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닌자 (25/43)

#닌자

따르르릉~ 따르르르릉~

“으흠……?”

한참 맛있게 자고 있는데 전화벨 소리가 날 깨웠다.

전화 올 사람이 없을 텐데?

“여보세요?”

“나 인택이다.”

“어, 그래. 웬일이냐?”

“목소리가 잠긴 걸 보니 자고 있었고만? 나와라. 날씨 좋고 힐름도 못하는 날, 오랜만에 영화나 보자.”

“난 그냥…….”

“재연이도 나올 거니까 후줄근하게 입고 나오기만 해봐! 학교 앞에서 만날 거니까 30분이면 되지? 30분 뒤에 학교 정문에서 보자.”

“얌마, 야!”

띠이. 띠이. 띠이.

인택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할 말만 하고 끊어버렸다.

“딱히 할 일도 없긴 한데……. 뭐, 오랜만에 영화 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

학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자취하는 나에게 30분이란 시간은 결코 적지 않은 것이었다.

대충 샤워를 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옷을 주워 입으니 16분이나 남았다. 뭐라도 먹고 갈까 하다가 라면 이외에는 별로 먹을 것도 없다는 걸 떠올리고 모처럼 광합성이나 할겸 일찍 길을 나섰다.

“태연 오빠!”

10분 가까이 일찍 나왔는데 재연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거참, 부지런한 녀석일세?

“재연아, 일찍 왔네?”

“네. 항상 약속 있으면 10분 먼저 나와요.”

항상? 쯧쯧. 인택이 녀석, 그 곰같이 굼뜬 성격에 재연이한테 맞추려면 고생 꽤나 하겠군.

“오빠, 어떻게 그동안 연락 한 번 안 할 수 있어요?”

재연이 허리에 손을 얹고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하핫, 꽤 귀여운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아, 어제 봉인구 하나 더 얻었다.”

“봉인구요?”

“그래, 봉인구. 거 왜 있잖아. 밀림에서 라무.”

“아! 그걸 오빠 혼자 잡았단 말이에요?”

“혼자 잡긴 했는데, 내 힘은 아니었지.”

“그게 무슨…….”

“그런 게 있어. 그리고 또 마나 10분의 1 잡아먹는 아이템 나왔다. 이번엔 망친데……. 이크! 인택이 온다. 저 녀석이 알면 달라고 졸라댈 테니 이건 비밀이다?”

“후훗, 둘만의 비밀 말이죠?”

“뭐……. 그리 거창할 것까진 없지만 그런 셈이지.”

재연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했다.

뭐 좋은 일 있나?

“어라? 아직 약속 시간도 안 됐는데 둘 다 있네? 내 시계가 잘못된 건가?”

“사람들이 모두 너처럼 시간에 딱 맞거나 늦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근데 무슨 영화 보려고?”

“우리 재연이가 보고 싶다고 한 게 있어서. 그거 봐야지!”

“우리 재연이? 오~. 벌써 그런 사이로 발전한 거야?”

“아, 아니에요. 오빠!”

인택의 말에 바람잡이 역할을 하자 재연은 여전히 손사래 치며 강하게 부정했다.

쩝, 쟤들은 별로 나아진 게 없군. 그럼 다른 커플은 어찌 되었을라나?

“근데 거트 형이랑 에린 누나는 어떻게 되가냐? 뭔가 진전이 있어?”

“말도 마라. 에린 누나는 여전한데 거트 형은 끝도 없는 선물 공세에……. 나보다 더 했으면 더했지 절대 못하진 않다. 조금만 심해지면 스토커 소리 듣게 생겼어.”

그날 이후로 끝없이 대시하나 보군. 썩 좋은 현상은 아닌 것 같은데……. 큭, 나야 더 적극적인 대시도 못해보고 좌절한 놈이니 이런 말 할 자격이 없군.

“내가 표 끊어 올 테니까 기다려.”

어느 새 극장 앞에 도착하자 인택이 뛰어가 표를 끊어왔다.

우리가 볼 영화 제목은…….

“닌자, 인법 대작전?”

재연이도……. 취향이 참 독특하다.

어릴 적 닌자가 되는 것을 꿈꾸던 평범한 회사원이 몇 명의 닌자를 우연히 만나 진짜 닌자가 되기 위해 수련하고, 마지막에는 궁극의 인법서를 노리는 사악한 닌자와 맞서 싸운다는 다소 황당한 줄거리의 영화였다.

중간 중간에 쳐놓은 개그들 덕분에 돈 버렸다 생각까진 들지 않게 된 이 영화에서 난 새로운 것을 떠올렸다.

아무리 연습해도 안 되는 비도 날리기를 대신 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진 것, 마법사와 로그라는 직업을 절묘하게 퓨전 시킬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닌자다!!

“넌 아까부터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

“응? 그냥 이것저것.”

영화를 보고 식당, 노래방, 게임 센터 등을 돌았지만 닌자라는 키워드가 머릿속에 박혀 뭘 먹고, 뭘 부르고, 뭘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태연 오빠, 오늘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놀러가요. 네?”

“응, 그래.”

인택이와 재연이는 옆집에 살고, 난 둘과 반대 방향이기에 작별 인사를 고했다. 돌아오는 길에 책방에 들러 만화책 8권을 빌렸다.

재연에게 들은 바로는 내일 0시부터 서버가 열린다니 그때까지 시간을 죽이다 접속할 생각이다.

* * *

대앵, 대앵, 대앵…….

“접속!”

정확히 시간을 지켜 서버를 가동시켰는지 접속하는데 장애는 없었다.

“아무도 안 왔나? 급한데……. 할 수 없지.”

접속해보니 일행 중 아무도 들어와 있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의뢰소 NPC에게 약간의 수고비를 쥐어주며 일행들이 오면 잠시 기다리라는 전언을 남겼다. 그리고 수모 폴메르로 텔레포트.

“저, 실례지만 뭣 좀 물어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수도에서 가장 실력 좋은 대장장이가 어디 있죠?”

콜로니스트라는 캐릭터가 워낙 파란만장하게 성장한지라, 아직 실속 있는 정보를 잘 모르기 때문에 길 가던 유저 중 제법 삐까번쩍하게 차려입은 기사를 잡고 물어봤다.

대충 8, 90대의 레벨 정도는 될 것 같은데, 한 곳 정도는 알겠지.

“으흠, 그런 곳들은 대장장이 밑으로 문하생이 많아서 당신이 물건을 사거나 고치기엔 무릴 텐데?”

사내는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괜찮습니다. 어느 정도의 지출은 각오하고 있거든요.”

“그러시겠지. 알렉스의 대장간은 이 길을 따라 서문 쪽으로 쭉 가면 오른쪽에 보일 거다.”

사내는 가서 놀라지나 말라는 식으로 피식 비웃음을 흘리며 설명해줬다.

겨우 너덧 번이나 강화시켰을 샤벨에 은도금한 정도로 거드름 피우다니. 가소롭군.

“아론의 일격이면 부서져 버리지 않을까?”

“뭐라고?”

“아닙니다. 가르쳐주셔서 고맙다고요.”

혼자 작게 중얼거린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아 대충 얼버무리고 빠져나왔다.

대장간에 도착해보니 비싸서인지 접속자 수가 적어서인지 대장간 안은 한산했다. 기다리지 않아도 NPC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저…….”

“죄송합니다만 손님, 저흰 수상한 사람과는 거래하지 않습니다.”

말을 RJ내기도 전에 더 말을 걸 여지를 남기지 않는 여성 점원 NPC 덕분에 난 내 처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젠장, 그리고 보니 성향이 악이었어!

“마이 양, 잠깐 이분 좀 대신 봐드리겠나?”

“네.”

“이거 죄송합니다. 마이양이 몰라 뵈었군요.”

“……?”

대장간의 주인인 듯한 근육질의 중년인이 이쪽을 힐끗 보더니 여성점원 NPC와 자리를 바꿔 내게로 왔다.

“성을 다스리시는 분들 중 한분, 아니십니까?”

“맞긴합니다만……. 아!”

생각났다. 성을 점령한 길드의 특권 중 하나. 성향이 악일 지라도 자신의 영지 상점은 이용 가능!

“문장을 떼고 다니셔서 마이 양이 몰라 뵌 듯합니다.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는 모르지만 예전처럼 선행을 쌓으시길……. 아,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구입? 수리? 강화? 아니면 아이템 처분?”

“개조입니다.”

용건과 함께 그림자의 단검을 꺼내 놓자 대장장이, 아니 알렉스는 이채로운 눈빛을 띄었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특수한 능력이 담긴 무기로군요. 어떤 식의 개조를 원하시는 거죠?”

“이 검을 도의 형태로 바꿔 주십시오. 모든 능력은 그대로 놔둔 채.”

“도라고 하시면 이렇게, 곡선으로 검신이 휘어져 있고 찌르기보다 베기 위주인 그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알렉스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재차 확인했다.

“예.”

“폭을 이 정도로 얇게 하면서 이런 곡선을 만들고도 지금과 같은 경도를 유지하는 건, 더군다나 특수 능력을 그대로 남긴다는 것은 마스터 블랙스미스로서도 불가능합니다.”

“역시 그런가요…….”

“하지만! 이 몸은 드워프도 울고 갈 최.고.의. 대장장이. 그랜드 마스터 블랙 스미스란 말씀!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못할 건 없습니다. 음홧홧홧홧홧!!!”

알렉스는 허리를 젖히고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할 수 있다니 다행이긴 한데, 잠지드도 그렇고. 자화자찬하는 사람들은 다 저렇게 웃는 건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얼마 주실 건지부터 들어보죠. 10골드면 1년, 15골드면 반년, 20골드면 3개월, 25골드면 1개월, 30골드면 1주일. 특별 케이스로 50골드는 4일도 가능합니다.”

“……30골드짜리로 하죠.”

칼만 안 들었지, 아니. 칼도 들었으니 완전 날강도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쉬운 놈이 참아야지.

30골드를 건네주고 계약서에 사인 한 뒤, 이번엔 북문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넬슨 대장간.

“역시나 북적이는군.”

길을 걷는 동안 접속자 수가 늘고 있다는 건 느꼈지만 넬슨 씨의 대장간은 평소와 다름없는 손님수를 보였다.

역시 싸다는 것만큼 큰 경쟁력도 없다니까?

“넬슨 아저씨!”

“넌……. 스트 아니냐? 마침 잘 왔다. 이리 들어와서 좀 도와라.”

넬슨 아저씨는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카운터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렇게 물건이 다 팔릴 때까지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붙여보고 일만 도왔다.

“이제 좀 살겠네. 그나저나 곰 같은 놈 하나 던져주고 떠나더니 스트 네가 웬일이냐? 혹시 또 아르바이트하러 온 게냐?”

“그게 아니라……. 부탁을 하나 하고 싶어서요.”

“부탁? 내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아뇨, 아저씨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에요.”

“나만? 일단 들어나 보자.”

제법 분위기가 잡혔다.

음, 이것도 가능할지 아닐지 불투명한 일인데……. 게다가 부탁을 들어줄지도 문제였고.

“표창을 만들어주세요. 생김새는…….”

비도를 대신할 나만의 무기. 그것은 닌자들이 사용하는 표창이다. 회전 없이 직선으로 날려야하는 비도와 달리, 오히려 회전을 먹일수록 강해지는 표창이니 나에게는 딱 맞는 무기가 아닌가!

“어렵군. 이런 무기라면 나보다 실력 좋은 대장장이들도 많을 텐데 어째서 나밖에 못하는 일이라 했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단가!”

대답을 짧게 일축했다.

“아, 그렇군. 나야 주조기술이 있으니 싼 값에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지만 다른 이들은 하나하나를 따로 만들어야 하니 값이 비싸지겠어. 좋아. 매일 장사가 끝난 다음에 연구해보지. 빨라도……. 5일은 걸릴 것 같군. 그때 다시 와봐.”

“감사합니다. 아저씨!”

“아참, 적어도 중급 비도 이상의 위력을 내려면 상등품 철이 필요한데 여기엔 그런 철이 얼마 없어. 아무래도 네가 구해 와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나?”

상등품의 철이라……. 상급의 철……. 아!

“그건 걱정 마십시오. 내일이나 모레쯤 배달해 올 겁니다. 이미 물건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다시 녹이시는 수고를 해야겠지만‥.”

“나도 멋진 무기를 만들어낸다는 기쁨이 있는데 겨우 그 정도도 못할까? 그건 걱정 붙들어 매게.”

마지막으로 표창의 가격에 대한 협상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일차적으로 공급할 상급 철은 도둑 길드의 마스터에게 훔치고, 뜯어낸 상급 비도와 상급 덫이면 되겠지.

“다음은 술집인가?”

넬슨 씨의 대장간을 나와 이번엔 근처 펍으로 들어갔다. 일단 정당한 가격의 술들을 병째 사서 옆에 두고 실험을 시작했다.

“이건……. 3단계에서 하는 게 낫겠군. 감도 설정 변경, 3단계로.”

[수식어 효과가 적용된 리얼모드 4단계가 생겼습니다. 정말 3단계로 변경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설명]

리얼모드 4단계라니? 시스템 추가도 있다더니 이게 그건가?

“4단계 설명!”

[리얼모드 4단계가 추가되었습니다. 이 모드는 시스템 자체에서 혹은 운영자가 부여한 수식어를 가지신 분만 사용가능하며, 수식어 하나당 1%의 감도가 상승됩니다.

감도 상승의 특혜 : 마나의 컨트롤이 쉬워지고 추가로 1%의 감도가 상승하면 모든 스킬, 마법 사용시 마나 소비가 1%씩 줄어듭니다.

자신이 가진 수식어를 확인하려면 내 수식어를 외쳐주세요.]

“내 수식어!”

[당신의 수식어는 사기꾼, 오크슬레이어, 마법사 최강자, 화탑의 정벌자, 반역자, 개척자, 개국 공신, 위저드, 마인. 총 9개입니다.]

“사기꾼이라……. 제롬 짓이겠군. 감도 설정 변경 4단계로.”

평소보다 감도 변경 시의 어지러움이 조금 더 강했다. 그래도 금방 회복되니 상관없지.

“파이어!”

검지와 중지, 쭉 편 두 손가락에 마나가 모이며 조그만 불꽃을 만들어냈다.

“기대 이상으로 마나 컨트롤이 쉬워졌는데? 좋았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술병을 집어 입 안 가득 부어넣었다. 그러고는 힘차게 내뿜었다.

화르르륵!

차력에서나 볼 수 있던 불 뿜기였다.

영화를 보면서 해보리라 마음먹었던, 입에서 불이 나오기에 마법으로 대신 할 수 없는 유일한 것.

영화에서는 이걸 보고 인법, 화염 방사의 술! 이랬던가?

“뭐야?”

“차력인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구경거리가 되는 건 별 상관없지만 실험을 방해받는 건 싫었기에 술병을 들고 자리를 피했다.

사람 없는 골목으로 들어가서 실험을 재개한 지 약 10분! 비교 실험 결과, 가격대 성능비가 제일 우수한 것으로 매그넘74가 뽑혔다.

다시 펍으로 가, 매그넘74를 10병 사고, 뤼크레스의 의뢰소로 이동했다.

“어딜 갔다 오는 거냐?”

“비밀 병기를 만들러 갔다 왔지!”

“비밀 병기? 어딨는데?”

“한 일주일 후에나 완성 될 거야.”

크루드 등은 비밀 병기란 말에도 ‘오~’라는 반응만 보일 뿐 캐묻지는 않았다.

의뢰소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로 패치 된 던전을 찾아 나섰기 때문. 그러고 보니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질 않아서 패치 내용을 모르잖아?

“혹시 패치 내용 아는 사람?”

“홈페이지 안 들어가 봤냐?”

“어.”

“에휴, 저런 놈이 어떻게 마스터가 된 건지……. 아슈라, 네가 말해줘라. 말하기도 입 아프다.”

“네, 스트형. 이번 패치가 던전, 몬스터, 시스템 추가인 건 알죠? 먼저 던전은 총 9개가 생겼다는데 공개된 곳은 키메라의 탑, 빛의 신전, 고대의 유적. 이렇게 달랑 3곳이에요. 나머진 유저들이 알아서 찾아내야죠. 추가된 몬스터도 전부 추가된 던전에서 나오는 놈들인데, 앞서 말한 3곳에서 나오는 몬스터, 그것도 소수만 정보가 공개되었고, 나머진 또 알아서 확인하라네요. 마지막 시스템은 리얼모드 4단계가 생긴 건데 이건 리얼모드 3단계로 전환하려 하면 자세한 설명이 나오니 말 안 할게요.”

숨겨진 던전 6곳에, 공개된 곳이 3곳이라? 제법 대규모의 공사를 했군. 당분간 다른 사냥터는 한산하겠어.

“자, 어떻게 할래? 새로 생긴 곳에 가볼까?”

“아니. 이럴수록 기존의 사냥터에 가야지. 지금 가봐야 몹보다 사람이 더 많아서 제대로 된 사냥도 불가능할걸?”

“삼촌, 이번에는 무작정 사냥만 하는 거 말고 새로운 퀘스트로 하자. 요즘 레벨도 많이 올렸는데 조금 놀아도 상관없잖아?”

“크루드 형, 저도 찬성이요!”

“그럼 단순 몬스터 토벌을 제외한 것들로 보여드리겠습니다.”

크루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의뢰소 NPC는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던 퀘스트 양피지를 수거하고 새로운 양피지들을 내려놓았다.

“D랭크짜리를 빼면 B랭크 상단 호위, C랭크 물건 배달, B랭크 광산 탐사, A랭크 특정 지역 수색이 전분데……. 쉬운 걸로 치자면 물건 배달, 상단 호위. 하지만 상단 호위는 걸리는 시간에 비해 보수가 너무 짜고, 물건 배달은 너무 싱거워. 둘만 빼면 남은 건 광산 탐사랑 특정 지역 수색. 뭘로 할래?”

수색 퀘스트가 끌리기는 했지만 같은 A랭크인 미궁에서 호되게 당한 기억 때문에 망설여졌다. 이런 시기에 수상한 곳은 숨겨진 던전일 확률이 꽤 높은데 말이야…….

“전 광산이 좋을 것 같아요. 미궁일 때문에 A랭크는 무서워서……. 하…… 하…….”

“나도 A랭크는 좀…….”

아슈라와 쿤이 반대표를 던졌다. 할 수 없지.

“그럼 광산으로 해.”

“그러지 뭐.”

결정이 나자 크루드가 사인하고 양피지를 받아왔다.

힐름 내에 큰 산맥이 몇 개 없어서인지 광산은 그로티우스 산맥에 있었다. 그것도 미궁 근처. 따로 찾으러 다니지 않아서 좋긴 하지만 왠지 꺼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들 준비됐지? 매스 텔레포트!”

하얀빛 무리가 우릴 미궁 입구로 인도했다. 광산은 이곳에서 서쪽으로 직선 700m거리. 다행히도 수풀은 우거지지 않았다.

“이야, 이런 곳에 마을도 있네?”

“광부들이라고 하루 종일 광산에서 일만 하는 건 아니니까.”

탄광으로 보이는 구멍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투박하게 지어진 목조 건물 수십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집이 어설픈 건 전문 목수가 지은 게 아니어서라고 해도, 광산이란 마을이 둘 다 조용한 건 뭐야? 설마 벌써 못 살겠다고 떠난 건가?

“내려가 보자.”

광산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로 들어서니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시선만 느껴졌다.

우릴 경계하는 거겠지.

“후읍, 광산 탐사하러 왔는데 아무도 없소?”

일부러 5분가량을 제자리에 머물렀는데도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이 없자, 크루드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으며 소리쳤다.

“정말…… 모험자 길드에서 의뢰 받고 온 사람들이오?”

마을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 크루드의 목소리에, 2m 정도 되는 키의 근육질 사내가 골목에서 걸어 나왔다.

“못 미더운가?”

사내의 눈에 우릴 깔보는 듯한 빛이 있었다.

그럼 나노 존중해 줄 필요가 없지.

“솔직히 그렇소. 어린애 하나에 청년 셋이라니. 힘쓰는 걸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 43명도 못한 일이오. 두 세계를 넘나드는 자들은 마나라는 것을 사용하고, 체격에 상관없이 엄청난 힘을 갖기도 한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솔직히 난 못 믿겠소이다.”

아직 유저라는 존재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듯한 그에겐 눈에 보이는 체격이 힘의 판단 기준으로 작용하는 듯했다.

“그럼 확인시켜 주면 되겠군. 크루드, 팔씨름이라도 한번 해봐라.”

“음……. 탁자와 의자를 가져와라!”

사내가 소리치자 집안에서, 골목에서 숨죽이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튀어나와 우리와 사내를 동그랗게 둘러쌌다. 곧 중앙에 탁자와 의자가 놓여졌다.

“게런트요.”

“크루드입니다.”

게런트와 크루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의자에 앉아 손을 맞잡았다.

“심판은 아무나 한 분만 나와서 봐주시죠.”

“그, 그럼 내가 해볼까나? 준비, 시~작!”

공정을 기하기 위해 심판은 마을 사람 중 한 명에게 맡겼다.

넉살 좋아 보이는 사내는 나오자마자 곧장 시작을 알렸다. 시작과 동시에 가진 바 힘을 모두 쓰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게런트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하나 크루드의 표정은 여유 그 자체였고 팔도 변함없이 중앙에 머물렀다. 확실한 힘의 차이다.

“저의 승리인 것 같군요.”

세게 내려치지도 않았다. 크루드의 오른팔은 저 혼자 쓰러지듯, 왼쪽으로 저항 없이 기울었다. 톡 하는 소리가 승부의 끝을 알렸다.

“스, 승자는 크루드!”

게런트란 사내가 마을에서 제법 힘 좀 쓰는 편인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상당했다.

“당신을 인정하겠소.”

당신들이 아니라 당신을. 이다. 여전히 탐탁지 않은 저 눈빛으로 보아, 아직도 못 믿겠다는 건가?

“하이딩!”

게런트를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하이딩을 사용해 모습을 감췄다. 모두가 당황해하는 사이, 게런트의 등 뒤로 돌아갔다.

“어리긴 해도 마법사다. 얕보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

등 뒤에서 무미건좐 목소리로 말하자 게런트가 흠칫 떨었다.

“마, 마법사? 크흠, 꼬마야. 네가 쓸 수 있는 마법 중 가장 강한 걸 써보거라.”

“피식, 집 몇 채쯤 박살나도 상관없다는 건가? 원한 진 사람이라도 있나보군.”

“이런 꼬마가 그런…….”

“게런트, 당신은 세상을 너무 모르는군. 우리 중 한 명만 마음 먹어도 이런 마을쯤은 쓸어버릴 수 있다. 말조심하도록. 아슈라, 하는 김에 너도 하나 보여줘라.”

“저요? 시체도 없는데 무슨…….”

“저주 계열로 한두 개쯤 걸어봐.”

“알았어요. 약해져라, 위크니스! 느려져라, 슬로우!”

“헉!”

갑자기 힘이 빠진 게런트가 비틀거렸다.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아주 느린 속도로.

“원, 사람도. 모험자 길드에서 오신 분들 앞에서 무슨 추태인가!”

“그~게~ 아~니~~야~아~.”

“헙!”

이제야 주위 사람들도 장난이 아님을 깨달았다. 대충 힘을 보여주자 마을 사람들의 태도가 확 바뀌었다.

당장에 촌장 집으로 모셔가 노루 고기를 대접했고, 게런트의 무례를 앞 다투어 사과했다.

“얼마 전부터 광산 안으로 깊이 들어간 사람들이 실종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찾으러 간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죠. 그나마 광산 입구 근처는 안전하다지만 언제 위험해질지 모르고……. 광물 매장량도 적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끼리 돈을 모아 모험자 길드에 의뢰한 거죠. 제발 광산 안의 괴물을 처치해주십시오!!”

“삼촌, 이번 퀘스트 그냥 탐사만 하는 거 아니었어?”

“그러게. 분명히 쓰여 있기는 그렇게 쓰여 있는데?”

퀘스트를 받을 때의 내용과 막상 와서 부탁받은 내용이 달랐다. 뭐야, 이거?

“개인적 부탁이란 건가?”

“그렇습니다요. 꼭 좀 부탁드립니다!!”

“탐사라면 몰라도 처치라면 일의 난이도가 한 단계 올라갈 수도 있을 터, 우린 맡은 바 일만 하겠다.”

그깟 것쯤. 처치해 줘도 별 상관없지만 속았다는 게 분해서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이럴 거면 A랭크짜리 수색 퀘스트를 맡았지!

“그렇다면 퀘스트 완료 서명을 해주지 않겠소!”

“이거 더는 못 들어주겠군. 크루드, 쿤, 아슈라. 돌아가자. 위약금은 내가 문다.”

“야……!”

이젠 협박까지 하는 촌장에게 열 받아서 문을 박차고 나가자 밖에서 기다리던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허리 숙이며 부탁했다.

“스트 형, 저렇게까지 부탁하는데 들어주죠. 평생 관산에서 일만 한 사람들이 여길 떠나서 뭘 하겠어요? 저들에겐 목숨과도 같은 일이라 그런 거니 화 풀어요.

“저 아저씨들 불쌍해요.”

“그래, 한번만 꾹 참아.”

아슈라, 쿤, 크루드도 차례로 날 말렸다.

제기랄!

“마음대로 해!”

결국, 져버렸다. 셋까지 저래 버리니 어찌 할 수가 없군. 쳇!

“여기 횃불…….”

“필요 없다.”

아직 화가 풀린 것은 아니기에 마을 사람들을 대하는 내 태도는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깊이 들어가면 빛이 필요할 테지?

“라이트!”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내 머리 위로, 주먹 만한 빛의 구가 떠올랐다. 안에 있는 게 뭐하는 놈인지 몰라도 내 화풀이 상대가 되어줘야겠어!

“같이 가!”

내 빠른 걸음을 셋은 뛰어서 쫓아왔다.

사람들이 주로 사라지는 지역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계속 오른쪽으로 가면 된다고.

한참을 걷고 있을 때, 좌측 전방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려왔다.

“백스텝!”

쿠웅!

의문의 적이 날린 망치가 횡으로 그어지며 벽면을 때렸다.

나타났군!

“멜트, 윈트 커터!”

일직선으로 뻗어가려던 불꽃이, 바람의 칼날에 토막 나 어지러이 뿌려졌다.

“끄으…….”

불꽃이 가미된 바람의 칼날을 몸으로 받아낸 상대는 공중에서 빙글 돌아 안정된 자세로 착지해 도망갔다.

망치를 든 소형 몬스터라, 코볼트인가? 하지만 코볼트는 몽둥이가 무길 텐데? 하긴, 설정 나름이지.

“먼저 간다!”

“야!”

넓지 않은 길이라 약간 떨어져서 오던 셋을 두고 먼저 코볼트를 향해 달려갔다.

지잉. 지잉.

쫓고 있던 코볼트가 이제 겨우 잡힐 듯한데, 이번엔 좌우 양쪽 위에서 경고음이 들려왔다.

치잇, 무리지어 사나보군.

“백스텝! 차지 볼트, 더블! 백스텝!”

이번엔 뒤로 빠지며 신호가 온 방향으로 전격의 구를 날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시 한 번 안전거리를 확보했다. 아무리 그럴싸한 설정이라도 코볼트 따위가 날 이길 수는 없지만 대단위 마법을 쓰기 어려운 지금은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파이어 랜스, 더블!”

기다란 화염의 창이 차지 볼트에 튕겨나간 둘을 뒤쫓았다.

끼기기깅…….

“끄으읍!”

무방비 상태의 코볼트 두 마리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꼬치로 변하나 했더니 더 안쪽에서 튀어나온 새로운 코볼트들 때문에 실패해 버렸다.

4써클 관통형 마법을 물러섬 없이 받아내다니, 제법이군.

“게다가 이번엔 도끼까지? 하!”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예리함은 반쯤 빛이 노출된 도끼가 잘 벼려진 것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코볼트 주제에 과분한 물건을 가지고 있군.

“꽤 콤비네이션이 좋은 놈들이야. 그렇다면 한방에 몰살시켜주지. 덕분에 이 광산이 붕괴되어 버릴지 모르지만 말이야. 큭큭큭! 라이트닝 월! 멸망으로 이끄는 홍염의 불꽃, 그랜드…….”

“기, 기다려라. 인간!”

막 그랜드 파이어를 완성시키려는 순간, 코볼트 로드라도 있는 것인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깜빡할 뻔했군. 괴롭히다 죽인다는 것을.

“뭐지?”

“협상을 하자.”

“협상? 내가 왜 네놈들과 협상을 해야 하지?”

‘인간들을 돌려보내 주겠다.’

“내가 수행중인 퀘스트는 광산안의 몬스터를 처리하는 거야. 협상 따윌 해서 사람 구해오라는 게 아니지. 이것도 처음 광산 탐사에서 멋대로 바뀐 거라 내가 지금 상당히 열 받아 있거든? 그러니까 곱게 죽어라. 라이트닝…….”

“우린 몬스터가 아니다!”

말을 하다가 기분이 또 나빠져 버렸다. 납치한 사람들이 살아 있다면 그들을 지키는 코볼트들도 있을 것이란 생각에 이놈들을 쓸어버리려는데 코볼트 로드로 보이는 한 놈이 능숙한 인간의 언어로 소리쳤다.

“코볼트가 몬스터가 아니면 대체 뭐가 몬스턴지 모르겠군.”

“코볼트라니, 우린 명예로운 드워프 전사다!”

“뭐……?”

한발 빛이 있는 쪽으로 다가온 상대는 드워프의 모습으로 널리 알려진 땅딸보 할아범. 다부진 두 팔에 들린 커다란 양날 도끼가 잘 어울리는 것이 거짓은 아닌 듯싶었다.

“그럼 어째서 인간들을 잡아간 거지? 드워프와 인간은 크게 적대시 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다.”

“비밀?”

“그렇다. 우리 드워프들이 최근 인간 세상에 나오지 않아 해를 입은 적은 업지만 옛날에는 우릴 잡아다 노예로 부리려는 인간들이 많았다. 우린 조용히 살고 싶다.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자기 방어를 위한 행동이었다 이거군. 그런데 왜 하필 여기야?

“최근 인간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대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뭔가?”

“온 게 아니다. 만났을 뿐.”

“만나?”

“그렇다. 이 길로 쭉 가면 우리 마을이 나온다. 우린 이쪽에서 굴을 뚫었고, 인간들은 저쪽에서 굴을 뚫었다. 그러다 만났다.”

대충 상황 파악이 됐다. 서로가 있는 줄도 모르고 굴을 파다가 우연히 서로의 쪽으로 파들어 갔고, 벽이 허물어지며 만나자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드워프들이 광부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지금 이들은 사람들이 또 올까 봐 지키고 있는 것이고.

미묘한 문제로군.

“이걸 내게 말해주는 이유가 뭐지? 나 역시 인간인데 말이야.”

“여기 있는 모두가 힘을 합쳐도 널 이길 수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운 좋게 죽인다 해도 넌 더 많은 동료를 데리고 오겠지. 너 자신의 의지가 있지 않는 한 소멸되지 않는 몸이니까. 그렇게 되면 어차피 죽게 될 터, 우린 네가 그런 인간이 아니길 빌 수밖에 없다.”

드워프가 신기하기는 하지만 굳이 끌고 가서 노예로 부리거나 하고픈 마음은 없다. 드워프제 아이템이야 이 일을 도와주고 감사의 표시로 받아내면 될 테니까.

더 받고 싶으면? 나중에 말하지 뭐. 설마 그때 가서 모른 척 하겠어?

“도와주지.”

“스트!”

“스트 형!”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뒤쳐져 따라오던 크루드, 쿤, 아슈라가 도착했다.

“오다가 박쥐 떼를 만나서 좀 늦었다. 그런데 여기서 뭐……. 드워프?”

워낙에 게임, 소설 등에서 묘사된 모습과 같아서 셋은 금방 알아차렸다. 대략적인 설명을 끝내고, 이번엔 머리를 한데 모았다.

“그냥 돌로 막아버리면 안 되나?”

“그걸로 끝일 거면 진즉에 막았지. 광산의 입구를 막지 않는 이상 누군가 다시 파볼 텐데……. 입구를 막을 거였으면 애초에 의뢰를 하지도 않았을 거야.”

쿤이 가장 단순한 답을 내놓았지만 그건 단발적인 것일 뿐이다. 뭔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데…….

“쳇, 소설 보면 망각의 눈물이네 뭐네 해서 특정 기억도 조작하고 그러더만 힐름엔 그런 거 없나?”

“그런게 있을 턱이……. 있지! 아슈라, 로브 벗어봐.”

“네? 잠깐만요.”

크루드의 투덜거림처럼 망각의 눈물 같은 세뇌 약물은 없었지만 그에 상응하는 것은 있었다. 바로 마족의 로브에 내장된 마법 참!

아슈라가 사용해도 될 것을 굳이 벗으라고 한 이유는 아무래도 마법력이 더 강한 내가 사용하는 게 효과가 좋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일단……. 드워프 마을에 있는 인간들부터 만나보도록 하지.”

드워프들은 두말없이 우릴 자신들의 마을로 인도했다.

마을 분위기는 꽤 밝았다. 아무런 제약 없이 드워프 전사들을 뒤따르는 우리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 아니 드워프들도 있었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자신의 일에 열중했다.

잡혀 온 사람들이 밀실쯤에 갇혀 있으리라 생각한 내 생각은 보기 좋게 틀렸다. 그들은 오히려 기쁜 표정으로 드워프의 옆에서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저 좀 잠깐 보시죠.”

“예? 누구……?”

뭔가 작업을 하는 사내를 불러 함께 나갈 것을 청하자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했다.

“나가 보게.”

우리와 같이 온 드워프의 한마디에 사내는 X누는 듯한 자세에서 겨우 벗어났다.

“호, 혹시……. 마을로 돌아가는 겁니까?”

광산 쪽으로 향하자 사내는 초조한 기색으로 물었다.

“아직은 아니오.”

“휴우~. 다행입니다. 제가 여기 와서 기술을 배우고 있는데 조금만 더 실력을 쌓으면 돌아가서 여유 있는 삶을…….”

“여기로 잡혀 온 지 얼마나 됐소?”

“한……. 3주 된 것 같은데요?”

“그럼 4주 정도로 잡아야겠군. 참!”

아직 광산에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한적하기만 하면 별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참을 사용했다.

강력한 유혹 마법의 힘에 사내는 변변한 저항도 못하고 눈이 풀렸다. 이제 몇 가지 제약을 걸고 실험해 볼 차례.

일단 우리는 처음 드워프들과 조우했던 곳으로 이동했다.

“지금부터 너는 지난 4주간의 기억을 모두 잃는다. 드워프라는 말에 심한 거부감을 느낄 것이며, 이 길에 다시는 발도 들여놓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박수를 치는 순간, 너는 4주 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짝!

참도 최면류의 마법인지라 써보긴 했는데 잘될지는 미지수였다. 박수를 치자 사내는 눈을 감았다 떴다.

“여긴……? 당신들은 누구요?”

“대충 성공인 것 같지?”

“여긴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있소. 어서 나가요!”

“저흰 마을 사람들의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당신이 광산에서 사라졌으니 찾아달라고요. 어서 나가 보십시오. 아참, 그리고 마을에는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말을 전해주십시오.”

“예에? 그러죠. 전 여기가 왠지 기분 나빠서 이만…….”

사내는 수긍이 가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곳에 몸서리치며 광산 밖으로 뛰어나갔다.

효과 만점인데?

“이거면 되겠다. 잡혀 있던 사람들 먼저하고, 그 다음 마을 사람들에게도 사용하자.”

“스트 형, 그런데 사람들 모두한테 걸려면 너무 오래 걸리지 않을까요? 로브에 내장된 참은 하루 세 번이 한계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잡혀온 사람 수만 10명은 될 것이고, 마을 사람 수는 약 100명. 사내만 추려도 43명이랬나? 하루에 세 명씩 조작을 한다고 하면 20일 가까이나 걸릴 것이다.

이거 문제로군.

“그거라면 문제없는데…….”

“응? 쿤, 그게 무슨 소리니?”

“로브 받을 때 같이 얻었던 흑마법 백과사전요. 거기에 참도 들어있어요. 난 레벨이 낮아서 못 배우지만.”

참이 흑마법이었던가? 하긴, 내장되어 있는 걸 보면 마법 같기도 한데 네크로맨서인 아슈라도 모르는 것 같았으니까. 남은 건 마법사의 흑마법뿐이었군.

그나저나 쓸데없이 마나만 왕창 잡아먹는 흑마법이라 쿤에게 책을 줘버린 건데……. 아까워지네. 쩝!

“그럼 스트 형이 배워서 쓰면 되겠네!”

“쿤, 나중에 참 마법서 구해다 주마.”

백과사전을 펴서 몇 장을 뒤적거리니 참이라 적힌 페이지가 나왔다. 다른 흑마법서와 달리 익히고 나니 그 페이지의 글자들만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8써클이라니, 정신계 마법은 어렵다는 건가?

“돌아가자!”

잡혀 온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나 포션도 있고, 리얼모드 4단계가 소모 마나 9% 감소라는 능력을 톡톡히 보여준 덕택에.

기억의 조작이 끝나고, 우린 광산의 한 부분을 폐쇄했다. 사람들도 그 길을 꺼려했기에 우릴 고맙게 여길 뿐, 제지하지 않았다.

맨 처음 쿤이 했던 말처럼 크고 작은 수백, 수천 개의 돌로 길을 막아가며 우린 드워프 마을로 뒷걸음질 쳐갔다. 드워프들에게도 보상을 받아내기 위해서.

물론 기억을 조작하기 전에 퀘스트 완료 서명은 받았다.

“고맙다. 너희는 우리 드워프들의 은인이다. 보답으로 무기를 하나씩 만들어주지.”

“오, 무기!”

“아싸!”

무기란 소리에 크루드와 아슈라는 펄쩍 뛰며 좋아했다. 크루드야 그렇다 쳐도 아슈라는 왜 저러는 거야? 무기도 뼈다귀면서.

“아슈라, 넌 왜 좋아하는 거냐?”

“그야 좋은 무기가 생기니까요. 힘 상승시켰을 때 매번 주먹으로 싸울수는 없잖아요.”

맞는 말이다. 쳇, 이럴 줄 알았으면 그림자의 단검을 놔뒀다가 이들에게 맡기는 건데……. 난 뭘로 하지?

“난 무기는 있으니까 갑옷!”

“전 롱소드요!”

“으음, 난 소매 속에 숨겼다가 쉽게 꺼내 쓸 수 있는 작은 칼 두 개로 하지.”

“난…….”

검은 그림자의 단검이 있으니 암수를 펼칠 수 있는 무기를 말했다. 금세 답을 낸 우리와 달리 철제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쿤은 우물거리며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마법사에게 맞는 물건은 없소? 예를 들면 미스릴이라던가…….”

“아, 마법사였군. 있지. 미스릴 실로 만든 로브. 우리가 마법에 대해 알지 못해서 순서와 간격에 맞춰 보석을 박는 지팡이는 만들 수 없지만 로브라면 가능하지.”

“그 정도면 훌륭하군.”

“컥! 미, 미스릴!!”

나와 드워프는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는 반면, 미스릴 자체를 본 적 없는 크루드, 쿤, 아슈라는 말도 제대로 못 이었다.

미스릴 실이나 도금에는 그리 많은 미스릴이 들지 않는 걸 모르나 보군.

“저, 저기 혹시 저희 것도 미스릴로…… 안 될까요?”

“이거 미안하군. 미스릴은 우리도 그리 많은 양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 미스릴 도금 정도는 해주지.”

“가, 감사합니다!!!”

처음의 부정적인 대답에 시무룩한 표정을 짓던 크루드, 아슈라는 허리를 90도, 그 이상으로 숙이며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은인에게 이 정도는 해야지. 너도 도금할 건가?”

“그것도 좋지만 무기나 잘 만들어주시오. 웬만한 갑옷도 뚫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우리 드워프를 우습게보지 마라. 그 정도가 아니라면 남 앞에 내어놓지도 않아.”

그 말을 들은 크루드와 아슈라의 얼굴이 더욱 밝아졌다. 자신들의 무기도 그만큼 강할 것이기 때문에. 그 후로 1주일 간 드워프 마을에 머물렀다.

명검은 한순간에 나오는 게 아니라나? 아무튼 그런 이유로. 아직 무기들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난 가봐야 한다. 대장간에 맡겨놓은 무기들도 찾아야 하기 때문에.

“곧 돌아올게.”

“그래, 다녀와라.”

“좌표 기억!”

치지직!

좌표를 적어 넣기 귀찮아서 텔레포트 스크롤을 바닥에 내려놓고 좌표를 기억시키려는데 스크롤이 방전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며 좌표가 기억되지 않았다.

“그로티우스 산맥의 안쪽에서는 좌표를 기억할 수 없다. 즉, 여기서 한번 나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소리지. 그래도 나갈 건가?”

옆에 있던 한 드워프가 상황을 설명해줬다.

쳇, 나중에 추가로 뜯어먹기는 그른 것 같군.

“별 수 없군. 크루드, 내 무기는 네가 받아다 주라.”

“그래, 걱정 말고 가봐.”

“리턴!”

오는 건 안 되도 가는 건 가능했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그림자의 단검을 찾으러 갔다.

“맡긴 물건은 완성 됐겠죠?”

“여기 있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완성된 그림자의 단검, 아니 그림자의 단도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수준의 것이었다.

큰 곡선은 아니지만 비스듬한 곡선으로 되어 있는 이 단도는 흡사 일본의 소태도라 불리는 검 같았다.

좋아, 좋아.

“좋군요.”

도를 받아 몇 번 휘둘러 본 후, 이번엔 넬슨 씨의 대장간으로 향했다. 그리고……또 물건이 다 팔릴 때까지 붙잡혀서 일했다.

“수고했어!”

“에고고, 아저씨. 물건은 다 된 겁니까?”

“그래, 네 손에 맞을지는 모르겠다만 완성은 됐다. 이리 와봐.”

넬슨 아저씨가 날 데려간 곳은 수차례 들어가 본 적 있는 물품창고였다. 그곳 한 구석에 쌓인 수많은 표창들. 내가 그려준 그림 그대로였다.

쉬릭!

“오, 좋은 데요! 균형도 잘 맞는 것 같고…….”

표창 던지는 것만큼은 자신 있다. 어렸을 적 커터 칼날을 십자 형태로 붙여서 자주 날리곤 했으니까.

내가 던진 표창은 목표한 지점에서 지름 5cm의 원을 벗어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연습하면 3cm안에도 들어가겠지.

“콜 오빠! 저 세르인데 지금 시간 있어요?”

웬일로 세르에게서 귓속말이 왔다.

무슨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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