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진우는 100관을 돌파한 뒤에도 또 다시 열흘 만에 200관 도전을 성공시켰다. 가제타는 진우가 도전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올 때마다 어김 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성공을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200관까지 등장한 마수들은 모두 최하급이거나 하급 마수들이었다. 진우가 단계를 돌파한 속도는 경이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빨랐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가 남들보다 뛰어난 결과를 내리라고 섣불리 기대하기는 아직 어려웠다.
진우는 S등급의 용사였다. 본래 S급 용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1관부터 도전을 하는 경우란 없었다.
보통 용사 자격증 테스트를 통과한 이들은 5급에서 1급 정도의 자격증을 받기 마련이었다. 1급 자격증을 받는 이들도 가뭄에 콩나듯 했다.
대개는 3급 이하의 자격증을 받았다. 일단 용사가 된 이후로, 용사의 관에 도전하는 경험이 많아지고, 때로는 실패를 거듭하기도 하면서 서서히 등급이 올라가기 마련이었다.
만약 현재 S급 용사 자격증을 가진 이들이 진우처럼 1관부터 다시 도전을 시작한다면, 그보다 빠른 속도로 낮은 단계들을 돌파할 수도 있었다. 진우가 대단한 신예이자 기대주인 것은 틀림없었지만, 그의 등급을 고려할 때 어찌 보면 지금의 관문 돌파 속도는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가제타는 매번 진우가 그날의 도전을 끝내고 호텔에 돌아올 때마다 전화를 걸어 축하를 해 주었다. 진우는 그녀가 자신에게 다소 과분할 정도의 신경을 써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그녀의 태도는 방송국이 투자하고 있는 기대주에 대한 관리 차원을 넘어설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진우에게 노골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은 파토스였다.
“쓰고 있는 무기는 어때? 다른 것으로 바꿀 생각이 들면 얘기하게.”
“호텔에서 지내기에 불편한 건 없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힘을 써 줄 테니까. 내가 이래 뵈도 크리켄데르에서는 아는 사람들이 꽤 많거든.”
그는 수시로 전화를 걸거나 한 번씩 호텔에 들러 진우에게 직접 불편한 점이 없는지를 물어보고는 했다. 말로는 퇴근길에 지나가다가 잠시 들렀다고는 하지만, 진우는 그가 자신에게 다소 지나칠 정도로 심하게 관심을 표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것이 이곳 피엔다 행성 사람들의 문화와 관습이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파토스가 진우에게 지나친 관심을 보인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어떤 이유가 따로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진우의 성공이 자신의 이익과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파토스가 돌연변이라고 할 정도로 특이한 성격의 인물이라는 얘기였다.
하는 짓으로 보아서는 후자일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진우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전자에 가까운 것 같았다.
200관을 돌파하자 관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덕분에 200관 이후로는 거의 매일 용사의 관에 도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등장하는 마수들도 이제 최하급은 없고 모두 하급 마수들이었다. 자료에 의하면 200관 후반부터는 완전한 중급은 아닐지라도 중하급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마수들이 등장한다고 했다.
“진짜 이 우주에는 별의별 마수들이 존재하는군.”
243관에서 상대했던 메굴이라는 마수는, 비록 하급 마수이기는 했지만 방심하다가는 큰 곤욕을 치를 수도 있는 녀석이었다. 자신의 몸을 안개처럼 분산시킬 수 있는 메굴은 검이나 창, 활과 같은 무기로는 상처를 입히는 것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호흡기 속으로 파고들어 상대를 질식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진우는 뜨거운 양의 마나를 발산시켜 녀석을 태워버렸지만, 오로지 강한 힘만을 수련한 용사들이라면 등급과 무관하게 도전에 실패할 가능성도 있는 마수였다.
진우가 다른 목적이 없이 순수하게 헌터로서 수련을 하는 입장이었다면, 굳이 다른 행성들을 찾아가지 않아도 한 곳에서 이렇게 다양한 마수들을 상대할 수 있다는 건 대단히 편리하고 고마운 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만큼 용사의 관 자체는 헌터들의 수련을 위해서는 최적화된 장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사의 관에 등장하는 마수를 실제가 아니라 가상 모드로 전환시키는 것도 가능하다면 장치의 가치는 더욱 커질 것 같았다.
* * * * *
진우가 다시 보름 만에 300관을 돌파하는데 성공하자 크리켄데르의 한 건물 안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열었다. 처음 진우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에게 유난히 친근감을 표시했던 파토스의 요청에 의해 열린 회의였다.
“자네가 진우라는 이방인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하자고 건의하는 근거는 그가 S등급 용사이기 때문인가?”
커다란 원형 테이블에는 8명의 사람들이 둘러 앉아 있었다. 그 중에 한 사람, 턱수염을 무성하게 기른 건장한 체격의 중년인이 파토스를 보고 물었다. 켈로드라는 S급 용사였다. 그의 질문에 파토스가 고개를 저었다.
“S급 용사가 흔하지 않은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야. 크리켄데르 시민들 가운데에도 S급 용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이 8명이나 되네. 아니, 진우 역시 여기서 용사 자격증을 받았으니 이제 9명이라고 해야겠군. 어쨌든 S급 용사라면 당장 이 자리에도 세 명이나 있지 않나.”
파토스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 셋은 S급 용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크리켄데르 시민들에게도 얼굴이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들이었다. 세 사람은 3년 전의 고스티스 축제에서 각각 800관 초반까지 용사의 관을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관문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다음 단계에 도전하는 것을 포기했지만, 이번 고스티스 축제에서는 지난 대회에 이어 새로운 관을 돌파하리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8명이라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중 셋은 이곳 토박이가 아니지. 그리고 자네가 말한 진우라는 자 덕분에 이방인 출신의 S급 용사가 한 명 더 늘었고 말이야. 이번 대회가 끝난 뒤에는 크리켄데르 시민권을 얻어 새롭게 이곳에 정착할 S급 용사가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지.”
하관이 날카롭고 눈매가 가는 장신의 인물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 역시 노르프라는 이름의 크리켄데르 출신 S급 용사였다. 창을 잘 쓰는 그는 이곳에서 나고 자란 전형적인 토박이였다. 그는 이방인 출신의 용사들이 고스티스 축제가 끝날 때마다 크리켄데르 시민권을 얻어 이곳에 정착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축제에서 700관 이상을 돌파하는데 성공한 용사들에게는 본인이 원할 경우 크리켄데르 시민권이 주어졌다. 그 때문에 한 번 축제가 끝날 때마다 새롭게 크리켄데르의 시민이 되는 용사들이 수십 명씩 늘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크리켄데르에서 용사 자격증을 획득하는 이들과 함께 해마다 이방인 출신 용사들이 늘어나게 만드는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용사 자격증이 없던 이방인이 이곳에서 처음 테스트를 받아 3급 이상의 자격증을 얻으면 그 역시 크리켄데르의 시민이 될 수 있었다.
“나는 도대체 시스템이 왜 그렇게 이방인 출신의 용사들을 받아들이는데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용사의 수가 늘어난다고 해도 축제 때 볼거리가 더 많아지는 것 이외에는 특별히 크리켄데르에 도움이 되는 것도 없잖아.”
투덜대듯이 말을 한 사람은 도시 관리 기구, 흔히 시청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근무하는 바시킨이라는 인물이었다. 도수가 높은 안경을 끼고 다소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역시 크리켄데르에 이방인 출신 용사들이 늘어나는 것을 반기지 않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도시 관리 업무의 대부분이 시스템에 의해 자동으로 처리되고 있었기 때문에, 하는 일 없이 혜택만 누린다는 비난을 받는 것은 시청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가운데 진정으로 도시를 위해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나? 정작 중요한 일들은 대부분 시스템이 처리하고 있잖아. 그런 이야기를 해봤자 제 얼굴에 침 뱉기야. 이야기를 자꾸 다른 곳으로 끌고 가지 말고 파토스 자네가 말을 해봐. 그 진우라는 이방인에 대해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도대체 뭔가?”
턱수염이 무성한 켈로드의 말이었다. 그의 말에 파토스가 앉아 있는 사람들을 한 번 죽 둘러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는, 그 진우라는 친구가 단순한 이방인이 아닌 것 같아.”
“단순하지 않다? 그게 무슨 뜻인가?”
파토스의 말에 켈로드가 다시 물었다. 파토스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니 청천벽력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는 아무래도 외계인인 것 같아. 이 행성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 삼백년 전의 첼스본처럼 말이야.”
회의실에 있던 일행이 모두 한꺼번에 얼어붙고 말았다.
* * * * *
300관을 돌파한 뒤로 진우는 도전 속도를 조금 늦췄다. 500관까지 돌파하는 데에는 아직 90일 가량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기간에 조금 여유가 생긴 듯하자 그는 용사의 관에 등장하는 마수들을 조금 더 세밀히 관찰하기로 했다.
“마나를 형상화시켜 마수를 만드는 건 분명해. 문제는 형상화 된 마수들을 어떻게 해서 움직이게 만드느냐는 거지.”
공격을 당하면 실제로 피해를 입는 건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마수들이 완전히 살아 있는 생물과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가령 마수들을 칼로 베면 놈들도 피를 흘리기는 했다. 하지만 그 피는 실제가 아니라 가상이었다.
도전이 성공하고 마수가 사라지면, 칼에 묻어 있던 피도 함께 사라졌던 것이다. 사람이야 상처를 입으면 진짜로 피를 흘리는 게 당연했지만, 마수들이 흘리는 피는 실제가 아니라 가상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마수들을 형상화시킨다고 해서 내장 기관이나 눈에 안 보이는 부분까지 완벽하게 똑같이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
결국 마나를 이용해 마수들의 외양만 똑같이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라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마수들이 실제로 살아 움직일 리가 없었다.
“살아있는 생물이 아닌데도 움직이는 것이라면, 누군가 마수의 형상으로 실체화 된 마나를 조종하거나 통제하고 있다는 뜻인데...”
만약 그 일을 시스템이 하는 것이라면 조금 생각해 볼 문제였다. 그런 기술은 헌터들도 동조 단계에 들어서서나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마나를 실체화시키는 일 자체가 이미 동조의 단계에 들어서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기술이기는 했다.
“만약 실제로 시스템이 동조의 단계에 든 헌터처럼 마나를 다룰 수 있다면, 이 시스템을 설계하거나 만든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다는 소리야?”
용사 자격증 테스트에서처럼 가상으로 마수들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그저 과학기술이 발달된 덕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마나를 형상화시키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지구와는 달리 마나가 풍부한 다른 행성들에서는 대개 과학기술의 발달 과정에서 마나를 과학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 함께 발전했다.
니코레임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마나를 이용하여 마수를 직접 실체화시키는 기술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 행성의 역사에 대해서 조금 공부를 할 필요가 있겠어.”
하지만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진우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셔퍼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그 수많은 자료와 정보에도 불구하고, 용사의 관에 대한 과거의 기록은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용사의 관이 언제, 누구에 의해서, 어떤 방식으로 설계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면, 보통 사람들은 열람할 수 없게 되어 있거나.”
남은 방법은 자신이 직접 용사의 관에 도전해서, 거기에 등장하는 마수들을 관찰하여 알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진우가 마나를 이용하여 마수를 실체화시키는 기술의 핵심을 이미 거의 다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역시 동조 단계에 든 사람이었다. 자신도 이미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 원리에 대해서도 확실히 깨우치고 있었다.
“다만, 그렇게 빨리, 그렇게 거대한 형체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만들어내는 건 지금의 나로서도 불가능하지만 말이야.”
시스템은 진우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그를 좌절시켰다. 용사의 관에서 시스템이 마나를 실체화시키는 기술의 수준이나 능력은 동조 단계의 헌터인 진우보다 훨씬 뛰어났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상대가 시스템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헌터였다면, 진우는 당분간 그와 맞서 싸우는 일을 피했을 것이다.
지금의 진우도 마나를 이용해 칼이나 창, 방패 같은 것을 형상화시키는 것은 가능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무기들은 금속을 이용해 만든 것들보다 강도나 날카로움에 있어서 훨씬 뛰어났다. 그러나 만약 조그만 쥐나 고양이를 만드는 것이라면? 시스템에서 본 마수들처럼 그렇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느낌을 가진 녀석들을 형상화시키는 것은 지금 진우의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관이 높아질수록 등장하는 마수들의 크기는 점점 커졌다. 앞으로는 더욱 거대해질 것이다. 강한 마수들은 크기도 다른 것들보다 큰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크기가 커진다고 해서 용사의 관이 만들어내는 마수들의 사실성이 떨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도전이 되겠군.”
진우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최대한 마나를 형상화시키는 기술을 연습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서 시스템처럼 잘 해낼 자신은 없었다.
그는 아직 쥐 한 마리도 제대로 완벽하게 구현해 낼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을 살아있는 생물처럼 조종한다? 아마 그것은 용사의 관을 끝까지 정복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게 진우의 솔직한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