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간이 포털 장치는 외계인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어. 돈이 있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넌 도대체 누구한테 그 포털 장치를 받은 거냐?”
진우는 말을 얼버무리며 대답을 회피하는 잭슨의 멱살을 강하게 틀어쥐었다. 그의 몸에서 저도 모르게 강렬한 기운이 새어나와 잭슨을 압박했다. 순간적으로 온몸을 압박하는 마나의 기세에 잭슨의 얼굴이 허옇게 질려버렸다.
“진우야, 진정해라. 그러다 그놈 죽겠다.”
옆에서 보고 있던 최현이 얼른 진우의 어깨를 잡았다. 잭슨 따위가 죽는다고 해서 안타까울 건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있었다.
진우는 마나의 기세는 거두었지만 여전히 살기 어린 눈빛으로 잭슨을 바라보았다. 곧 숨이 넘어갈 듯하던 잭슨의 얼굴이 간신히 조금 핏기를 되찾았다.
“네가 죽인 어윈이 구해 준 거야. 내가 간이 포털 장치가 있으면 아무도 몰래 직접 이니스프리로 올 수 있겠다고 했더니 그가 구해다 줬어. 그가 어디서 구한 건지는 나도 몰라. 이건 정말이야. 그는 최상급 헌터니까 아는 인맥이 있었겠지. 나도 그게 누군지는 몰라.
나야 간이 포털 장치만 구하면 되는 거니까 그 이상은 관심이 없었단 말이야.”
진우는 다급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며 말하는 잭슨의 얼굴을 한참 동안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어윈은 이미 죽었다. 죽은 그를 깨워 포털을 어디서 구했는지 물어볼 수는 없었다.
진우는 이를 악물고 잭슨의 멱살을 쥐었던 손을 신경질적으로 뿌리쳤다. 그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카슨 사장이 입을 열었다.
“제레드 어윈은 영국 출신의 헌터네. 영국에 있다는 네 명의 최상급 헌터 가운데 하나였지. 그는 영국 헌터 협회를 비롯해서 헌터와 관련된 사람들과 인맥이 두터웠던 걸로 알고 있네. 포털을 구한 방법이 정 궁금하면 그쪽으로 알아보면 혹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영국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진우의 머릿속에는 두 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나는 자신에게 궁술을 가르쳐주기도 했던 멜리사였고, 다른 하나는 뉴 올림포스 행성에서의 무투 대회 때 보았던 영국 헌터 학교의 아스탄 교장이었다.
‘아스탄 교장하고는 이상하게 안 좋은 일과 계속해서 엮이는 것 같아. 무투 대회 때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의혹에 빠진 사건 가운데 그가 도와주었다면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 많네. 그가 결부되었다는 증거는 없지만 자꾸 신경에 걸리는 이름이야. 지구로 돌아가면 타르코스 소장에게 그에 대해서 물어봐야겠다. 멜리사 교관님에게도 도움을 부탁하는 게 좋겠어.’
진우가 막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최현이 진우를 어깨를 잡았다.
“잭슨에게 더 물을 게 있니?”
진우가 고개를 젓자 그가 주저앉아 있던 잭슨과 험프리를 일으켜 세웠다.
“그럼 이동하자. 진우 네가 앞장을 서라. 이제 이곳을 나가야지.”
일행은 다시 동굴을 빠져나가기 위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진우가 제일 앞에 서고 그 뒤를 도로시를 안은 카슨과 모레스가 따랐다. 최현은 제일 뒤에서 잭슨과 험프리를 앞세우고 그들을 감시하며 걸었다.
일행이 5분 정도 걸었을 때 진우는 갑자기 뒤에서 마나의 기운이 맹렬하게 이는 것을 느꼈다. 깜짝 놀란 그가 재빨리 검을 빼어들고 뒤를 돌아보는 찰라, 최현이 대도를 휘둘러 뒤에서 따라오던 잭슨과 험프리를 단칼에 베어버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 왜?”
진우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자 엉겁결에 뒤를 돌아보던 카슨 사장 일행도 예상치 못했던 광경을 목격하고 입을 크게 벌렸다. 그들이 놀라는 표정을 보면서도 최현은 아무 말 없이 매고 있던 배낭을 내려놓고 그 안에서 취사용 연료를 꺼내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버린 두 사람의 몸 위에 뿌렸다.
“나도 일반인들을 죽이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들을 살려서 데리고 가는 건 더 문제가 많다. 두 놈 다 죽어 마땅한 짓을 저지른 놈들이라는 점도 있지만, 잭슨의 경우 그가 어떻게 이 자리에 있게 됐는지를 설명하는 것부터가 복잡해. 간이 포털 장치에 대한 일은 어차피 우리가 캐 보는 게 낫다.
경찰이 개입되면 일이 더 복잡해 질 거다. 제임스 험프리 역시 마찬가지고. 무엇보다 이들을 살려서 데리고 가면 죽은 헌터들의 시체를 태워버린 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오히려 나중에라도 조사가 나오면 사체 유기나 증거 인멸의 죄를 추궁 당하게 될 가능성이 많아. 우리 둘이서 최상급 헌터가 두 명이나 포함된 헌터들을 열 한 명이나 없앨 수 있다는 걸 설명하기도 어렵고 말이다. 이번 일은 그냥 여기서 정리하는 게 좋다.
”
말을 하는 최현의 표정도 착잡했다. 진우는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불현듯 헌터라는 직업에 대한 회의가 일었다.
‘헌터는 마수를 상대하는 직업인데, 왜 이렇게 자꾸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일이 생기지.’
그가 눈앞에 벌어진 일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서 있는 모습을 본 카슨 사장이 옆으로 다가와 팔을 잡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저들은 살려 준다고 해도 어차피 개과천선해서 이번 일을 반성할 사람들이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나는 마음속에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기분일세. 잭슨은 이번 한 번으로 나와 도로시를 해치려는 생각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야.”
진우도 알고 있었다. 잭슨은 무사히 지구로 돌아갈 경우 분명 또 다른 흉계를 꾸밀 인물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돈과 인맥이면 앞으로 이보다 더 치밀하고 잔인한 일도 저지를 수 있었을 거다. 제임스 험프리 역시 비슷한 놈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죽여 일을 마무리 짓는 이런 방식이 진우는 달갑지 않았다.
만약 누가 ‘그럼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면 그로서도 딱히 달리 대답할 말이 없기는 했다. 그래도 이건 자신이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그렇게 노력해서 강한 힘을 얻었는데도 여전히 내 뜻대로 사는 게 이렇게 힘들다니.’
진우는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서 잭슨과 험프리의 시체를 깨끗이 태워버렸다. 최현은 진우만큼 시체를 깔끔히 태워버릴 능력이 없었다.
일은 최현이 저질렀어도 마무리는 어차피 공동의 몫이었다. 순식간에 활활 타오르는 두 사람의 시체를 바라보면서 진우는 마음이 복잡했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일이 또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 그의 마음을 더욱 우울하게 했다.
* * * * *
뒤처리를 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잭슨 사장과 험프리는 물론이고, 처음 카슨 사장을 습격했던 헌터들은 각자 간이 포털 장치를 이용해 동굴 앞까지 직접 이동했다. 하지만 카슨 사장 일행과 바실라르 구조대가 타고 왔던 무중력 자동차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진우와 최현은 잘 숨겨져 있던 카슨 사장의 차까지 일부러 꺼내 각자 위험한 마수들이 출몰하는 지역까지 끌고 가 버려두고 와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그들의 실종에 대해 설명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작업을 마치자 해가 기울기 시작했지만 일행은 무리하게 차를 몰아 브르가 온천 지대의 테마스 호텔까지 이동했다. 호텔 앞에 차를 세웠을 때는 이미 사방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였다.
이동 중에 잠이 깬 도로시는 카슨 사장을 발견하고는 한 동안 소리를 내어 울더니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잠시도 그의 팔을 놓지 않고 끌어안고 있었다. 운전을 하던 최현은 그 모습에 마음이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브르가 호텔에 도착해 식사를 한 뒤 일행은 온천욕을 즐겼다. 마음은 전혀 느긋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뜨거운 온천물에 몸을 담그자 한결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험프리 호텔은 어떻게 할 겁니까?”
서양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하겠지만 일본식으로 여러 사람이 함께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 놓은 넓은 온천탕에 몸을 담근 채 최현이 카슨 사장에게 말을 걸었다.
“글쎄요. 정확하게 예상할 수는 없지만, 아마 험프리 그룹에서는 그 호텔을 내 놓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차피 그룹 차원에서 가지고 있는 지분도 많이 줄었고, 경영권을 방어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아무리 미운 자식이라도 그 호텔 때문에 한 명은 파산하고, 곧 알려질 일이겠지만 다른 한 명은 실종이 되었으니, 불길하다는 생각도 들겠지요. 저희가 돌아간 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무슨 움직임이 있을 겁니다.
”
“만약 험프리 그룹에서 가지고 있는 지분을 시장에 내 놓으면 그걸 인수할 생각이 아직 있으십니까?”
최현이 재차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이곳을 인수할 생각을 한 건 죽은 제 아내와 도로시 때문입니다. 이니스프리는 제가 부자가 된 뒤 아내와 결혼했을 때 신혼여행을 온 곳입니다. 그때 아내와 구경을 했던 곳들을 이번에 다시 돌아보려고 했었지요. 곳곳에 숙소를 건설할 생각으로 그 후보지를 살펴 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관광객이 적어 숙소를 건설하면 운영이 어렵지 않나요?”
머리 위에 수건을 둘러쓴 진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러자 카슨 사장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이니스프리가 잘만 개발하면 충분히 재력가들에게 매력적인 휴양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경영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문제지요. 하지만 그보다는 도로시 때문에 숙소를 건설하려는 생각이 더 컸습니다.
올해 초에 도로시가 수술을 받자 경치 좋은 곳에서 지낼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다만 도로시의 건강이 안 좋아서 되도록 편히 묵을 수 있는 숙소를 여러 곳에 짓고 싶었어요. 아내를 잃은 뒤에는 도로시가 제 인생의 유일한 낙이 되었습니다. 제 딸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었어요. 잭슨은 저를 이곳에 유폐시키려고 했지만, 사실 나이가 들면 은퇴해서 정말 이곳에서 은둔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잭슨이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제 지분을 가져가지는 못하더라도 실질적으로 유일한 경영자 행세를 하는 건 가능했을지 모릅니다.”
카슨 사장은 그 말을 마치더니 진우와 최현을 바라보며 쓰디 쓴 미소를 지었다. 욕심은 미련을 낳고, 미련은 죄악을 잉태한다. 진우는 아무리 현명해지려고 노력해도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여전히 알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 *
진우는 본의 아니게 이니스프리에 한 달을 더 머물러야 했다. 잭슨은 예전의 허진행과는 급이 다른 인물이었다.
세계적인 대기업의 실질적인 경영자나 다름없던 그의 실종은 지구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다만 그가 엉뚱하게도 지구가 아닌 이니스프리의 외딴 장소에서 시체가 되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포털 이용 기록을 남기지 않고 간이 포털 장소를 통해 이니스프리로 건너오는 바람에 그가 지구를 벗어났으리라고는 생각하기란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대규모의 경찰이 그의 실종 사건을 캐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결국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사건은 오리무중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진우와 최현을 힘들게 만든 것은 오히려 카슨 사장의 실종 사건이었다. 카슨 사장은 지구에서 급파된 형사들에게 적지 않게 시달려야 했다.
그는 호위하는 헌터들과 명승지 견학을 나갔다가 생각 밖의 강력한 마수들을 만나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고 밝혔다. 그 과정에서 호위하던 헌터들을 대부분 잃고 타고 갔던 무중력 자동차도 고장이 나서 고립되었는데, 다행히 나중에 파견된 구조대를 만나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과 돌아오던 중 다시 마수의 습격을 받았고,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진우와 최현에 의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함께 하던 다른 헌터들은 그만 마수들에게 당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전문가들이라면 코웃음을 칠 설명이었다. 그런 우연이 반복될 수 있다는 걸 그냥 믿는다면 형사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의 설명은 형사들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비슷한 시기에 자신의 집무실에서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제임스 험프리의 일도 여전히 해결이 되지 않고 있었다.
형사들은 두 사건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카슨 사장과 모레스 비서, 그리고 진우와 최현을 붙잡고 끈질긴 심문을 벌였다. 심지어 어린 도로시에게도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 카슨 사장이 벌컥 화를 낼 정도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지만, 어차피 도로시는 잠을 자느라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이제 일곱 살이 된 꼬마에게 정도 이상의 심문을 하는 것은 형사들의 입장에서도 곤란한 일이었다. 뭔가 이상하기는 한데, 그걸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외계 행성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들은 원하는 증거나 증인을 얻지 못했다. 결국 한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나도록 만족스러운 결과를 하나도 얻지 못한 형사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못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지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외계 행성에서 일어난 일들은 하나같이 골치가 안 아픈 게 없어.”
포털을 타기 직전 형사 한 명이 그렇게 불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말에는 직업적 헌터인 진우와 최현마저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이렇게 골치 아픈 일에는 그들도 다시는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 * * * *
진우와 최현은 일이 대충 마무리 지어진 뒤에 함께 포털을 타고 지구로 돌아왔다. 경치가 훌륭한 곳으로 휴식과 훈련을 겸해 갔었지만, 훈련을 빼고는 제대로 휴식을 취한 기억이 없이 돌아온 일정이었다.
그가 돌아온 뒤 한 달쯤 지나 카슨 사장이 도로시를 데리고 한국을 방문했다. 이번에는 비서와 법률 고문까지 잔뜩 대동하고 온 일종의 공식 방문이었다.
진우와 최현은 카슨 사장의 초대를 받고 서울의 큰 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얼굴이 밝아진 도로시가 종종 걸음으로 뛰어와 최현을 포옹함으로써 그의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이니스프리에서는 서로 정신이 없었던 터라 사실 일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 일이 어느 정도 공식적으로 정리가 되었으니 저도 두 분에게서 받았던 은혜를 갚아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모셨습니다.”
진우와 최현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자 카슨 사장이 씩 웃더니 두 사람 앞에 각각 서류 뭉치 하나씩을 꺼내 놓았다.
“헌터들은 의뢰비를 받고 움직인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두 분은 저와 도로시, 그리고 제 비서인 모레스의 목숨을 구해주고도 그에 대한 의뢰비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김에 그에 대한 제 성의를 표시하고 싶습니다.”
진우와 최현은 각자 자기 앞에 놓인 서류를 들쳐보았다. 잠시 후 그들이 눈이 커졌다.
“이, 이건 너무 과한데요.”
서류에는 한 사람 앞에 험프리 호텔 지분 10퍼센트와 화이트캐슬 사의 지분 1퍼센트에 해당하는 비율의 주식을 양도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외에도 현금으로 천만 불에 해당하는 금액을 두 사람 각자에게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금액으로 따지면 사천억 원이 넘는 액수였다.
“과하지 않습니다. 절대 과하지 않습니다.”
카슨 사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 가족은 저와 여기 있는 도로시 둘 뿐입니다. 제가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우리 둘이 죽으면 그 재산들은 모두 공중에 뜨고 맙니다. 그런데 두 분은 저희 가족 모두의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그 은혜를 돈으로 갚을 수는 없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현재로서는 이것뿐입니다. 이걸 거절하시면 저로서는 제 목숨을 대신 내놓으라는 얘기로밖에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
아무리 그래도 헌터에게 지불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어떤 헌터도 한 번 의뢰의 대가로 이만한 의뢰비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두 분에게 드리는 돈보다 훨씬 큰 이득을 저는 얻었습니다. 험프리 그룹에서 가지고 있던 험프리 호텔의 지분을 모두 내놓았습니다.
그걸 제가 대부분 사들였습니다. 제 계획이 성공하면 험프리 호텔의 주식은 지금보다 올라갈 겁니다. 그리고 저는 그걸 성공시킬 자신이 있습니다.
잭슨이 가지고 있던 화이트캐슬 사의 주식도 제가 상당부분 흡수했습니다. 정부와 거래를 조금 해야 했지만 덕분에 앞으로 있을 무상 증자에서도 상당히 많은 주식을 더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최현과 진우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두 분도 지금 받으신 주식의 지분에 해당하는 비율로 새롭게 무상증자에 의한 주식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진우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저는 헌터에 대해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저를 도와주는 최상급 헌터가 미국에 두 분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물어봤습니다.
동시에 최상급 헌터 두 사람을 5분 안에 해치우려면 어느 정도 수준이어야 하냐고 말이지요. 그랬더니 그분들이 그렇다면 그 사람은 이미 최상급을 넘어섰을 거라고 얘기하더군요. 지구상에 아직 그런 헌터는 없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카슨 사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진우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날 진우와 최현은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서류에 서명을 했다. 의뢰도 받지 않고 움직인 일에서 두 사람은 오히려 역대 최고의 의뢰비를 받은 것이었다.
‘앞으로 착하게 살아야지.’
최현은 그렇게 굳게 결심했다.