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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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의 미국방문
겨울날씨가 화창하니 신바람이 난 여동생 미려가 앞장을 서고 뒤에는 부모님과 할머니까지 막내 태진의 가이드를 받아 시내투어를 떠나고 규태는 서재에 앉아서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이번에 인수한 회사 중에 리만과 디즈니,CBS방송국은 큰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유독 MGM의 경영에 문제가 산적해서 서류를 들여다보는 규태의 머리가 아팠다.
누적적자가 4억 달러를 넘고 현금유동성도 달랑거렸다.
해결방법은 투자자금을 동원해서 증자를 하거나 회사채를 발행해서 숨통을 틔워주는 것이다.
규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많은 필름 라이브러리까지 가지고 있는 회사가 이런 식으로 몰락해 가는 건 내부적인 영화제작 시스템에 문제가 많다는 소리였다.
기존 사장인 카를로 레알리로 계속 가는 건 모험이었다.
잠시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던 규태는 전화기를 붙잡았다.
“루드, 잘 지네죠. 바쁘겠어요?”
연말이 되면서 중동 사우디 국경과 호르무즈 해협에 집결한 미군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누가 봐도 전쟁 시작의 징후였다.
애틀랜타의 CNN본사에 틀어박혀서 모든 전쟁현장을 통괄하는 루드의 움직임이 바쁠 수밖에 없었다.
- 말도 마, 아주 힘들어 죽겠어. 시작하려면 빨리 하지, 답답하게 질질 끌기만 하고.”
그답지 않게 앓는 소리를 했다. 야생 황소가 우리에 갇혀있으니 답답해 미칠 것 같은 모양이었다.
“새해가 되면 시작할겁니다. “
- 자네 좋은 정보라도 들은 게 있나?
“자세한 이야기는 하기 그렇지만 하여간 새해예요. 그렇게 알고 있어요.”
- 흠, 그렇단 말이지. 알았네. “
“그건 그렇고 MGM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가요? 이렇게 내버려 둘 건가요?”
- 그건 나도 아직은 모르겠어.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원하는 건 케이블에서 방송할 필름 라이브러리란 말이야. 영화제작은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몰라서 내버려 두고 있지.
“아무래도 사장을 교체해야겠어요. 카를로로 계속 가는 건 손해를 방치하는 것 같으니까 이번기회에 신임 사장을 임명하죠.
- 사장이 될 마땅한 사람이 있나?
“마이클 아이스너가 어떤가요?”
- 디즈니의 그 작자 말인가?
루드의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
“확실히 루드와는 결이 맞지 않는 사람이죠?”
마이클 아이스너는 빈사상태에 빠진 디즈니에 제작부분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인어공주, 알라딘, 미녀와 야수를 연이어 성공시키며 회생을 이끌었다.
이후에는 ABC를 인수하면서 디즈니의 주가를 취임할 때보다 100배 이상 상승시키며 전성기를 시작한 인물이지만 반대로 디즈니를 관료적인 폐쇄적인 기업으로 후퇴시켰다며 욕도 많이 먹는 인물이다.
그를 최고의 CEO로 만들었던 꼼꼼함과 체계성은 성공을 거듭하다보니 결국 콘텐츠 기업의 핵심 가치인 창의성과 역동성을 저하시켰다. 디즈니는 지나치게 중앙집권적이고 관료적인 조직으로 변모했고 카젠버그를 경영권 다툼으로 쫒아내 드림웍스의 탄생을 시켰고 스티브 잡스가 세운 픽사와의 관계도 오만함을 앞세워 파국으로 이끌었다.
한마디로 아이스너의 경영스타일은 꼼꼼하고 칼같은 계산을 앞세운다. 저돌적이고 즉흥적인 경영을 하는 루드와는 상극인 셈이었다.
- 너무 계산이 앞서는 것 같아서 말이야.
“대충 살펴보아도 MGM의 경영이 엉망이더군요. 조금은 냉정하게 조직을 정비할 필요가 있어요. 아이스너의 전직이 파라마운트의 사장이었더군요. 영화사도 잘 알 테고 침체되어있던 디즈니의 제작부분도 살렸잖아요. 그래서 영화제작부분은 그에게 맡기고 루드는 방송을 전담하는 게 어떨까 해서요.”
- 자네가 직접 나서보는 건 어떤가? 지난번에 보니 영화대본 픽스도 나쁘지 않아 보이고 리만 인수가 끝났으니 바쁜 일도 없지 않나? “
“내가 MGM의 경영에 참여하긴 힘들어요. 글래스 스티걸법 때문에요.”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결합을 제한하는 글래스 스티걸 법은 90년대 후반 개정되지만 아직은 꽤 강력하게 시행되고 있었다.
- 젠장, 그게 있었군. 하여간 나도 고민을 해보지, 얼핏 생각해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 방만한 조직을 정비하고 좋은 영화를 만들 수만 있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지.
규태가 경영에 참여하면 당연히 보유주식 매각 명령 같은 제제가 따라온다. 이사회에 참여하는 것 정도가 한계였다.
수차례의 전화통화를 통해 결국 규태는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 루드도 마땅히 MGM의 사장으로 선임할 많나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디즈니의 스튜디오와 본사는 로스앤젤레스의 북쪽 버뱅크에 위치해있다. 벨에어의 저택에서 차를 타고 가도 한 시간이 넘게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다.
아직 디즈니의 경영권은 프랭크 웰스가 가지고 있었다. 웰스의 후계자로 거론되는 인물이 아이스너와 제프리 카젠버그였다.
계속되는 만화영화의 흥행성공으로 디즈니의 스튜디오는 활기차게 돌아갔다. 이시기의 디즈니를 긴 잠에서 깨어난 공주라고 표현했다.
91년에 개봉할 예정인 미녀와 야수, 92년 개봉예정인 알라딘이 이곳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둘 다 전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하는 작품들이다.
“반갑습니다. KT입니다.”
“마이클 아이스너입니다.”
자신을 찾아온 규태를 아이스너는 경계의 눈으로 보았다. 아이스너의 키는 190이 넘는 거한이었다.
아이스너의 정식 직함은 디즈니 제작부분 사장이었다. 따라서 이곳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지는 만화영화제작을 총괄 하는 책임자였다.
사실 루드터너의 디즈니 인수는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대주주들의 지분을 차례로 인수해서 단숨에 대주주로 올라선 것이다.
만화영화의 제작이 성공하면서 회사의 재정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워낙 침체기간이 길었던 탓에 대주주들도 앞으로의 미래를 밝게 보지 못했던 것이다.
침체기동안 회사를 탈취하려는 시도도 수차례 일어났었다.
그렇게 임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회사를 인수한 규태가 갑작스럽게 면담을 요청했으니 아이스너도 긴장을 할 밖에.
인수 후에 하는 첫 번째 단계는 기존의 임원들을 자르고 측근을 그 자리에 임명하는 게 보통이었다.
“저 잘리는 겁니까?”
덩치 큰 거한이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말을 하는 모양이 우스워서 규태가 피식하고 웃었다.
미래에 디즈니를 미디어 제국으로 만든 아이스너의 이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누가 그럽니까? 내가 이렇게 찾아온 것은 제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휴우, 제안이라면 어떤 제안을 말하는 겁니까?”
“그동안 마이클의 실적을 살펴봤습니다만 아주 좋더군요. 인어공주는 아주 대박이었어요.”
“하하, 그 정도야. 이번년도에는 더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미녀와 야수, 그리고 내년에는 알라딘이 개봉할 예정입니다. 두 작품도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자랑하기 좋아하는 양키답게 자랑할 시간에는 어김없이 자기 자랑이었다.
“좋아요. 이젠 본론으로 들어가죠. MGM을 아시지요. 이번에 디즈니와 함께 인수한 영화사가 경영이 엉망이에요. 한번 맡아서 해볼 생각 없습니까?”
경영실적 이야기에 환해졌던 마이클 아이즈너의 얼굴이 얼음 빔이라도 맞은 것처럼 그대로 굳었다.
“........ 그게 말입니다. 저는 아직 디즈니를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그로서는 당연한 거절이었다. 파라마운트의 사장자리를 버리고 디즈니의 제작부분 사장으로 들어온 것은 침체된 디즈니를 살리고 경영권을 틀어쥐겠다는 야망 때문이었다.
이제 죽어가던 디즈니가 만화영화들의 거듭된 흥행성공으로 살아나고 있는데다 나이가 많은 디즈니의 회장 프랭크 웰스의 은퇴도 멀지 않았다.
더군다나 망해가는 MGM의 막장 경영은 아이스너도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이건 누가보아도 명백히 좌천이었다.
이미 아이스너의 생각을 전부 짐작하고 있는 규태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미끼를 던졌다.
“마이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약속하지요. 마이클이 MGM을 살린다면 디즈니의 회장 자리는 물론이고 디즈니, MGM, CBS의 드라마 제작부분까지 총괄하는 자리를 맡기겠습니다.”
한마디로 죽어가는 MGM을 회생시키면 거대 미디어 제국의 콘텐츠 제작부분을 총괄하는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가 노리는 디즈니 회장자리보다 한층 큰 자리였다.
이건 물지 않기엔 너무 먹음직스런 미끼였다.
“........ 생각보다 큰 자리가 걸렸네요.”
“디즈니를 살렸으니 이번엔 MGM을 살려보시죠. 경영능력을 보여준다면 막대한 보수를 지급하는 것은 물론이고 스톡옵션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까지 이야기를 했는데도 넘어오지 않으면 포기할 수밖에.
“저....... 제가 그 자리를 받지 않으면 잘리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나는 마이클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제자리를 지킬 겁니다. 다만 마이클이 원하는 자리까지 올라가려면 시간이 많이 지나야겠지요. 충분한 시간을 드릴 테니 마음의 결정이 내려지면 일주일 안에 연락을 해주세요.”
고민하는 마이클을 두고 자리를 벗어난 규태는 차분하게 연락을 기다렸다.
당연히 아이스너는 규태가 던진 너무나 달콤한 미끼를 거절하지 못하고 MGM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오래된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한 MGM을 탈탈 털어 나갔다.
전 세계가 미군의 공격으로 시작된 이라크전의 생생한 생중계에 열광할 때 MGM의 직원들은 절반이 짐을 싸 회사를 나가거나 보직을 옮겼다.
과연 철과 얼음의 경영자다운 조치였다.
회사조직을 슬림하게 바꾼 아이스너가 규태를 찾아왔다.
“전부 5억 달러가 필요하단 말이로군요.”
“예, 누적된 적자를 털어내고 제작하고 있는 작품들에 집중한 자금이 필요합니다.”
제작하고 있는 작품은 둘, 하나는 보디가드이고 다른 하나는 원초적 본능이었다. 조직개편으로 주춤하던 영화제작속도가 아이스너의 매서운 채찍질로 제자리를 잡았다.
감독을 선임하고 보디가드의 제작준비를 하던 케빈 코스트너도 새로운 영화제작진의 지원에 만족한 눈치였다.
“그 정도로 되겠어요. 아예 10억 달러를 지원할 테니 원하는 대로 해보세요.”
“옙.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원하는 금액의 두 배를 지원하겠다는 소리에 아이스너의 얼굴이 환해졌다. 대작이라고 해봐야 5천만 달러를 넘지 않는 시절이다.
블록버스터 열편의 제작비를 확보했으니 아이스너의 마음이 넉넉해졌다.
“그리고 영화 제작부문 강화를 위해 트리스타 픽처스를 매입하면 어떻겠습니까?”
“그건 소니가 인수하지 않았나요?”
89년 소니가 콜롬비아 영화사를 인수하면서 함께 넘어간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아이스너가 말하는 내용은 조금 달랐다.
“트리스타는 소니가 인수한 콜롬비아와 다르게 지분을 다른 곳에서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듣기로는 93년에 개봉할 예정인 필라델피아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제작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작부문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이 영화사를 인수해야 합니다.”
이 두 영화의 이름을 듣자마자 규태가 반색을 했다. 92년에 개봉 예정인 보디가드와 원초적 본능은 가지고 왔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톰 행크스가 주연으로 활약하는 필라델피아와 시애틀의 잠못이루는 밤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와야 했다. 적어도 전 세계적으로 2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거두는 영화들이다.
트라이스타의 인수를 승인하고 자금 지원까지 마치고 나자 규태도 한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