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224화 (224/235)

224화

피스쳅스는 한 눈에 벨라토르가 또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게다가 벨라토르의 몸속, 특히 그의 머리 안에서 느껴지는 억지스러운 마나의 기운 때문에 느낌이 좋지 않았다.

진우 역시 눈앞에 있는 팔 네 개의 외계인으로부터 뭔가 꺼림칙하고 부자연스러운 마나의 기운을 느꼈다. 그는 매덤 행성에서 투르가의 노예가 되었던 이들을 본 적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마나의 기운에서 특별한 이상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벨라토르를 보자마자 그의 머릿속에 비정상적인 마나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자네는 누군가?”

피스쳅스는 친절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냉랭한 목소리로 벨라토스를 향해 물었다. 벨라토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두 사람을 보더니 움찔했다. 그러나 곧 진우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너는 지구인 강진우?”

진우는 난생 처음 보는 외계인이 자신을 알아보자 의아했다. 벨라토르는 그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어떤 외계인과도 다른 외모를 하고 있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낯선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상대는 조르크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어떻게 나를 알지? 그리고 조르크 어를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군. 어느 행성에서 오신 분이요?”

벨라토르에게 묻는 진우의 음성도 반가운 친구에게 건네는 인사말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에 대한 벨라토르의 대답 역시 곱지 않았다.

“벨푸님께서 나를 보내셨다. 너에게 전할 말이 있다고 하셨다.”

벨푸라는 말에 진우의 얼굴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벨푸? 니코레임의 벨푸 말인가? 너는 니코레임 인이 아닌데 어떻게 벨푸를 아는 거지? 그의 노예 전사인가?”

벨라토르는 진우의 질문을 무시하고 품에서 패드 하나를 꺼냈다. 그는 패드를 조작해서 편지 한 장을 띄우더니 그것을 진우에게 건넸다.

“벨푸님의 전언이다. 읽어봐라.”

진우는 상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일단 그가 건네는 패드를 받아들었다. 거기에는 니코레임어로 작성된 편지가 있었다.

‘...... 중급 전사를 지구로 보냈다. 너의 지인들 가운데 몇 명을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 것이다.

아스탄이 우리에게 너와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주었지. 조승운, 최현, 박정태...... 이 편지를 받는 즉시 블리젠으로 와라. 그렇지 않으면 나와 노르호지가 직접 지구를 방문할 것이다. 블리젠의 좌표는 ......’

진우의 손에 들린 패드가 퍽 하고 부서졌다. 그의 몸에서 순간적으로 엄청난 살기가 일어나 벨라토르를 덮쳤다. 그의 손이 위로 들리며 허공에 수십 개의 마나창이 떠올랐다. 그때 피스쳅스가 얼른 진우의 손을 잡았다.

“잠시 기다리게.”

진우는 놈을 당장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은 기분이었지만 피스쳅스의 만류에 손을 내렸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벨라토르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피스쳅스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더니 앞으로 나섰다.

“자네는 플레비크 사람들과 무슨 관계인가?”

플레비크라면 피스쳅스에게도 낯선 이름이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에 준엄함이 서려 있었다.

벨라토르는 진우가 일으킨 살기에 순간적으로 온몸이 오그라드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깟 지구인이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냐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는데, 정작 진우와 직접 마주치자 자신은 절대로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 피스쳅스의 질문에 대답했다.

“플레비크의 위대한 전사이자 니코레임과 블리젠의 지배자이신 벨푸님이 나의 주인님이시다.”

“자네는 그럼 블리젠 사람인가?”

“그렇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조르크 어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지?”

벨라토르는 상대의 질문에 굳이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피스쳅스의 눈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몸 안의 마나가 거칠게 꿈틀거리더니 자신의 의지에서 벗어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전사들은 자신의 노예에게 지식의 일부를 전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상급 전사들은 니코레임어와 조르크어를 잘 알고 있지. 상급 전사들에게 전승되는 지식이니까.”

“자신들에게 치욕을 안겨준 행성에 대해 미리 준비한다는 뜻이로군.”

진우가 벨라토르를 차갑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냉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지구의 언어도 알아두어야겠군. 내가 곧 너희들에게 지금까지 경험했던 어떤 치욕보다 더 심한 대가를 치르게 해 줄 테니까. 그런데 어떡한다, 지구에는 언어의 종류가 무척 많으니 고생깨나 해야겠구나.”

진우는 말을 하는 동안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당장이라도 놈을 잡아 주리를 틀고 싶었지만 지금은 참아야 할 때였다. 어쨌든 자신도 놈을 통해 블리젠에 있다는 벨푸에게 말을 전해야 했다.

블리젠은 본래 투르가가 지배하던 행성이었다. 그가 죽은 지 벌써 일 년이 지났으니 지금쯤은 그곳에 있던 투르가의 노예들이 모두 종속의 낙인에서 풀려났을 것이다.

벨라토르의 말을 들어보니 주인이 사라진 블리젠을 니코레임의 지배자인 벨푸와 노르호지가 차지한 것 같았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노르호지와 벨푸 모두 지금은 니코레임을 떠나 블리젠에 머물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렇다는 얘기는 자네도 노예 전사라는 얘기로군.”

피스쳅스는 연민이 깃든 표정으로 벨라토르를 쳐다보았다.

“나는 자네를 해치고 싶지 않네. 그럴 만한 가치도, 그럴 이유도 없으니까.”

그는 벨라토르를 향해 냉정하게 말을 뱉더니 진우를 쳐다보았다.

“자네도 지금 이곳에서는 저 자를 해치지 말았으면 좋겠네. 이곳은 은퇴한 노인들이 여생을 보내는 곳이야. 큰 소란이 일거나 피가 튀는 꼴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군.”

진우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을 확인한 피스쳅스의 눈길이 다시 벨라토르로 향했다.

“자네의 임무는 아마 편지를 전하는 것이었을 테니, 이제 일이 다 끝난 셈이군. 그렇다며 여기에 온 방법을 이용하여 그대로 다시 돌아가게나. 편지는 본인에게 잘 전달되었다고 자네 주인에게 전하면 될 것이야. 경고하건대 이곳을 떠날 때까지 절대로 자네 몸속에 있는 마나를 함부로 일으키지 말게. 우린 자네를 해칠 생각이 없지만, 자칫하면 자네의 마나가 주인을 배반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벨라토르는 감히 피스쳅스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서둘러 간이 포털 장치를 꺼내 설치했다. 그가 포털장치를 설정하자 잠시 후 블리젠으로 이동하기 위한 검은 포털 구멍이 생성되었다. 벨라토르는 급히 포털로 뛰어들려고 했다.

“잠깐.”

그때 진우가 그를 불러세웠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벨라토르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목을 콱 움켜쥐었다.

벨라토르는 그의 공격을 피하려고 했지만 언제 뻗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빠르게 다가온 진우의 손에 의해 목이 졸린 채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리고 말았다. 진우는 자신의 손을 두 팔로 움켜잡고 버둥거리는 벨라토르를 향해 살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가서 전해라. 조만간에 내가 직접 블리젠으로 찾아갈 것이다.

만약 그 사이를 못 참고 직접 두 개자식이 나를 찾아오고 싶다면 그것도 환영하마. 내가 마나가 말라 비틀어져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 경험하게 해 줄 테니까. 그러니 내 지인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느니 하는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블리젠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해.”

“감히...”

진우가 욕까지 하며 자신의 주인을 욕하자 종속의 낙인이 찍힌 벨라토르는 목이 잡혀있음에도 불구하고 반항하기 위해 버둥거렸다. 그러자 그의 몸속에 있던 마나가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진우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으으아악~”

진우의 마나에 벨라토르의 마나가 반응하자 그의 머릿속에 있던 종속의 낙인이 순식간에 지워져버렸다. 그와 함께 벨라토르의 몸속에 있던 마나가 마구잡이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엄청난 고통과 함께 중급 전사인 그로 하여금 체면도 잊을 만큼 거친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다.

주인이 직접 종속의 낙인을 풀어주거나, 주인의 사망 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낙인이 해제되는 경우는 노예들도 별 고통 없이 종속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타인에 의해 머릿속의 낙인이 강제로 지워질 경우, 당한 자는 몸속의 마나가 뒤틀리면서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다 죽게 되어 있었다. 진우는 피스쳅스의 권고에 따라 이곳에서 피를 볼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앞의 블리센 전사를 곱게 보내주고 싶지도 않았다.

“가라. 가서 네 몸으로 나에게 잘못 걸리면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 직접 네 주인들에게 보여줘라. 나한테 경고를 하겠다고 했지? 이게 내 경고다.”

그는 목을 움켜쥐고 있던 벨라토르의 몸을 열려 있는 포털 구멍을 향해 휙 집어던졌다. 그의 몸이 포털 구멍 속으로 사라지자 잠시 후 간이포털 장치가 멈추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괜찮은가?”

여전히 붉은 기운이 가라앉지 않은 채 씩씩대고 있는 진우를 향해 피스쳅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진우는 그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에게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이 녀석들이 제 고향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을 해치겠다고 협박을 하는 바람에 제가 조금 흥분했습니다. 공연히 보기 좋지 않은 꼴을 보여드렸습니다.”

피스쳅스는 진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과 친구가 위협을 당하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지. 그나저나 자네는 그럼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가?”

“네. 지금 당장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차 한 잔의 약속은 나중으로 미뤄야할 것 같습니다.”

진우는 거듭 고개를 숙여 피스쳅스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자신의 간이 포털 장치를 이용해 지구로 귀환했다. 벨푸와 노르호지가 전한 말대로 지구에 있는 지인들이 이들에 의해 피해를 입었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  * * * *

“벨라토르가 바보가 되어 돌아왔다고?”

노르호지는 벨푸의 집무실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물었다. 최근 들어 그는 벨푸의 집무실을 자주 찾고 있었다.

“바보라기보다는 그냥 폐인이 되어 돌아왔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 온몸이 뒤틀리고 마나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졌네. 물론 종속의 낙인도 풀렸고.”

벨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스산한 살기로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역할을 다 했군. 진우 그 자가 블리젠으로 오겠다고 직접 전하라고 했다면서? 그럼 우리는 이제 여기서 그 자가 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군.”

노르호지는 벨푸가 내뿜는 살기에도 불구하고 태연히 말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벨푸의 중급 노예 전사 하나가 폐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다지 큰 일이 아니었다. 그런 노르호지의 담담한 표정을 힐끗 살펴본 벨푸가 엷은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되지. 하지만 그 자는 이곳에 오면 지옥을 경험하게 될 거야. 자네와 나, 그리고 블리젠에 있는 하급 이상의 모든 전사들을 상대해야 할 테니까.”

“아니야. 정확하게는 자네와 나 둘 만을 상대하는 거지. 다만 주변에 예상보다 구경꾼이 많을 뿐이겠지만.”

노르호지의 말에 벨푸가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한 사람 당 천명에 가까운 두 사람이지만 말이야.”

두 상급 전사의 얼굴에 섬뜩한 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들은 만족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큰 목소리로 웃었다. 그 시간 진우는 대전에 있는 헌터 종합 병원의 병실에서 벨푸와 노르호지보다 더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승운의 병실이었다.

*  * * * *

“진정해.”

소현이 옆에서 진우의 팔을 붙잡았다. 진우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은 여전히 진정이 되지 않았다.

수많은 고통과 위험을 겪으면서 웬만한 일에는 마음이 잘 동요하지 않는 경지에 오른 진우였다. 하지만 자신의 스승인 조승운이 병실에 누워 잠이든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피가 끓는 듯한 분노가 자꾸 치밀었다.

“몸은 어때? 다리는 이제 괜찮은 거야?”

진우는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소현을 향해 물었다. 소현도 조승운을 습격했던 블리젠 전사에게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 나았어. 화정 언니가 잘 치료해 주셨어.”

소현의 다리는 이미 걸어다니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회복되어 있었다. 조승운을 치료하느라 거의 모든 마나를 소진하는 바람에 중급 헌터로 각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을 치료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박화정이 성의를 다해 그녀의 다리를 고쳐준 덕에 이미 특별히 병원 치료를 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회복되어 있었다.

“내가 찾아가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군.”

소현은 진우의 말에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여기에 머무를 거야. 스승님이 다 나으실 때까지는 곁을 지켜 드려야지.”

“당분간이라는 말은 또 어디로 가야 하는 거니?”

진우는 그녀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웃음 사이에 미안해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소현은 진우의 손을 잡아 그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미안해하지 마. 너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소현은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삼키며 씩 웃었다.

“나도 당분간은 케이튼에 가 있을 거야. 거기서 조세연 박사님에게 수련을 좀 받아야 할 거 같아. 여기서는 마나가 회복이 안 되니까 겸사겸사 그곳에서 좀 지내는 게 나을 거라고 화정이 언니가 그러셨어.”

진우는 말없이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가족이 없이 자란 그에게 조승운과 소현은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두 사람이 자신으로 인해 하마터면 죽을 뻔한 위험을 겪어야 했다. 그는 절대로 블리젠에 있다는 두 명의 플리베크 상급 전사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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