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진우가 명상에 들어 깨어나지 않은 지 하루가 지났을 때 그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은 디키오 마을의 마구스인 피스쳅스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개울 건너의 커다란 바위 걸터앉은 채 명상에 빠져들은 진우를 지켜보았다. 혹시 모를 방해자로 인해 그의 명상이 깨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지만, 진우의 명상이 계속 깊어지면서 점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겉으로 볼 때 진우는 숨 쉬는 것 말고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얼핏 보아서는 잠을 자고 있는 건지 명상을 하고 있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부드럽게 감겨 있었고, 몸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낡은 고옥의 거실 위에 고요히 앉아 있었다. 진우의 호흡이 점차 적어지고, 맥박도 느려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모습은 마치 앉아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피스쳅스는 그의 모습을 보며 오히려 자신의 맥박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바람도 없는데 개울가의 나무에서 나뭇잎이 하나가 툭 떨어지더니 물살을 따라 흘러내려갔다.
“어린 친구가 정말 대단하군.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기에 저 나이에 벌써 저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인가.”
대견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극복해 낸다면 커다란 성취를 이룰 수 있지만, 잘못하면 지금까지 쌓아올렸던 공든 탑을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발을 내딛었으니 물러 설 수는 없었다.
그가 알기로 지금 진우의 상태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에 매달려 있는 것과 같았다. 위로 올라가는 것은 몹시 힘들지만, 내려오는 것은 더 위험했다.
여기서 오르기를 포기하면, 그 순간 팔에 힘이 빠져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이다.
“그냥 계속 가야 하네. 멈추면 더 위험해.”
모든 것은 본인에게 달려 있었다. 지켜보며 기도해 줄 수는 있었지만 도와줄 방법은 없었다. 그는 숨소리조차 죽이며 진우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시간 진우는 자신의 어머니를 보고 있었다. 과거 케이튼 행성에서 케로스와의 사투를 겪고 난 뒤에 최초로 신체 변화를 겪을 때, 그는 잠깐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해 낸 적이 있었다.
그것은 누워 있는 어린 자신을 눈물자국이 있는 얼굴로 웃으며 들여다보던 모습이었다. 그 때는 그것이 기억의 회귀를 거친 마지막 이미지였다. 그런데 지금은 갓 태어났을 때의 자신의 모습에서 기억이 시작하고 있었다.
기억 속의 자신이 점점 자라면서 어머니의 모습은 금방 사라졌다. 그 뒤를 이어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의 모든 기억 속에서는 항상 아버지가 함께 하고 있었다.
처음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의 풍경이 나타났다. 아버지는 다른 학부모들을 피해 운동장 구석의 나무 옆에 서 계셨다.
그때는 몰랐고, 전혀 기억하고 있지도 않았는데, 그날 아버지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한 번도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그날, 모든 아이들의 엄마가 참석한 그 자리에서, 혼자서 아들의 입학식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울고 계셨다.
‘아버지. 왜 우시는 거예요?’
* * * * *
“제가 지금의 경지에서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자네가 걸어온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네. 자네는 보았던 것을 보지 못하고, 들었던 것을 듣지 못하고, 알았던 것을 알지 못하네.”
“저는 열심히 보고, 듣고, 배웠습니다. 저는 제가 배운 것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럼 자네가 이제까지 배웠던 것 가운데 가장 쓸모없는 것이 무엇이었는가?”
마스바로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 * * * *
아버지의 장례식날 그는 전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실감이 나지도 않았고,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조금은 겁에 질려 있기도 했었던 것 같았다.
그가 대성통곡을 하듯 눈물을 흘렸던 것은 오히려 장례식이 끝나고 나중에 아버지의 유골이 보관된 공원묘원에 찾아갔을 때였다. 그때서야 이제 세상에 자기 혼자 남았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것은 끔찍한 고통이 되어 그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날 그는 탈진할 때까지 울었다.
* * * * *
“제가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족한 것이 있던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나아가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부족한 것이 있어야 나아가네. 넘치는 것부터 먼저 버리도록 하게.”
“그럼 저한테 넘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걸 알아서 무얼 하려는가? 마음을 멈추면 저절로 없어질 것을.”
* * * * *
최현과의 첫 수련장면이 떠올랐다. 헌터 학교에서 만났던 나르샤와 권일도, 조승운의 모습이 차례로 스치고 지나갔다.
오랜 친구였던 정태나 헌터 학교에서 친하게 지냈던 도훈에 관한 기억은 오히려 희미했다. 수많은 훈련, 조승운의 가르침, 마나 크리스털과 교감하던 순간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고통과 기쁨, 그리고 행운이 함께 하던 시간들이었다. 무니악 행성에서 만났던 세르빅이 나타났다.
그가 자신의 두 손을 꼭 붙잡고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기억 속에는 눈물이 많았다. 왜 이런 것들을 여태 잊고 지냈지?
* * * * *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십시오. 가르쳐주시기만 하면 제가 백일이고 천일이고 열심히 수련해서 꼭 익히도록 하겠습니다.”
“백일 천일이 아니라 백년 천년을 힘들게 수련한다고 해도 깨달음을 얻은 하루에 비할 수 없네.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물 한 방울도 소화가 되지 못하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아무 것도 보고 들을 수가 없네.”
“그 깨달음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마구스께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 * * * *
지난 네 행성에서의 수련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처음 도전했던 야스간 행성의 약탈의 계곡에서부터 물의 행성 토바르에 있던 심연의 구멍, 매덤 행성의 만물의 벽과 피엔다 행성에서 도전했던 용사의 관까지. 삶과 죽음이 왔다 갔다 하던 위험했던 순간들과, 자신을 굴복시키겠다고 찾아왔던 플레비크의 상급 전사들. 고비를 하나씩 넘길 때마다 진우는 조금씩 강해졌다.
매덤 행성을 떠나던 날 자신의 뒤에서 울고 있던 카딘의 얼굴이 보였다.
* * * * *
“마구스의 말씀을 듣고 있다 보면 저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 된 것 같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쓸모가 없어야 온전해질 수 있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래도 뭔가 세상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주고받는 것은 본래 자연스러운 것이지. 왜 세상에 도움이 되려고 하는가? 나를 온전히 하면 세상이 저절로 온전해지고, 세상이 온전해지면 내가 저절로 온전해 지는 것이네. 자네는 바라는 게 너무 많아서 벽을 뚫기가 어렵겠어.”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뭘 어떻게 해? 그냥 거기 있어야지. 자네 자리가 지금 있는 그곳인데 자꾸 또 어디를 가려 하는가?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애초에 한 가지야.”
* * * * *
진우가 명상에 빠져 움직이지 않은 지 사흘이 지나자 피스쳅스의 주위에 백 명이 넘는 디키오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모두가 허연 머리를 가지고 있는 노인들은 하나둘 개울 주위에 편안히 자리를 잡고 앉아 진우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안면이 있는 듯 가볍게 고개를 숙여 서로 인사를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저 말없이 앉아 진우를 바라보며 그의 호흡에 자신을 맞추었다. 노인들의 호흡과 맥박이 진우의 그것과 비슷해져갔다.
명상이 오일 째 접어들었을 때에는 드디어 디키오 마을의 모든 노인들이 개울가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각자 진우가 앉아 있는 곳으로부터 강력한 마나의 이끌림을 느끼고 자신들의 거처를 떠나 이곳을 찾아왔다.
천여 명의 노인과 한 명의 젊은이가 개울가에 자리를 잡고 가만히 명상에 든 모습은 소란스럽지 않은 장관이었다. 그들의 은색 머릿결이 달빛을 받은 수정조각들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개울 주변이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침묵으로 덮였다. 들리는 것은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 물줄기가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뿐이었다.
가끔씩 바람도 없는 가운데 떨어지는 나뭇잎들만이 작은 소리를 더하며 개울 위로 흘러갔다.
오일 째 저녁이 되자 조르크 행성의 세 달이 하나씩 밤하늘을 밝히기 시작했다. 가장 작은 달인 자나가 먼저 떠오르고 그 뒤를 이어 녹티카가, 그리고 밤이 깊어 자나가 중천을 지날 때쯤 해서는 가장 큰 달인 이그니스가 동쪽 하늘을 뿌옇게 밝히며 모습을 드러냈다.
세 개의 달이 모두 하늘 위로 떠오르자 조르크의 밤이 글자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환하게 밝아졌다. 자정이 가까울 무렵, 드디어 진우의 모습에 변화가 생겼다.
진우의 전신에서 우윳빛 서광이 조금씩 비쳐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이 신비로운 조명을 받은 것처럼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하자 그를 둘러싼 채 말없이 명상에 들어있던 노인들이 일제히 눈을 떴다. 진우의 몸에서 서광과 함께 잔잔하면서도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짙은 마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윳빛 서광은 처음에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미약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밝기를 더해갔다. 세 달 가운데 중앙의 녹티카가 중천을 지날 무렵 진우의 몸에서 새어나오던 서광이 그의 몸 주위로 모여들었다.
이제는 눈을 뜨고 제대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환해진 서광이 돌연 거대한 빛기둥이 되어 하늘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지상에서 하늘을 향해 거대한 탐조등을 밝힌 듯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늘에서 땅을 향해 굵은 번개가 내리꽂힌 듯한 모습이기도 했다.
하늘과 지상이 빛기둥에 의해 연결되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진우의 몸이 있었다.
“오오...”
마구스인 피스쳅스를 비롯하여 지켜보던 노인들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감탄의 탄성이 새어나왔다. 그들은 흐뭇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구스의 재림인가...”
이름을 알 수 없는 노인 하나가 문득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피스쳅스의 입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무려 6백년 만이군. 죽기 전에 마구스의 재림을 보다니. 내가 무슨 복으로...”
그들이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 동안에도 진우의 몸에서 뻗어 나온 빛기둥은 계속해서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빛이 얼마나 밝던지 별들이 모두 모습을 감출 지경이었다.
그 빛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다른 섬들에서도 뚜렷이 보일 정도로 높이 솟아 있었다. 그 시간 빛기둥을 본 다른 섬의 조르크 인들은 모두 하늘을 바라보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빠, 저게 뭐야?”
어느 동네의 꼬마 아이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아버지는 아이를 향해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해 주었다.
“마구스가 재림하는 거란다. 전설이 재현된 거지.”
* * * * *
찬란할 정도로 빛나던 빛기둥은 어느 순간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노인들로 가득 메워진 개울가에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시간이 지나자 숨죽였던 풀벌레의 소리가 다시 들리고 멈췄던 바람이 다시 개울 위를 지나쳐 노인들의 머릿결을 간질였다. 그러자 진우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주변의 노인들을 보더니 피스쳅스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피스쳅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감사한 것은 우리지. 전설이 다시 재현되는 모습을 목격하게 해 주었으니. 살아생전 이런 행운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네. 대단하네. 그리고 고맙네.”
진우는 그의 말에 그저 조용히 웃었다. 조르크 행성에서의 수련이 끝났다. 그것은 이제 다섯 행성에서의 수련이 모두 마무리되었다는 뜻이었다. 아무런 위험도 없었고, 골치 아픈 판단이나 선택을 할 일도 없었다. 가장 무난하고 평탄하게 끝난 수련이었다. 그러나 소득은 그 어떤 행성에서의 수련보다 컸다.
진우는 자신이 동조의 단계를 확실히 넘어섰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따져보거나 평가하기 이전에 그냥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동조를 벗어나보니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가야할 길이 더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 두 단계를 더 올라선다던가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피스쳅스는 개울을 건너 진우에게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축하했다.
“자네가 말하던 지배의 단계에 올랐는가?”
그의 질문에 진우는 그저 웃기만 했다.
“모르겠습니다. 동조의 단계는 넘어선 것 같은데, 지금 제가 있는 곳이 지배의 단계인지는 분명치 않은 것 같아요. 갇혀 있던 곳을 빠져나온 것은 분명한데, 새롭고 낯선 곳이라서 여기가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진우의 대답을 들은 피스쳅스가 웃으며 한 손을 들어 밤하늘에 떠 있는 세 달을 가리켰다.
“지금은 저 달에 갈 수 있을 것 같나?”
진우는 그의 손끝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네. 갈 수 있을 것 같네요.”
“가고 싶나?”
진우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개울가에 모여들었던 천여 명의 노인들이 하나둘 그의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진우는 그들에게 일일이 고개를 마주 숙여 답례를 했다.
천 명이 넘는 노인들의 인사를 받느라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모든 노인들이 차례를 기다렸다가 인사를 했고, 진우 역시 싫은 기색 없이 묵묵히 웃는 얼굴로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이제 어떻게 할 텐가?”
마지막 노인이 인사를 한 뒤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자 피스쳅스가 물었다. 진우는 그의 얼굴 너머에 있는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돌아가야지요.”
그의 말을 들은 피스쳅스가 진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네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우리 집에서 내가 차 한 잔을 대접했지. 바쁘지 않다면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차 한 잔 더 하고 가게.”
진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나 차 한 잔으로 인연을 맺었다. 이제 차 한 잔의 이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함께 공간이동을 통해 피스쳅스의 집으로 이동했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며 서 있는 벨라토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