랩과 암살로 수를 줄인 뒤, 콜로니스트님을 끌어내려 했었습니다. 그런데 세르가 자청한 거죠. 레벨 다운을 시킬 수 없다면서요. 길드 추방은 세르도 각오한 일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오해만은 말아주십시오.”

아론, 거트 형. 둘 다 95레벨을 넘긴 상황에, 필요 경험치도 남보다 많았다. 한번 죽어서 1레벨이라도 떨어지면 그 손실은 막대할 터. 그것을 지켜주기 위해 세르가 길드에서 추방당할 것을 각오했다……?

“…….”

“너무 심각해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그랬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문득 왕국의 주인인 레이지 길드보다 이들이 더 히름을 n이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외받은 자들을 위해 성을 얻고, 흉악해져 가는 사람들을 바로 잡기 위해 성을 버린다…….

과연 나라면 할 수 있는 결정이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러니 더욱, 최선을 다해 싸워야겠군.”

나와 로즌 크랜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 넓은 방의 중앙으로 향했다.

“듀얼 신청!”

“받아들인다.”

로즌 크랜츠가 명령어에 따라 생겨난 흰 장갑을 벗어 내게 던졌고 난 그걸 집어 들었다. 이것으로 듀얼 성립. 죽어도 페널티가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게‥날 위한 배려일까, 자신을 위한 보험일까?

“블링크! 하이딩!”

로즌 크랜츠는 선공을 양보한다거나 할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오히려 하이딩을 사용해 숨어버리기 전에 몰아쳐서 끝장을 봐야할 타입. 그래서 선수를 쳤다.

퍼억!

시동어로 대충 파악했는지 스킬 조합을 쓰자마자 로즌 크랜츠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뒤에서 목을 노릴 단검을 피하기 위해서.

하지만 내가 이동한 곳은 오히려 로즌 크랜츠의 눈앞이었다. 있어야 할 머리가 아래에 있는 것에 당황하긴 했지만 재빨리 무릎으로 그의 안면을 찍어 찼다. 내 힘이 높지는 않지만 머리에 맞았으니 충격이 있을 게다.

“큭!”

“라이트닝 더블!”

두 줄기의 전격에 맞은 로즌 크랜츠의 허리가 크게 젖혀졌다.

이때다! 정신 차릴 틈을 주지 말고 몰아쳐야 한다. 로즌 크랜츠가 어쌔신과 마법사 클래스를 택한 이상, 작은 데미지라도 착실히 입혀 가면 이길 수 있다!

“파이어 볼, 더블!”

크고 작은 두 개의 화염의 구가 로즌 크랜츠의 머리 위에서 폭발했다. 또 다시 정신 못 차리고 날아가는 로즌 크랜츠. 이번엔 차지 볼트 두 개가 크기를 달리해서 날아들었다.

“으어억!”

“라이트닝 랜스, 더블!”

치지직!

실패였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건지 검을 들어 두 개의 전격의 창을 비껴낸 로즌 크랜츠는 비틀거리는 몸으로 하이딩을 시전했다.

제길, 더 빠른 걸로 휘몰아쳤어야 했는데 너무 욕심 부렸어!

“파이어 월! 윈드!”

쿤과 함께 했던 콤보를 이번엔 나 혼자서 펼쳤다.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멀리야 도망 못 갔을 테고, 뭔가에 스치기만 해도 풀리는 하이딩의 특성을 생각하면 이걸로 잡을 수 있겠지.

“음흉한 자들이여, 모습을 드러내라. 리빌!”

그새 파이어 월의 영향권을 벗어났는지 로즌 크랜츠가 나타나지 않자 이번엔 6써클의 투명 해제 마법을 시전했다. 리빌에 의해 드러난 로즈 크랜츠의 위치는 내 우측 측면! 그는 자신의 하이딩이 풀리자마자 내게 비도를 던져왔다.

“블링크! 하이딩!”

“블링크!”

비도를 던지기 전부터 주문을 읊어놨는지 내가 이동한 즉시 로즌 크랜츠는 반대편 멀리로 이동했다.

이동하자마자 포션부터 온몸에 뿌리는 것이 이대로 도망 다니며 회복부터 하겠다는 생각인 듯했다. 회복이 끝나면 내가 불리해질 수 있어. 속전속결이다!

“무지한 자에게 심판을, 체인 라이트닝 더블!”

이번엔 시간차를 두고 공격했다. 먼저 왼손의 체인 라이트닝을 제대로 날리고 오른손의 체인 라이트닝은 로즌 크랜츠가 사라지는 순간 등 뒤로 뿜어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에도 로즌 크랜츠의 모습은 없었다.

큭, 측면인가?

“차앗!”

상황이 역전되었다. 이번엔 내가 주저앉고, 로즌 크랜츠가 무릎으로 귀를 찼다. 머리, 그것도 귀를 맞아서인지 일순간 균형 감각을 상실했다. 비틀대는 사이 마법 대신 몇 자루의 비도가 날아왔다.

“쉐도우 소드!”

다급히 검, 아니 도를 휘둘러봤지만 옆구리와 허벅지에 각각 하나씩 비도가 박혔다.

“블링크! 블링크! 하이딩!”

아직 9써클 이상의 마법사가 되지 못해, 4써클의 블링크를 주문 없이 사용 못하는 로즌 크랜츠와 나에겐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블링크로 도망치고 혹시나 따라 붙을까, 또 한 번 이동해서 숨었다.

“큭, 그 블링크는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군요. 하이딩!”

둘 다 서로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을 끌수록 내가 불리하다. 하이딩이 지속적으로 마나를 잡아먹으며 유지되는 기술이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이상, 상대적으로 스킬이 낮은 내가 먼저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므로. 일단 로즌 크랜츠가 있던 곳으로 조심스레 걸어갔다. 바보가 아닌 이상 제자리에 서 있진 않겠지만.

“팔방 수리검!”

정확히는 표창이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표창도 수리검의 일종인 것을.

아무튼 초조해진 내가 먼저 선공을 날렸다.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전방위로 던지는데 막기라도 하겠지.

따닥! 탁!

“거기냐!”

하이딩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표창을 피하기 위해 발을 구르는 소리가 포착되었다. 다시 6개의 표창을 더 던지자 로즌 크랜츠도 막지 않을 수 없는지 하이딩을 풀고 검을 휘둘렀다.

“파이어!”

로즌 크랜츠가 표창을 막아내는 동안 손가락 끝에 불을 만들고 달려갔다. 다른 한손으론 매그넘 74란 이름의 술병을 품에서 꺼냈다.

입으로 마개를 따고 한 입 가득 부어넣은 뒤, 술병은 로즌 크랜츠에게 던졌다.

“큭!”

병이 깨졌다간, 그 파편에 자신도 피해 입을 것이므로 로즌 크랜츠는 신중하게 술병을 비껴냈다.

화르르륵!

한 숨 돌릴 새도 없이 뜨거운 불길이 로즌 크랜츠의 눈앞에 닥쳤다. 데미지도 미미할 단순한 불꽃일 뿐이지만 인페르노 같은 고위 마법으로 착각했는지 로즌 크랜츠는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쉐도우 소드!”

허리춤에 매어뒀던 도를 집어 들며 외치자 반대쪽 손에 그와 똑같은, 아니 약간은 다른 도가 나타났다. 자세도 무너지고, 당황하기까지 한 지금이 기회다!

“끝을 보자!”

까앙!

정수리를 향해 떨어지는 도를 손목으로 받아냈는데 이상하게도 쇳소리가 났다. 튕겨진 검에 당황하는 사이 로즌 크랜츠는 오른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치잇!”

“백스텝!”

아래에서 위로, 긴 사선을 그리며 솟구쳐 오르는 검을 쉐도우 소드로 막아내는 동안 로즌 크랜츠는 백스텝을 써서 몸을 피했다.

“이 강철 토시가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군요. 아, 오해는 마십시오. 경량화가 걸린 것이라 움직임을 둔화 시키진 않습니다.”

여유를 가질 만한 거리를 만든 로즌 크랜츠는 친절하게 왼팔을 들어 보이며 설명했다.

날 무시하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로군.

“이번엔 제가 가죠. 쉐도우 홀드!”

급속도로 길어진 로즌 크랜츠의 그림자가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팔을 뻗어 내 발목을 붙잡았다.

“윽, 라이트!”

달려오는 로즌 크랜츠를 보며 다급히 빛의 구를 만들어 냈다. 빛은 순식간에 그림자를 몰아냈다. 쉐도우 소드란 그림자까지.

“쉐도우 브레이크!”

라이트가 시야를 가린 사이, 측면으로 돌아온 로즌 크랜츠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겐지 내가 아닌 그림자를 향해 비도를 던졌다.

“컥!”

비도 하나가 그림자에 박히는 순간, 갑자기 가슴 언저리가 쿡 쑤셨다. 혹시나 해서 쳐다보니 그림자에 비도가 박힌 부분도 가슴. 그림자를 공격해 주인에게 타격을 입히는 기술이었다.

“제길, 라이트!”

“이로써 이도류의 이점은 사라지셨군요. 하앗!”

이번엔 로즌 크랜츠가 직접 검을 마주쳐왔다. 검을 써온 시간부터가 다른데 내가 검술로 이길 수 있을 리는 만무한 일. 최대한 급소를 방어하기로 마음먹었다.

쿠웅!

힘은 어떨지 모르지만 달려오던 가속도가 있는지라 로즌 크랜츠와 정면으로 부딪힌 내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쉐도우 홀드!”

날아가던 몸이, 그림자에게 잡혀 도중에 멈춰 섰다. 관성 때문에 피가 뒤통수 쪽으로 쏠리는 색다른 경험을 하고 있을 때, 두 자루의 비도가 날아왔다.

“플레임 노바!”

내 주위로 불꽃의 띠가 생겨나 원형으로 퍼져나갔다. 그 덕에 날 묶고 있던 그림자가 사라지고, 날아오던 비도가 튕겨나갔다.

로즌 크랜츠가 접근하지 못 하는 사이, 서둘러 마법사 최강자의 전용 아이템 샤이닝 로브를 둘렀다. 움직이긴 불편하지만 이것으로 그림자 계열 스킬은 무용지물!

“네 그림자는 이제 뻗어 나오지 못한다! 라이트닝 노바! 음흉한 자들이여, 모습을 드러내라. 리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노바 계열 주문을 한 번 더 쓰고 투명화 해제 마법을 사용했다. 로즌 크랜츠가 나타난 곳은 내 앞으로 약 20m 떨어진 곳. 라이트닝 노바에 당해 마비 된 듯,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내게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한 줌의 재로 화할지니. 인페르노!”

손에서 뻗어나간 불꽃이 시야를 가릴 때까지도 로즌 크랜츠가 일어서지 못하는 걸 확인했지만 신중을 기하자는 차원에서 주위를 경계했다.

“이건……. 컥?!”

‘뭐지?’ 라는 말도 내뱉지 못하고 목에 구멍이 뚫렸다. 계속 뿜어지는 불꽃 속에서 색다른 무언가가 거슬러 오더니 검을 내질러 내 목을 꿰뚫은 것이다.

회색으로 물들며 본 것은 타는 듯한 붉은 망토를 품속에 집어넣는 로즌 크랜츠의 모습. 쓰러지는 나를 보며 로즌 크랜츠는 어찌된 상황인지 설명해줬다.

“이 던전의 끝에 있던 아이템, 화염의 망토입니다. 능력은 망토에 닿은 모든 불꽃 흡수, 그리고 흡수했던 불꽃의 방출. 제가 운이 좋았군요.”

그 말이 끝이었다.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가 하얀 천장이 보였다.

병원이다.

가면을 벗은 상태였다면 범죄자 마을에서 눈떴겠지만 가면 덕분에 에린 누나의 비코 영지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자 레이지의 움직임에 대한 웅성거림이 꽤 컸다.

“정말이야?”

“아, 그렇다니까. 지금 레이지 길드가 블러드 길드의 성을 치려고 동맹 길드는 물론, 일반 유저들까지 불러 모으고 있어.”

“레이지와 블러드는 협력 관계 아니었어? 레이지가 공성할 때마다 블러드가 도와줬고, 블러드가 성을 차지했을 땐 레이지가 얼마간 지켜줬잖아? 게다가 얼마 전엔 디아블로도 대신 끝장내줬고.”

“그랬지. 나도 한 다리 걸쳐서 들은 얘긴데, 블러드가 먼저 배신했다는군?”

“에이, 블러드가 바보도 아니고 먼저 배신했을 리 없잖아? 레이지와 동맹인 길드만 몇인데‥. 레이지가 배신해 놓고 명분 만드느라 퍼트린 헛소문 아니야?”

“네 말 듣고 보니 또 그러네? 에휴, 모르겠다. 우리 같은 중수들이야 성주가 바뀌든 말든 알 바 아니지. 레이지가 세금을 높게 걷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맞는 말이야. 오마이스 영지가 다시 범죄자의 도시에서 벗어나면 사냥터가 늘 테니 우리야 좋은 일이지.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

‘어찌되든 우리에게 피해가 오진 않으니 구경이나 하자’로 끝난 앞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며 과연 이게 잘하는 짓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다. 한참을 더 생각하다가 메시지 기능을 이용해 세르에 관한 얘기를 글로 적고 길드 수뇌부에게만 보냈다. 리얼모드 3단계라면 전서구가 날아드는 걸로 표현되겠지.

“술이나 마시러 가야겠군.”

……블러드 길드가 성을 빼앗기고 엔젤 하트란 길드가 성을 차지했다는 알림말이 나온 후에도 난 한참 동안이나 술집을 떠나지 않았다.

* * *

“으흠…….”

로그아웃을 했음에도 술의 쓴맛이 혀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TV나 볼까.”

블러드와 레이지에 대해 뭐라 떠드는지 보고 싶었기에 자리 잡고 앉아 TV를 켰다.

“헛된 꿈이 아니길 빌고 빌며~.”

“어라? 내가 채널을 잘못 맞췄나?”

힐름 전문 채널에서 다른 곳으로 돌린 기억이 없는데 TV를 켜자 웬 청년 넷이 나와 노래를 부르는 화면이 잡혔다. 다른 곳으로 돌렸다 틀어 봐도 여전히 나오는 건 4인조 그룹.

채널이 바뀌었나? 하고 생각하던 차에 원래 힐름 전문 채널의 MC를 보던 한 쌍의 남녀가 나왔다.

“네. 잘 들었습니다. 요즘 모든 가요 순위 1위를 차지하고 있죠? 엔젤 하트분들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와아아아!”

짝짝짝짝짝!

“안녕하세요, 엔젤 하트입니다!”

빨갛게, 노랗게. 온갖 색으로 머리를 물들이고 귀에다가는 큼지막한 고리를 단 남성 4인조는 허리를 숙이지 않고 손짓, 몸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지연 씨, 오늘 엔젤 하트 분들을 모신 이유, 혹시 아세요?

“물론이죠. 3시간 전에 있었던 일 때문 아닌가요?”

“맞습니다. 이미 아실 분들은 다 아실 대사건! 오마이스 영지의 함락 때문이죠. 블러드 길드가 습격했다는 명분 하에 동맹 길드, 일반 유저 할 것 없이 불러 모아 총공격을 펼친 레이지. 성의 소유권에 대해 신경 쓰지 않겠다는 그들의 말에 시작된 성 쟁탈전에서 당당히 살아남으신 분들이 바로 요즘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엔젤 하트분들의 길드입니다!”

“오오~.”

그랬군. 귀에 익하 했더니 새로 성을 차지한 놈들이었어. 그런데…… 표정들이 왜 저래?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엔젤 하트 여러분!”

“감사합니다만…….”

리더로 보이는 노란 번개 머리가 마뜩찮은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예?”

“한 가지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예. 말씀하십시오.”

“레이지 길드가 블러드를 몰아냈기 때문에 저희가 성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안 그래도 저희가 블러드를 치려고 준비 했었는데 공교롭게도 레이지 길드가 선수 친 것이죠.”

“오, 그럼 엔젤 하트가 그 정도로 강력한 무력을 지녔단 말씀이시군요?”

별로 알려지지도 않은 엔젤 하트란 길드가 그 정도의 무력을 갖추었다는 소리에 남자 MC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아니오. 저희는 약합니다. 하지만 저흴 사랑해주시는 팬들이 있는 이상, 저흰 절대 지지 않습니다. 정의는 언제나 승리하는 법이니까요.”

그 말과 함께 리더는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언뜻 보기엔 아닌 것 같지만 저건 확실히 숙련된 솜씨의 자세다.

블러드의 진짜 힘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애송이들이 말을 함부로 하는 군. 마음에 안 들어.

“하…… 하……. 그, 그렇죠.”

“그럼 길드 성향은 어떻게 하실 건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남자 MC가 힘들어하자 이번엔 김지연이란 여자 MC가 말을 받았다.

“중립으로 할 겁니다. 레이지 길드가 크다지만 그것에 고개 숙이면 팬들께서 실망하실 것 같아서요. 크진 않지만 내실이 탄탄한 그런 길드로 이끌어 나가고 싶습니다. 사람만 많다고 강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건 명백한 도발 행위였다.

저놈들, 잘못하면 며칠 안에 성을 다시 빼앗기겠군.

“그, 그거야 그런데…….”

“이번엔 다른 얘기를 해보죠. 블러드 길드가 사실, 특별한 저항 없이 사라졌지 않습니까? 길드장인 로즌 크랜츠가 몇몇 PK들을 꾸짖는 한마디를 남기고 말이죠. 레이지에서는 이 일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고 밝혔는데, 그 얘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패배자의 변명이죠. 일단 PK가 직업인 사람들이 PK들을 꾸짖는다는 것 자체부터가 웃기는 일 아니겠습니까? 안 될 것 같으니까 괜한 변명을 늘어놓은 것일 뿐입니다.”

“그럼 다른 것을 묻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한 라이벌로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신가요?”

“있었죠. 콜로니스트라는 마법사 유저 분이신데…….”

“아, 콜로니스트님. 연예인이 아님에도 힐름 내에서 가장 빨리 팬클럽이 생기셨고, 마법사 클래스의 최강자이자 레이지 길드의 실세 중 하나인 대단한 분이시죠. 외모도 웬만한 연예인 이상이라 몇몇 기획사에서 연락처를 알아보려 했지만 게임사에서 완강히 거부한 탓에 이루어지지 못했다죠? 요즘은 잘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계시지만 여전히 경외의 대상임엔 틀림없습니다.”

남자 MC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있었죠는 과거형이다. 뭔가 덧붙일 말이 있다는 소리.

“그렇긴 했지만 요즘 같이 강자가 많은 때에는 예전처럼 생각되지 않더군요. 저희 길드의 몇 분도 그 정도 무력은 지니셨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말씀이 과하신 게 아닐지…….”

“자신감의 표현일 뿐입니다. 그리고 설마 이 정도에 열 받아서 쳐들어오기야 하겠습니까? 레이지가 그렇게 속 좁았다면 지금까지 버텨오지도 못했겠지요. 힘으로 통치하는 폭군이 아닌 이상.”

리더는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놈인지 할 말 다하고도 레이지가 보복할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거만하군. 눈에 콩깍지 낀 팬들이라면 몰라도 일반 유저들 중에는 적이 될 사람이 많겠어.

“하…… 하……. 네. 그럼 이번엔 엔젤하트 여러분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힐름은 언제 시작하셨죠?”

“반년 전에…….”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언제 데뷔했는지 모르지만 힐름을 시작한 게 겨우 반년 전이라면 자신들의 힘으로 성장하진 않았을 터. 팬클럽에만 의존하는 놈들 따위, 관심 둘 가치도 없었다.

TV를 끄고 침대에 누워 다시 사색에 잠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