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전쟁
"차, 찾았다고?!"
"네."
난 엔딘의 보고에 너무나도 깜짝 놀라 굳어 버렸다.
그리고 그 이유란 케찹이와 내가 지옥 갔다가 사막 갔다가 삽질하고 다녔을 때, 이미 그 비밀 장소로 들어가서 전설의 히든 클래스, 증폭 페리어에 대한 단서를 찾았다는 것이다.
사실 난 지금 무척이나 강해져야 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데리트와 아이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블랙 젠더라는 새로운 미지의 적도 알아 버렸으니까.
물론 블랙 젠더가 부활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부활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일단 그놈의 씨앗이라고 불리는 블랙 페리안이 반응하고 있으니까.
그건 케찹이라는 요정이 아주 잘 증명해 주고 있는 사실이지.
그나저나 왠지 모르게 이런 기분이 드는 이유는 뭘까?
나와 케찹이 따위는 없어도 히든 클래스 찾는 건 아주 척척 잘만 진행된다는 기분?
"어려웠을 거야."
"......."
"......?"
그때 케찹이가 뜬금없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그리고 케찹이는 잠시 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의 도움이 없었으니 무척이나 어려웠겠지."
"......."
"......."
참으로 뻔뻔하게도 말한다.
아니, 네놈 도움은 원래 있으나 마나 한 건데, 어떻게 이렇게 뻔뻔하게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정말 네놈은 지금까지 이 파티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 거냐?!
"아니, 그렇지 않아!"
"......?!"
그 순간 마요네즈가 갑자기 케찹이의 말에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거듭 말하지만 케찹이 일에는 무조건 태글 거는 게 마요네즈이다 보니 별 특이 상황은 없다.
하지만 그런 마요네즈의 말에 케찹이는 뭔 소리냐며 마요네즈를 바라보고, 마요네즈는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네놈의 주둥아리가 없으니, 너무 수월했어!"
"......."
"아, 덤으로 네 주인의 알 수 없는 추리력도 없으니 참으로 편하더라."
"......!"
"......!"
나와 케찹이에게 엄청난 말을 던졌다.
뭐라고?
케찹이는 그렇다 쳐라! 왜 가만히 있는 나까지 묶음 배송(?) 아니, 1+1개념으로 묶여 들어가는 거냐!
물론 나의 추리력이 조금 빗나가기는 했지만, 그런 소리까지 들어야 할 정도냐?
그것도 네놈 따위에게?!
"크크."
"......."
"......."
한편 나와 케찹이는 비웃고 있는 마요네즈를 본 뒤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서로 통했다.
일명 필이 통했다고 하는?
잠시 케찹이와 난 마요네즈라는 불량 요정을 사랑해 준 뒤, 다시 엔딘에게 물었다.
"그 단서는 뭔데?"
"페로 왕국의 기사단장이신 데들리라는 분이 알고 있습니다."
"호오?"
그럼 이미 다음에 할 일도 끝났다는 거네?
사실 다음에 할 일이라고 해 봤자 그 페로 왕국인가 뭔가 하는 데 가서 기사단장 만나서 이야기 좀 나누면 미션 완료!
어머나, 내가 짠 작전이지만 정말 최고다!!
"하지만 약간 문제가 있습니다."
"엥?!"
문제? 완벽해서 최고의 작전이라고 생각했던 작전이 첫 단계부터 문제라니, 이건 무슨!
엔딘의 말이 이어졌다.
"전쟁 중입니다."
"전쟁?!"
"네. 지금 데들리라는 분이 있는 나라 페로 왕국과 스티머 제국과의 전쟁 말입니다."
"......."
허! 언제 전쟁이 일어난 거지?
난 진짜 몰랐다. 전쟁이 일어났는지 말이다.
하지만 그거랑 그 데들리라는 기사단장에게 묻는 거랑 무슨 상관이지?
물론 전쟁 중에 기사단장으로서 무지 바쁘기야 하겠지만, 잠시 동안 이야기할 시간은 없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미리 만나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저에게...... 조건이 있다고 했습니다."
"조건?"
"네."
"......."
그때 엔딘의 이어지는 말이 들려왔다.
조건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 말은 나와 흥정에 들어가자는 거냐?! 한마디로 곱게는 못 가르쳐 준다는 거?
아니, 뭐 이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정도야 뭐 당연한 거겠지?
"그 조건이라는 게 뭐야?!"
난 물었다.
웬만해서는 그 조건이라는 걸 들어주고 정정당당하게 정보를 획득할 거여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내 질문에 엔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말했다.
"가르쳐 주지 않더군요."
"그건 무슨 말?"
뭔 조건을 들어주면 가르쳐 준다더니, 그 조건을 말하지 않으면 어찌하자는 거냐?!
우리랑 장난치자는 거야?!
한편 엔딘은 예상외의 답변에 살짝 당황하는 나를 보더니 말했다.
"잡것들은 상대 안 한답니다."
"......."
"그분의 말을 그대로 전하면 '짱 새끼 아니면 말 안 한다' 이러더군요."
"......."
뭔가 멋진데?
그분이 찾는 짱 새끼 간다.
일명 '짱 새끼=리더'라는 공식이라는 건 웬만해서 모두 알 테니 설명은 하지 않겠다.
그나저나.......
"엔딘."
"......?"
"진짜 그렇게 말한 거야?!"
"네."
"......."
"그대로 외워 왔습니다."
"......."
정말 기가 막힌다.
한 왕국의 기사단장이 말하는 꼴 하고는.
잡것들은 상대 안 하고, 짱 새끼 아니면 말 안 한단다.
정말 인상에 톡톡 남으실 분이군.
"과연 어떤 조건이려나."
분명 쉽지 않은 조건인 건 확실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왠지 방금 전 엔딘이 한 말 '전쟁'이라는 단어가 참으로 거슬린다.
설마 전쟁에 관련된 일은 아니겠지?
"전쟁에 참여해라."
"......."
설마 하면 적중하는 이 센스, 가끔씩 이런 쓸데없는 예상은 왜 맞아 주는지 모르겠다.
"감히 우리가 누군 줄 알아?!"
"이 자식이!"
"지금 누구한테!"
지금 우리는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는 평범(?)한 파티라고, 이 자식들아!
이미지 이상하게 만들지 말란 말이다.
난 데들리라는 기사단장의 한마디에 협박하는 케찹이, 마요네즈, 버스틴을 보고 순간적으로 너무나도 당황해 버렸다.
아니, 좋게 말을 못할망정 이런 건달같이 반응을 해 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혹시라도 충격 받으면 니들이 책임질래?
"풋."
"......!"
"......!"
"......!"
하지만 요정 두 마리와 이상한 놈 한 분의 말에 반응해 비웃는 그 데들리.
난 그것만으로도 깨달았다,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일단 다른 건 다 젖혀 두고도 요정 두 마리가 협박하면 일단 절대 충격 기술이 발동된다.
한마디로 패닉 상태로 빠진다는 거다.
그렇지만 저분은 요정 두 마리의 미친 행각을 그저 웃음으로 끝내다니.......
물론 그런 반응에 두 명의 요정과 한 분의 이상한 암살자는 갑자기 흥분하지만, 난 그런 그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
일단 칼자루는 저쪽이 쥐고 있다.
저 남자가 지금 말 안 하면 지금까지 고생했던 게 다 헛수고라는 소리니까.
난 그런 생각과 함께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럼 그 전쟁 참가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만?"
사실 전쟁에 참가한다고 해도 여러 가지다.
일단 보급품 쪽일 수도 있고, 의료 쪽일 수도 있다. 그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일 수도.......
한편 그런 내 질문에 그 남자는 나를 진지한 눈빛으로 보더니 말했다.
"지금 이 전쟁에서 우리 쪽 총사령관이 돼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
"......."
흠, 미친 잡소리를 하신다.
5만 대 400만.
지금 우리의 상황이다.
참고로 데들리라는 분이 있는 페로 왕국이 5만이고, 적국이 400만 명이라는 건 예의상 말해 둔다.
물론 옛날에 그리스 인 300명이 100만 명의 페르시아라는 나라를 상대로 싸운 적도 있다.
잘 싸웠다. 하지만 끝내는 전멸했다.
그뿐 아니라 적벽대전이라고 불리는 것도 있는데, 그것도 잘 싸웠다.
하지만 이건 승리했다.
아니, 이게 아니라 그 적벽대전에서는 그나마 머리 잘 돌아가는 분도 계셨고, 병력 상황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이 조건은 적벽대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고, 그나마 300대 100만 명이 맞장 뜬 상황보다는 나아 보이지만, 별로 다를 거 없어 보인다.
멋진데?
"선배, 이건 무리예요."
"맞아. 5만으로 400만 대군을 상대하다니......."
연희와 은애조차도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녀들 말대로 무리다.
5만으로 400만을 상대로 승리를 하다니.......
간단하게 말해 지나가던 케찹이를 상대로 요정들이 단체로 덤벼서 이길 확률과 비슷한 확률이다.
그렇지만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예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은 그분.
물론 난 약간의 불건전한 생각을 하기는 했다.
뭐 그런 애교적인(?) 생각은 다들 알 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고.
어찌 됐든 그렇게 해 보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절대 그런 방법으로 입을 열 분이 아니다. 한마디로 입을 여는 방법은 지금 저분이 제안한 방법을 수락하는 것.
삽질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시간 낭비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방법밖에 없다면 할 수 없다.
아니, 난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게 있다.
"도대체 뭘 믿고 나에게 총사령관을 맡기는 거야?"
그거다.
내가 조금 믿음직스러운(?)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큰 것을.......
"너의 악명을 들었거든."
"......."
"미친 초보자."
"......."
그때 나에게 총사령관을 맡긴 이유를 설명해 주는 그분.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나는구나.
그나저나 아직도 그 거지같은 별명 안 사라진 거냐?!
미친 초보자 프레젠.
"가만히 놔두셔도 되겠습니까?"
데리트는 물었다.
왜 자신의 마스터는 그저 지켜만 보고 있는지 말이다.
확실히 증폭 페리어라는 히든 클래스는 이제 거의 바로 앞에 있다.
한마디로 자신들이 가로채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마스터는 오히려 다른 말을 했다.
"증폭 페리어는 포기한다."
"......?!"
"어차피 아직 부딪치기에는 난감한 상황. 차라리 마지막 남은 히든 클래스에 대해서 총력을 기울이겠다."
"그렇지만......."
"물론 증폭 페리어라는 직업이 플레이지 나이트라는 직업과 만날 경우 어떤 파장이 올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찾고 있는 마지막 히든 클래스 역시 그 파장에 버금가는 파장이 올 테지."
"그게 무슨......?"
도대체 마지막 남은 히든 클래스가 뭐기에 자신들에게 그런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단 말인가.
확실히 플레이지 나이트는 공격력에 치중된 직업이다 보니 거기에 증폭 페리어가 합쳐지는 순간 1+1이 아닌 1+? 이런 공식이 붙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파장에 버금가는, 아니 넘어서는 거라니!
작전 회의 중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잡탱구!"
"이놈의 씹탱구가!"
"꺄아! 오, 오지 마요!"
"덮쳐 드릴게요!! 이리 오셈!"
"잠시, 뭐 하는 짓이에요!"
"흐음."
"......."
"......."
두 분의 요정은 싸우고 웬 변태 암살자는 이리엘을 덮치려고 한다.
그리고 은애와 연희는 그런 이리엘을 보호하려고 하고.
아, 참고로 엔딘은 책 읽고 계시고, 루얀은 서서 눈 감은 채 개폼 잡고 있다.
전혀 작전 회의와는 상관없는 모습이다.
완전히 평소 모습하고 똑같다.
아니, 굳이 다른 점을 찾으라고 하면 있기는 하다.
여기가 작전 짜는 곳이라는 것, 그거 하나 다르다.
약 50평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와 차분한 분위기가 될 수 있게 꾸며 놓은 인테리어라든가 정말 딱 영화에서나 등장할 만한 완전 멋진 작전 회의소다.
하지만 문제는 전혀 활용도는 없다는 거지.
하아.......
에라, 나도 모르겠다. 그냥 이런 데 들어오는 것도 이제 없을 건데, 이왕 온 거 이런 좋은 데서 잠이나 한숨 자자.
"좋은 작전이 나왔냐?"
"......."
내가 작전 회의소에서 하품을 하면서 어기적어기적 나오자, 나를 반기면서 한마디 하는 데들리.
당신이 보기에는 지금 내 모습이 좋은 작전이 나온 사람 같으우?
하품이나 쩍쩍 하면서 어기적어기적 걷는 나를 보고 말이다.
"안이 상당히 시끄럽더군. 모두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모습이 멋져. 우리 애들은 다들 회의에만 들어가면 버로우 타는데 말이야."
"......."
그때 또다시 데들리라는 분의 알 수 없는 문법 작렬이다.
버로우라. 거참, 이렇게 직설적이고 멋진 표현을 하는 분은 처음 봤다.
그나저나 난 당신 애들이 부러운데?
차라리 버로우 타면 잠이라도 느긋하게 잘 텐데, 이건 워낙 생난리를 피다 보니 잠도 못 잔다.
"단장님!"
"뭔 일이냐?!"
그 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 나와 데들리의 상큼한(?) 대화 중에 한 기사가 끼어든 것 말이다.
그러고는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약간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엄청난 일이 생겼습니다!"
"침공이냐?!"
"아닙니다!"
"......!"
"그, 그게!"
갑자기 이야기를 하는 도중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였다.
"저, 저기 지금 총사령관이 되신 프레젠 님의 명성(?)을 듣고 상대 제국의 용병들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
"......."
나에게도 엄청난 소식을 들려준다.
아니, 뭐라고? 나의 명성(?)을 듣고 용병들이 빠져나가고 있다고?
이건 도대체 무슨 일이야?
"대단하군!"
"......."
"정말 대단해! 어느새 그런 소문을 내서 건덕지들을!"
"......."
그때 용병 분들이 들으면 참으로 슬퍼할 만한 명칭 '건덕지들'이라고 표현하면서 나를 칭찬하는 그분.
저기요, 저도 알고 싶거든요? 언제 그런 일을 했는지 말입니다.
"역시 작전 회의소에서 시간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런 멋진 작전을 실행하다니!"
저기 작전 회의소에서 전 잤는데요?
엄청난 명성(?) 아니, 악명을 가진 프레젠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바로 미친 초보자 프레젠이 이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왜 참여했는지는 모른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다.
그저 그 인간과 연관된 일이라면 빠지는 게 최고라는 게 모든 용병들의 생각이다.
괜히 엮였다가 그 인간과 마주치는 순간, 이 게임 접어야 한다.
어찌 됐든 그의 명성(?)에 의해 대부분의 용병들이 스티머 제국에서 떠나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400만이었던 병력이 순식간에 용병 50만이 빠져나가 35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물론 이 소문이 어떻게 돌았는지는 그나마 제일 정상인 엔딘이 알지도?
"350만 대 4만 8천?"
나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명성(?)을 듣고 50만 명이라는 엄청난 용병들이 빠졌다.
역시 나는 너무 선량해서 빛이 반짝반짝 나다 보니 사람으로서 나를 보면 모두 이렇게 착해지는...... 뭐, 어찌 됐든 그런 거다!!
"저기 주인, 나머지 우리 편 2천 명은?"
"......."
움찔.
그때 마침 나의 아킬레스건을 마구 건드려 대는 케찹이.
아니, 평소에는 멍청한 자식이 왜 지금은 그런 것까지!
분명 우리 쪽에 총 병력은 5만 명이라고 했다.
물론 약간의 오차는 있겠지만, 2천 명이라는 엄청난 오차는 아니다.
그럼 2천 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것도 목숨 걸고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참여한 용병들이 말이다.
제길.......
"얼마나 주인 소문이 아름다우면 우리 편도 도망치네."
"......."
빠직!
저 자식!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했던 거냐!
그래! 나 때문이다!
나 때문에 원래 없던 병력 더 줄여 먹었다!
그런데 불만 있냐?
아니, 애초에 왜 내 소문이 퍼지고 나서 이런 어이없는 반응이냐고!
내가 무슨 악마 마왕도 아니고, 왜 갑자기 나와 관련되면 사람들이 다들 없어지냐고!!
억울해! 으악!
그렇게 난 슬픔을 감추지 못한 채 흐느꼈다.
이건 아닌데, 적이 줄어든 건 엄청나게 좋지만 왜 아군까지 도망갈 정도인 거냐!
도대체 나의 명성(죽어도 명성이라고 우김)이 얼마만큼이면?!
으악!
콰앙!
"......."
"......."
"......."
그때 절망하고 있던 나를 정신 번쩍 차리게 해 주는 문소리.
그리고 그 문소리에 누구 할 것 없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데들리라는 이상한 기사단장이 다급한 어조로 외쳤다.
"침공이 시작됐다. 1차적으로 10만 대군이 도착했다."
"......!"
10만!
350만에 비해서는 상당히 적은 숫자다.
하지만 문제는 10만도 우리에게는 많은 숫자. 약 2배의 차이가 나는 숫자다.
그리고 문제는 1차적이라는 거.
그 말은 시간 지나면 2차, 3차, 4차, 5차 애들이 도착해서 개떼처럼 불어나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더 모이기 전에 우리가 숫자라도 줄여 놓아야 하는데, 우리가 공격을 나갈 숫자도 아니라는 거다.
"걱정 마, 주인!"
"......?!"
그 순간 갑자기 나를 향해 자신 있게 말하는 케찹이.
또 이 자식, 거지같은 작전으로 나를 나쁜 놈으로 만들려는 거지?!
그래, 잘 생각해 보니 나쁜 작전은 전부 다 저 나쁜 대가리에서 나왔다.
난 그저 희생양일 뿐이다.
너무 순수해서(?) 그저 케찹이에게 이용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그런데 변명을 하는 내가 왜 이리 추해 보이는 걸까. 젠장!
한편 케찹이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든 말든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정정당당하게 해치우겠어."
"......."
이상한 작전을 내밀지는 않고 '정정당당'이라는 미친 소리를 한다.
아니, 이건 좋은 현상이야.
케찹이가 이렇게 순진한(?) 모습을 보이는 거 말이다.
그렇지만 그거와는 별개로 숫자를 봐라.
10만이다.
물론 네놈이 강하다는 거 인정한다.
술만 주면 드래곤도 때려잡으니까.
하지만 10만 대군을 상대로 네놈 혼자서 이길 거라는 생각은 좀 오버 아니냐?
"와라."
"......?"
"......?"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케찹이는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와라'라는 정체불명의 소리를.
아니, 도대체 누구한테 하는 소리냐. 누가 올 사람이라도?
펄럭펄럭.
펄럭펄럭.
"......!!"
그때 난 내 눈을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 광경이란 요정들이 순식간에 케찹이 주변으로 몰려드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 케찹이 다구리라도 칠 기색이다.
아니 케찹이 자식, 얼마나 요생을 더럽게 살았으면 저 착한 요정들이 다구리라는 엄청 끔찍한 짓을 하려고!!
하지만 그런 나의 생각은 아주 열심히 빗나갔다.
"보스!"
"보스!"
"보스!"
"......."
"......."
"......."
갑자기 요정들이 케찹이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이, 이건 뭐냐? 보스라니?!
아니, 그리고 왜 케찹이에게 그런 말을 하지?
한편 케찹이는 나를 향해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소개할게. 케찹이 친위대라고 불리는 요정 군대야."
"......."
무척이나 충격적인 소리를 너무나도 태연하게 하신다.
케찹이 친위대, 요정 군대?
이건 또 무슨 얘기야?
아니, 잠시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다.
질겅질겅.
건들건들.
요정들이 다 이상하다.
껌 씹는 요정부터 건들거리고 하품하고 무슨 양아치 아저씨들 같은 포스를 보인다.
"내가 특별 훈련을 시켰거든. 후후."
"이 미친 자식아!"
"악! 왜 그래?!"
그때 난 나도 모르게 그대로 케찹이 파리채를 꺼내 들었다.
아니! 이 자식, 자기만 그딴 식으로 살 것이지, 왜 가만히 있는 순수한 요정들을 저 따위로 만들어 놓은 거냐!
이건 얘들이 꿈꾸던 착한 요정은커녕 악마 요정들이 대량으로 생산(?)된 거잖아!
이놈의 케찹이 자식이!
"나, 나를 지켜라! 나의 친위대여!"
"......!"
한편 내가 파리채 블로킹을 하려는 걸 눈치 챈 케찹이가 얼른 자신의 친위대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
"......."
"......."
"......."
다들 침묵이다.
아니, 오히려.
"저, 저는 잠시......."
"아, 배가......."
"어, 멀미가!"
"아, 주인님이......."
"......."
다 도망가기까지 하신다.
난 이걸 보고 깨달았다. 케찹이의 불량함만을 배운 게 아니고, 케찹이의 나쁜 건 다 배웠다고 말이다.
한편 어느새 혼자가 된 케찹이가 갑자기 피식 쓰러진다.
마치 그때의 이상한 상황과도 비슷하지만 아니다.
전문용어로 생 쇼다.
"일어나, 임마."
"......."
"연기해도 소용없어."
"......."
"허어?"
하지만 계속해서 자기가 이상해졌다는 걸 이용해서 빠져나가려는 케찹이.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이상 현상이 일어나면 지금 기회에 죽이도록 하겠습니다."
번쩍!
"뭐, 뭐야?!"
갑자기 검을 들고 케찹이를 향해 달려가면서 한마디 하는 루얀의 말에 그대로 벌떡 일어나는 케찹이.
난 그런 케찹이를 향해 그대로 날아서 파리채를 내리꽂았다.
퍼억.
"꺄울!"
그러고는 땅바닥에 쳐박힌 케찹이를 한번 본 뒤 루얀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루얀, 땡스."
"......?"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루얀.
난 그런 루얀을 향해 친절하게 말했다.
"방금 전 케찹이의 연극을 단번에 무효로 만들었잖아. 죽이는 것처럼 해서 말이야."
"무슨 말이신가요."
"아니, 그러니까 너도 연기인 걸 알고?"
"아닙니다. 저는 이상해진 줄 알고 진짜 죽이려고 했습니다."
"......."
"......."
섬뜩.
그때 나와 케찹이의 등 뒤로 싸늘한 한기가 지나갔다.
진심이다.
저분은 정말 진심이다. 언제든지 케찹이를 죽이려고 하는 친절한 청년이시다.
어찌 됐든 케찹이와 케찹이 친위대를 내보내는 건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일단 요정들이 그런 짓거리를 하는 걸 보면 세상에 큰 이슈가 될 것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만든 존재가 나라는 소문이 퍼질 확률 99.9999999%.
간단하게 나만 나쁜 놈 되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나쁜 놈 되기는 싫다. 그것도 요정들을 상대로 이상한 짓거리를 해 댄 정말 사악한 인간은 말이다.
그나저나.......
"무슨 좋은 방법 없을까?"
난 생각해 본다.
어떻게 해야 참신하고 멋진 아이디어로 10만 대군을 격파할 것인가?!
"나를 고용하면 이길 수 있어."
"......."
그때 버스틴이 갑작스럽게 나의 생각에 끼어들더니 이상한 소리를 했다.
내가 너를 왜 고용해?
아니, 너 공짜로 해 준다고 해도 절대로 사양하고 싶다.
어디다 써먹을 데도 없는.......
"난 암살자야!"
"헉!"
그 순간 버스틴의 한마디에 난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그래. 버스틴은 암살자였다.
그것도 나름대로 지상 최강의 암살자!
하는 짓이 또라이여서 지금까지 망각했었지만, 지상 최강의 암살자라면 정말 엄청난 것이다.
예를 들어 단숨에 간부들을 암살해 버리고 지휘 체제를 흔들어 버린다?!
그럼 이 전쟁도 금세 끝나는 것이다.
그만큼 암살자 즉, 엄청난 실력을 가진 암살자는 전장의 분위기를 바꿔 버린다.
그리고 버스틴은 충분히 가능하다. 정말 나름대로 엄청난 실력자니까.
이건 예상치 못한 수확인데?
아니, 그런데 잠시, 방금 전 어떤 말이 상당히 거슬린다.
"너를 고용해?"
"......."
"지금까지 빌붙어서 쫓아다녔으면서 고용하라고? 한마디로 대가를 주고?"
"당연하지. 난 암살자니까."
허허! 이런 미친놈이 있나.
감히 지금까지 집적거리게 해 준 것만 해도 영광으로 알지는 못할망정 당당하게 고용 값을 내놓으라고 한다.
완전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아, 오해는 하지 마. 우리 사이에 큰 걸 받을 생각은 없으니까."
"......?"
그래도 양심은 쥐꼬리만큼 있었는지 이런 말을 건네는 버스틴.
아니, 그래도 지금까지 빌붙어 대고 나서 조건을 거는 것 자체가 상당히 괘씸하지만, 아무런 조건 없이 그 어려운 일을 해내려면 또 힘들 테니 난 약간은 들어주기로 했다.
그리고 말투로 봐서는 별것 아닌 듯싶으니 뭐.
"이리엘의 옷을 찢어 버리게 협조해 줘."
"......."
"제길!"
버스틴은 쫓겨났다.
아니, 정확히는 프레젠에게 죽도록 맞은 뒤 곧바로 임무로 투입되어 버린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 자신이 뭘 그렇게 심한 요구를 했다고, 자신의 눈을 밤탱이로 만든단 말인가?!
고작(?) 이리엘의 옷을 찢는 걸 도와달라는 것밖에 요구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어찌 됐든 버스틴은 강제로 암살하라고 쫓겨났고, 제대로 일 안 하면 들어오지 못한다는 경고가 있었다.
그래서 이번 임무는 절대적으로 성공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나저나 버스틴은 거슬린다.
누가?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요정 한 마리가.
"너 뭔 속셈이냐?"
"뭔 속셈이라니! 친구를 도와주려는 착한 마음?"
"......."
케찹이가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을 믿을 버스틴이 아니다.
아무리 멍청이 버스틴이라도 이건 알고 있다.
저 악마 요정 케찹이가 친구를 도와준다는 세상이 멸종하기 1분 전에도 없을 일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절대 믿지 못한다.
"날 믿지 못하는 거야?!"
"......."
그때 버스틴이 계속해서 수상한 눈동자로 보자, 케찹이는 화들짝 놀라면서 물었다.
그리고 버스틴은 말은 안 했지만 예스다.
안 믿고 있다. 절대로!
글썽글썽!
"......!"
갑작스러웠다.
그 순간 케찹이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 것이다.
절대 눈물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케찹이에게서 눈물이라니!
버스틴은 너무나도 당황스러웠고 그런 버스틴을 향해 케찹이는 쓸쓸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괜찮아. 내가 지금까지 한 행동을 생각하면....... 흐흑."
"......."
"너의 그런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걸. 절대로 날 믿지 못하는......."
"미, 믿어!"
"......."
그때 버스틴은 생전 처음 보는 케찹이의 눈물(?)에 순식간에 판단력이 흐려지면서 그렇게 소리쳤고, 그 말에 케찹이는 속으로 웃었다.
'게게게게게!'
참으로 겉으로는 울고 속으로는 웃는 엄청난 녀석, 그게 바로 케찹이었다.
버스틴은 진정으로 감동 받았다.
자신 대신 암살을 성공시켜 이 전쟁을 끝내겠다고 하면서 가 버린 케찹이 때문에 말이다.
물론 처음에는 좀 믿기 힘들었지만, 케찹이의 환상적인 말발에 버스틴은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자신은 귀엽고 깜찍한 요정이기에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테고, 그렇기에 암살도 수월하게 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뿐 아니라 자신은 프레젠에게 맞았으니 좀 쉬고 있으란다.
이 얼마나 배려 깊고 아름다운 마음인지!
진짜 버스틴은 케찹이가 오늘 새롭게 보인다.
"땡땡이 치고 있군."
"......헉!"
그때 케찹이에 대해서 감동을 하고 있는 시간에 갑자기 나타난 한 남자.
자신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그 남자였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라이벌(이리엘 옷 누가 먼저 찢을까 경쟁하는 라이벌)!
즉 프레젠이 바로 앞에 있던 것이다.
아니, 이건 어찌 된 일인가! 어떻게 저분이 여기에 있는 자신을 알고 찾아온 거지?!
버스틴은 갑자기 나타난 프레젠 덕택에 마구 머리가 혼란스러웠고, 그런 버스틴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보였다.
그리고 그건.......
"케찹이!!"
"게게게게."
"......."
자신 대신 암살하러 가신다던 그분이었다.
왜 그분이 암살은 안 하고 프레젠 옆에 있을까?
"네놈이 땡땡이치나 감시하라고 했거든."
"......!"
그때 프레젠의 한마디에 버스틴은 깨달았다.
역시 케찹이는 나쁜 요정이라고!
아니, 그런데 감시하고 눈물하고는 뭔 상관이란 말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번거로운 행동을 하고, 처음에 열심히 일하려던(?) 자신을 못하게 막은 것일까?!
버스틴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간단해. 주인이 네가 땡땡이치는 걸 확인하면 술 준다고 했거든."
"......."
"한마디로 네가 착실하게 일을 하고 있으면 난 술을 못 얻는 거지. 그래서 난 네가 친히 땡땡이를 치도록 도와준 거지. 크크."
"......!"
그때 어느새 다가온 케찹이가 버스틴에게 속삭였다.
결론은 이거였다.
프레젠이 땡땡이치는 걸 발견하면 술을 준다 했고, 그렇기에 케찹이는 아예 잔머리를 굴려서 일하려는(?) 버스틴을 방해한 것이다.
버스틴은 완전히 낚였다는 걸 깨닫고 케찹이를 노려보았지만, 그때는 이미 프레젠 님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시점이었다.
"정말 나쁜 요정일세."
"......?"
난 약속한 대로 술을 건네주면서 한마디 했다.
하지만 그런 내 말에 케찹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케찹이를 향해 말했다.
"술을 위해서 그런 잔인한 작전을 짜다니!"
"헉!"
한편 나의 말에 너무 깜짝 놀라서 기겁하는 케찹이. 아마도 자기 딴에는 완벽한 작전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이런 쪽에는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가는 편이다.
술을 위해 땡땡이치게 만든 저 케찹이라는 요정,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뭔가 이상할 것이다.
왜 난 알면서도 속아 주었냐는 거다.
그 이유는 버스틴을 더 패고 싶어서이다(자꾸 이리엘에 옷을 찢어 버린다면서 하는 말이 내 머리를 맴돌아서 약간 분노했다).
그러니까 명분 없이 패면 이상하다.
그러니 명분을 만들자는 거다.
한마디로 난 케찹이를 어떻게 보면 이용한 것이다.
분명 케찹이에게 '버스틴이 땡땡이치는 모습을 내게 보여 주면 술 지급!'이라는 제안을 할 경우, 케찹이라는 놈은 어떤 방법을 써서든 땡땡이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케찹이는 완벽하게 버스틴을 땡땡이치게 만들었고, 나는 정당하게 팰 수 있었다(결론은 둘 다 나쁜 놈).
"헉!!"
"......."
"......."
"......."
"제길, 엄청나잖아!"
"......."
"......."
나와 일행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이유는 파격적인 패션으로 도망 온 버스틴 때문이다.
저번 변장술과는 비교도 안 된다.
이번에는 완전 파격적인 의상이다. 초 미니에다가 등이 훤히 보이는, 거의 벗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충격적인 변신을 한 것이다.
"그 모습 뭐야!!"
난 경악했다.
왜 그 모습으로 도망 나온 거냐!!
내가 암살하라고 보냈지, 그렇게 미친 짓 하라고 보내지는 않았잖아!
한편 이런 나의 말에 버스틴은 침체된 어조로 말했다.
"나의 미인계가 통하지 않았어."
"......."
"모두 나를 보더니 이 완벽한(?) 변신술을 파악하고 나를 죽이려고 하더군."
"......."
"정말 최초로 들키고 말았어."
이 돌팅아!!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임마! 분명 네놈의 변장술은 충격적이다.
나도 순간적으로 굳어 버릴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네놈이 이상한 미친 변태라고만 생각했지, 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엄연히 다르다.
전쟁 중인 상황이다.
그런 상황 중에 별 이상한 놈이 나타나면 당연히 적이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저런 미친놈이라면 나 같아도 당장 죽여 버리고 싶겠다.
아아, 내가 저놈을 믿은 게 잘못이다.
아니, 그리고.
"잠입 몰라, 잠입?!"
암살자가 잠입을 해야지, 왜 정정당당하게 쳐들어가는 거냐!
앙?
한편 이런 나의 말에 버스틴은 피식 웃더니 말했다.
"난 그딴 거 안 배운다."
"......."
"난 고귀하거든."
"......."
미친......놈.
버스틴은 잠입을 못한단다.
그리고 그 이유는 자기가 고귀해서라고.
한마디로 쓸모없는 암살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결론은 버리자.
제길!! 그나저나 정말 좋은 작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토록 허망하게 포기하게 되다니.......
아니, 그리고 무엇보다 슬픈 건 이제 작전이 없다는 거다.
이게 더욱 나를 슬프게 한다.
"제 생각에는 프레젠 님의 명성(?)만 더욱 드높인다면, 상대편의 수를 더 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싱긋.
아이디어가 없어서 절망하고 있는 나에게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엔딘과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는 나.
그리고 그런 나를 보고 웃고 있는 엔딘.
느껴진다, 엄청나게 불길한 느낌이.......
난 오늘 엔딘이 잔인한 인간, 아니 조율자라는 걸 알았다.
어떻게 그런 잔인한 작전을!!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작전에 다들 수긍하고 있다.
심지어는 여자들까지도!
그 어느 때라도 마음씨 곱고 고운 그녀들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항상 나를 도와줬는데!
이번 작전은 다들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런 제길, 정말 슬프다.
"너한테는 무척이나 수월한 작전이겠다! 그치?"
"......."
그때 이런 내 마음을 모르는지 너무나도 해맑게 웃으면서 말하는 은애 양!
정말 당사자가 아닌 이상 이 기분 모른다. 흐흑.
"어차피 너의 악명에 플러스만 하는 거잖아!"
참으로도 친절한 은애 씨.
내가 뭘 말하기도 전에 모든 설명 다 해 준다.
그래, 그러니까 엔딘의 작전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저번에 나로 인해서 적국의 용병들이 대량으로 빠져나간 사건이 있다.
그 사건을 이용하자는 것이다.
그 사건의 근본적인 이유는 나에 대한 알 수 없는 괴소문.
절대 오버래핑(?)되어서 과대 포장된 난 그 괴소문을 이용을 하자는 작전이다.
흐음, 약간 이해하기가 난해한 사람을 위해서 풀이해 주자면, 괴소문을 더욱 높이라는 것?
그러니까 나에 대한 명성(?)을 더 높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의 명성을 들은 적들은 또다시 사라질 거라고 말하는 엔딘.
하고 싶지 않다.
결론적으로 보면 나만 이상한 놈 되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제일 효율적일 수도 있다.
내 과장된(?) 소문으로 인해 그토록 많이 빠져나갔다면 좀 더 난이도만 높인다면.......
제길, 승리를 위해서 내가 희생할 수밖에.
"총사령관님?"
에르크 부대장은 갑자기 자신을 부른 프레젠의 명령에 의해 지금 총사령관실에 온 상태고, 조심스럽게 프레젠을 부른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다.
아니, 오히려 대답 대신 너무나도 미묘한 소리가 총사령관실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하아아악, 하아악!"
"......!"
이건 무슨 일일까?
방문도 살짝 열려 있고 말이다.
에르크는 방 안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궁금증이 생겼고, 슬며시 그 살짝 열린 방문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였다.
"허헉!! 으읍!"
에르크는 소리를 지르려다가 지금의 상황을 인지하고 최대한 숨을 죽였다.
아니, 그것보다 어떻게 저런!!
에르크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눈을 비비고 방문을 엿보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프레젠이 피로 보이는 붉은색의 액체를 먹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잊혀지지 않던 프레젠 옆에 있던 연희와 은애, 그리고 이리엘을 눕혀 놓은 채 말이다.
이미 방 안은 가득히 피로 흩뿌려져 있고, 그 피는 연희와 은애, 이리엘의 옷에 잔뜩 묻혀진 상태.
이 정도면 바보가 아닌 이상 다 안다.
저 남자가 저 여자들의 피를 빨아먹었다고.
에르크는 그런 사실을 알자 당장 그녀들을 구하려고 하지만, 그것도 달성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완전히 살벌하게 입가에 묻은 피를 핥고 있는 프레젠 때문이다.
이길 수 없다.
지금 달려들어 봤자 개죽음만을 당할 뿐이다.
너무나도 무섭다!
그의 눈빛을 본 순간, 에르크는 이미 기사도 따위는 잊어버렸다.
"수고했어."
"선배도 고생하셨어요."
"연기력 최고!"
"주인님, 정말인 줄 알았어요."
"......."
난 부대장이 돌아간 걸 알고는 모두에게 나름대로 격려의 인사를 보냈다.
그러자 나에게 수고했다고 답변을 해 주는 그녀들.
난 그런 그녀들을 향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남아 있던 토마토 주스를 마저 먹으면서 처량하게 말했다.
"아무리 그렇다지만, 내가 여자 피나 빨아먹는 변태가 될 줄이야......."
"......."
"......."
지금까지 별별 소문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좀 그렇다.
피를 빨아먹다니, 정말 이건 아닌데. 차라리 좀 다른 거였다면 이렇게 한숨까지는 쉬지 않을 테다.
그렇지만 이런 변태성은 정말.......
"아직 끝난 게 아니죠."
"......?!"
피 빨아먹는 변태 역할을 힘들게 소환해 낸 나에게 청천벽력 같은 엔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끝난 게 아니라고?!
설마 여기서 더 이상한 소문을 만들라는 거냐?!
"정답입니다."
"......."
"이왕 한 거 완벽하게 하면 좋지 않을까요?"
제길, 거절하고 싶다.
하지만 엔딘의 말이 너무나도 와 닿는다.
이왕 시작했다. 그리고 그럴 바에는 완벽하게 하는 게 낫다.
그래, 하자. 피 빨아먹는 역할도 했는데 다른 거 못하겠는가?
데들리는 어이가 없었다.
피를 빨아먹는다?
자신들의 총사령관이 된 프레젠의 소문이었다.
분명 자신이 알기에 프레젠이라는 남자는 성격이 좀 지랄 맞아서 그렇지, 알고 보면 그런 쪽하고는 절대 인연이 없다.
지금 자신이 들은 소문도 그의 성격이 지랄 맞은 것과 관련되어 있지, 절대 무슨 피 빨아먹거나 이상한 변태 짓거리 하거나 그런 건 없다.
그만큼 그는 성격이 지랄 맞은 걸 제외하고는 나름대로 착한(?) 존재였다.
그런 그에게 이런 웃기지도 않는 소문이 붙다니.
그렇기에 자신은 이 소문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단단히 입막음을 시켰고, 그리고 이상한 소문이 들어서 기분이 심하게 나빠졌을까 봐 프레젠을 찾아가는 길이다.
그리고 바로 프레젠이 있는 총사령관실 바로 앞.
문이 열려 있었다. 마치 방문을 기다리는 듯 말이다.
한편 그걸 본 데들리는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려고 한다.
그런데.......
"아아악!!"
"으하하하."
"아아앙?!"
"......후하하하하."
"이, 이러지 마세요오!!"
"닥쳐라! 비명을 질러라!"
"아아악!"
"그래, 비명을!!"
"......."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도 무척이나 섬뜩한 비명이 말이다.
그리고 참고로 말하자면 두 명의 대화였는데, 둘 다 남자의 목소리다.
그럼 이쯤 되면 감이 잡힐 것이다.
두 명의 남자의 대화 중 한 명은 소리 지르고 한 명은 즐거워하고.
데들리는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을 거라고 한다.
그래, 이건 말도 안 된다!
이게 현실이라면!
그때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열려진 방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
굳어 버린다.
항상 거침없이 짱 새끼, 건덕지기, 잡것들 등 화려한 어록(?)을 만들면서 항상 당당했던 그가 최초로 굳어 버린다.
왜냐고?
방 안에는 엄청난 광경이 펼쳐져 있었으니까.
두 남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냥 있으면 놀라지도 않는다.
둘 다 속옷만 입고 있으니 놀란다.
그리고 참고로 그중 한 명이 프레젠이다.
그렇지만 여기까지만 봤다면 데들리는 그저 게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프레젠의 손에 쥐어진 채찍이 문제인 것이다.
지금 저 상황에서 왜 채찍이 있을까?
......채찍이 말이다.
"흐흑."
"선배......."
"흐윽."
"......."
"으아악!!"
"선배, 진정하세요."
연희야, 위로는 고마운데 정말 진정이 안 돼!
아무리 더럽혀질 데까지 더렵혀진 이 몸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최악의 소문까지 나게 만들다니.......
여자의 피를 빨아먹고 게이에다가 거기다가 새디스트.
멋지다.
"효과 하나는 최고군요."
한편 그때 누군 더럽혀지든 말든 감탄을 금치 못하는 엔딘.
저 자식, 은근히 나쁜 놈이다!
정말 나쁜 놈! 원래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저런 사악한 존재가 된 거지?
제길!
"적들이 70만 명이나 줄어들어서 총 120만 명이 줄어들었군요."
"......."
"그래서 남은 숫자는 약 280만 명. 물론 우리 편에서도 다수의 탈영자가(?) 나왔습니다. 대략 13,000명 정도? 그래서 우리 쪽은 31,000명이 되어 버렸군요. 하지만 비교를 해 볼 때 훨씬 전략적으로 성공한 작전입니다."
한편 친절하게 작전 상황에 대해서 말해 주는 엔딘 군.
참으로 고맙기도 하다.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확실하게 엄청난 성과를 거두기는 했다.
단지 소문만으로 120만의 대군을 없애다니!
이건 그 누구도 깨지도 못하고 시도조차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기록이다.
평생 남아 있을 기록인 게 분명한다.
그나저나 여기서 잠깐!
많은 사람들이 궁금할 테다.
과연 진짜로 소문만으로 이런 성과를 거두는 게 가능한지.
사실 나도 직접 체험하지 않았으면 절대 믿을 수 없는 결과.
아니, 사실은 아직도 믿기가 힘들다.
그런데 다른 사람 같으면 믿고 싶겠는가?
아닐 테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가능한 건 내 소문이 그냥 소문이 아니었다.
소문이 진화해서 괴담 수준인 것이다.
한마디로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무섭고 엽기적인 것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런 소문이 도는 상대라면 나라도 거부하고 싶으니까.
물론 그 소문이 도대체 어떤 소문인지 꽤나 궁금할 거다.
하지만...... 안 가르쳐 주지!
흠, 나 왜 이러는 거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뭐지?"
엔딘의 한마디에 루얀은 여전히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런 반응에도 엔딘은 여전히 특유의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케찹 님에 대한 질문입니다."
"......."
다소 루얀에게 민감한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루얀은 말이 없었고, 그걸 본 엔딘은 곤란한 어조로 말했다.
"안 되나 보군요."
"아니. 짧게 말해라."
그나마 다행이라면 루얀이 허락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허락에 엔딘은 슬며시 웃음을 거두면서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케찹 님이 블랙 페리안에게 몸을 뺏기지 않고 이겨낸 얘기는 들었습니다."
"......."
"하지만 이상하게 루얀 님은 항상 이런 말을 하시더군요. 케찹 님은 블랙 페리안에게 이길 수 없다고, 언젠가는 잠식당해 버린다고 말입니다."
"......."
"그래서 기회만 나면 죽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죠. 근데 루얀 님, 분명 루얀 님도 블랙 페리안에게 잠식당하지 않은 케찹 님에게 놀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다시 한 번 케찹 님이 이길지 질지도 모르는 싸움에 확정을 짓는 건지 궁금하군요."
"......."
"한 번 이겼으면 또다시 이겨서 블랙 페리안에게서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을 확률도 분명 있을 텐데요."
그렇다. 엔딘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케찹이가 또다시 블랙 페리안에게 몸을 뺏기지도 않은 상태인데, 왜 자꾸 미리 뺏길 거라고 단정 지은 채 지금이라도 목숨을 끊어야 한다고 말하는지 말이다.
왜 그가 이렇게 성급하게 케찹이의 목숨을 없애려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그런 질문에 루얀은 여전히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놀라기는 했지."
"......."
"그 작은 몸으로 블랙 페리안에게 대항해서 몸을 뺏기지 않았으니 말이야. 보통 그 어떤 존재라도 블랙 페리안에게 점령당한 이상 그 누구도 견뎌 낼 수 없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지. 하지만 그 케찹이라는 요정과 비슷한 케이스를 가진 존재가 한 번 있었다."
"......!"
엔딘은 그 말에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자신도 블랙 페리안이 어떤 존재인지는 루얀처럼 상세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조금은 알고 있다.
블랙 젠더의 씨앗이라고 불리는 블랙 페리안.
고대 신을 소멸시키고 나머지 조율자 다섯 명을 동시에 해치운 존재, 그리고 플레이지 나이트와 함께 유일무이하게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다.
그런 존재의 씨앗인 블랙 페리안에게 점령당한 케찹이라는 요정에게 정말 놀랄 대로 놀란 엔딘이다.
그런데 케찹이 말고도 또 그런 케이스가 있다니!
"그래. 그녀도 처음에는 케찹이라는 요정처럼 블랙 페리안에게 몸을 뺏기지 않고 견뎌 냈지. 그리고 그 이후 지금 저 요정처럼 아무런 현상이 없었다."
"......."
"하지만 그건 그저 잠시의 시간이었을 뿐. 시간이 지날수록 블랙 페리안이 그녀를 가지기 위해 힘을 가지고, 그녀는 매일매일을 고통으로 보냈다."
"......."
"말도 할 수 없는 고통. 물론 난 느껴 보지 못했다. 하지만 단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도 끔찍했을 고통을 그녀는 매일매일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견디다 못해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아는가?"
"잘 모르겠군요."
당연한 말이지만 엔딘이 그 말을 알 리는 없다.
한편 그런 엔딘의 말에 루얀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하더군."
"......!"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다고...... 말이야."
"......."
"그리고 그녀는 몇 개월간을 그렇게 고통을 당한 채 자신의 손으로 죽어야만 했다. 자, 그럼 그녀에게 수개월간 남은 건 무엇이었을까?"
"......."
"알겠는가? 블랙 페리안에게 숙주가 된 존재는...... 그게 바로 마지막의 모습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