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유리 엘 바이어스(4)
“하아.”
유성은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옆에 나란히 선 그녀, 유리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가능하면 한숨을 쉬는 건 남이 보지 않을 때 하는 게 좋은 거다. 어른을 보면 예의를 차려야 하는 법이지.”
“그 어른 때문에 한숨을 쉬는 겁니다.”
“오호. 그래?”
유성은 유리를 마주하고서도 여전한 태도를 보이며 대꾸했다. 그의 안색에는 귀찮음이 여간 베여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단지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의 눈에 서린 것은 언짢은 감정이었으니까. 그녀와 마주하기를 처음부터 꺼렸음은 분명해 보였다.
실제로 그는 유리가 전함에 기거한 시각 이래로 줄곧 숙소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으니까.
결국 그 의미는 간단했다.
유성은 그녀와 마주할 순간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는 소리.
덜컹!
자판기에서부터 콜라를 하나 뽑아 든 그녀는 이내 말문을 열었다.
“옛부터 난 놈은 난 놈이라는 말이 있다, 유성. 그리고 어릴 때부터 네가 라피스와 함께 다니는 모습은 간혹 보고는 했지.”
“…….”
“네가 심상찮은 녀석일 줄은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치익.
콜라의 캔 뚜껑이 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목울대를 통해 음료를 마시는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유성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늘한 듯이 가라앉은 눈을 한 채로 조용히 침묵할 뿐이다.
이내 금세 음료를 모두 마신 유리가 씩 웃고는 물어왔다.
“오늘따라 조용하구나. 따로 할 말은 없는 거냐?”
“상황이 좀 더 나빠졌다는 것 정도는 확실히 알 것 같군요.”
유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 이내, 옆에 나란히 선 유리를 힐끗 보고는 물었다.
“라피스 녀석은 만나보고 오시는 길입니까?”
“아니.”
“아니라고요?”
그 말이 이상해서 힐끗 그녀를 돌아보는데 유리는 안 될 게 뭐가 있냐는 듯이 오히려 태연히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이 나이를 먹은 할머니가 기껏 손녀딸을 오래간만에 마주해봐야 오히려 그 아이 입장에서는 어려워하기밖에 더 하겠냐마는. 게다가 이미 몸 상태가 건강하다는 것도 보았고 말이지.”
“…그 말 라피스가 들었다가는 꽤나 서운해했을 겁니다.”
“그렇겠지.”
유리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순한 듯했던 눈매가 날카롭게 돌변했다. 그리고는 유성을 노려보듯이 입을 열었다.
“이제껏 네가 어째서 숙소에 처박힌 채로 출입을 삼갔는지는 대충 알고 있다, 유성.”
“…….”
그녀의 말에 유성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할 수가 없다고 해야 함이 정확할 터였다.
애당초 유리 엘 바이어스 후작이라는 인물은.
제아무리 이 전함 메타트론 내에서는 거칠 것 없이 돌아다니는 유성이라고 할지라도 멀쩡히 두 눈을 뜨고서 마주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녀의 명성은 온 우주에 널리 퍼져 있을 정도로 막대했다.
중앙의 황족과도 밀접한 연계성을 지닌 그녀의 가치에 대해서 구태여 따진다면, 힘과 권한이 막대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침묵 끝에, 그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개인적으로는 굳이 이곳에까지 오시길 바라진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귀찮은 상황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니까.”
“하. 그러냐?”
후욱.
그 말과 동시에, 기류가 변했다.
주변의 대기가 마치 먹먹한 수중 아래라도 되는 듯이 유성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 변화의 급류 속에서, 유리 엘 바이어스의 두 눈은 찬란한 금빛을 드러낸 채로 유성을 마주 보았다.
“너. 내가 알고 있던 그 유성이라는 녀석이 맞기는 한 거냐?”
“…….”
그 시선을 마주한 유성은 이번만큼은 그리 손쉽게 빠져나갈 수 없음을 알았다.
그녀의 손이, 허리춤에 걸린 검에 걸려 있었다. 마치 당장에라도 뽑을 듯이.
* * *
인류가 우주로의 진출을 시작한 것은, 이미 400년도 더 전의 한참이나 더 오래된 과거의 이야기였다.
아마도, 지금의 인류에게는 아득히도 멀게만 느껴질, 그런 시절.
유성이 아닌 이시혁으로서 살아왔었던 지구 시절에조차도 이미 인류에게는 다른 태양계로 이주를 할 만큼의 기술력이라는 게 존재했다.
그들은 온 태양계를 자신들의 영역권으로 만들었으며, 차근차근 그 행성들에 영역을 확대해나가고 있었다.
아마도 조금만 더 시간과 자원이 있었다면, 그때 당시에도 지금 시대와 같은 대규모 거주형의 콜로니가 생겨났을 터였다.
우주와 심해, 그리고 하늘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기가스와 우주 함선들을 찍어내듯이 양산할 정도로 기술이 발달한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단순한 과장이 아니었다.
실제로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 그러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러하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그러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러려던 그 순간, 다른 태양계에서부터 건너온 미지의 존재가 그들을 덮쳤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출을 하기도 전에 말이다.
그것이 바로 인류의 대적. 드라칸이라는 존재였다.
녀석들은 한없이 포악하였으며, 급속도로 발전해나가는 인류의 기술력으로도 감히 대적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협적인 존재들이었다.
인류가 놈들을 마주했던 이래, 녀석들에게서부터 확인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마력의 속성은 크게 세 가지였다.
시간. 공간. 그리고 개념지배.
죽었다 확신했을 정도로 처참한 꼴로 숨이 멎어가던 것들이, 돌연 난데없이 멀쩡하게 되살아나서 전장을 무너뜨리고, 파일럿들을 도살했다.
공간을 무너뜨리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차원을 겹치고 겹쳐 지구권 태양계의 온 세상을 자신들의 마음대로 주물렀다.
일부의 환경을, 자신들이 정한 법칙대로 개변시키기도 했다.
상상해보라.
눈앞에서 하나의 드라칸이 난데없이 여럿으로 분열해나가고,
아무런 전조조차도 없이 전함이 깔끔하게 절단되어버리고,
행성의 지표면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영역이 한순간에 치솟아 오르는 불의 영역으로 뒤바뀌는 그 광경을.
그 어디에도 상식이라는 영역이 있을 리가 없다.
이제껏 인류가 알고 있던 법칙을 눈앞에서 으스러뜨려 버리는, 그 말도 안 되는 변질과 변이의 연속성에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서도 그들이 위태롭게나마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이 변화 속에 적응하고서 태어난 신인류라는 것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과, 개념지배의 능력을 날 때부터 손에 쥐고서 태어난 자들.
그것이 바로 그들 마나 능력자의 유래였다.
“…그래서.”
이제껏 이어지던 유성의 이야기를 듣던 유리는. 그 주름 하나 없이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이제껏 유성이 말했던 내용들을 종합해서 간추렸다.
“네가 400년도 더 전의 인간이라는 건가? 그 예의 자료로만 전해지던 대전쟁 시절의?”
“줄이자면, 그런 셈입니다. 그리고 그때의 제 이름은 이시혁이었죠. 유성이 아니라.”
스윽.
그렇게 대답하며, 유성은 가만히 검지만을 내밀었다. 유리의 시선 또한 말없이 그 검지로 향했다.
처음에는 과연 뭘 하나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에 불과했다.
이내 스스로의 눈으로 보고서도 결코 믿기가 어려운 현상이 연속적으로 줄을 잇듯이 일어났다.
그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그 검지 손가락은 마치 거울로 비추어지기라도 하는 듯이 숫자가 하나에서 네 개로 늘어났으며,
또는 공간을 건너뛰어 족히 수십 센티 너머의 장소에서부터 난데없이 등장하기도 했다.
혹은 뼈와 살, 그리고 피부 너머의 근육 조직들이 모두 분리되고 해체되어 허공을 둥둥 떠다니기도 했다.
자신의 손가락에 행해지는 그 규칙성이라곤 하나 없는 변화를 가만히 응시하며.
유성은 말을 이었다.
“그 시절의 인간이라면 대부분 이 정도쯤은 가볍게 해내고는 하던 편이었습니다. 이건 마나 능력을 다루기 위해 그 시절에 있었던 일종의 연습이었으니까요. 물론, 그중에서도 저는 다소 특별한 축에 속하기는 했었습니다만.”
잠시간 허공을 둥둥 떠다니던 손가락의 말도 안 되는 변화를 바라보고 있던 유리가 돌연 대꾸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처구니가 없다. 당혹스럽다.
그것은 구태여 그 현실을 마주하는 유리 엘 바이어스 그녀만이 아니라, 유성 본인마저도 그러했다.
누가 들어도 가히 믿어질 리가 없는 헛소리나 다름없었다. 무려 4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환생을 하였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다.
그게 바로 개그가 아니고 무엇일까.
유성 본인조차도 때때로 이 모든 현실이 사실은 거짓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사실 그 본인은 여전히 400년 전의 과거, 대전쟁의 시대에 속해 있고 그의 육신은 그 질척거리는 녹색의 배양액 안에 가둬져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서 말이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이것은, 틀림없는 현실이자 사실이다. 대체 무슨 영문과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분명 400년의 막대한 시간을 건너뛰어 이 시대에 환생했다.
‘진실로 하는 소리인가?’
반면, 그러한 사실이 유리에게조차 고스란히 전해질 리는 당연히 없었다.
생각해본다면 예전부터 유성은 다소 묘한 기색이 있기는 했다. 코흘리개였던, 불과 열 살조차도 되지 않아 천방지축이던 라피스와 함께 뛰어놀던 그 시절부터 말이다.
그때를 회상하던 유리의 눈매가 다소 가늘어졌다.
‘확실히. 유성 이 녀석은 조금 묘한 구석이 있기는 했었지. 꼬맹이였던 시절부터 말이야.’
그때에는 단순히 코흘리개 꼬마치곤 조금 어른스러웠나 싶었을 뿐인데, 지금 와서 이 이야기를 들어보니 확실히 이상했던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유독 무심하게 가라앉은 특유의 눈매하며, 넘어져 무릎이 까진 라피스를 태연히 업고서 돌아와 아무도 가르쳐준 적이 없을 치료를 해주는 것과 같이 말이다.
무엇보다도 재미 삼아 유성과 라피스가 둘이서 대련을 하던 모습을 보곤 한다면 유성의 검격은 때로 유리 본인조차도 놀랄 정도로 고매한 경지를 속속 드러내기도 해서 그녀를 놀래켰던 기억이 있고는 했다.
‘당황스럽기는 하군.’
입맛을 다시며, 유리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는 솔직히 말해서 다소 당황한 편이었다. 다소 유성을 추궁하기는 했었지만 설마하니 이런 난데없는 소리까지 들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제아무리 오래도록 산 각성자라고 할지라도 이런 소리까지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 네 말이 사실이라면, 대충 몇 살이나 되는 거지? 대충 백 살? 이백 살?”
“……?”
하지만 그 말에, 오히려 유성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의문을 드러냈다.
그 선한 얼굴을 마주하며, 유리가 되물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지금까지 제 말 제대로 이해하신 게 맞으십니까, 유리 님?”
“그래. 대충은 말이야. 각성자들도 한 번의 전투에서 여럿 죽어 나가는 게 그때 그 시절의 전장이었다면서?”
“그런데 제 나이가 그렇게 오래되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저도 결국에는 죽었다고 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