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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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연준의장
세월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두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남자아이가 기어 다니다가, 뛰고 이젠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중얼 거릴 정도로 컸을 시간이 흘렀다.
“여보, 이거 저기로 옮겨줄래?”
바쁘게 손을 움직여 저녁을 준비하는 캐서린의 말에 조리대위에 놓인 음식을 식탁으로 옮겼다.
캐서린은 아이를 키우느라 바쁜 와중에도 저녁식사만큼은 꼭 자신의 손으로 만든 음식을 먹이려고 들었다.
“이건 처음 보는 음식인데 이름이 뭐야?”
“이 요리이름은 검보야. 루이지애나 음식인데 어렸을 때 엄마가 만들어주던 게 생각나서 만들어 보고 싶더라고.”
“어머님이 루이지애나 출신이었나?”
“친 엄마가 루이지애나 출신의 프랑스계 크리올이라서 내가 어렸을 적에 이런 요리를 많이 만들어줬거든.”
검보는 루이지애나의 전통음식중 하나로 볶은 밀가루에 야채와 물고기, 고기를 넣어서 만드는 요리다.
북아프리카가 원산지인 오크라를 넣어서 어패류와 함께 오랜 시간을 끓여내는 것이 보통이다.
장모는 캐서린이 열다섯 살 나던 해에 병으로 돌아가셨다.
그 후에 부친이 재혼하면서 지금 살고있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이 둘을 낳았다.
캐서린과 두 오빠는 캐서린의 친모소생이었다.
미국사람들답게 캐서린의 가족들은 큰 거리낌 없이 다들 잘 어울렸다. 때가되면 흩어져사는 식구들이 모여서 함께 명절을 보냈다.
진득하게 끓인 검보를 식탁위로 올리며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낸 캐서린은 규태가 맛을 보고 잔뜩 긴장한 얼굴을 했다.
“나쁘지 않은데? 조금 진한 맛이 나긴 하지만 먹을 만해.”
“휴우, 조금 걱정했거든, 당신은 스튜가 걸쭉한걸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 기름진 것도 싫어하고.”
“그래도 당신이 해준 건 다 잘 먹잖아. 에단도 마찬가지고.”
에단은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남자아이의 이름이었다.
“알아, 그래도 내가 만든 요리가 당신이 좋아하는 맛이면 더 좋잖아.”
아이가 태어나고 조금씩 크면서 팔로알토의 저택을 개축했다.
규태는 일터도 가깝고 날씨도 마음에 들어서 앞으로도 팔로알토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에단은 아직도 자나? "
저녁식사를 하면서 규태는 평소와 다르게 너무 조용한 아들 녀석이 걱정됐다.
“낮에 LA에 가서 너무 신나게 놀았나봐. 돌아오자마자 곯아떨어졌는데 저러다가 한밤중에 깨어나서 놀아달라고 칭얼거릴까 걱정이네.”
낮이면 온 집안을 부산스럽게 뛰어 다녀 정신이 하나도 없게 만드는 녀석이다.
규태가 집을 내버려 두고 회사로 출근하는 것도 아들놈의 놀아달라는 성화를 이기지 못했다. 일을 하려고 하면 놀아달라고 칭얼거리는 아들놈 때문에 집에서는 도무지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걔가 낮하고 밤이 바뀐 게 하루 이틀인가.”
캐서린은 미국사람답게 아이가 돌이 지나자마자 부부침실에서 떼어내 따로 재웠다.
초반에는 에단도 엄마를 찾아 제법 칭얼거리더니 이젠 혼자서도 잘 잤다.
입맛에는 크게 맞지 않지만 옛날 생각에 잠긴 캐서린의 눈치를 보며 검보로 저녁을 마무리했다.
“이거 먹으니까 어린 시절 생각이 많이 나나봐? ‘
“엄마가 시도 때도 없이 해줘서 어린 시절에는 정말정말 별로였거든. 맛도 없는 이런 걸 매일 요리한다고 투정도 많이 부렸었고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까 점점 생각이 나네.”
기분 좋은 얼굴로 자기가 만든 검보를 싹싹 비우는 캐서린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규태의 머릿속으로 9월 달에 루이지애나에 들이닥칠 대규모태풍에 생각에 미쳤다.
대규모 학살 같은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면 역사에는 개입하지 않는 것이 규태의 원칙이었다.
카트리나라는 이름을 가진 대규모 태풍은 루이지애나뿐 아니라 남부에 커다란 피해를 입힌다.
만조 때가 겹치면서 대규모 제방이 붕괴되고 남부의 산업시설이 타격을 입으며 한동안 유가가 큰 폭으로 변동하기도 했다.
“요즘 일은 잘돼? 주가가 큰 폭으로 많이 올랐잖아?”
“그렇지 뭐 투자은행에서 발행하는 모기지 론쪽으로 수익률이 높아.”
규태의 말에 캐서린이 이마를 찡그렸다.
“난 그거 불안해보이던데.”
식사를 마친 규태가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진짜로 불안한 거 맞아. 작년에 연준에서 저금리를 종료했잖아. 앞으로 계속 금리는 올라갈 텐데 모기지 연체율이 높아지면 높아졌지 낮아지지 않을 거야. 특히 신용도가 낮은 서브 프라임 쪽의 연체율이 크게 올라갈 거야.”
닷컴버블의 붕괴, 911과 아프간전쟁으로 불황의 늪에 빠진 미국경제 때문에 연준은 금리를 장기간 저금리로 유지했다.
유동성의 과다한 공급은 필연적으로 부동산 가격의 상승을 불러왔고 투자은행들은 경쟁적으로 모기지론을 이용한 각종 상품을 만들어서 팔며 수수료와 높은 수익을 챙겼다.
2004년부터 여러 은행과 투자은행들의 모기지론 취급 비중이 급속하게 올라갔다.
서브 프라임 론의 이자율보다도 높은 주택가격상승은 주택수요의 증가를 불러왔고 신용등급이 낮은 이들조차 쉽게 돈을 빌려서 주택을 사들였다.
“그럼 어떻게 해?”
“어떻게 하긴 거품이 점점 불어날 테니 때가 되면 터지겠지.”
지금은 버블의 초입을 막 지난 상태. 앞으로도 2년간은 버블이 끝나지 않고 지속된다.
버블이야기가 나오자 캐서린이 머리를 흔들었다. 닷컴버블의 붕괴로 벤처캐피탈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일반 미국인들은 벤처라면 학을 뗀다.
벤처의 활력이 대폭 줄어들면서 자금투자도 줄어들었다.
타이거 벤처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버블이라면 아직도 끔찍하게 여겼다. 그만큼 뒤처리가 만만치 않았다는 이야기.
캐서린이 아이를 키우느라 외부활동을 줄였지만 완전히 은퇴하건 아니라서 매주 강현 사장이 업무보고를 했다.
타이거벤처의 주식 15%가 캐서린 소유였다.
“끔찍하네, 이것도 후폭풍이 만만치 않겠지? 지금 투자은행들이 눈이 뒤집혀서 서브 프라임모기지 상품을 만들고 있잖아?”
“아직 정점에 도달하려면 멀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겠지.”
“시간이 있다면 됐어.”
“그런데 캐서린, 루이지애나에 아직 친척이 남았어? 엄마 쪽으로 있을 것 같은데.”
“응! 이모 두 분이 아직도 거기에 살아.”
“지금도 친해?”
규태의 질문에 캐서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친하다고 해야 하나? 가끔 연락을 하긴 하는데. 아무래도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는 자주 보지 못하니까. 다른 지역에 나가 사는 사촌들하고는 가끔 연락해.”
잠시 규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망설였지만 캐서린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태풍과 같은 천재지변을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루이지애나는 여름마다 태풍 때문에 고통 받는 지역이었다. 올해 오는 태풍이 워낙 강력한 것이라 문제였지.
“이모님들 아이가 어리다면 이곳으로 와서 살라고 하면 어때? 환경은 거기보다 여기가 낫잖아.”
“에이 뭘, 이모 둘 다 사촌들이 다 커서 직장을 외부에 구했거든. 은퇴해서 부부만 따로 뉴올리언스에 사시는데. 내가 바쁘게 움직일 때는 사촌들이 사는곳에 가면 연락을 해서 가끔 만났었어. 그런데 갑자기 그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야?”
이모님들이 캐서린의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다면 은퇴할 나이가 됐을 법도 했다.
“아니 뉴올리언스가 태풍이 심한 곳이잖아. 경제연구소에서 올해 기상이변이 심해서 그지역의 태풍피해가 극심할 거란 예측 보고서를 만들었거든. 갑자기 루이지애나 이야기가 나오니까 그걸 읽은 기억이 나서 말이야.”
“어머! 경제연구소에서 만든 자료는 정확하기로 유명하잖아. 정말 올해 태풍피해가 심할 거래?”
“환경파괴 때문에 역사상 몇 없는 강한 태풍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더군. 캐서린이 루이지애나 이야기를 하니까 갑자기 그 생각이 나서 말이야. 자칫하면 태풍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을수도 있고 거기가 그렇게 안전한 도시는 아니잖아.”
규태의 말을 들은 캐서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루이지애나, 그중에서도 두 이모가 사는 뉴올리언스는 저지대에 만들어진 도시라 수해를 입을 확률이 높았다.
지방정부의 재정도 빈약해서 낡은 제방을 보수해야 하는데 하지 못했다.
재즈로 유명한 뉴올리언스는 인구의 2/3가 흑인이고 빈곤층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는다면 보나마나 도시의 치안이 악화될 것이고 그 뒤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이번에 두 분 가족들을 LA로 초청할까? 여기 팔로알토는 와봐야 크게 구경할 것도 없고 날씨도 서늘하잖아. 두분가족이 LA에 머물면서 관광을 하게 하면 어떨까? 태풍철이 지나면 돌아가시는 걸로.”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아. 규태가 초대하면 누가 오지 않겠어. 은퇴해서 시간도 많은 분들인데. 아마 기쁘게 달려오실걸. 사촌들도 시간이 나면 찾아올 테고.”
포브스에서 집계하는 세계 부호 순위에서는 빠진 규태지만 워낙 부자로 이름이 유명해져서 초청을 받으면 기쁘게 달려올 것이었다.
“이모님들이 오시면 캐서린이 LA주변 관광도 시켜드리고 우리요트로 유람도 다니시면 금방 여름이 다가겠네.”
“정말 좋아하시겠다. 나도 오랜만에 이모가족들하고 만날 생각을 하니까 좋은데. 자기, 고마워. 내 이모님들까지 이렇게 신경을 써줘서.”
“그 정도야. 당연한 일이지.”
아내가 루이지애나이야기를 하자 올해 닥칠 카트리나가 떠올라서 급작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생각보다 캐서린이 기뻐하니까 규태도 기분이 좋아졌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모처럼 부부만의 다정한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의 귀에 아들 녀석이 잠에서 깨어나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지만 이럴 때는 정말 천하의 악당이 따로 없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아내가 잠에서 깨어난 아들과 놀아주는 사이에 규태는 한창 재선준비로 바쁜 엘 고어에게 온 연락을 받았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재선준비는 잘 돼가나요?”
- 정말 너무 바빠서 정신이 하나도 없네. 그런데 어쩐 일이신가? 내 전화를 다받고. 요즘은 연락이 안 된다고 보좌진들이 투덜거리던데.
“선거가 가까워지니까 조심하는 거죠. 그렇지 않아도 내가 엘 고어와 가깝다고 공화당에서 얼마나 온갖 중상모략을 했어요.”
- 하긴 자네하고 만났다간 또 공화당 놈들이 입에 거품을 물겠지.
엘고어가 대통령에 당선된이후로 공화당의 단골공격 목표가 규태와 엘고어 행정부의 유착이었다. 엘 고어 행정부의 고위직에 오른 사람들은 모두가 규태의 정치후원금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물론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은 엘 고어였다.
로비가 합법인 미국에서 선거자금만큼이나 평상시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입법을 위해 지출하는 로비자금의 규모가 더 컸다.
“합법적인 범위에서 정치자금을 후원했는데도 저렇게 난리니 말이에요.”
- 자기들을 빼놨으니 그 난리를 치는 거 아닌가. 자네가 불법이라도 저질렀으면 이미 난리가 났을걸. 그러기에 저놈들 입에도 정치자금 좀 물려주지 그랬나.
엘 고어 행정부의 고위인사들에게 정치자금을 지원해도 그걸 댓가로 받은게 없으니 꺼리낄게 없었다.
규태가 받은 대가라고는 다른 기업들과 비교해서 불공평한 대접을 받지 않는 것.
이걸 특혜라고 할 수가 없으니 입에 거품을 물고 엘 고어와의 관계를 비난할 뿐이었다.
“공화당 쪽은 크게 마음 가는 사람들이 없어서요. 오히려 때려주고 싶은 사람들만 점점 득시글거리니.”
- 하긴 점점 공화당에서 네오콘들이 점점 입지를 넓히고 있으니 자네 마음에 들지도 않겠군.
역사와는 다르게 공화당이 정권을 잡지 못하면서 네오콘들의 기세가 거칠어졌다.
공화당의 주류가 되어가는 네오콘들은 대통령 선거가 가까워지자 극우에 가까운 강경한 발언들을 연일 쏟아내는 중이었다.
딕 체니와 럼스펠드가 사라진 후 네오콘의 새로운 대표주자로 꼽히는 마이크 펜스 하원의원은 규태를 흑막의 대통령이라고 세차게 비난했다.
“그런 정신없는 사람들 하고 싸우려면 고어도 힘들겠어요.”
- 그러니까 자네가 이번에도 힘을 써줘야한다니까. 내가 은혜를 잊는 사람은 아니지 않나.
엘 고어의 말처럼 지난 4년 동안 민주당 엘 고어정부에서 규태는 많은 이득을 보았다.
작은 군수업체들도 몇 개 인수했고 경영부실로 영국으로 넘어간 원자력발전을 주업으로 하는 웨스팅하우스의 경영권도 되찾아왔다.
“알았어요. 생각해볼게요. 그런데 정말 어쩐 일이예요?”
- 이번에 알렌이 은퇴할거네.
“누구요? 그린스펀의장이요?”
- 그래 그래서 후임을 뽑아야 하는데 난 리처드를 염두에 두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