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실마리 (4)
유성은 오로지 앞만을 보고 걸었다.
황폐한 대지와, 뼈가 드러난 건물들이 그를 반겨주었다.
유성은 그가 지나쳐온 도시에 있을 생존자의 무리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아마도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하겠지. 어떤 식으로든 수 년 이내에 모두 죽게 될 거야.’
지구의 종말은 이미 확정되어진 지가 오래였다. 이미 자력으로 회복할만한 수준은 진작에 넘어섰다.
행성 지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부의 핵을 점거한 드라칸들로 인하여 죽어가고 있었고, 어떤 식으로든 그것은 대지 전체에 영향력을 미쳤다.
일부의 지역들은 끓어오르는 마그마가 지상에까지 흘러넘쳤고, 바다의 일부는 시커먼 독기에 잠겼다.
지금은 이미 새로운 자원을 생산해내고 확보한다는 게 불가능한 시점에까지 와 있었다.
아마 남은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 또한.
도시의 자원을 모두 소모하는 그 날까지가 기한일 터였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유성은 행동했다.
대단하고 큰 이유는 없었다. 단지, 저들이 하루라도 더 오래도록 살아남기를 기원하는 탓이었다.
‘부질없는 짓임을 알고 있다고 해서, 눈앞의 상황에 행동하지 않을 인간은 없다. 나도 마찬가지야.’
그는 묵묵히 무거운 걸음을 내디뎠다.
발걸음이 유난히도 무거웠다.
간신히 회복했었던 한 줌의 마력을, 변종 괴수를 처치하는 데에 소모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슬슬 해가 저물고 있다.
번-쩍.
저 아득한 우주의 저편.
별무리가 떠오른 시커먼 밤하늘 너머에, 돌연 몇몇의 크고 작은 빛이 번쩍이는 게 보였다.
‘오늘은 유난히 여러 빛들이 보이는군. 하늘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전투라도 일어나고 있는 건가.’
어쩌면 지금 저 너머의 공간에서 싸우고 있는 것은 유성, 혹은 그가 알고 있는 어떤 인물일지도 몰랐다.
각성자들은 몇 안 되었고, 그들 중의 대다수는 서로 어떤 식으로든 함께 전장에 투입된 적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곳에서 유성의 최종적인 목표는 바로 저들에게 닿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이 세상 어디에도 등록된 신병을 가지지도 않았고, 또한 저들에게 닿을 방법조차도 없었다.
지금 유성은 해안가를 따라서 남하하고 있었다.
그가 며칠 전까지 머물렀던 서울에는 아무것도 남질 않았다.
그 흔한 군사 기지들마저 완벽하게 초토화가 된 지 오래였다.
그 시점에, 유성 그가 택할 수 있었던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북쪽, 중국이나 유럽 쪽으로 올라가 어딘가에 있을 다른 군사 기지를 찾던가.
그게 아니라면 남쪽의 가까이에 있을 기지를 찾던가.
만약 이대로 남하했을 때, 어떠한 수확조차도 없다라고 한다면 그는 정말로 긴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그때에는 북쪽으로 올라갈 여분의 기력마저도 바닥날지도 모른다.’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세상은 선택과 도박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그는 동아시아 기지들이 곳곳에 산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들의 위치는 몰랐다.
하물며 그들의 연합군과 기지들마저 대파당했을 지금, 그 잔류한 전력을 찾기란 더더욱 어려운 시점이었다.
유성은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남쪽에 있을 마지막 잔류 전력을 찾아내야 한다. 그게 유일한 방도야.’
지금 그는 오로지 몸 안의 기력만으로 버텨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마저도 바닥이 난다면, 사실상 배터리의 방전과도 마찬가지 상태에 돌입할 터였다.
수일 전, 그가 함께 지냈던 생존자 무리들의 거처에서 어느 정도 회복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는 사실 턱도 없었다.
마나 사용자, 하물며 방대한 그릇과 능력을 지닌 준 각성자였던 유성은.
그만한 그릇을 채우기 위한 많은 양의 마나와 소비재를 필요로 했다.
그때였다.
콰아앙-!
저 멀리서부터, 난데없이 강렬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무슨?’
당황한 유성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
[■■■!!]
유성, 그가 선 절벽의 아래에.
족히 수백을 넘을 듯한 어마어마한 수의 드라칸 무리가 한 방향을 향해 무지막지한 기세로 내달리고 있었다.
‘저건?’
쾅! 콰앙!
다소 구시대적인 형상을 띄기는 했지만.
분명한 마력탄을 쏘며 다가오는 드라칸 무리를 상대하는 그것은 틀림없이 유성이 알던 어떤 원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기가스!’
지구상 초기 모델 중의 하나인 기가스 EF-01.
가장 먼저 개발된 초창기 전력 투입 기체이자, 적극적인 전력 양산을 위해 다소의 성능 대신 비교적 간단한 구조의 저렴한 부품과 핵 등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그것이 저 아래에서 몰려드는 드라칸 무리를 상대하고 있었다.
기체는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이미 해당 기체의 동료로 보이는 자들은 진작 침묵하는 지가 오래였다.
산산이 부서진 기체 조각들이 주변 대지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콰직! 쾅!
파일럿은 나름대로 상당한 실력을 지닌 듯했다.
코앞에까지 접근해오는 드라칸 무리를 향해 주저 없이 입자 광검을 틀어박거나, 혹은 거리를 벌리며 마력탄을 쏴 날렸다.
전투 방식에서 나름의 노련함이 엿보였다.
하지만 유성은 그 안에서 금세 그의 기량을 읽어냈다.
‘꽤나 괜찮은 경험을 한 듯한 파일럿으로 보이지만, 대단한 수준은 아니야. 이 시대 어디에나 흔하게 보이는 수준의 상대로군.’
콰앙-!
결국 몰려드는 드라칸들로 인해, 더 이상은 접전을 계속해 나갈 수 없다 여긴 것인지.
해당 기체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스러스터 날개가 푸른 불꽃을 내뿜었다.
잠시간 지상의 드라칸 무리를 내려다보던 기가스는, 이내 한 방향을 향해 쏘아지듯 날아가기 시작했다.
쿠아아아-!
금세 멀어지기 시작하는 그 기체를 바라보며.
유성은 눈을 빛냈다.
‘찾았다.’
저 구세대 기체인 EF-01 이 향하는 방향에.
아마도 유성,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이 대한민국 최후의 군사 기지가 있을 터였다.
* * *
고오오-.
아직 해가 떠오르기도 전인 칠흑 같은 새벽녘.
오로지 어둠뿐인 시간 속에, 그는 움직였다.
콰르륵.
유성은 모래뿐인 황폐한 절벽 아래를 내려가 드라칸들과의 전투 끝에 파괴된 기가스 EF-01의 파편을 뒤지기 시작했다.
드라칸들은 진작에 물러간 지가 오래였다.
녀석들이 완전히 물러나는 이 고요한 새벽녘이 될 때까지, 유성 그는 근방의 폐허에 몸을 숨긴 채로 오래도록 침묵했다.
바로 이때만을 노리고서.
‘찾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조종석 칸이 내장되어 있을 개폐문을 찾았다.
온 힘을 다해 닫혀있던 잠금장치를 열자,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예상대로 이미 파일럿들은 진작 죽은 뒤였다. 두 명이 있었으나, 산 사람은 없었다.
반쯤 우그러진 조종석 안에서 피를 사방에 흩뿌린 채로 죽어있었다.
하지만 유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조종석 안의 모니터 화면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치직. 치지직.
화면은 켜지지조차 않았다.
‘시스템은…… 대부분 망가졌나. 작동되는 게 없군.’
하긴 그만한 수의 드라칸들이 뒤덮은 채로, 사지를 갈가리 찢어버렸을 테니.
어떤 식으로든 내부의 충격 또한 보통 수준이 아니었을 것이다.
제아무리 기가스가 드라칸들을 상정하고 만든 전쟁병기라 하더라도 그만한 숫자가 몰려들어 산산이 해체한다면 그 충격은 고스란히 내부를 망가트릴 수밖에 없다.
심지어 진작에 기가스의 중심체를 이루고 있던 마력핵이나 여타 에너지원 등은 드라칸 녀석들이 뜯어간 뒤였기에.
유성이 건져낼 만한 것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
단, 한 가지.
파일럿의 조종석에 비상사태를 대비한 듯이 하나씩 넣어져 있던 마나 포션을 제외한다면.
“…….”
유성은 말없이 자신의 손에 쥐어진 마나 포션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이곳에서 얻을 수 있었던 유일한 노획품이다.
‘두 개의 마나 포션이 전부인가.’
효율도 아득한 400년 후의 그것과는 상당 부분 떨어지는 하급품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 목숨을 구해줄 여벌의 보급 정도는 되겠지.’
기대했던 일부의 총과 같은 무기 등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당장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만에 하나의 상황에서, 어떻게든 그를 살려줄 목숨줄 정도의 역할은 해줄 터였으니까.
유성은 그것들을 소중히 품 안 깊숙이 집어넣었다.
다시, 이동할 때였다.
* * *
“도망쳐!”
한 무리의 군인들이 드라칸 놈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총과 방호구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그마저도 별다른 믿음을 주지 못한다는 듯이 내달릴 뿐이었다.
[■■■■!]
유성은 그들의 뒤편에서부터 나타난 일단의 드라칸 놈들을 돌아보았다.
녀석들은 결코 하나나 둘이 아니었다.
‘둘? 아니, 셋이로군. 양산형 등급의 드라칸 놈들이다.’
마치 비대한 애벌레의 형상을 한 그것들은, 입안 가득 서려 있는 무수한 이빨들을 드러내며 빠른 속도로 군인들을 뒤쫓고 있었다.
녀석들은 흔히 ‘웜’ 의 가장 하급한 개체군으로 분류되는 저급종 중의 하나였다.
양산형 개체들이었다.
양산형 개체는 분명 드라칸 무리 중에서는 전투력도 뒤떨어지는 한낱 자원 채취를 목적으로 한 일꾼 등급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같은 드라칸 놈들을 비교 대상으로 하였을 때의 일이었다.
결국 인간에게는, 다 같은 드라칸에 불과했다.
드라칸 놈들보다 훨씬 연약한 피륙을 가진 그들은, 그 상대가 무엇이든 강력한 위협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했다.
쾅!
그때 가장 뒤쳐져 있던 군인들 중의 하나가 드라칸 놈에게 그대로 먹혔다.
콰득, 하고 한입에 씹어 먹히는 동료의 모습에, 앞서 도망치던 군인들이 분개하며 소리쳤다.
“한신!”
“이 제기랄 괴물 새끼가! 죽어!”
타다당!
그들은 이를 악물고 총을 쐈다. 소총의 불꽃과 굉음이 먹먹한 도심을 일깨웠다.
하지만 별다른 효용성은 없었다.
녀석들 드라칸은 태생적으로 터무니없는 수준의 갑각질을 보유하고 태어났다.
저 막대한 수준의 갑각을 관통할 만한 수준의 물리 공격이 아니라면 제대로 된 흠집조차 내지 못한다.
하물며 가장 아래 등급인 양산체 드라칸조차 이러한 마당에, 그 위의 녀석들이라면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것이 바로 필연적으로 마력탄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으아아아!!”
고함과 함께 총격을 가하는 군인들.
유성은 그들을 가만히 응시하다, 품에서 두 개의 마나 포션을 꺼내 들었다.
그는 잠시간 오래된 옛 기억을 되살렸다.
이 마나 포션들의 효용성이, 육체에 얼마만큼의 부하와 회복력을 동시에 적용시켜주는 지를 가늠했다.
잠깐의 셈을 더하는 끝에, 그는 결정을 내렸다.
‘가능해. 충분히 가능하다.’
다른 이라면 결코 불가능한 대답이었겠지만, 유성 그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그는 본래부터 다른 능력자들 이상으로 훨씬 뒤떨어지는 마력만을 가지고서 적들을 격멸한 존재였다.
최소한의 마력만을 가지고, 최대의 효용성을 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망설임없이 마나 포션의 뚜껑을 따고, 그것을 들이켰다.
울렁이는 목울대 너머로 푸른 기운을 머금은 그것들이 넘어갔다.
고오오-!
이내, 그것을 모두 마신 유성의 눈이 새파란 빛을 뿜어내며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